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의 말씀

“이제는 자유의 날개 짓으로”

(2016년 7월 28일, 감신대 웨슬리 채플)

송순재(감리교신학대학교, 기독교교육학과)

 엊그제 7월 26일 저녁 8시 33분 김재은 선생님께서 소천하셨습니다. 선생님의 주검 앞에서 우리들 심정은 뼈저린 슬픔과 통곡 보다는 이별의 잔잔한 아픔과 고요하고 초연한 희망으로 어우러진 무엇이었다고 하겠습니다. - 우리들은 요 몇 주 사이 임종이 가까우신 선생님의 여위신 몸과 이제 임박한 죽음과 고통의 시간을 정직하게 직면하시고자 했던 선생님과 특별히 가까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 석별의 시간으로 우리는 우리나라 기독교교육학 개척기의 제2세대에 속하셨던 선생님들 중, 한 분을 떠나보낸 셈이며, 또한 감신의 옛 세대에 속하셨던 큰 선생님들 중 한 분을 떠나보낸 셈이기도 합니다.

제가 선생님을 처음 뵌 건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서 연구실로 찾아뵈었던 1991년 봄기운이 일던 때였습니다. 그로부터 십 오년 정도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을 감신 교정에서 같이 지내며 모시고 살았던 인연이 새롭습니다. 처음 대했을 때에 밝고 예리한 눈매와 생기 넘치는 목소리가 인상적이었는데, 또 한편으로는 좀 냉정하신 분이라는 인상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 선생님이 누구고 어떤 분이신지는 세월이 말해주었습니다. 나는 차츰 그 분의 냉정함에서 냉철함의 살아있는 표본을 만날 수 있었고 교제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진실함과 인간적 온기를 점점 더 깊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런 기운은 퇴임하실 때도 여전하셨지만 퇴임 후에는 인간적 온기가 더욱 두드러지고 깊어져 그 자태에서 부드러운 기운이 흘러넘쳤습니다.

많은 분들이 감신이 배출한 이러저런 학자들을 거명합니다. 나는 일찍이 우리 감신이 이 특별한 기독교교육학자이자 여성신학자를 가질 수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새삼 골똘하게 생각해 보며, 이 자리에서 이 사실을 증언하고 싶습니다. 대학시절과 졸업직후 우리 선생님이 보이셨던 총명함과 재빠른 몸짓 그리고 열정을 담은 헌신적 노력은 늘 회자되는 것이었습니다. 신학이라 하면 성서학이요 그중에서도 특히 구약학에 조예가 깊으셨고 교육학이라 하면 신앙공동체 이론과 교수학습이론에 매진하셨으며, 다른 한편 일반 학문적 세계나 삶의 실제에 대해서도 조예가 깊으셔서 깨인 의식과 개방적 사고, 의사소통적 교제라는 점에서 그 세대를 살아간 다른 이들보다 먼저 저 만치 앞서 가셨습니다. - 영민하시고 이지적이셨지만 늘 감성의 세계에 깊이 공감하시고 이것을 자신의 학문과 삶의 세계에 풀어놓고자 힘쓰셨지요. 제가 자연의 힘, 자연의 교육에 대해서 말했을 때 이를 눈여겨보시고 이 점을 여러 사람들 앞에서 짚어주셨습니다. 그래서인지 보통 기독교교육학자들 입술에는 그리 오르내리지 않는 루소를 읊조리고 자연의 아이를 칭송하기도 하셨는데, 이것은 분명 예사롭지 않았던 대목이었습니다.

학자의 주업은 이론 탐구입니다. 하지만 교육학으로 말하자면 실천을 토대로 하지 않는 이론을 이론이라 하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이 원천적 자료에 늘 근본적 의미를 부여하셨을 뿐 아니라 연륜이 높아 가시면서 여기에 보다 치중하셨습니다.

50줄에 접어들면서 부터는 남편 이상윤 목사님과 함께 좀 더 본격적으로 교회공동체를 섬기셨는데 제가 보기에 선생님에게는 이때부터가 또 하나의 전성기가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교수직만으로도 버거운 하루하루였을 터인데 선생님은 교회 사역을 위해 뛰어 드셨습니다. 교회 사역을 통해 남기신 설교문집을 보면 바로 알 수 있기는 합니다 만은 선생님은 간략한 길이에 핵심이 명확히 드러나는 내용을 통찰력이 번득이는 문장으로, 개념으로, 이야기로 듣는 이들의 폐부를 파고 드셨습니다. 그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이 살아있는 말씀들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일에 전념한다 하여 기도와 설교와 가르침에만 골똘하지 않으시고 육신의 노동이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대소사를 가리지 않고 몸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선생님은 또 한 평생을 사셨습니다. 그렇게 살아가신 선생님을 저는 “일상을 사는 삶의 철학자”로 기억하고 싶습니다.

퇴임하신 후 어떻게 지내시는지 물으면 “참 자유롭다” 이제까지 누리지 못했던 시간으로부터의 자유가 행복하게 하고, 이러한 시간으로부터의 자유가 혼을 살찌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선생님은 그 자유를 “쉼”이라는 말로 표현하셨는데 그건 사회적 봉사나 학문적 기여라는 이름을 빌어, 또 하나 그럴듯한 사업을 벌리기 보다는 바로 분수에 맞는 일을 찾고자 함 때문이라 하셨지요. 그건 자신을 하루 24시간에 따라 움직이는 일정표에 따라 굴리지 않고 낮과 밤에 구애받지 않고 살아가는 하루, 그걸 선생님은 시적인 표현을 빌어 25시라 부르고 싶다고 하셨는데, 그렇게 해서 하루하루를 깃털처럼 살아가고자 하셨다 했습니다.

