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마음, 예수의 길

김종길 / 구약학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 무슨 격려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무슨 동정심과 자비가 있거든, 2 여러분은 같은 생각을 품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이 되어서, 내 기쁨이 넘치게 해 주십시오. 3 무슨 일을 하든지, 경쟁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자기보다 서로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 4 또한 여러분은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아 주십시오. 5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6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8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10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11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1-11)

1. 서언

(1) 배경

마케도니아 지역에 있는 빌립보는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인 마케도니아의 왕 빌립 2세의 이름을 따서 건설된 도시입니다. 로마의 식민지인 빌립보에는 제대한 로마 군인들이 정부로부터 땅을 분배받아서 거주하였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이 유럽 땅에 세운 최초의 교회입니다. 그 교회에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했습니다. 첫째로, 제도적인 문제로 추정됩니다. 교회의 구성원이 된 로마인들은 로마 제국의 체제를 교회 제도에 적용하고자 하였을 것입니다. 로마의 가치가 교회 안으로 들어오면서, 교회는 중앙집권적으로 조직되고, 교회 안에 위계질서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툼과 허영으로 교회일을 하게 되고, 남보다 나를 높이는 현상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둘째로, 교리적인 문제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바울이 전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以信稱義)는 복음에 대하여 유대인 신자들은 이방인 신자들에게 믿음과 아울러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선교하는 현장에는 이러한 문제가 끊임없이 일어났습니다. 그 내용은 갈라디아서에서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 더욱이 당시에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는 처지였었습니다. 과중한 스트레스로 인하여 바울은 너무 괴로워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1:23)고 실토했습니다. 시쳇말로 표현하면, 선교고 목회고 다 때려치우고 싶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는 것이 교회에 유익이 되기에, 참고 견디겠다는 것입니다(1:24). 더 나아가서 긍정적인 태도로 상황을 수용합니다.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1:12). 급기야 옥중에 있는 바울이 밖에 있는 교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4:4). 요컨대, 로마의 제도와 유대의 율법주의가 빌립보 교회를 난처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빌립보서 2장 1-11절에 접근하겠습니다.

