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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본주의 하나님, 인본주의자 예수, 그리고 셋=하나!....??
박경은  |  0117669763@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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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년 08월 24일 (수) 17:03:14
최종편집 : 2016년 08월 27일 (토) 20:39:27 [조회수 : 6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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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본주의 하나님, 인본주의자 예수, 그리고 셋=하나!....??

마14:13~21(오천 명 식사이적 사건) vs 15:32~39(사천 명 식사이적 사건)

 

   기적이란 것을 완벽하게 부인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성서에 기록된 기적사건들에 대해서는 특별한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성서의 기적사건들은 하나님의 권능을 말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기적 사건 속에 담긴 말씀과 만나라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본주의적이신 하나님, 인본주의자로 사셨던 예수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을 위해 오셨다고 고백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하나님은 인본주의적이신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인간을 위해 오셨으며 인간을 위해 사셨고, 인간을 위해 죽으셨으며 인간을 위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모든 ‘인간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활동’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실행된 사역이므로 “신본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인간을 위해 사람 편에 서서 그렇게 하셨으므로 지상예수에 대해서는 “인본주의자”이셨다고 해야 적절합니다.

 

   변질된 신본주의

   따라서 ‘성서본문에 기록된 기적들은 모두 역사 속에서 발생했던 사실 그대로이다’를 주장하면 매우 믿음이 좋은 신본주의적 신앙일 것 같으나 실제로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입으로는 ‘신본주의’를 연발하면서도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사람을 차별하거나....

   특히 성경에는 ‘이렇게 써져 있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생각과 견해를 달리 하는 타인을 예수의 이름으로 정죄하는 등, 사탄의 졸개 같은 모습을 보이는 자들이 생각하는 신본주의란 것은 변질되고 오염되어 피해만 주는 자가당착적 상상물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인본주의 하나님, 인본주의자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도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는데(요3:16)’ 당신은 왜 성경에도 없는 신본주의를 운운하면서 당신 기준에 맞춰 사람을 차별하고 정죄하는 등, 말씀과는 반대방향을 향해 갑니까?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당신이 들이대는 특정의 기준에 맞든, 맞지 않든 당신은 겸허하게 다른 사람을 당신보다 낫게 여길 줄 아는 겸손의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빌2:3).

   그럴 때 “사람을 위한 신앙적 관점”을 갖고 성서에 나타나는 각종 이적사건들을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이적사건을 통해 “사람을 위해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서의 이적사건들은 당신이 말하는 그런 류의 변질되고 오염된 신본주의 믿음을 가지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생명의 길로 나가라고 주신 ‘인간을 위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성서본문을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해석해야 하는 이유

   성서저자들은 참 인간이 되셔서 인본주의자로 활동하신 역사의 지상예수를 통해, 고단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신령한 영적 의미와 힘을 부여받아 세상을 이기며 힘차게 살아가도록 하기 위하여 여러 다양한 말씀자료들을 활용하였습니다. 그 중에 기적 이야기도 들어 있는데 기적 이야기들은 그 여러 다양한 말씀자료들 중의 한 분야입니다.

   그런데 성서의 기적사건들을 읽어보면 문학적 허구성이 다발적으로 발견됩니다. 그렇기에 ‘성서저자가 받은 영감은, 역사 속에서 발생했던 사실 그대로를 가감 없이 기록하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창조적인 문학적 구성을 통해 말씀을 전하는 것에 있었다’고 말하게 됩니다.

   성서저자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신본) 사람을 위하여(인본) 일했던 사람(인본주의자)들입니다. 분명하게도 그들은 사람을 위한(→인본) 하나님의 뜻을(→신본)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애썼던(→인본주의적) 예수의(→신본) 사람(→인본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위해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문자로 기록하여 후세에 전한 인본주의자들로서 하나님의 뜻을 위해(신본주의) ‘믿음으로(신본주의적) 하나님께서 맡기신 거룩한 사명을 세상에서 행했던(인본주의적) 사람(인본주의자)들’ 이었습니다.

   따라서 성서본문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진지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더욱 더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행하신 일(인본주의적인 일)을 믿음으로 시행하는 사람(인본주의자)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 수고 중의 하나가 성서 안에 나타나는 기적들을 연구하여 그 안에 담겨 있는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내는 일입니다.

 

   2.그러면 마태복음의 사천 명 식사이적 사건에 담긴 신학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전능하신 하나님이 일으키신 놀라운 식사이적 사건.... 그것이 뭐 어떻다는 겁니까?

 

[1]마태복음 안에 있는 서로 다른 두 식사이적

  ①두 거대 식사이적 사건 비교

 

오천 명 식사이적 사건(14:13~21)

사천 명 식사이적 사건(15:29~39)

이적 전 배경

헤롯이 생일잔치 자리에서

세례요한을 처형한 사건

치유이적(보행장애자, 장애인, 시각장애자, 언어장애자)

이적장소

어느 곳의 빈들(13절)

갈릴리 호숫가의 어떤 산(29절)

이적 전 상황

고향에서 배척, 세례요한 처형소식

정결례 논쟁, 가나안여인의 딸 치유

발생시간

저녁때(15절)

사흘째 되는 날 점심때(32절)?

