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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의 교인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
최재석  |  jschoi@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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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년 06월 30일 (목) 13:01:01
최종편집 : 2016년 07월 04일 (월) 21:48:11 [조회수 : 126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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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기독교 신자들 중에 성경의 글자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목회자가 85%, 평신도는 92%에 달한다고 한다. 그들은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 한 분이라고 그리고 성경에는 인간의 의지나 생각은 전혀 가미되어 있지 않다고 믿는다. 이 사람들은 축자영감설 혹은 성경무오설을 지지한다. 아직도 그들이 그런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은 전근대적인 성경지식을 따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국에서 일어난 근본주의와 창조과학이 이러한 성경지식을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 성경의 저자는 여러 사람으로 보인다. 신약의 서신서들을 보면 그 편지들을 쓴 바울, 베드로, 요한, 야고보 등은 그들이 그 편지를 썼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당시 어떤 교회는 믿음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고, 어떤 교회는 분파가 심하고, 어떤 교회는 이단에 미혹되고, 어떤 교회는 박해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서신서의 저자들은 각 교회가 처한 상황에 따라서 자기 나름의 가르침을 그들의 편지에서 제시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은 반모섬에 유배되어 있는 요한이 박해받고 있는 교회를 격려하기 위해서 기록한 것이다.

서신서뿐 아니라 구약과 복음서들 역시 여러 저자들이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누가복음의 서두에서 보면 많은 사람이 전승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들었는데 누가도 그 사람들처럼 누가복음을 저술하려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도 그렇게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구약의 예언서의 이름이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호세아 등 선지자들의 이름을 따라서 불리는 데서도 각 예언자가 자기 목소리로 하나님의 뜻을 전한 것을 알 수 있다. 특별히 열왕기와 역대기는 모두 다윗과 솔로몬 그리고 남북으로 갈라진 후의 유대와 이스라엘을 다루고 있는데, 이 두 가지 기록의 내용이 많이 다른 것을 보면 그 저자가 다른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는 한국의 많은 교인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성경의 저자가 여러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그 저자들은 나름의 주견을 가지고 자기들이 처한 상황에 맞는 신앙적 메시지를 기록한 저자들이라는 점을 드러내고자 한다.


복음서의 저자들

우리는 보통 복음서들을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으로 나눈다. 공관복음이라는 말은 관점이 비슷한 복음서라는 말인데,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요한복음에 비해서 관점이 비슷해 보인다. 공관복음서들은 요한복음과 많이 다르다. 비슷해 보이는 공관복음서들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서로 다른 면이 있다. 공관복음서들이 아주 똑 같다면 그 세 복음서가 모두 성경에 포함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네 복음서가 서로 다른 것은 그 복음서들을 기록한 사람들이 다르기 때문이다.

성경의 글자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이고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라고 보는 사람들은 복음서들의 저자가 다르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네 개의 복음서가 그렇게 다른 것은 한 저자가 예수님의 삶을 각각 다른 각도에서 조명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왜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관점이 비슷하고 공관복음에 비해서 요한복음만 공관복음서들과 다른가에 대한 설득력 있는 답을 제시하기 어려울 것이다. 성경학자들은 마가복음이 가장 먼저 기록되었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저자는 마가복음을 참고하기도 하고 마가복음 외에 다른 자료들을 참고했기 때문에 세 복음서에는 같은 내용도 많이 나오고 서로 다른 내용도 나온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요한복음의 저자는 공관복음서 저자들이 참고한 자료와는 아주 다른 자료들을 자기 나름의 관점에서 모은 것이라고 본다.

