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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읽으면 안 되는 성서문학으로서의 이적사건들
박경은  |  0117669763@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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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년 06월 22일 (수) 16:03:16
최종편집 : 2016년 06월 25일 (토) 21:51:31 [조회수 : 6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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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이적사건을 역사로 읽으면 안 되는 이유: 신앙을 위한 종교문학이므로

 

마14:34~36(막6:53~56 비교)

 

본문이 전하는 예수가 “어떤 예수이냐”를 파악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마태복음에서 영향을 받은 인상이 너무 크기 때문에 오천 명을 먹이신 식사이적 사건에 대해 어떤 질문도 제기하지 못한 채 그저 어마어마한 수가 식사를 했다는 감탄만 했었습니다.

   그러나 오천 명 식사이적 사건에 나타는 각 수자들은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는 수들이지, 실제적으로 남자만 오천 명이 모인 상황에서 남녀노소 포함하여 대략 25,000명의 수가 한 자리에서 식사를 했다는 이야기를 단순보도하는 것이 아님을 지적했습니다. 그럴 수 있을 만한 지리적, 시대적, 역사적 정황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셨다는 이적사건을 통해 본문이 전하려는 예수가 어떤 예수인지를 파악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럴 때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물 위를 걸은 베드로’에 대한 이야기가 전하려는 내용의 핵심은 무엇이며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은 물 위를 걸으신 예수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왜 서로 다른가에 대해 물음으로서 각 본문을 통해 받는 독특한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1.계획적으로 의도된 문학적 허구

   정치적인 경계선을 지도상에서 보면 갈릴리 호수는 유대 땅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헤롯 안티파스와 헤롯 빌립의 지역을 구분합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당시의 로마황제였던 디베리우스의 이름을 따서  갈릴리 호수 서쪽에 디베랴를 건설하고 수도를 삼아 자기의 지역을 다스렸습니다.

   헤롯 안티파스와 형제간인 헤롯 빌립은 갈릴리 호수의 북쪽으로 40여km 떨어진 곳에 역시 당시의 로마황제였던 디베리우스를 기리기 위해 빌립보 가이사랴를 세워 수도를 삼고 자신의 지역을 다스렸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나오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바로 이곳에서 있었던 것으로 나타납니다(마16:13~16; 막8:27~29).

   하지만 누가복음에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요? 누가복음에는 베드로의 고백이 다른 곳에서 있었고(9:10 벳새다?) 내용도 좀 다르게 나타나고 있습니다(9:20). 마태복음에 나타나는 신앙고백은 마가복음에서도 차이가 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몇 가지의 차이점만 보더라도 각 복음서의 본문들이 주장하고 나타내려는 “예수의 정체”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오천 명을 먹이신 식사이적 사건이 있은 후에 발생한 것으로 읽도록 된 예수의 수상도하 사건은 고사하고 베드로도 역시 물 위를 걸었다는 이야기를 완전히 통째로 빼버린 누가복음의 입장과 마가복음 및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의 서로 다른 입장이 무엇인지를 간단하게 지적해 보겠습니다.

 

2.의도된 마가복음의 문학적 허구성이 전하는 예수

   마가복음에서 오천 명 식사이적 사건은 벳새다 맞은편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읽도록 되어 있으므로(6:45) 헤롯 안티파스가 세운 디베랴를 중심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식사를 마친 후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벳새다로 가게 하셨습니다(6:45). 그러나 그들이 고생하다가 도착한 곳은 게네사렛입니다(6:53).

   마가복음의 본문을 통해 오천 명 식사이적 사건이 갈릴리 호수의 서쪽에 있는 디베랴나 그 지역 어딘가에서 발생했었다고 볼 때 게네사렛은 바다 건너편이 아닙니다. 디베랴에서 갈릴리 호수변을 따라 북쪽으로 가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가복음 본문에 나타나는 문학적 오류나 저자의 지리적 착오에 따르면 예수께서 갈릴리 호수 한 복판에서 고생하는 제자들을 향해 갔다는 내용에 허구성이 있음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마가복음에 의하면 제자들이 탄 배는 갈릴리 호수를 건너 맞은편인 동편이나 혹은 동북편으로 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마가복음이 전하는 예수의 구원활동 사역은 헤롯 안티파스의 관할지인 갈릴리 지역에서 활성화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갈릴리 호수 자체가 제자들의 뱃길을 디베랴 북쪽의 게네사렛으로 몰았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에서 바울이 아시아로 가려고 했으나 성령께서 허락하지 않았다는 말씀이 떠오릅니다(행16:6).