발생계기

제자들이 먼저 저녁 걱정(15절)

예수께서 먼저 저녁 걱정(32절)

식사재료

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17절)

떡 일곱 개, 작은 생선 몇 마리(34절)

식사자세

잔디 위에 앉음(19절)

땅에 앉음(35절)

예수의 행동

①오병이어를 받아 가지심

②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심(≠감사하심: 단어가 다름)

③떡을 떼심

④나누어 주심

⑤무리들이 받아먹음

①떡과 작은 생선들을 받아 가지심

②감사하심(→우리말: 축사하심)

③떼어 주심

④나누어 주심

⑤무리들이 받아먹음

식사결과

남은 조각 열두 바구니(20절)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37절)

식사인원

남자만 오천 명(21절)

남자만 사천 명(38절)

식사 후

제자들 먼저 배로 보내심(22절)

물 위를 걸으심(수상도하 이적)

제자들과 함께 배로 떠나심(39절)

마가단 지경으로 가심

    갈릴리는 반로마 쿠데타가 발생하기로 유명한 지역입니다. 그러므로 갈릴리 호숫가의 어느 광야에 오천 명이 모였던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사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여 사흘 동안 같이 있었다는 것은 도무지 역사적으로 신뢰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오천 명 식사이적 사건과 사천 명 식사이적 사건은 창조적인 문학적 허구로 구성된 말씀보따리라고 보아야 합니다(이와 관련하여 수천 명의 인상이 나지 않는 요6:23의 구절을 참조할 수 있습니다 오천 명이라는 수를 문자 그대로 쓴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수자에 의미를 두고 썼다는 뜻입니다).

 

  ②사천 명 식사이적 사건에 담긴 신학적 진리

   그러면 이제 표에서 보는 차이점들을 바탕으로 사천 명 식사이적 사건을 통해 전하려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마태복음은 마가복음에 없는 ‘산’을 명시하고 있습니다(15:29). 구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산’에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 의하면 ‘산’에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5:1참조). 그러므로 마태복음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사람을 위하여 복된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마태복음 저자는 이 진리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놓고 전하지 못했습니다. 마태복음 저자가 상대하는 사람들 중에는 유대인들도 상당수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하나님]이라는 등식에 익숙한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에 따라 마태복음이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내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바로~.... 하나님이야. 이 사람들아....”

   그런데 여기서.... 매우 예민하게 주의해야 할 핵심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신약성서의 본문들에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지만 교회사 속에서 확정된 삼위일체 개념입니다. 삼위일체에 대해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하면,

   ①양태론(→한 분이신 하나님이 구약시대에는 아버지로, 신약시대에는 아들로, 그 이후에는 성령으로.... 따라서 [아버지=아들=성령]이라고 보는 견해)을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채 가르치는 자가 되거나,

   ②세 명칭에 의한 일신론(→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같다. 그러므로 [야웨=예수=성령]이라고 보는 견해)이 되기 십상입니다.

   ③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을 삼신론적으로 이해하는 다신교 숭배자로 빠질 수도 있습니다([아버지 하나님≠아들 하나님≠성령 하나님], 그러므로 하나님은 셋!).

 

   그러면 신약성서 본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나 교회사를 통해 확정된 삼위일체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고백해야 할까요?

   신약성서 전반에 의하면 [예수=하나님]입니다. 따라서 [아버지=하나님, 예수=하나님, 성령=하나님]라고 표시하게 됩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아버지=예수=성령]이라는 표시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여기 한 아버지가 있다. 집에서는 아이들의 아버지이다. 그런데 사회에서는 사장이다. 그리고 그는 어떤 할아버지의 아들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아들=사장]으로 삼위일체이다. 부연하면.... 여기 물이 있다. 수증기는 물이다. 얼음도 물이다. 따라서 [물=수증기=얼음]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버지=아들=성령]이다.”

   하지만 이것은 전형적인 양태론 설명입니다. 하나의 존재가 세 가지 기능, 혹은 세 가지 역할을 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이와 같은 양태론에서 세 명칭(서로 다른 이름)에 의한 일신론의 오류가 범해지기도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야웨)=아들 하나님(예수)=성령 하나님]에서 자연스럽게[야웨=예수=성령]으로 표시되기 때문입니다.

   일체를 중시하다가 생겨난 일신론 개념의 양태론과 달리 삼위를 강조하는 견해도 생겨났습니다. 이것은 [아버지≠아들≠성령]으로 표기됩니다. 이때 [야웨≠예수≠성령]으로 셋의 독자성이 강조되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체’에서 결정적인 약점이 생기고 맙니다.