성경의 저자가 하나라고 믿는 사람들은 여기서 자료들을 모은 것이라는 말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요한복음 21장에서는 예수님의 제자 요한이 요한복음의 내용을 증언하기도 하고 기록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21:25)는 구절에서는 분명히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일 가운데서 저자가 취사선택해서 기록했다는 알려준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 자체가 누가복음과 마찬가지로 요한복음도 전승된 자료들을 모아서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증언해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자료를 선택했느냐가 아니고 복음서들의 저자가 하나냐 여럿이냐의 문제다.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요한복음에서는 요한복음의 저자가 예수님의 제자 요한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누가복음에서도 그 복음서의 저자는 자기가 누가복음을 썼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누가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복음사역에 관해서 기록했는데, 자기도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자료들을 “근원부터 자세히” 살펴서 차례대로 기록한다고 말하고 있다(1:2-3). 요한복음과 누가복음의 기록에 따르면 요한복음의 저자는 요한이고 누가복음의 저자는 누가다. 그렇다면 마태복음의 저자는 마태고 마가복음의 저자는 마가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복음서의 저자들은 자기들이 목격한 것, 다른 사람들에게 들은 것, 혹은 전해 내려오는 자료들을 자기 나름대로 정리하여 기록했다. 그래서 공관복음서도 제 각각 다르고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은 아주 다르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신 후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 마태복음에 기록된 둘째와 셋째 시험이 누가복음에서는 셋째와 둘째로 그 순서가 바뀌어 있다. 그 순서가 바뀐 것이야 대수로울 것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오천명을 먹인 기적을 행한 후 배를 타고 건너간 곳이 마태와 마가복음에서는 게네사렛인데, 요한복음에서는 가버나움으로 되어 있다. 이런 엇갈리는 기록은 기록자가 다르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는 착오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무심코 성경을 읽었지만, 성경에는 이러한 유의 엇갈리는 기록이 수없이 많다. 공관복음 안에서도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의 족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데,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족보가 나온다. 그 족보에 대한 이야기도 마태복음의 내용과 누가복음의 내용이 다르다. 그리고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군인들이 예수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조롱하지만, 마태복음에서는 홍포를 입히고 조롱한다. 인간 예수를 중시하는 공관복음에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가 나오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중시하는 요한복음에는 겟세마네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공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직전에 단 한 번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최소한 세 번 올라가신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새벽에 무덤을 찾아가는 여인들이 네 복음서에서 각각 다르게 언급되어 있다.


열왕기와 역대기의 기록자들

구약에는 39권의 책이 있지만, 여기서는 열왕기와 역대기에 나오는 솔로몬의 기록에 대해서만 생각해 보려고 한다. 이 두 책에 나오는 솔로몬에 대한 기록의 차이를 살펴서 한 기록자가 관점을 달리 해서 두 책을 기록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 두 기록자가 솔로몬에 대해서 기록했다는 점을 밝히고자 한다.

열왕기상 1장에서 솔로몬이 왕이 되고 11장에서는 죽는다. 역대기에서는 역대상 마지막에서 솔로몬이 왕위에 오르고 역대하 9장에서 죽는다. 솔로몬의 일대기를 기록한 열왕기의 저자와 역대기의 저자는 공관복음의 저자들 이상으로 자료들을 공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모두 솔로몬을 지혜의 왕으로, 일천번제를 드린 투철한 믿음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복을 받아 부귀영화를 누린 왕으로,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받아 성전을 건축한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다. 마지막 부분에 가면 스바의 여왕이 솔로몬을 찾아가서 그의 지혜와 궁의 화려함에 놀라는 에피소드를 삽입하는가 하면 저자가 직접 솔로몬의 재산과 지혜를 요약하기도 한다.

그런데 열왕기 저자와 역대기 저자가 대체로 같은 내용을 언급하기는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여러 면에서 다르다. 열왕기에서는 솔로몬이 왕위에 오른 후에도 다윗이 솔로몬에게 조언하지만, 역대기에서는 솔로몬이 왕위에 오른 후에 다윗은 자취를 감춘다. 열왕기에는 솔로몬의 재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역대기에는 재판 장면이 없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동일한 저자가 강조점을 달리해서 기록했다고 볼 만하다.

