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학
기독교의 진짜 다섯기둥(1)
박창진  |  5016park@paran.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입력 : 2016년 01월 24일 (일) 09:16:36 [조회수 : 3099]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텔레그램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기독교는 편의상 종교로 분류되지만 삶의 한 부분이 아니라 전 삶에 관한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이에요. 토대는 성경이지요. 성경엔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를 생명, 영생, 구원 등 다양하게 표현해요. 그래서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 구원의 종교라고 하죠. 구원에 관해서는 다섯 개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거든요. 구원 받기 이전의 인간의 상태, 어떤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 하나님께서 구원의 토대로 제시하시는 속죄, 하나님께서 선택된 사람들을 교제로 부르시는 효력 있는 부르심, 마지막으로 영원한 구원에 이르는 길이에요. 다섯 기둥이라고 할 수 있지요.

먼저 구원의 의미를 알아야 해요. 마태복음 8장 22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라는 말씀이 있어요. 앞의 죽음과 뒤의 죽음의 의미가 다르지요. 앞의 죽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를 뜻하고 뒤의 죽음은 이 땅에서의 생명이 끝난 것을 뜻해요. 관계가 단절된 상태에서 이 땅에서의 생명이 끝나면 영원한 멸망이 뒤따르거든요. 구원이란 그 죽음에서 건짐을 받는 것이에요. 그렇기에 성경에서 구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져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에서 건짐을 받는 것인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과 영원한 멸망에서 건짐을 받아 삼위의 하나님과 영원토록 교제하는 거예요. 후자를 영원한 구원이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영생으로 얘기되고 있어요. 성경에서 구원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그 의미는 둘 중의 하나이에요. 문맥에 의해 그 의미가 결정되지요. 정확하게 구분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이제 다섯 기둥에 대해 성경이 말씀하는 바를 알아볼께요.

첫째로 구원 받기 이전의 인간의 상태입니다.

바울 사도는 믿는 사람들에게 편지하면서 그들의 이전 상태가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했어요. 에베소서 2장 1절이에요.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 죽었다고 해요. 예수님의 말씀과 연관시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를 뜻하지요.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면에서 시체라는 거예요.

양심이 있어요. 도덕성을 완전히 상실한 것도 아니에요. 양심에 새겨진 율법의 일들로 인해 도덕에 대한 의식이 있지요. 이성도 작용해요. 이성의 작용을 통해 과학과 기술의 발달 등 인간적으로 볼 때에 유익한 여러 결과들이 도출돼요.

그렇지만 스스로 하나님을 찾지 않아요.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하지요. 하나님과 사랑하지 않죠. 사람 간에도 참된 사랑에서 멀어졌어요. 이기적인 사랑으로 서로 고통을 겪지요. 인간적인 욕심을 따라 자원을 이용하여 피조물들이 황폐해지고요.

하나님께서 찾아오시지 않으면 그 누구도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아요. 나아가지도 못하지요.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고 한 로마서 3장 10절과 같아요. 이를 전적 타락이라고 해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기 이전의 인간의 상태는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어떤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선택이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실 자들을 미리 정하신 거예요. 미리 정하셨기에 예정이지요. 그 당사자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이전에 예정하셨어요.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어떤 사람을 선택하신 거예요.

로마서 8장 29절과 베드로전서 1장 2절에는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선택하셨다는 말씀이 있어요. 예지 예정이지요. 여기에서 안다는 단어는 아담과 하와와 동침한다고 할 때에 동침하다를 가리키거든요. 체험적인 앎이에요. 인격적인 연합과 일치이지요. 사랑한다는 의미예요. 당사자가 믿을 것을 미리 아셨다는 의미는 아니고요. 예지 예정이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그 사람을 사랑하셔서 선택하셨다는 뜻이에요.

구약에는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불러내시는 이야기가 있어요.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신 것이에요. 신명기 7장 7절과 8절에 그들이 선택받은 이유가 나와요. 그들의 수효가 다른 민족보다 많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어요. 곧 이스라엘이 선택 받을 만한 어떤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그냥 조건 없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셨던 것이지요. 신약 시대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신자들도 마찬가지에요. 에베소서 1장 3절과 4절에 기록되어 있어요. 신명기의 내용과 에베소서의 내용은 같은 의미예요. 선택이 구약 시대엔 민족적인 단위로 이루어졌고 신약 시대엔 개인적인 단위로 이루어진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지요. 어느 경우이든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을 만한 그 어떤 조건도 없었어요. 하나님께서 조건 없이 어떤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선택하셨던 거예요.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어요. 선택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 중에서 어떤 사람은 선택되었고 어떤 사람들을 선택되지 못했다는 구분을 하고자 함이 아니라는 거예요. 선택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후에 내가 어떻게 이러한 은혜를 누릴 수 있었는가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기 때문이에요. 선택은 부르심을 받은 이후의 사람들에게만 사용되는 것이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사용해서는 안 된답니다.