   [아버지 야웨≠아들 예수≠성령], 이 셋이 어떻게 하나가 되는가?

   바로 이 지점에서 막혀 결국 삼신론으로 빠지게 됩니다. 그 결과 [아버지 하나님≠아들 하나님≠성령 하나님]이 되어 삼위일체가 아니라 삼위삼체가 되어 세 분의 하나님이 되고 맙니다. 아버지 하나님 한 분, 아들 하나님 두 분, 성령 하나님.... 이렇게 세 하나님으로....

   그러면 대체 삼위일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일까요?

   설명이 아니라 고백입니다. 삼위일체는 교회사 속에서 논리의 형태를 띠고 다듬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한 분 하나님을 고백할 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홀로 하나이신 한 분 하나님임을 말해야 하는데 삼위일체에 대한 입으로의 고백이 글로 써질 때 문자진술이 되는 겁니다.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고백은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진술될 수 있습니다.

①예수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아버지=하나님; 아들=하나님; 성령=하나님]

②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이 아니고 아들은 성령이 아니며 성령은 아버지가 아니다.

   [아버지≠아들≠성령(야웨≠예수≠성령)]

③따라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서로 구별되지만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이시다!!....??

 

   이 고백을 결정적으로 지지하는 말씀으로 제시되는 구절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는 요10:30입니다. 여기서 ‘나’와 ‘아버지’는 구별됩니다[나(예수)≠아버지]. 서로 다른 두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둘이 하나입니다[(나≠아버지)=하나!]

   바로 이 지점에서 ‘어떻게 서로 구별되는 독립적인 두 존재가 홀로 하나일 수 있냐?’는 질문이 지속되어 왔고 현재에도 질문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삼위일체는 논리가 아니고 논리의 형태를 띠고 진술되는 신앙고백이라서 “그것은 신비”라며 미스테리 카테고리 안에 담아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서에는 결코 단 한 번도 나타난 적 없으나....

   ①유대교의 아버지 하나님만을 가리키면 안 되고

   ②신약성서의 예수만을 단독으로 가리켜도 안 되며

   ③아버지와 아들이 동시에 보내시는 성령도 포함하여

     (아버지께서 보내시는 성령, 요14:26; 아들이 보내시는 성령, 요15:26)

   ④한 분 하나님을 고백해야만 하기 때문에....

   논리가 아니라....논리적으로! 다음과 같이 진술하도록 교회사 속에서 확정되었습니다.

 

하나, 아버지는 하나님이시고 아들도 하나님이시며 성령도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아버지=하나님, 아들=하나님, 성령=하나님]

둘, 아버지는 아들이 아니고 아들은 성령이 아니며 성령은 아버지가 아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아들≠성령(야웨≠예수≠성령)]

     만일 [아버지(야웨)=아들(예수)=성령]이라면 아들이 죽을 때 아버지도 죽어야 함....

셋, 그럼에도 불구하고 셋은 홀로 하나이신 한 분 하나님이시다(3=1?)!!!

   [(아버지≠아들≠성령)=한 하나님]

 

[주의!]

 

  →①부시=대통령, 그 아들=대통령, 따라서 [아버지=대통령, 아들=대통령]

    ②그러나 [아버지 부시≠아들 부시], 그러므로 [아버지≠아들]

    ③하지만 둘은 모두 대통령.[(아버지≠아들)=하나뿐인 대통령]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하나 뿐인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 부시와 아들 부시 사이에는 서열, 혹은 순서가 존재합니다. 아버지 먼저, 아들 다음.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들 부시는 아버지 부시에게 종속됩니다. 아버지 부시 없이 아들 부시의 존재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버지 성부 하나님과 아들 성자 하나님 사이에는 순서나 서열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 성부 하나님은 초대 하나님, 아들 성자 하나님은 제2대 하나님. 그 이후 성령 하나님은 제3대 하나님이 결코 아닙니다. 따라서 아래와 같이 최종 정리됩니다.

   ①성부는 하나님, 성자도 하나님, 성령도 하나님이다.

     (성부=하나님; 성자=하나님; 성령=하나님)

 

   ②그런데, 아버지(성부)와 아들(성자), 그리고 성령은 서로 구별된다

     (셋은 서로 다른 독립적인 존재라는 뜻: 성부≠성자≠성령).

 

   ③그러나 성부와 성자, 성령은 홀로 하나이신 한 분 하나님이다

     [(성부≠성자≠성령)=홀로 하나이신 한 분 하나님].

 

   더위 막바지에 건강하시며 하나님이 참으로 기뻐하시는 신본주의적(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한다는) 인본주의자(사람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처럼 활동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지속적으로 말씀을 연구하시며 훈련되시길 바랍니다. 사천 명 식사이적을 통해 보는 신학적 진리, 식사이적에 담긴 말씀에 대해서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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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멘 (183.109.98.239)
2016-08-24 22:2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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