그러나 우리는 솔로몬에 관한 두 책의 기록에서 이보다 더 큰 차이를 발견한다. 열왕기에서는 솔로몬의 장점 외에도 그의 실수와 불신앙을 언급하고 있는데, 역대기에서는 그의 장점만을 기록하고 있다. 열왕기상 11장에서 저자는 솔로몬이 여호와의 명을 어기고 이방 여인들을 처첩으로 맞아들여서 후궁이 칠백 명이고 첩이 삼백 명에 이르렀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 이방 여인들과 함께 솔로몬의 궁에 이방신들이 들어오고 심지어 이방신을 위한 산당을 짓기도 했다. 그 결과 여호와께서 진노하셔서 그의 아들 대에 가서 솔로몬의 나라가 남북으로 나뉘는 불행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런데 역대기에서는 이러한 솔로몬의 불신앙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역대기의 저자에 따르면 솔로몬은 끝까지 신실한 신앙인이며 지혜의 왕이고 여호와가 주시는 복을 누린 사람이다.

이것은 솔로몬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이러한 차이를 단순히 같은 저자가 다른 각도에서 기록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열왕기의 저자는 솔로몬의 양면을 모두 기록했지만, 역대기의 저자는 그를 신앙심이 돈독하고 성공한 왕으로만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두 저자의 관점이 아주 다르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는 동일한 저자가 이 두 역사를 기록했다고 말하기가 힘들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조금 더 들여다보면 한 저자가 두 가지를 기록한 것이라고 도저히 말할 수 없는 부분이 나온다. 솔로몬의 죽음에 대한 기록을 참고하라고 말하는 데서는 열왕기와 역대기가 아주 다르다. 열왕기에서는 “솔로몬의 남은 사적과 그의 행한 모든 일과 그의 지혜는 솔로몬의 실록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왕상 11:41)로 되어 있다. 그런데 역대기에서는 “이 외에 솔로몬의 시종 행적은 선지자 나단의 글과 실로 사람 아히야의 예언과 선견자 잇도의 묵시 책 곧 잇도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에 대하여 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대하 9:29)로 되어 있다. 열왕기의 저자는 솔로몬의 실록을 참고하라고 했고 역대기의 저자는 솔로몬의 실록이 아닌 세 가지 자료를 언급하고 있다. 한 사람의 저자가 이렇게 다른 것을 참고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솔로몬의 행적에 대한 참고서적보다 더 큰 차이를 열왕기와 역대기에서 읽을 수 있다. 열왕기와 맥을 같이 하는 사무엘하 11-12장에서는 다윗이 밧세바를 취하는 과정에서 죄를 지은 사실 그리고 솔로몬이 밧세바에게서 나은 다윗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열왕기에서도 솔로몬의 어머니가 밧세바라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왕상 1:11). 그런데 역대기에는 다윗과 밧세바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뿐 아니라 솔로몬은 밧세바의 아들이 아니고 밧수아의 아들로 되어 있다. 그리고 사무엘서에서는 솔로몬이 밧세바의 큰 아들로 나오는데(삼하 12:24), 역대기에서는 밧수아의 넷째 아들로 되어 있다(역상 3:5). 이러한 차이를 보면 열왕기와 역대기의 저자가 다르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이렇게 엇갈리는 것을 모두 기록하셨다고 말한다면, 하나님의 전지전능성을 부인하는 셈이 되고 말 것이다.