선택은 선택 받은 사람에게 어떤 조건이 없이 이루어진 것으로서 무조건적인 선택입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구원의 토대로 제시하시는 속죄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장 16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이지요. 독생자를 세상에게 주셨다고 해요. 여기에서 세상은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있는 그 시점의 유대인들을 가리킬 수 있고 아니면 일반적인 의미의 모든 사람을 뜻할 수도 있어요. 둘 중의 어떤 의미이든지 간에 ‘믿는 자’보다는 넓은 개념이지요. ‘믿는 자’는 택함을 받은 자이고 세상은 그보다 넓은 개념이에요. 독생자는 세상에게 주어졌어요. 여기에는 탄생만이 아니라 피 흘리심 곧 속죄가 포함되어 있거든요.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3장 18절이에요. 여기에서 ‘우리’는 택함 받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에요. 예수님이 대신한 ‘불의한 자’는 택함 받은 사람들만이 아니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에요. 처음에 살핀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들 모두이지요.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는 요한일서 2장 2절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께서 구원의 토대로 제시하신 속죄는 이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에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죽으신 것이지요. 속죄의 범위는 모든 사람이에요. 그리고 그 효력을 누리는 사람들은 ‘믿는 자’예요. 믿는 자는 선택을 받은 사람이지요. 곧 속죄의 효력은 선택 받은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거예요.

이를 보편적 속죄라고 해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셨고 믿는 자가 그 효력을 누린다는 거예요. 보편적 속죄는 보편적 구원과는 전혀 다른 말이에요. 모든 사람들을 위해 피를 흘리셨다는 것이 곧 모든 사람이 구원 얻는다는 뜻은 아니거든요.

넷째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을 교제로 부르시는 효력 있는 부르심입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 곧 죽음에서 살리시는 것이에요.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나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에베소서 2장 8절과 9절이에요. 여기에서 구원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뜻해요. 신자에게는 과거에 이루어진 일이지요. 그래서 신자를 대상으로 이야기되는 이 구원은 언제나 과거형으로 기술되어 있어요. 비신자였던 상태를 전제로 한 문맥에서 이야기되는 구원은 이처럼 관계 회복의 구원이랍니다.

어떤 사람에게 복음이 전해질 때에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있거든요.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어떻게 해서 복음을 받아들일까요? 사도행전 16장 14절에서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셨다”고 하거든요. 그 마음을 열어 복음을 따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당사자가 복음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곧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였던 것이지요.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사도행전 13장 48절이에요. 여기에서 영생은 회복된 관계 안에서 교제를 뜻해요.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 곧 사랑하는 것이 영생이라고 하신 요한복음 17장 3절의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요. 관계 회복의 구원인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사람 곧 예정된 사람 곧 선택된 사람은 그 마음을 열어 복음을 따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다 믿어요. 그 생애 가운데 한 번은요. 태중에서 믿음의 자녀로 태어나거나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 아니면 십자가의 한 편 강도와 같이 죽기 직전에라도요.

참고로 예정과 작정은 같은 말인데요.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속 역사, 어떤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 선택하신 사람을 그 생애 가운데서 효력 있게 부르시는 것에만 사용하고 있답니다. 그 외에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예정과 무관해요. 하나님께서는 그에 대해 별도로 예정하지 않으셨어요.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칙 안에서 당사자들이 선택한 결과인 거죠. 그런데 하나님은 전지하셔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해 아세요. 예정했기에 아시는 것이 아니라 예정하지 않았지만 전지하셔서 아시는 거예요. 사실 전지하시기에 예정하실 이유도 없고요. 신자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당사자의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예요. 이 지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일반 법칙과 인간들의 선택의 결과이고요.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이 믿음이에요. 요한복음 1장 12절의 가르침이지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실존, 그분 앞에서 죄인인 자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하신 대속을 받아들이는 것이에요. 그로 인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가 용서받거든요. 하나님께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이지요. 이를 신학적으로 법정적 칭의라고 해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며 그분의 자녀가 된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출생한 것이에요. 요한복음 3장 3절에서 8절까지의 거듭남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과 연관시켜 생각하면 거듭난 것이지요.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돼요. 성령께서 찾아오시고 함께 하세요. 내주하시지요.

여기에서는 사람 편에서의 행위란 없어요. 시체가 스스로 생명을 취하지 못하고 빛을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것과 같아요. 전적으로 타락한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하셨어요. 성경에서 불신 상태에서의 복음 수용을 행위로 보진 않거든요. 행위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거나 따르지 않는 것을 뜻해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행위가 있었다면 자기 의, 자기 자랑이 가능하겠지요. 그런데 부르심을 받을 만한 행위는 전혀 없답니다. 자랑하지 못하지요.

그 마음을 열어 복음을 따르게 하시는 역사이고 전 생애 가운데 반드시 한 번은 믿기에 불가항력적이에요. 불가항력적인 은혜랍니다.

 

박창진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를 추천하시면 "금주의 좋은 기사" 랭킹에 반영됩니다   추천수 : 255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의견나누기(0개)
 * 100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20000byte)
 * [운영원칙] 욕설, 반말, 인신공격, 저주 등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은 글과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올린 글은 통보 없이 삭제합니다.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20-012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가 35 기사연빌딩 401호 ☎ 02-393-4002(팩스 겸용)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심자득
제호 : 당당뉴스  |  등록번호 : 서울아00390  |  등록연월일 : 2007.7.2  |  발행인 겸 편집인 심자득(010-5246-1339)
Copyright © 2005 당당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dangdang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