(2) 본문 개관

빌립보서 1장 27절부터 2장 18절까지의 내용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야 할 성도의 삶에 관한 것입니다. 1장 27절에 제시된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구절이 이 단원(1:27-2:18)을 이끌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중심 부분이 되는 2장 1-11절은 복음에 합당한 생활의 기준인 그리스도의 모범을 주제로, 한 단위를 이루고 있습니다. (2장 12-13절은 다음에 이어지는 단락의 서두를 이루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2장 1-4절에서 바울은 교회생활의 지침을 제시하고, 5-11절에서 권면의 근거를 제시합니다. 2장 6-11절은 교회생활 내지 기독교윤리의 근거로서 인용된 ‘그리스도 찬가’입니다. (이밖에 요한복음 1장 1-18절, 골로새서 1장 15-20절, 디모데전서 3장 16절, 히브리서 1장 1-4절 등의 본문들도 초기 교회에서 사용했던 찬송 가사입니다.) 빌립보서 2장 6-8절은 그리스도의 낮아짐을 서술하고, 9-11절은 그리스도의 높아짐을 노래합니다. 6-8절에서 그리스도는 믿음의 모범입니다. 9-11절에서 그리스도는 신앙의 대상입니다. 이와 같이 빌립보서의 찬가에는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가 결합되어 있습니다. 당시 초기 교회에서는 후자(신앙의 대상)를 보다 강조한 것 같습니다. 그러한 분위기는 중세 교회에 영향을 미쳐서 예수의 신격화 교리를 형성하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케리그마의 그리스도, 곧 신성화된 예수에는 관심하지만, 역사적 예수는 간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필자는 6-8절의 본문을 중심으로, 특히 역사적 예수에 관심하며, 그리스도를 믿고 따름에 관하여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빌립보서 2장 1-4절에서 바울 선생은 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강조합니다. 곧 빌립보 교회 안에서 교우들이 한마음을 품고 서로 사랑할 것을 권면합니다. 발신자는 1절에서 빌립보 교회가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열거합니다. 이러한 은혜가 공동체의 삶 안에서도 실현되어야 하는데, 이기심과 불화가 공동체를 위협합니다. 그래서 2절에서 한마음을 강조합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이 구절을 달리 표현하면, 첫째는 한마음, 둘째로 한마음, 셋째도 한마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토록 한마음을 강조했다는 것은 당시 빌립보 교회에서 교인들의 마음이 일치되지 못하였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나 로마교회나, 이 땅에 있는 어떤 교회에서든지 교회 구성원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담과 골이 있는 듯합니다. 이 문제를 푸는 것이 목회의 관건입니다. 3절에서 갈등 해결의 열쇠로서 바울은 “겸손”을 역설합니다.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이 “다툼이나 허영”이라면, 교회를 연합하는 것은 겸손입니다. 겸손은 소통과 연합의 능력입니다.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김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존중한다는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만이 나와 너를 가로막는 담을 허물고 골을 메우며, 한맘 한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5절 이하에서 겸손의 모범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합니다. 개역개정판 성경으로 2장 5-8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5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5절의 헬라어 문장을 직역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이것’을 생각하라”입니다. 이 구절에서 ‘이것(τουτο)’은 예수의 “마음”(개역) 또는 “태도”(표준역)를 말합니다. 예수의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신자의 태도, 곧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을 새기고 그의 삶을 본받는(Imitatio Christi) 행위를 뜻합니다. 본문을 해석하는 데에 요구되는 두 가지 중요한 주제는 ‘역사적 예수’와 ‘그리스도의 믿음’입니다. 여기서는 역사적 예수에 관한 논의를 생략하고, ‘그리스도의 믿음’에 관하여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3) 율법의 의와 그리스도의 믿음

왜 ‘그리스도의 믿음(πίστις Χριστού)’이 중요할까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신앙의 질과 방향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3장 7-9절의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7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9절에서 “율법에서 난 [의]”와 “그리스도를 믿음”이라는 두 가지 핵심 용어가 등장합니다. 이후로는 “그리스도를 믿음”을 ‘그리스도의 믿음’이라고 표기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을 읽는 데에 두 용어를 올바르게 이해함이 요구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길이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율법’과 ‘믿음’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은 율법을 지켜야 의롭게 된다고 하는 데에 반하여,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움을 얻는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율법이란 무엇일까요? 구약성서의 ‘토라’를 가리킬까요? 많은 사람들이 루터 신학의 영향을 받아서 ‘율법’과 ‘복음’을 대립 개념으로 인식합니다. 그러나 유대인 바울은 토라로서의 율법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반대한 것은 ‘율법의 행위’입니다. 그것은 유대인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신분을 나타내는 안식일, 음식, 할례 등에 관한 제의 규정을 준수함으로써 의로움을 확보하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를 ‘율법주의(legalism)’라고 하지요. 따라서 바울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율법과 율법주의를 구분하는 것이 요구됩니다. 율법주의는 믿음의 대척점에 있습니다. 이러한 ‘율법의 행위’에 대하여, 바울은 ‘그리스도의 믿음’을 제시합니다.

3장 9절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믿음(πίστις Χριστου)”은 바울 사도의 신학에서 핵심적인 개념입니다. (‘그리스도의 믿음’이라는 용어는 빌립보서 3장 9절 외에 로마서 3장 21, 26절 그리고 갈라디아서 2장 16, 20절 등에서도 나타납니다.) ‘피스티스 크리스투’에서 ‘크리스투’를 문법적으로 분석하면, 목적격적 속격으로 볼 수 있고, 주격적 속격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목적격적 속격으로 해석하면, 그리스도의 믿음은 그리스도를 신앙의 대상으로 보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전통적이고 일반적인 입장입니다. 그래서 우리말 성서에서는 “그리스도를 믿음”(개역) 또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새번역)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주격적 속격으로 보면, 그리스도의 믿음은 ‘그리스도가 지닌 믿음’ 또는 ‘그리스도의 신실’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가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의 주체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해석은 칭의론과 구원론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제공하며, 하나님의 선행하는 은총과 아울러 믿음의 전형이자 삶의 모범인 예수 그리스도를 부각합니다. ‘그리스도가 믿는 믿음’은 신자들이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신앙을 극복하여,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자기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신앙생활을 하도록 격려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빌립보서 2장 6-8절을 해석하고자 합니다.