 

3.계획적으로 창조된 마태복음의 문학적 허구 속에 담겨 전해지는 메시지

   한편 이런 문학적 허구성은 마태복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태복음이 마가복음보다 나중에 기록되었다고 보는 복음서들의 관계성에서 볼 때 마태복음이 말하는 오천 명 식사이적 사건이 발생한 장소는 더욱 오리무중입니다. 다만 마태복음 본문에서는 마가복음의 비논리가 조금 개선되었습니다.

   하지만 의도적인 문학적 허구에 의해 강하게 나타나는 주장은 마태복음에서도 매마찬가지 입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식사이적 사건이 끝난 후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건너편으로 가라고 하셨는데(14:22), 그들이 도착한 곳은 게네사렛입니다(34절). 그렇다면 마태복음의 경우 식사이적 사건은 데가볼리 지역에서 발생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을 상대로 데가볼리 지역에서 오천 명 식사이적 사건이 있었다는 것은 문학적 허구가 지나쳐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복음에는 친이방적 성향이 매우 강하게 나타난다는 점을 염두에 둘 때 마태복음 본문이 전하려는 메시지에는 아무런 손상이 가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뒤에 이어져 나타나는 정결례 관련 논쟁과 이방여인의 귀신 들린 딸을 치유하는 내용 및 이방인들을 상대로 벌어졌던 사천 명 식사이적 사건과 어우러져 본문의 구체적인 성향이 어느 쪽으로 가고 있는지를 짐작하게 됩니다. 더구나 마가복음에서 발생하지 않는 ‘바다 한 복판’ 이미지가 그대로 살아남는 장점이 있기 때문에 마태복음의 본문에서만 만날 수 있는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만날 수 있게 됩니다.

   첫째로, 당시에 바다 한복판이 가졌던 이미지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헬레니즘 문화권 속에서 바다의 신은 포세이돈입니다. 그러므로 헬레니즘의 관점을 갖고 볼 때 바다 한복판을 걸으신 예수 이미지는 포세이돈의 머리를 짓밟은 행동입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이 전하는 말씀은 명백해집니다.

   마태복음이 전하는 예수.... 그 분은 헬레니즘의 그리스-로마신화에서 말하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을 짓밟아 죽음의 기운을 평정한 분입니다.

 

   다른 하나는 유대 관점에서 볼 때 바다는 죽음의 세력인 사탄을 상징합니다. 그것도 밤 사경에 만난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세력입니다. 그러므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마태복음 저자가 유대인들을 향해 전하는 예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밤 사경은 새벽 3시~6시입니다. 밤이 지나고 새벽이 가까운 시간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죽음의 세력인 사탄을 짓밟으면서 동터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도래시키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갈릴리 바다 한 복판을 걸어서 자기들에게 오신 예수를 향해 그들은 절하면서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14:33).

 

   둘째로, 마태복음에만 베드로도 물 위를 걸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통해 전하려는 마태복음 본문의 타오르는 외침은 간단합니다. 부활하신 예수 없이는.... 아무리 선택받은 제자들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은 죽음의 세력에 휩싸이기 쉽습니다. 실제로 마태복음 교회공동체는 유대인들로부터 박해받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유대 팔레스틴을 적시고 있는 헬레니즘의 영향 속에서 유대교 자체도 휘청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와 함께 동행 할 때에는 포세이돈이고 죽음의 사탄이고 뭐고 가릴 것 없이 ‘나도 밟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처럼 부활하신 예수만 바라보고 ‘나도 걸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며 담대히 나아갈 수만 있다면 예수 따르미들은 누구든지 자신의 삶을 휩싸고 있는 죽음의 세력을 발로 짓밟을 수 있습니다. 더구나 베드로처럼 지도자급에 있는 사람들은 앞장서서 포세이돈을 밟거나 죽음의 세력인 사탄의 머리를 내밟아버리는 모습을 담대한 믿음으로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부활하신 주만 바라보는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저자가 본문을 기록할 당시에 지상 예수는 안 계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고백하는 교회공동체만 지구 위에 덩그러니 놓였던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4.누가복음의 편집의도를 통해 보는 예수