그리하여 육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최소한의 가사일과 소박한 교제 외에는, 고요히 머물러 앉아 책 읽는 것과 글쓰기에 골똘하셨던 것 같습니다. 글이라 하면 그 분 표현대로 하면 좌뇌를 쓰는 학문적 글쓰기가 아니라 우뇌를 쓰는 문학적 글쓰기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학문은 바로 접으신 대신 <인생 뒤풀이>라고 이름 붙인 수필집 두 권과 설교집 한 권을 내셨습니다. 이것이 선생님께서 누리신 자유의 첫 번째 이유라 하겠습니다.

쉼을 말하신 두 번째 이유는 후학들이 자유롭게 학문 활동을 하도록 멀찌감치 비켜서 있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꾸 나타나서 후학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시어머니 노릇은 하고 싶지 않으셨던 겁니다. 그래서인지 퇴임 후에는 학교에는 발을 딱 끊고 강의 같은 것도 일체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이 자유를 가지고 살아가고자 하신 정말 중요한 마지막 이유는 죽음을 어떻게 맞을 것인지 준비하고 싶으셨던 것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지에 대해 그렇게 많이 생각하고 그렇게 많이 연습한 사람도 흔치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살면서도 죽음을 곁에 두고 생각하고, 죽음의 시간이 찾아왔을 때에는 삶에 연연하지 않고 “자유롭게” 죽음을 맞을 것인지에 관한 물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누구나 혹시 암에 걸리면 어쩌나 염려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선생님도 예외라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병에 대해서 선생님은 그건 사실, 현대의학으로 보자면 사람 몸에서 수없이 생겼다가 또 저절로 낫기도 하는 병이니 난치병이라 하기 보다는 만성질환 정도로 생각하고, 그러다가 정말 치료받을 수 없는 중증으로 판명되면 이 암을 벗으로 삼아 하나님이 부르실 때까지 동고동락하다가 자유롭게 죽음을 맞겠다는 심정으로 지내셨습니다. 그리고 절대 절명의 시간이 오면 목숨을 구걸하거나 구차하게 연명하기 위한 일체의 의료적 조치들은 거절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은 우리들의 예상과는 달리 훨씬 일찍 찾아왔습니다. 70대 중반이면 아직 젊으신 나이 아닙니까? 선생님은 늘 그렇게 생각해 오셨고 작정하신 것처럼 선생님께서는 평생의 반려자이신 이상윤 목사님과 교우들, 평생의 선배이자 동료교수이신 선한용 교수님 그리고 아들딸 같이 여기시던 제자 몇을 불러놓고 유언하시면서 마지막 고통의 시간을 어떻게 맞으실 지에 대해서 각별한 당부의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그래도 가족과 친구들은 백방으로 해법을 모색하였고 우리들도 나름 도움을 드릴 수 있는 방도를 이리저리 구하고 찾아보고 안타깝게 제안도 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모든 시도는 옆으로 새나가고 전혀 들어맞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시간은 마치 세찬 바람이 불어오듯 빠르게 닥쳐왔습니다. 이 시간이 얼마나 빠르게 다가왔는지 상황을 보게 되면 그것은 바로 오랜 시간 동안 바라고 기도해 오신 그대로, “자유롭게” 죽음을 맞으시겠다고 작정하신 그대로라 하겠습니다.

죽음에 직면한다는 것은 홀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홀로 선다는 건 두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자유를 가지고 홀로 서는 사람은 또 다른 지평에 서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살아온 일생을 낱낱이 드러내시기도 하셨지만, 홀로 아늑한 자리에 앉아 하나님과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그 자리는 심판의 두려운 자리가 아니라, 우리의 어머니 되시고 아버지 되신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모든 걸 털어놓고 속삭이신 자리였으며, 또한 영원한 생명의 탄생을 위해 이야기를 나누신 아늑한 삶의 자리였습니다.

선생님은 이 몸가짐을 통해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서까지 신앙의 사람이 죽음 앞에서 드러낼 수 있는 품위와 존엄성이 어떤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주셨습니다. 숨을 거두신 후 시신은 유언대로 세브란스 병원에 의료연구용으로 기증되었습니다.

김재은 교수님! 선생님은 학문과 교회공동체 사역과 가사 일과 노동을 통해서 참 아름다운 삶의 이야기를 만들어내셨지만, 이제는 신앙의 도리에 따라 죽음을 준비하고 자유롭게 죽음을 맞는 과정을 통해서, 예수께서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될 것이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 하신 말씀처럼(요 8:31-32), 자유롭게 되셨습니다. 저는 이 평생의 삶 전체를 “정화의 과정”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선생님은 우리의 진정한 신앙의 선배들과 수도자들이 거쳐 간 바로 그 “정화의 길”을 따라 걸으셨으며 그렇게 자유롭게 되셨습니다. 그 은밀한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처녀시절 아름다우신 자태 그대로, 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과제와 숱한 역경과 고통과 죽음을 통해서 정화된 영혼으로 또 다른 아름다움으로 태어나신 선생님, 이제는 영원히 그 분의 품 안에서 자유롭게 나르시옵소서. 하나님! 그 영혼에 자유의 날개를 달아주신 우리 하나님께 두 손 모아 감사의 기도를 바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