2. 예수의 마음, 예수의 길

이제 빌립보서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2장 7-8절은 신앙의 주체로서 역사적 예수가 지닌 믿음을 서술합니다. 6절 이하는 관계대명사가 이끄는 절로서 5절에 나온 그리스도 예수를 수식합니다. 7, 8절에서 주동사는 “자기를 비워”와 “자기를 낮추시고”이고, 나머지는 분사구로서 주동사를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6-8절에서 그리스도의 믿음은 “자기 비움”과 “자기 낮춤”이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분사구들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은 ‘성육신’ 사건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2:7). 자기 낮춤은 ‘십자가’ 사건으로 실현되었습니다(2:8). 성육신과 십자가 사건은 구원 사건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역사적 예수의 신실한 순종을 통하여 성취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곧 ‘자기 비움’과 ‘자기 낮춤’ 그리고 ‘순종’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은 성도가 걸어야 할 길이기도 합니다.

(1) 자기 비움

하나님의 구원 행동은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케노시스)’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케노시스’는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를 희생하는 행위입니다. 케노시스는 성육신 사건에서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요한복음 1장 1-18절은 초기 교회의 찬송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성육신 사건을 우주적 차원에서 진술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여기서 말씀은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동등합니다. 높은 데 계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서 낮은 데로 임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 하나님의 사랑은 성육신을 통하여 구체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그리스도의 케노시스는 기독교 진리의 핵심으로, 그 의미가 심오하고 오묘합니다.

여기서는 자기 비움을 ‘무집착’ 내지 ‘무소유’의 뜻으로 한정하겠습니다. 십계명에 나타난 하나님은 인간이 탐욕과 집착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살도록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소유를 추구하고 탐욕의 노예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2장 13-21절에서 ‘무집착’에 관하여 교훈하셨습니다.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유산 분배 과정에 개입해주기를 예수께 간청하였습니다. 아마도 형이 유산의 대부분을 차지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지혜롭고 유력한 분이 나서서 재산을 공평하게 나누도록 교통정리를 해주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일이 잘 되면 후원금을 두둑이 내겠노라는 말도 덧붙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당신이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가 아니라며 일언지하에 거절하셨습니다. 그리고 대중을 바라보며 말씀하셨습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쳐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5). 에리히 프롬의 용어를 빌리면, ‘소유’와 ‘존재’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이지요.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마 6:24). 우상과 하나님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예수는 인간이 탐욕으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생명과 자유를 누리라고 가르쳤습니다.

