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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은사와 신학[1]...
사두환  |  kbecc@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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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6년 07월 11일 (화) 00:00:00 [조회수 :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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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교단신학은 성경 해석을 일목요연한 체계의 논리로 요약한 내용들이다.
이러한 내용을 좀더 압축하면 신학의 전문성을 요하게 되고 여기서 좀더 압축하면 신학자 수준은 요하게 된다.
그 이상 압축하면 고도의 신학 전문지식과 주석가 수준 정도를 요할 것이다.
그 이상의 압축은 더 이상 압축 불가의 입장을 표명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교단신학의 한계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더 압축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압축의 한계란 설명을 최대한으로 줄이고 줄인 것으로 더 이상 줄이면 설명이 제대로 되어지지 않음 앞에 당도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한계에서 마지막으로 한번 더 압축이 가능한 것이다.
그 압축의 답은 기록된 성경의 액면 그대로의 제출이다.
이 제출이야말로 완벽한 해석임과 동시에 여타한 군살이 붙지 아니한 최고의 해석으로서 이 해석에는 더 이상 더할 수도 그렇다고 뺄 수도 없는 완전표준 해석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성경은 그 이해의 측면에서 높은 지식과 학문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학문이 없는 베드로와 같은 어부일지라도 그 심령이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하기만 하면 충분히 이해 가능한 성경인 것이다.
이는 어린아이 같이 순전한 거듭난 영을 요구하는 것이며 그 영에게 주어진 글인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이르신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라는 것을 바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요6:63)

동시에 주님이 이르신 이 말은 주님의 자의적인 말이 아니라 영으로 존재하시는 성부께서 친히 명령하신 그 명령을 액면 그대로 전달한 것이 주님의 말씀인 것이다.(요12:49)
따라서 주의 이른 모든 말씀에 근본은 영인 것이며, 그 영의 표현 체가 말씀으로 전환된 것이다.
이러하신 성부는 高明 그 자체이시므로 더 없는 밝음이 그에게 있으므로 성부는 무한한 빛으로 존재하시는 것이다.(요1:1-4)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통하여 바로 이 빛이 거듭난 영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우리 역시 高明해지기 시작하기 때문에 高明한 자가 되어 高明한 일을 도모하는 것이며 항상 이런 高明한 위치에 서 있게 되는 것이다.(사32:8)
즉 신령으로 시작하여 신령한 일로 끝맺음을 한다는 것이다.
이 신령의 최종적인 일은 부활체로 그 모든 일이 끝이 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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