“채희동 목사 소천” 오호라,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컴퓨터를 끄고 거실로 나와 마구 혼잣말로 지껄여댔다. 뭔가 토해내지 않으면 속을 견딜 수 없는 그런 느낌이었다. 내가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천안 총동문회에 갔다가 밤늦게까지 있었던 인근 어느 찻집에서였다. 순간 다시 한번 희동이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세상은 세월만큼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는데 유독 내가 기억하는 희동이는 그 무수한 세월도 그를 변화시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언제 봐도 희동이는 영원한 해맑은 소년이었다.

벌써 오래된 얘기다. 내가 희동이를 집중적으로 만났던 시기가 그가 교회를 개척하면서였다. 전철 2호선을 타고 신대방에 내려 어디쯤 가다보면 플라타너스가 쭉 늘어선 찻길이 나온다. 그 길을 따라 한참 걷다보면 고만고만한 건물들 사이로 한생명교회가 나타난다. 그곳에서 첫 교회를 열어 백걸이와 둘이서 교회를 시작했다. 개척교회가 다 그렇듯 처음엔 을씨년스럽고 마음도 휑하였을 것이다. 당시 나도 마땅한 일이 없었던지 시간만 나면 한생명교회에 가서 밤을 지새곤 했다. 희동이, 백걸이 두 놈은 정말 충청도 촌놈 중에 촌놈들이다.

이들이 얼마나 순진한지는 우리가 너무도 잘 안다. 나 정도의 사기술만 가져도 저 놈들은 천당과 지옥을 몇 번씩 보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맑고 순수한 열정에 세상과 교회는 응해 주지 않았다. 정말 지지리도 못난 놈들이었다. 한마디로 그들은 세상 어떤 경쟁에도 끼지 못했다. 그저 물 흐르는 대로 지금까지 왔다. 겨우 십수 년 만에 얻은 자리가 고향 지척 논밭 가운데 우사 같은 교회를 얻은 게 그에겐 대박이라면 대박이었다.

두 해 전인가 내가 책값도 줄 겸해서 그 우사 같은 교회를 직접 찾아 간 적이 있었다. 교회 옆에 자리한 사택에 들어가 그의 삶을 들여다볼 기회가 있었다. 큰 아이 윤기는 재롱을 부리며 여간 귀엽잖게 굴었다. 그리고 아내는 만삭의 몸이었다. 그런데 어쩌자는 건가? 젊디젊은 아내와 어린 자녀를 두고… 날벼락도 유분수지… 어디 때릴 때가 없어 거기엡 참으로 기가 막힐 뿐이다. 우리 모두 1만 명이라도 모아 하늘에 대고 소리치면 하나님이 들으실까….

내가 기억하는 희동이의 모습은 이런 거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희동이를 떠올리면 해맑은 소년의 미소가 다가올 것이다. 정말 난 그를 볼 때마다 어릴 적 동네 어귀에서 내가 골목대장 노릇할 때 나를 가장 잘 따르던 동생 같았다. 그는 거의 모든 대답을 일단 미소로 응답했다. 한마디로 그는 누구나 척 보면 상대의 긴장을 풀어 주고 만만하게 대해도 좋다는 느낌을 선사한다. 그의 미소는 말 그대로 자연 친화적이었다. 

나하고는 욕지거리를 할 경우는 없었지만, 지 또래들하고 대화하다 욕지거리를 하는 것을 보면 정말 저렇게 아름다운 욕지거리도 있을까 하는 생각이 떠오른 적이 왕왕 있었다. 야, 임마… 아마 모른긴 해도 그의 풍부한 어휘 가운데 욕만큼은 이 한 단어로 족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도 싸늘하게 식어버린 그의 육체가 아니라, 그의 해맑은 미소만 떠오른다.