이어서 한 어리석은 부자를 예로 들어 보이셨습니다. 그 부자는 밭에 소출이 풍성하였습니다. 부자의 고민은 어떻게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부자는 잉여 농산물을 안전하게 비축하기 위하여 곡창을 크게 지었습니다. 그는 창고 가득히 곡식과 물건을 쌓아 두고 흡족한 마음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그러나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부자는 진정으로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지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소유가 생명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부자는 하는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습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 19:24). 여기서 어리석은 부자는 소유에 집착하는 자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이나 바나바 그리고 브리스길라 등은 부자이지만 자신의 재물을 선한 목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사용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재물에 종노릇하는 탐심을 책망하신 것이지, 재물 자체를 부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탐욕의 결과는 사망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오손 웰즈가 감독하고 주연한 “시민 케인(Citizen Kane, 1941)”이라는 영화는 소유양식의 삶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현대인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케인이라는 재벌이 황폐한 대저택의 침실에서 장미꽃봉우리를 뜻하는 ‘로즈버드’라는 의문의 한 마디 말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신문기자가 로즈버드의 비밀을 취재하는 과정을 따라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평생 소유와 야망을 향하여 달려온 케인은 엄청난 재물와 권력을 소유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주인공은 인간관계를 경시합니다. 그는 성공할수록 삶이 망가져 갑니다. 동료도 돌아서고 아내도 그의 곁을 떠나갑니다. 마침내 외톨이가 된 그는 외롭게 숨을 거둡니다. ‘로즈버드’는 케인이 어린 시절에 가지고 놀던 눈썰매를 가리킵니다. 그때는 눈썰매 하나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눈썰매와 같이 작은 것으로도 우리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욕심과 집착 때문에 많은 소유로 인하여 인생은 도리어 불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복음’과 ‘자기계발’이 혼동되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자본주의와 실용주의 심리학이 결합된 심리학으로 왜곡된 듯합니다. 기도는 자기를 비우는 방편인데, ‘야베스의 기도’에 나타난 기도는 자신의 소원을 성취하는 주문으로 변질되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비전(vision)이라는 이름으로 내 욕심을 채우고자 합니다. 소유를 지향하는 번영신앙은 ‘신념의 마력’에 근거한 ‘삼박자 축복,’ ‘긍정의 힘’ 등의 모습으로 교회에서 유행합니다. 하지만 무엇인가에 집착하고, 무엇인가를 소유하고자 할수록 사람은 복음과 멀어집니다.

종교의 기본은 ‘자기 비움’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부정이 제자도의 기본 요건임을 가르치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막 8:34). 소유의 집착에서 벗어나기는 제자도의 기초입니다. 누가복음 14장 25절 이하에서 예수께서 당신을 따르는 대중에게 제자가 되는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망대 공사와 전쟁을 비유로 들어서 소유에 대한 철저한 마음가짐을 강조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14:33). 모든 것을 버릴 때,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텅 빈 충만’입니다.

(2) 자기 낮춤

‘자기 낮춤’은 케노시스 영성의 주요한 요소입니다. 누가복음 14장 7-11절은 ‘낮은 자리’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어느 날 잔치 집에서 사람들이 기를 쓰고 윗자리를 골라잡는 것을 보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낮은 자리에 앉아라”(눅 14:10)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낮은 자리는 주님의 명령이요, 내가 사는 자리입니다. 과연 나는, 그 분의 말씀대로 사는지 나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이제껏 내가 자발적으로 낮은 자리를 선택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잊고 살아 온 듯합니다. 흔히 사회 상류층 사람들이 잘 쓰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누군지 알아?” 남을 깔보고 자기를 과시하는 발언이지요. 이러한 태도는 교회 안으로 배어들었습니다. 이래봬도 내가 누군데 하면서 남에게서 인정받고 대접받기를 은근히 기대합니다. 나도 모르게 말석보다 윗자리에 마음이 끌립니다. 지방회에서 한 자리 얻지 못하거나, 특별 행사에서 순서라도 맡지 못하게 되면 서운한 마음이 듭니다. 기실, 스스로 아랫자리에 앉기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갈등과 문제는 여기에서 비롯하지 않는가 싶습니다. 마가복음 10장 35-45절에서 예수님은 ‘섬기는 리더십’의 본을 보여주십니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막 10:43-45). 주님께서는 제자의 도리를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에 낡은 기도방석이 있습니다. 예배당을 청소하는 분들이 강단 의자 방석과 바닥에 깔린 기도용 방석을 가끔 뒤바꾸어 놓기에, 방석을 구별하고자 거기에 아랫자리라는 표시로 ‘하좌(下座)’라고 썼습니다. 막상 글을 써 놓고 보니, ‘下座’라는 말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아랫자리에 앉을 수 있을까요? 위에 있는 것들을 찾는 사람만이 스스로 낮은 자리에 앉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앞에다가 “위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라”(골 3:1)는 뜻으로 ‘상지(上志)’라는 말을 더하여 ‘상지하좌(上志下座),’ 곧 ‘높은 뜻, 낮은 자리’라는 사자성어를 만들었습니다. 새벽마다 “上志下座” 네 글자가 쓰인 방석에 앉아서, 뜻을 높이고 자리를 낮추기를 다짐합니다. 우리의 낮은 자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혹시 성도님 가운데 직장에서 승진하지 못하신 분들이 있습니까? 교회에서 임원으로 세움 받지 못한 분들이 계십니까? 감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낮은 자리에 앉을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기꺼이 낮은 자리에 앉는다면, 머지않아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뜻을 높여주실 것입니다.