마치면서

17세기에 성경을 세심하게 읽은 사람들이 성경에는 서로 엇갈리는 구절들이 많이 나온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리고 19세기에 오면 성서학자들이 성서에는 여러 가지 다른 문체가 섞여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영어로 ‘Style is the man.’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문체는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성경에 여러 가지 문체가 섞여 있다는 것은 여러 사람이 성경을 기록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성경의 사본이 여러 가지라는 사실에서도 성경을 기록한 사람이 여럿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의 사본에는 시내사본, 바티칸사본, 사해사본 등이 있는데, 그 사본들의 내용이 각각 다르다. 사본들의 내용이 다른 것은 그 사본의 기록자가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성경의 저자가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 하나님이 성경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런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그 사본들 가운데서 어느 하나를 바탕으로 해서 번역했거나 사본들을 비교연구해서 정본을 재구성하여 번역한 것이다. 따라서 번역 성경은 어느 사본을 번역했느냐에 따라서 내용이 다르다. 그리고 같은 사본을 번역했다 하더라도 원문의 단어나 문장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번역 성경의 내용이 달라진다. 우리나라 말로 번역된 여러 성경의 내용이 조금씩 다른 것은 그 때문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리말 성경이 나오기까지 먼저 사본을 기록한 사람들의 입김이, 다음에는 사본을 번역한 사람들의 판단이 가해졌다. 따라서 우리말 성경번역이 나오기까지 최소한 두 번에 걸쳐서 사람의 생각이 가미되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정경화 과정에서 취사선택된 것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그 정경화 과정에서 제외된 바룩서, 지혜서, 집회서 등 15권을 외경이라고 부른다. 교회지도자들은 교회가 주장하는 교리에 합당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을 정경에 포함시켰고 그 교리에서 벗어나는 것을 제외했다. 그런데 그 교리는 여러 차례의 공의회를 거쳐서 다듬어졌다. 따라서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는 인간의 판단이 가미되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분명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라거나, 성경의 글자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거나. 성경에는 인간의 생각이 전혀 가미되지 않았다고 믿는데, 그러한 믿음은 재고되어야 한다. 물론 하나님이 성경을 기록하셨다는 생각은 성경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해서 성경의 말씀을 의심 없이 믿게 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그런 조치가 광신자들을 낳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증거들을 외면하고 무지한 아집의 바탕 위에 믿음을 세우는 것은 허상을 좇는 일이고 성경 말씀을 왜곡하는 일이다. 우리는 그러한 오류를 흔히 이단들의 행태에서 발견한다.

인간의 지식은 날로 발전하고 성경에 대한 연구도 그 폭과 깊이가 더해져 왔다. 거기에 따라서 성경 읽기의 방법도 새롭게 개발되어 왔다. 그런데 올바른 것으로 입증된 성경 연구의 결과를 외면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지식이 발전한다는 것을 무시하는 우매한 일이다. 근본주의자들의 문자적 성경 읽기를 문제 삼는 것은 그들이 성경학자들의 연구 결과와 새로운 성경 읽기를 외면하고 옛것에만 매달리기 때문이다. 그것은 창조과학자들이 지질학 연구의 결과를 외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렇게 옛것에 매달리려고 한다면 교회는 현대의 천문학 연구의 결과를 무시하고 계속 지구 중심설을 고집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들이 신앙적 전승과 자료를 참고하거나 자신의 신앙적 체험을 토대로 자기가 처한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기록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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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인구 (218.XXX.XXX.102)
2016-07-02 13:05:38
미신에 빠져있는 한국 기독교와 교회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기독교 신자들 중에 성경의 글자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목회자가 85%, 평신도는 92%에 달한다고 한다.

그들은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 한 분이라고

그리고 성경에는 인간의 의지나 생각은

전혀 가미되어 있지 않다고 믿는다.

이 사람들은 축자영감설 혹은 성경무오설을 지지한다.

아직도 그들이 그런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은

전근대적인 성경지식을 따르기 때문이다."



<기사의 내용중에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 표준새번역>






너희가 어떻게 '우리는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요,

우리는 주님의 율법을 안다' 하고 말할 수가 있느냐?

사실은 서기관들의 거짓된 붓이 율법을 거짓말로 바꾸어 놓았다.




<예레미야 8장 8절, 표준새번역>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언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이 새 언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라, 영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



<고린도후서​ 3장 6절, 표준새번역>







한국기독교는 지독한 미신이다.