그는 철저하게 아날로그 방식으로 산 녀석이었다. 그는 이미 세상 사람들과는 살아가는 방식을 달리하고 살았다. 왜 그랬을까? 내가 보기에 그는 경쟁에 엄청 약한 놈이었다. 그러므로 아예 그런 자리에는 끼지도 않았다. 무슨 경쟁이든 이기려면 모진 마음을 가져야 하는데 그는 천성적으로 그런 심성이 못되었다.

아마 얼마 전에 쓸 뻔했다는 환경단체 사무총장 직도 하다하다 마땅히 할 놈 없으니까 온 차례가 분명할 거다. 지가 나서서 그런 것 하겠다고 나설 위인이 못된다. 세상은 경쟁에 약한 사람은 철저하게 짓밟고 무시한다. 그러나 희동이는 오히려 그런 세상을 무시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에게 있어서 트릭이란 없었다. 그러면서도 희동이만큼 심지가 굳은 놈도 별로 못 봤다. 초지일관, 그에게 잘 어울리는 사자성어다. 그는 생각도 모습도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도대체 변화란 게 없었다. 때가 되면 늘 우리들에게 보내주는 그 「샘」지도 보통 작업이 아님을 잘 안다. 전문적인 출판업자들도 쉽지 않은 작업이다. 이 역시 그 아니면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일이었다. 정말 그 뚝심을 모르고 누가 그를 나약한 해맑은 소년으로만 보겠는가? 그는 세상 어떤 큰일을 맡겨도 아주 훌륭하게 수행할 친구다. 나는 그가 정말 큰 능력을 가진 친구라고 여겼다. 정말 그는 포장만 잘하면 명품이 될 물건이었다.

또 하나, 채희동 하면 떠오르는 생각은 그는 철저한 생명지기였다는 것이다. 그가 예수에게서 본 것은 온통 생명뿐이었다. 사실 이게 예수의 진실 아닌가? 언제 예수가 교회 건물이나 교회조직에 관심을 두셨나? 도리어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는 자들에게 호통을 치셨다.

그는 목회하는 동안 온통 이 한가지에만 매달렸다. 단 한번의 흔들림도 없이 이 땅의 철저한 생명지기로 그의 삶과 신앙을 실천해 왔다. 그 자신이 생명, 자연 그 자체였으니까…. 따지고 보면 우리들이 하는 짓이란 모두가 너 죽고 나 사는 식이 아니었던가? 교회만 해도 그렇다. 솔직히 희동이 같은 친구가 설 자리가 있었던가? 자리 하나 얻으려면 얼마나 치열한 경쟁과 치사한 아부와 험악한 경로를 거쳐야 하는가? 그러나 그가 추구했던 예수의 길은 가장 숭고한 길이었고, 그가 바로 복음을 들고 있는 사자였다. 그토록 생명지기로 이 땅의 모든 생명을 진정으로 지키고 살리는데 헌신한 그, 정작 자신의 생명은 비참하게 찢기어졌으니, 어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을 수 있으랴.

희동이 하면 떠오르는 생각은 그는 아주 조용한 진보였다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도 희동이는 뭇사람들과 달랐다. 진보의 캐릭터가 뭔가? 대가 쎄고, 주장하고, 소리치고, 독선적이고, 말 많고… 희동이는 그런 소리만 요란하고 뒷구멍에 가서 호박씨 까는 그런 표리부동의 진보가 아니었다. 희동이는 분명 내가 아는 이 땅의 가장 진보적인 목사였다. 그렇지만 그는 단 한번도 누구와 얼굴을 붉히며 주장을 내세우지 않았다. 자기의 주장을 남에게 강요한 적도 없었고, 머리에 띠를 두른 적도 없었다. 그러나 말없는, 소리없는 진보를 그는 끊임없이 실천해 왔다. 그의 침묵과 미소는 그 어떤 주장보다도 설득력이 있었다. 내가 그를 만날 때면 많은 세상 이야기를 했다. 물론 주로 내가 더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정작 뒤돌아 보면 그가 나에게 남긴 무언의 자취가 훨씬 크게 남아 있었다. 그는 그의 생각의 모든 것을 말로 하는 대신 글로 했고, 그의 행동은 미소였다. 그는 변함없이 글을 썼고 그 특유의 미소로 자신의 신념과 진보를 지켜왔다.