기도하는 자리는 하좌(下座)입니다. 누가복음 18장 9-14절은 낮은 자리에서 드리는 기도에 관하여 교훈합니다. 바리새인과 세리가 기도하였습니다. 바리새인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였습니다. 그는 종교적인 규칙을 열심히 지켰습니다. 그는 토색, 불의, 간음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은 동족에게서 멸시를 받던 세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십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은 자신을 높이고, 세리는 자기를 낮추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할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구의 기도를 들어주셨을까요?

예수는 자기를 낮추기를 역설했습니다. 누가 14장 7-11절과 18장 9-14절에서 공통적으로 예수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마무리합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겸손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능력입니다. 낮은 자리를 선택하는 겸손한 마음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3) 순종

자기 비움과 자기 낮춤은 순종으로 이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은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8절)라는 구절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순종의 뜻을 밝히기 위해 먼저 무엇이 순종이 아닌가를 살펴봅시다. 순종이란 ‘타율적 복종’이 아니며, ‘조종’도 아닙니다.

첫째로, 순종이란 무비판적이고 맹목적인 굴종과는 전혀 다릅니다. 에리히 프롬은 <너희도 신처럼 되리라(You Shall Be As Gods)>는 저서에서 권위주의적 윤리와 인도주의적 윤리를 대비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권위에 맹목적으로 따르는 ‘타율적 복종’과 사랑과 자발성에 근거한 ‘자율적 순종’을 상정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자율적으로 순종함으로써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타율적 복종은 우상숭배로 기울어지기 쉽습니다. 그러한 복종의 위험성을 일찍이 니체가 지적한 바 있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서문에 소개된 낙타의 정신이란 노예도덕을 상징하는 것으로, 타율적 복종의 정신을 말합니다. 낙타의 정신은 복종이 내면화되어, 전통과 권위에 순응합니다. 낙타는 ‘무거운 짐’을 지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맹목적인 복종과 억제는 결국 자신의 삶을 사막처럼 황폐하게 만듭니다. 스스로의 주체성이 상실되고 욕망이 좌절됨으로써, 낙타의 정신에는 ‘원한’(Ressentiment)이 쌓여갑니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약자가 강자에게 품게 되는 원한감정을 상세하게 다룹니다. 르상띠망이 자신을 향하면 ‘양심의 가책’이 됩니다. 노예의 정신을 지닌 자는 자학하며 굴종합니다. 반대로, 원한이 타인을 향하여 공격적 분노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타자에게 배타적이고, 난폭하고 잔인하게 행동합니다. 자기보다 약한 타인에게 분노를 표출하여 권력의지를 확인하고 원한감정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원한감정의 지배를 받는 자들을 니체는 ‘노예’라고 부릅니다. 노예가 비굴하게 복종할수록 원한은 깊어갑니다. 니체는 원한감정에 기반을 둔 기독교를 노예도덕이라고 경멸하였습니다. 기독교의 ‘원죄론’이나 ‘대속설’ 그리고 ‘칭의론’ 등의 교리는 죄의식에 근거해 있습니다. 죄의식은 르상띠망의 발로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굴종하고 자학하게 하는 원한감정이 때로는 가학적이고 공격적으로 표출되기도 합니다. 기독교의 역사에서 마녀 사냥, 유대인 학살, 십자군 전쟁 등이 그러한 사례들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의 과제는 노예도덕과 원한감정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순종은 조종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는 ‘조종’(manipulation)과 ‘순종’(obedience)이 있습니다. 조종이란 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상대방 또는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를 테면, 가나안 사람들은 풍성한 소출을 거두려고 가나안의 신 ‘바알’과 ‘아세라’등의 비위를 맞추며 조종하려 합니다. 지배자는 피지배자를 통치하는 도구로 신을 조작하고 이용합니다. 이와 같이 고대 근동의 신들은 현세적인 소원을 성취하는 매개체나 통치 이데올로기의 기능을 합니다. 야웨를 섬긴다 하면서도 탐욕을 채우고자 하나님을 조종하려 한다면, 그것은 이방 종교와 다르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작금에 한국 교회에 만연한 ‘번영 신앙,’ ‘삼중 구원,’ ‘긍정의 힘’ 등이 그러한 경향을 보이는 듯합니다. 신을 믿는다 하면서도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신을 조종하는 것은 우상숭배입니다. 인간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신 또는 인간에게 조종당하는 신은 참 하나님이 아닙니다.