머리는 신앙생활에 사용해서는 안되는 물건으로 치부하는

한국기독교는 근원적으로 개독교일 수밖에 없다.

성경도 머리와 생각을 벗어놓고(?) 읽기 때문에

신앙이 지독한 편집증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성경은 하느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라는

구절은 먹사들마다 인용하고 인용하고 또 인용하지만

서기관들의 거짓이 율법을 거짓말로 바꾼다는

예레미야의 날카로운 지적과

사도 바울의 문자(기록물=구약성경)는 사람을 죽인다는

심도있는 증언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저 성경 여기저기 조각조각 기워서

자신도 속이고 남도 망치는 자신들의 허설을

증빙하려고 성경을 뒤적거리기 때문에

각종 이단들과 잡설들이 난무하는 곳이

한국의 기독교판이다!




아느냐?




아니냐?
리플달기
6 2
새누리 (122.XXX.XXX.213)
2016-07-01 14:22:23
하나님도 한 분이요, 성경도 한 권이므로 하나님과 성경의 뜻도 단 한 가지여야 한다. 그런데 지금 기독교 세상은 어떠한가? 천갈래 만갈래로 갈라져서 서로 자기 해석이 맞다며 교단 교파가 얼마나 많이 생겨났는가?

이 상황에서 이런 조사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입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라고 말하면서, 자기도 모른 것을 자기보다 더 모른 교인들을 상대하여 진리를 가르치지 못하고, 오히려 진리를 여론조사로 평가하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행위라고 본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구약 성경을 아는 자가 없었다. 예수님이 오시어 구약 성경을 풀어주시니 제자들이 깨닫고 기록한 것이 신약 성경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천국에 관하여는 비유로 부분적으로만 가르치시고 가셨다. 그 이유는 당시의 제자들의 지식 수준으로는 다 소화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때가 되면 다른 보혜사(당시 보혜사는 예수님)가 와서 비유로 말하지 않고 밝히 알려주는 때가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시고 가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내가 가면 다시 밤이 온다' 고 하셨다. 그 밤은 성경을 깨닫지 못하는 영적 밤을 말한다. 그러므로 예수님 가시고 2천년 동안 기독교 세상은 밤이다. 밤이 아니라고 우기는 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이다.

그러면 예수님 가신 후 언제 다시 낮이 되는가? 예수께서 약속하신대로, 예수님이 다시 오셔야 성경을 깨닫게 되는 낮이 되는 것이다. 신약 성경속에는 다시 오시는 예수님에 대하여 곳곳에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세세히 기록이 되었다. 즉 어느 때에, 무슨 징조가 있은 후에, 어떤 모양으로 오시는지, 오셔서 무슨 일을 하시는지 등을 성경을 깨닫고 보면 소름이 끼칠 정도로 자세히 기록 해 주셨다.
리플달기
3 14
이상길 (1.XXX.XXX.11)
2016-07-01 08:29:53
말씀이 육신이 되어 ...
우리 가운데 거하셨고 (그 말씀을 믿지 않은 자들이 많았다)...
올라 가실 때 보혜사 성령님께서 오실 것을 말씀하셨다...
지금은 성령님께서 기록된 말씀을 근거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계시다...
<신구약 66권 하나님 말씀> 하면서
그걸로 밥벌이하고 부를 쌓아가고 있는 자들은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실까...???
마태 7장 23절에 나와 있다...
(아직도 참교회를 못 만나 외로운 양입니다...)
리플달기
4 9
최재석 (122.XXX.XXX.192)
2016-06-30 20:25:25
'복음서의 기록자들'에 관한 부분 셋째 단락의 다섯째 줄에서 잘못된
것을 발견했습니다. '저자가 취사선택해서 기록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로 정정합니다. 부주의해서 오기가 나온 것을 사과드립니다.
리플달기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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