   누가복음은 오천 명 식사이적 사건 뒤에 물 위를 걸으신 예수의 이야기를 생략하고 곧 바로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내용을 이어놓았습니다(9:18~21). 누가복음에 따르면 오천 명을 먹이신 식사이적은 벳새다에서 있었던 것으로 읽게 됩니다(9:10). 그렇다면 다른 복음서들과는 달리 누가복음의 식사이적 사건은 전적으로 이방지역인 헤롯 빌립의 지역에서 이 엄청난 사건이 있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지도에서 확인해 보면 어렵지 않게 벳새다는 헤롯빌립의 영역임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주목하게 되는 부분이 두개가 있습니다.

   먼저, 누가복음은 이미 유대 팔레스틴을 상대하는 선교활동을 접은 상태라는 점입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식사이적 사건이 유대인들을 상대로 하는 것임을 몰랐을 리가 없을 텐데 누가복음은 그 이적이 헤롯 빌립의 통할 지역인 갈릴리 호수의 동북편 벳새다에서 발생했다고 생각하도록 조치해 해놓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물 위를 걸으신 예수의 수상도하 사건이 생략된 대신에 ‘기도하시는 예수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보게 됩니다(9:18). 위에서 언급한 대로 헬레니즘의 그리스-로마신화에 따르면 바다의 신은 포세이돈입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바다를 밟는 예수의 정복적 인상을 강조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지중해의 해전을 통해 지중해를 로마제국의 호수로 삼고 있는 로마황제에게 도전장을 내미는 인상을 갖게 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정복자적 인상은 선교에 도움이 되지 않는 요소로 기능할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은 ‘기도하시는 예수’를 적극적으로 보도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누가복음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기도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적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예수의 정체성 문제는 누가복음이 전하는 교훈에서 도무지 지나칠 수 없는 중대사안이라는 점을 잘 알 수 있습니다.

 

5. 요한복음이 전하는 물 위를 걸으신 예수의 정체

   요한복음은 오천 명 식사이적 사건이 있은 후 제자들은 예수 없이 가버나움으로 향했다고 썼습니다(6:17). 그러나 그들은 곧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는데 예수를 영접함과 동시에 곧 그들이 가려던 가버나움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22절). 물 위를 걸으신 예수의 이미지는 위에서 언급한 그대로 입니다.

   요한복음의 본문에 따르면 예수를 영접함과 동시에 도착지에 곧 도착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죽음의 세력이 기를 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바다는 생명을 위협하지만 예수께서는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이를 증언하기 위해 요한복음은 즉시.... 생명의 떡에 관한 말씀을 뒤에 바로 이어놓았습니다.

 

6.복음서들이 전하는 공통 메시지와 이적사건에 대한 지성적 이해

   이쯤에서 복음서들이 전하는 예수에 관한 증언의 공통점을 정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다를 밟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지만 바다를 밟는 일은 사실, 구약에서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욥9:8; 합3:15). 그렇기 때문에 복음서들이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못했지만......예수는 하나님이십니다. 물론 요한복음에서는 대놓고 예수를 향해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요20:28).

   이렇기 때문에 이적사건은 역사보도가 아니라 복음서 저자들이 본문내용을 통해 전하고 싶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상적으로 전하기 위해 사용한 창조적인 문학적 도구임을 알고 거기서 말씀을 발견하도록 수고해야 합니다. “성서는 말씀”이라고 입으로는 말하면서도 성서본문을 통해 말씀을 찾으려고 하기보다는 논리적으로 설명도 잘 되지 않는 문자적 성서영감론에 얽매여 방황하며 헤매는 일에서 벗어나길 바랍니다. 그것은 마치 베드로 ‘주는 그리스도....’라고 입으로 고백을 했으나 사고체계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즉시 ‘사탄아 내 뒤로....’ 소리를 들은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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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구 (112.184.235.165)
2016-06-23 19:46:15
좋은 글 감사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문학으로 본다면 역사적 예수는 부인하는 것인지를 묻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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