반면에, 순종이란 ‘나와 너’(Ich und Du)의 인격적인 관계를 전제로 한 자발적인 섬김입니다. 여기서는 상호간에 의사가 소통되고 대화가 이루어집니다. 순종은 내 뜻을 이루고자 하나님을 조종하려 하지 않습니다. 십계명에서 “너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 하는 계명이 가장 먼저 제시됩니다. “다른 신들을 내 앞에 두지 말라”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교제하며 순종하라는 요구입니다. 야웨 신앙과 이방 종교의 차이는 순종 여부입니다. 순종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의 핵심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말씀을 따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삼상 15:22). 역사적 예수는 기꺼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히 5:8). 어려서부터 부모님에게 순종하기를 배웠습니다. “예수는 부모와 함께 내려가 나사렛으로 돌아가서, 그들에게 순종하면서 지냈다. 예수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에 간직하였다”(눅 2:51). 다른 신들을 섬기라고 유혹하는 사탄에게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십니다.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겨라”(마 4:10).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을 뜻을 이루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선택했습니다.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마 26:39). 이러한 뜻에서 우상을 거부하고 하나님께 순종한 역사적 예수가 믿음의 전형인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을 조종하고 있지 않는지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소유와 탐욕에 이끌려서 기복신앙, 배금주의, 권위주의, 성장주의, 교파 이기주의, 담임자 세습, 반공 이데올로기, 친미 사대주의 등의 ‘다른 신들’을 섬기고 있지 않는지 반성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는 참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섬겨야 합니다.

3. 결언

이제 말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빌 1:27)고 권면하였습니다. 그리하려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예수의 마음은 케노시스 영성, 곧 ‘자기 비움’과 ‘자기 낮춤’ 그리고 ‘순종’의 태도입니다. 무소유와 겸손과 순종은 예수의 길이며 또한 우리가 걸어야 할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세주라는 고백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예수의 희생에 기반한 속죄론의 본의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주체적으로 참여하라는 요청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고난에 동참해야 합니다. 예수가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사실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사영리’식 교리는 인간의 주체성과 역사의식 그리고 책임감을 소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인간이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할 일이 없습니다. 그저 보혈의 공로를 되뇌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다면,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3)는 바울 선생님의 말씀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빌립보서의 교훈은 ‘예수의 길’을 제시합니다. 신앙은 주술이나 마력이 아닙니다. 신앙이란 주체적 진리를 수용하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6-8절은 메시아 예수의 마음인 동시에 성도가 본받아야 할 성품입니다. ‘그리스도의 믿음’은 자주적 신앙과 책임의식을 일깨웁니다. 신앙생활이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내면화하여, 주체적이고 책임적 인간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그리스도교는 진정한 휴머니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으로 부르셨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우리 안에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시기 바랍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고후 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