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심이 정말로 천심인가

“국민 여러분, 이 늙은이가 큰 죄를 지었습니다.”

이는 필자와 같은 필부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대통령이라든가 국회의원, 아니면 청와대 보좌관이나 장차관처럼 어떤 면에서가 됐건 국가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럼에도 이 같은 제목의 글을 쓰게 된 것은 필자 나름의 까닭이 있어서이다.

2014년 4월, 그러니까 꼭 2년 전, 세월호 참사가 나고 그에 대한 책임 있는 자들을 향한 국민들의 분노가 들끓어 항의의 물결이 거세던 때였다. 한 거물급 정치인의 아들이 그들 국민을 향해 SNS를 통해 “국민이 미개하니까 국가도 미개한 것”이라는 발언을 해 물의를 빚은 일이 있다.

‘민심이 천심’이라는 말이 있는데, 필자는 그런 게 아니라고 생각해 왔다. 선거의 결과들을 보면 더욱 그랬다. 지키지도 못할 공약을 남발하고 가면을 써 거짓으로 찌든 얼굴을 가리는 데에 능한 자들이 당선되는 것을 보고도 그것을 천심이 반영된 민심이 드러난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었다.

가장 좋은 사회, 또는 나라는 ‘민심이 천심’이 되고, ‘천심이 민심’이 될 때 이루어진다. 그러나 사람들은 갈수록 천심을 거슬러 악해져 가고 있다. 물질만능이라는 사고가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좌우하고, 맘몬의 위력은 교회를 파괴해 가고 있다. 그러다 보니 ‘민심’과 ‘천심’의 거리는 멀어져 가고만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꼭 자신의 이익만을 쫓는 것도 아니다. 서민들이 자기들의 얄팍한 지갑에서 돈을 빼내어 부자들의 금고를 채우게 하도록 하는 정치인이나 그 집단(정당)에게 표를 주는 것이 무엇보다도 그 증거이다. 부자라면 자기의 이익을 위해 그리하는 것이니 나무랄 수 없는 일이라 할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그리하는 것을 아둔한 필자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다.

이해를 할 수 없는 것은 크리스천들에게도 없지 않다. 예수께서는 과부나 창녀와 같은 사회적 약자의 편이셨다. 옆에서 그들의 힘이 되어 주기를 주저하지 않으셨다. 옳은 일에는 칭찬하시고 그렇지 못한 일에는 꾸중을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분께서 하신 대로 행해야 한다. 나라나 지자체의 일꾼을 뽑는 데에도 같은 마음이 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은 면이 많은 것 같다. 우선 선거에 임하는 자세만 봐도 그렇다. 가난한 약자보다 부자와 힘 있는 사람들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하고, 거짓과 술수에 능한 사람에게 표를 주는 사람이 많다.

이번 4‧13 총선을 앞둔 선거판도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여당의 원내대표가 대통령의 미움을 사 그 자리에서 찍혀난 사건의 전말을 모르는 국민은 거의 없다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그 당의 공천관리위원장은 그의 공천을 미루고 또 미루기를 끝까지 하는 비열함의 극치를 보여 주었다. 공천해 주기가 싫거든 탈락시키면 될 것을 가지고 그랬다가는 여론의 몰매를 맞을 것 같아 당사자에게 거취를 정하라는 식의 소아병적인 자세를 취해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그런가 하면 당대표는 당인과 당대표 직인을 가지고 부산으로 내려가고 원내대표는 그를 쫓아가는 촌극을 연출하기도 했다. 그런데 당은 그 사건을 패러디한 선거 홍보동영상까지 만들어 활용하는 두꺼운 얼굴까지 보였다. “무성이 옥새 들고 나르샤” “원유철의 도장 찾아 삼 만리”라는 것이었다. 사건을 희화(戱化)하여 그 심각성을 약화시키려는 의도여서였겠지만, 반성과 사과가 선행되지 않는 한 그 같은 행위는 국민을 바보로 여기는 처사에 불과하게 된다.

선거판이 이렇게 돌아가고 있는데도, 여론조사로 나타난 그 당이나 그 당의 공천을 받은 후보에 대한 지지도는 대단했다. 의석의 과반을 훨씬 상회하리라는 게 중론이었고, 180석까지도 가능하다고 점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 당은 과반에도 못 미칠 수 있다는 우려를 보이기도 했으나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사람은 없었다. 보수층 결집을 위한 엄살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도 없었다.

비겁한 자들은 반성이나 사과대신 남을 탓한다

이 같은 현상에 필자는 “국민이 미개”하다는 건 입 밖으로 낼 수조차 없는 말이고, 국민의 의식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투표가 끝나고 개표를 해 본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새누리당이 122석, 더불어민주당이 123석, 국민의 당이 38석, 정의당이 6석, 무소속이 11석을 차지한 것이다. 그것도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의 비례대표 득표율을 보면 너무도 놀라워서 입이 다 벌어질 지경이었다. 25.54 : 26.74로 더불어민주당을 국민의당이 앞선 것이다. 그런데 이는 지지하는 후보와 비례대표 정당이 다른 이른바 '교차투표'가 전체 253개 선거구 가운데 절반이 넘는 138곳에서 이뤄진 결과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를 가리켜 혹자는 유권자들이 ‘산수’를 ‘수학’으로 푼 결과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절로 수긍이 된다.

