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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장선생님의 밑구녁
이계선  |  628595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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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년 03월 07일 (월) 13:21:21
최종편집 : 2016년 03월 29일 (화) 12:42:56 [조회수 : 4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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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졸업생들에게 주시는 이사장님의 훈사가 있겠습니다.”

 

등단한 박재필이사장은 헛기침으로 축사를 시작했다.

“에헴 에헴 에에헴... 친애하는 안중중학교 졸업생 여러분! 여러분은 비가오나 눈이오나 3년3개성상을 형설의공을 쌓으면서 아버지같이 자애로우신 유세준교장선생님의 밑구녁아래서 열심히 배우다가 이제 정든학교를 떠나게...”. 순간 웃음이 터졌다.

“호호호호 하하하하...”

울던 여학생들이 떼굴떼굴 굴면서 요절복통을 했다. 그러자 남학생 졸업생 축하객 할것 없이 장내가 웃음바다가 됐다. “교장선생님의 밑구녁”소리에 놀란것이다. 하루도 아니고 3년 동안이나 교장선생님의 밑구녁 밑을 들락거리다가 이제 학교를 떠나게 됐다는 표현에 여학생들이 요절복통을 한것이다. 그야말로 맨붕이요 초토화였다.

“여러분, 이사장님의 표현이 그렇게 아주 틀린건 아닙니다. ‘아버님의 슬하를 떠나서’ 할때 ‘슬하’(膝下)를 순 한국말로 표현하면 ‘밑구녁 아래’ 와 비슷하니까요”

이종구 국어선생이 나서서 유권해석을 했지만 소용없었다. 내가 안중중학교 다닐때 선배졸업식에서 있었던 해프닝이다. 우리학교는 남녀공학이었다.

안중중학교 박재필이사장은 시골방앗간 주인아저씨다. 옛날 시골사람들처럼 욕과 사투리를 섞어 가면서 축사하면 효과가 더 할것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다가 망신을 당한 것이다. 그 일 후로 이사장님은 두번 다시 밑구녁 축사를 안 했다. 대통령 연두교서 같은 근엄한 축사를 했다. 그런데 60년이 지나고 나니 이사장님의 밑구녁 축사가 그리워진다. 내가 다닌 안중중학교의 분위기가 그랬기 때문이다.

평택에서 서쪽 40리 안중에 일제시절 안중소학교가 있었다. 1.2등을 다투던 단짝 유세준 정시우는 서울로 올라가 나란히 경기중에 합격한다. 중학교 졸업이후 두 친구는 헤어져 진로를 달리한다. 유세준은 보성전문에 들어가 유진오의 애제자가 된다. 서울농업전문에 입학한 정시우는 여운형을 따라다니며 웅변과 정치를 배운다. 광복이 되고 여운형이 암살당하자 정시우는 유세준을 찾았다.

“우리 서울에서 거창하게 구국운동할게 아니라 고향으로 내려갑시다. 안중에 중학교를 세우고 교육운동 농촌운동을 하는게 어떻소?”

“좋지”

고향으로 내려온 두친구는 안중에 천막을 치고 “안중고등공민학교”란 간판을 달았다. 둘은 단짝이지만 이복형제처럼 매사가 달랐다. 유세준은 은사 유진오를 닮아 깡마르고 왜소한 체구에 눈빛이 날카로운 학자풍이었다. 키가 큰 정시우는 타고난 웅변과 호방한 성품이 여운형을 빼어 닮은 영웅형이었다.

후에 안중중학교 교장과 교감이 된 두친구는 출근방식도 달랐다. 아산만 바닷가에 사는 유세준교장은 25리 먼길을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길이 사나워 반은 끌고 다녀야 했다. 중간 지점에 사는 나는 교장선생님의 자전거가 나타나면 꽁무니를 따라 달렸다. 언덕배기를 만나면 밀어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걸어서 30분거리에 사는 정시우교감은 걸어 다녀도 좋으련만 꼭 스즈끼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다. 곤색양복에 빨간넥타이, 큰 키에 런던포그를 걸쳐입은 멋쟁이생님. 삐까번쩍 거리는 스즈끼 오토바이를 몰고 안중시내를 질주하면 굉음이 지축을 뒤흔들어놓았다. 그러면 미장원아가씨 다방마담들이 문을 열고 뛰쳐나와 손을 흔들었다. 유세준교장은 조랑말을 타고 다니는 제갈공명이다. 정시우교감은 적토마를 타고 청룡연월도를 휘두르면서 천하를 호령하는 관운장이고. 그런데 두 사람은 평생 동지였다.