채희동 목사! 너의 죽음을 난 믿고 싶지 않다.

되도록이면 너의 넋이 펼쳐질 현장에 가고 싶지 않다.

한 마디로 너의 죽음을 내 기억 속에 저장하고 싶지 않구나.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형님, 하고 그 맑은 미소 다가올 너만을 기억하고 싶구나. 한 30년쯤 가서 너의 안부를 물으마…

기억 속의 봄길

이 시는 다음 카페 ‘봄길을 걷는사람들’에서 가지고 왔습니다. 강종식 목사의 목사안수를 기념하여 써 준 시입니다. 미발표 시나 다름없는데, 참 풋풋하고 다정합니다. 샘지 독자들과 나누고 싶어 실어봅니다. - 편집자

밥솥 목사에게

밥솥 보다 작은 키에

밥솥 보다 큰 밥을 담고

너는 괴산의 한 촌락에 밥솥을 달았지

이 세상에 생명의 밥으로 오신

예수따라 밥솥이 되어

하늘의 양식, 지상의 양식 골고루 섞어

아침 햇살 한움큼

바람 한 점

시냇물 한 바가지 넣어

너 자신을 달구는구나

너를 불에 달구고 너를 태워

밥을 만들어 내는 일,

그것이 목회요 교회라는 그 분의 소리를

밥솥이 된 오늘,

너는 듣고 있겠지!

하늘의 양식을 쉽게 도시락에 담아

돈을 받고 파는 목사들에게서

전기줄에 밥솥을 연결해

숟가락 하나로 스위치를 눌러

하늘의 축복을

값싸게 만들어 놓은 현대교회들에게서

진득허니 앉아

예수, 그 분의 말씀을 밥솥에 담아

자신의 몸을 군불에 달구는

너의 밥솥 됨이 얼마나 큰 축복이랴!

센 불, 약한 불 잘 조절하여

하얀 김 모락모락 올라와

주의 성찬을 준비하는 밥솥의 따스한 사랑

꿀맛처럼 침이 흐르고

호호 불며 밥숟가락 서로의 입에 넣어주며

함박웃음 짓는 밥상을 마련하는

너의 목회를 기다려 본다

밥솥이 된 친구에게

엄마 품처럼 넓은 솥뚜껑으로

고마리 작은 마을 고이 품어

너를 달구어 차린 예수의 밥상을

마을 가득 펼쳐 내어

마을 어귀에 쪼그려 앉은 촌로에게

논두렁 밭두렁 힘차게 써레질 하는 농부에게

들녘을 헤엄치듯 뛰노는 아이들에게

미루나무 꼭대기에 올라 지즐 대는 종달새에게

시냇가 물방개에게도

골고루 나누어 주거라

밥솥 보다 작은 키에

밥솥 보다 큰 밥을 담고

일생을 예수 밥상 차리는

밥솥 목사의 길 걸어 가시길...,

종식, 너의 목사됨을 축하한다. 이 시대, 이 땅에서 목사가 되어 목사의 길을 간다는 게 축하 받을 일인지는 잘 모르지만, 제대로 된 목사의 길을 걸어갈 수만 있다면, 나는 목사가 된 너를 축하하마. 글을 쓰려고 책상에 앉아 종식 목사를 생각하는데, 갑자기 밥솥이 생각나더구먼, 이 사람 저 사람 입에 부지런히 밥 퍼 주는 모습, 그것이 종식 목사의 삶이 아닌가 생각하네.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부디 밥솥과 같은 목사, 목회를 하시기를…

2000년 3월 18일 희동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