이에 필자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국민의 의식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필자 자신이 어리석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국민 여러분, 이 늙은이가 큰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사죄를 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런데 사죄를 해야 할 사람은 필자만이 아니지 않은가 한다. 이번 총선에서 예상을 뒤엎은 결과를 부른 일등공신은 누가 뭐래도 박근혜 대통령일 것이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여당의 원내대표를 찍어낸 것이 누구인가. 공천에서 그를 배제하기 위해 야비한 행태를 보인 것만 해도 당의 공천관리위원장이 주도했지만, 그걸 자의에 의한 것이라고 믿을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박 대통령은 4‧13총선을 앞두고 창조경제혁신센터 방문이라는 명목을 붙여 격전지를 돌았다. 선거를 불과 5일 앞둔, 그것도 사전투표 첫날에는 충북과 전북을 집권여당의 상징색인 빨간 재킷을 입고 방문하였다. 선거 당일 역시 빨간 재킷을 입고 투표를 하여 선거의 여왕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 주었다. 그런가 하면 국회를 심판해야 한다고도 했다. 말이 국회심판이지 내용을 들여다보면 야당을 심판해달라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종전에는 이런 유의 활동이 유권자들에게 먹혀들어 선거를 유리하게 이끌었다. 그래서 박 대통령에게 붙여진 것이 선거의 여왕이라는 명예로운(?) 칭호이다. 이번 4‧13 총선에도 박 대통령의 활동은 새누리당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보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이 같은 일련의 활동들은 새누리당에 역풍을 안겨 주었고, 야당에는 순풍으로 작용케 하여 여소야대라는 선거결과를 낳는 데에 일등공신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 냈다.

이번 총선의 결과는 정부‧여당에 대한 심판의 색채가 짙다. 그렇다 보니 여당의 당대표가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청와대가 내 놓은 것은 “20대 국회가 민생을 챙기고 국민을 위해 일하는 새로운 국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국민들의 이러한 요구가 나타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라는 간략한 논평뿐이었다. 사과는커녕 어디에도 반성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국민들은 박 대통령이 예정되어 있는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는 어떠한 형태가 됐건 사과를 표명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선거가 끝나고 닷새가 지난 오늘(4월18일) 오전에 열린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하며 "이번 선거의 결과는 국민의 민의가 무엇이었는가를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국민의 민의를 겸허히 받들어서 국정의 최우선 순위를 민생에 두고 사명감으로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과 경제혁신 3개년 개획을 마무리하도록 하는데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자 한다"고만 말했다.

‘민의’에 대해 말은 했으나,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다. 책임이라든가 반성이나 사과에 대한 말도 없다. 말의 전체적인 맥락을 살펴보면 국정을 종전처럼 운영하겠다는 몽니처럼도 들린다. 게나마 “국회와 긴밀하게 협조하겠다”라는 표현이 있긴 하지만, 여소야대의 현실에서 그 말고는 방법이 없으니 하나마나한 말이다.

정신을 못 차리기는 여당도 마찬가지다. 원유철 원내대표를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앉혔다. 친박계의 핵심 인물로 여당 패배의 원인을 제공한 중심에 있던 사람이다. 자기들로서도 할 말은 있겠지만, 표로 심판한 국민들을 무시한 처사다.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당선한 사람들의 복당을 허용하여 원내 제1당의 위치를 되찾겠다는 것도 그렇다. 유권자들이 투표를 통해 만들어 놓은 것을 선거가 끝나기 무섭게 뒤엎겠다니 어안이 다 벙벙해질 일이다.

야당들도 다르지 않다. 세월호 참사 2주기 공식행사에 박근혜 대통령이 그런 것처럼 김종인 더민주당 대표도,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도 참석하지 않았다. 표를 준 국민들의 뜻을 저버린 처사이다. 김종인 대표는 참석치 않은 이유로 ‘정치적 공방’을 들었다 하는데, 세월호에 대한 것은 여와 야의 문제도, 보수와 진보의 문제도 아닌 인간 본연의 문제이다. 그러기에 국가가 공명정대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안철수 대표는 자기네가 원내 제1당이라고 거드름을 떠는데, 지금이 그럴 때인가.

더민주당이 됐건 국민의당이 됐건 이번 선거에서 괄목할만한 성적을 거둔 것은 자기들이 잘한 결과가 아니라는 걸 명심해야 할 것이다. 집권 여당이 바닥까지 곤두박질치다 보니 자기들로서는 더 이상 밑으로 내려갈 수가 없었던 것일 뿐이었다.

여든 야든 레이스는 이번 총선으로 끝난 게 아니다. 피니쉬라인을 스타트라인으로 알고 재출발하지 않으면 민의는 외면에 외면을 거듭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