안중중학교의 교장과 교감으로 20년을 동행했다. 동기동창이니 교장과 교감을 좀 바꾸자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고등학교가 생겨서 고등학교교장으로 갈때까지 정시우는 언제나 교감이었다.

아무튼 안중고등공민학교 간판을 단 후 두사람은 지방 유지들을 찾아 나섰다. 현덕면 피우치의 이장헌, 검정굴의 이강헌, 포승면 살치미의 이민휘, 석정리의 최석화, 오성면 수촌의 박재필, 안중성공회의 박신부. 국회의원 군수 면장을 지낸 부자들이었다. 유세준의 논리와 정시우의 웅변에 감동한 그들은 열섬 스무섬 많게는 쌀100섬을 내놓고 이사가 되어주었다. 그 돈으로 대지를 마련했다.

“어렵사리 학교부지는 마련했지만 건물은 어림도 없군. 이제부터 그야말로 맨땅에 박치기야. 이사들에게 더 이상 손을 벌리는것도 염치없는 일인데 어떡하지?”

“유형, 내가 학생들을 이끌고 동냥을 다녀보겠소. 그냥 손 놓고 기다릴수야 없지!”

시원시원한 정시우가 일어섰다. 정시우는 고등공민학교 학생 70명 전교생을 모아놓고 교육복음전도(?)훈련을 시켰다. 4명이 한조를 만들어 4개면으로 내보냈다. 예수님이 복음전도로 70문도를 보냈듯이. 정시우의 제자들은 4개면 120부락 3600세대를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교육복음을 전했다.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을 이용했다.

“안중에 중학교가 생기면 서부4개면의 문화가 발전합니다. 서울로 유학가지 않고도 싼값에 공부할수 있습니다. 교실을 짓는데 도와 주십시오”

덥석 쌀 한말을 퍼주는 집이 있는가 하면 겉보리 한되를 내놓기도 했다. 눈물겨운 사연이 이어졌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박재필이사가 중대결심을 한다. 안중정미소를 내놓은 것이다. 안중정미소는 보통방앗간이 아니었다. 정부가 수곡수매한 벼를 찧는 정부미방앗간이었다. 안중에서 제일큰 기업이었다. 전재산을 아낌없이 내놓은것이다.

그러자 현대식건물이 세워지고 중학교인가를 받았다. 신바람이 난 선생님과 학생들은 매일 2시간씩 운동장만들기에 매달렸다. 산비탈을 깎고 메꿔서 운동장을 만든다. 부르도저나 굴착기가 아니라 남녀중학생들의 고사리손이 동원됐다. 삽과 곡갱이를 든채 정시우교감선생님의 명연설을 듣고 있으면 피가 솟아오르면서 사기충천 용기백배가 됐다. 우리는 백두산영봉에 태극기를 꽂는 용사들처럼 삽을 들고 담가를 멘채 작업장으로 달려갔다.

운동장을 다 만들고 기념으로 아까시아동산을 조성했다. 그때 나도 아까시아 한그루를 심었다. 60년이 됐으니 많이 컸을게다. 박재필이사장님의 훈시를 듣고 깔깔웃던 여학생들이 지금도 예쁘겠지? “밑구녁”훈시를 생각하면 몰래 웃음이 나온다.

 

