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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내미는 두 번째 유럽 여행을 다녀 올 꿈에 잔뜩 부풀어 있었다. 2년 전 유럽 십여 개 국을
돌면서 수박 겉핥기 식으로 건축물을 답사했었다는데, 이 번에는 스위스,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4개 국의
유명한 건축물을 투어 전용버스로 답사하는 여행이라 했다. 모녀가 짐을 싸기 며칠 전의 일이다.
여행비 외에도 드는 소소한 경비를 마련해 주어야 하는데,
아내는 이미 자기 주머니를 톡톡 털어 주었기 때문에 어쩌냐고 두런거리는 소리를 애써 못 들은 척
했었다. 생각나는 게 내 비자금이었지만, 아무 말도 못하고 더 상황을 지켜 보기로 했다.
그런데 서랍 속에 잠자고 있는 지갑에서 본 듯한 유로화
한 장이 떠올랐다. 부리나케 광이나 창고용, 또는 컴퓨터실로 쓰는 문간 구석방으로 뛰어들어갔다. 주인이 놓고 간
책상의 서랍에다 지갑이나 잡다한 신용카드, 시효가 지난 롯또 복권 몇 장, 주사위나 윷, 화투 등 허접한
놀잇감들을 넣어 두었다. 평소에 선물로 받은 지갑들에는 영수증이나 잡다한 카드들, 이따금씩
현금이나 복권 등 돈될 만한 것들을 몰래 넣어 두기도 한다. 작년에 유럽 여행을
다녀온 친지에게서 기념으로 그 지갑을 받았을 때, 그대로 둔 유로화. 대개 지갑은 하나만 있으면 몇 십년을 두고두고
쓰는 데다 정이 든 것을 바꾸기 싫어 내게 들어온 선물용 지갑은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다. 기분 내키면 가까운 사람들에게 선물로
쥐어 주기도 하고, 지갑을 분실했을 경우에 꺼내 쓰는 예비용이다.
나는 유로화 가치를 모른다. 통상적으로 지갑 선물을 할 때는
돈이 들어 오기를 비는 뜻으로 빈 지갑보다는 동전이나 잔돈을 넣어 보내 주는 관례는 알고 있었다. 그
유로화도 장식용이거나 체면치레로 넣어 둔 변변치 않은 푼돈이려니 하고 액수를 주의 깊게 안
보았다. 얼핏 5자만 보고는 그것이 5 유로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500 유로 아니던가?
"어라? 5백 유로네! 이게 얼마쯤일까?"
궁금해서 아내에게 보여주려고
거실로 나갔다.
"여보 지갑에 있던 돈이 5백 유로네?"
"정말요? 어디 좀 봐요."
아내가 낚아채 읽어 보더니 팔짝 뛰기
시작했다.
"어멋! 맞네요. 달러가 우리 돈으로 천원 미만이고, 유로는 약 1300원 쯤
되요. 육칠십 만원을 족히 될 거예요. 이 돈이면 딸 여행 경비에 크게 보탬 되겠어요."
"아니, 육십만원?"
"그럼요. 재작년에 환전해 보았잖아요. 팔십만 원
바꿀 때 6백 유로쯤 됐거든요. 하나님이 어려운 살림을 아시고 때마침 정말 큰 선물을 주시네요. 고마워요.
여보."
"으흠"
꼬불쳐 둔 비상금을 헐지 않아도 되니 정말 잘 됐다구나 싶었다.
어깨에 힘주고 기분이 부풀어서 마을버스로 백운역에서 막 내릴 참이었다. 띵동~! 핸드폰 문자가
가볍게 울렸다. 내리자마자 열어 보니...
"꿈 깨요. 아들에게
보이니 복사본 같대요."
정말이지 좋다가 말았다. 어째서 그런지 궁금해서 전화를 걸었다. 인터넷 검색 결과, 차라리 위조
지폐라면 실액보다 더 높은 가치가 있지만, 사본이라 휴지 조각보다 못 하단다.
'허긴 내게 그렇게 큰 돈을 줄 사람이 아니었지!"
갑자기 비행기에서 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얼씨구나 해서 은행에서 돈을
바꿔 달라고 했다면, 얼마나 우사를 당할 뻔 했을까? 그 순간 비로소 그 유로화가 우리
돈보다 유난히 커 보인데다, 사선으로 'SPECIMEN'이란 영문자가 있는 게 떠올랐다. 게다가 아내가 말했다.
"여보, 뒷면에 아무 인쇄도 없으니 가짜가 맞네요."
그제서야 복사본이 맞구나 싶었다. 그렇지만 몇십 분
동안 만큼은 누구보다 행복했다. 그 작은 돈벼락에 우리 부부는 얼마나 감격해하고 황홀하고 하나님께 감사했던가?
이튿날 하는 수 없이 안방 옷장 깊숙이 모셔 둔 비자금을
아내 몰래 꺼내 들고 왔다. 가진 자들에게는 껌값에 불과한 소액이겠지만, 나로서는 반 년동안 용돈을 안 쓰고
모은 보물이기도 했다. 그 아까운 것을 졸지에 고스란히 아내에게 바치다니, 눈물이 핑 돌 것 같았다. 끙... 애써 표정을 바꾸고
의아하게 쳐다보는 아내의 손에다 그것을 건네 주었다.
"미안해. 그 유로화 대신 내 비자금을
줄게. 여행비에 보태 딸내미에게 줘.'
사랑스런 딸이 유럽
여행을 즐기며 행복해할 것을 생각하니 좀은 덜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정말 난 돈 복 없는 놈이다. 한 번도 꼬불쳐
둔 돈을 나를 위해 써 본 적이 없었다. 그 징크스를 이 번에 깨뜨리지 못하고 말다니. 쩝...
2006-07-12
화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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