   
▲ 방앗간창고를 숲속의 아카데미로 바꿔놓은 안중중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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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진아이 (119.194.227.85)
2016-03-17 10:37:47
ㅎㅎㅎ
하하하! 웃음이 나오면서 미소짓게 만드네요^^
시골중학교의 풍경이 다가오는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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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
개혁본부 (211.247.49.9)
2016-03-09 14:05:30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참~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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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
일봉성도 (122.101.20.146)
2016-03-08 16:28:22
ㅎㅎㅎ 등촌 목사님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지금이야 학교를 만들땐 부지 매입비용과 건축비용을 모두 정부에서 부담을 했지만
이 시절엔 이렇게 학교를 만들기도 했군요.
안중에 학교 설립을 위해 전 재산을 내놓은 박재필 방앗간 사장님 대단하시군요.
그리고 학교를 만들기 위해 팔을 걷어 부치고 삽과 괭이를 든 선생님과 학생들도
대단하고요.....
선배들의 이런 노력과 봉사가 있었기에 안중중학교라는 좋은 학교가 탄생이 된것이고
후배들이 먼곳까지 통학을 하지 않고 가까운 학교에 갈수가 있있네요.
저도 제 고향에 있는 중학교를 다닐때 개교를 한지 얼마가 되지를 않아서 3년동안
거진 운동장과 학교 울타리 정원에서 살았던것 같습니다.
시골 학교라 가난하여 워낙에 돈이 없다보니 외부에 공사를 맡기지 못하고 학생들을 동원하여
운동장과 교내 정원을 우리들이 만들다 시피 했습니다.
(이 시절에 개교된 대부분의 학교가 이런식으로 학교을 만들었을것 같음!)
주로 수업시간에 일을 했는데 1주일에 체육이 3시간 농업이 5시간 정도를 한것같습니다.
그 시간이 되면 남학생들은 여지없이 삽과 괭이를 들고 운동장에 집합을 하는것이고요
여학생들은 체육시간에 호미를 들고 운동장에 집합을 햇었습니다.
먼저 여학생들이 호미를 가지고 운동장에 박혀있는 돌을 캐놓으면 남학생들이 다음 시간에
여학생들이 캐낸 돌을 리역거에 싣고 이동을 해서 버렸고 운동장 높은곳을 괭이와 삽으로
긁어서 다시 리역거에 흑을 퍼담아 낮은곳으로 이동하여 메꾸는 작업입니다.
하도 작업에 많이 동원이 되다보니 어떨때엔 체육과 농업 시간이 지루했었습니다.
어느 한 친구가 작업을 하다말고 그러더군요.
"야 우리 이정도로 일을 하면 어딜가도 다만 몇백원이라도 받고서 일을 할텐데 어떻게 된게
이늠의 학교는 돈을 받기는 커녕 오히려 돈을 내고 일을하니 이게 어떻게 된 노릇이냐"라고
푸념을 하더군요.
그 말에 주의에 있던 친구들 폭소를 하며 이구동성으로 그려 네말이 맞다.
왜 우린 돈을 내고 일을 하는거냐 라면서 푸념아닌 푸념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애써서 만들어놓은 학교인데(개교 46년됨) 지금 제 모교가 폐교를 앞두고 있습니다.
시골지역의 학교라 학생수가 계속 줄어들어 지금은 겨우 50여명 남짓....
지금 통폐합 대상학교로 지정이 될거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우리들의 땀과 노력이 들어간 학교라 그런지 폐고된다는게 너무 안타까운 마음이 큽니다.
동창회 차원에서 폐교를 막아보려고 노력을 하고있는데 마땅한 대책이 없는 상황입니다.
요즘은 모교가 유지되고 있는것만해도 다행이란 생각이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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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3
등촌 (24.193.138.180)
2016-03-08 21:02:27
꼭 안중중학교 이야기 같군요.혹시 발안중학교가 아닌가요? 시골학교운동장만들기가 비슷비슷했군요. 단지 우리에게는 제2의 여운형이 잇어서 교감선생님의 연설을 듣고나면 힘이 절로 솟아나 힘든줄도 몰랏지요. 제 후배목사가 하도 교감선생님의 연설이 그리워 은퇴한 선생님을 교단청년집회 강사로 모셨답니다. 돌아가셨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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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4
일봉성도 (122.101.20.74)
2016-03-09 07:16:58
목사님 댓글을 주셨네요.
저는 발안쪽이 아니고 제 고향은 아산(온양)시 도고면 시골입니다.
현덕면과는 아산만 방조제를 사에에 두고 있는 지역이지요.
발안은 제가 수원에 살때 제 시골고향을 내려갈때 걸처간곳입니다.
같은 글인데도 목사님의 글을 보면 해악과 풍자가 있어서 읽기가 아주 편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재미있게 양념을 잘 처주셔서 그런것 같습니다.
비록 지금은 태평양 건너 뉴욕에 계시지만 바로 옆 현덕면에 계신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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