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년 12월 26일 (토) 18:36:57 최종편집 : 2015년 12월 29일 (화) 15:17:35 [조회수 : 6565]
▲ 고려민속여관 앞 전체사진 ⓒ사진제공 - 한국여성단체연합
“반갑습네다” 개성에서 만난 남북여성들
솔직히 이번에도 허가가 안 나올 줄 알았다. 방북허가가 났다는 소식에 오히려 얼떨떨할 정도. 월요일 새벽부터 팽목항, 동거차도에 다녀오느라 몸이 지쳐 있었는데 수요일 새벽 다시 길을 떠나게 됐다. 화요일 출근길에 미리 서울서 잘 준비를 해가지고 나와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새벽 2시에 잠이 깨어 다시 잠들지 못했다. 긴장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왜지? 나중에 한 버스에 탄 이들과 이야기 나누며 들어보니 모두가 잠을 설쳤단다. 그러고 보니 모두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설렘’이었다.
새벽 5:50이 집결시간인데 멀리 서귀포에서 오신 분도 시간 전에 모두 모였다. 방송사에서 사진을 찍지만 버스 2대에 나뉘어 타는 이들의 얼굴을 다 보긴 어렵겠다. 그냥 뒤쪽에 서서 사진을 찍는다.
1시간쯤 버스를 달려 임진각에서 몇 명을 마저 태운다. 몇 분 되지도 않아 경의선 남측 출입사무소(CIQ) 도착. 남과 북은 국가가 아니라고 출국 입국이란 용어 대신 출경, 입경을 사용한단다. 출경 수속을 위해 기다리는 시간이 더 길다.
▲ 경의선 남측 출입사무소(CIQ) 도착. 남과 북은 국가가 아니라고 출국 입국이란 용어 대신 출경, 입경을 사용한단다.
▲ 임진각 CIQ 출발장면 ⓒ사진제공 - 한국여성단체연합
이번 행사에 참여하는 33개 여성단체 중 종교여성들은 기독교 3단체뿐이다. 가톨릭측은 장상연합회 수녀님들이 네 분이고, 한국YWCA연합회 대표들이 또 여럿이다. 우리는 NCCK 여성위원회 자격으로 참여한다. 한국여성단체연합(여연)에도 기여민 등 기독여성단체들이 있는데 오늘 참여하는 이들은 대부분 여연 실무자들이다.
방북교육을 미리 받지 못한 이들의 교육 이수를 기다린 후 받아든 건 통일부장관이 발행한 하루짜리 방문증명서. 전에는 이 방문증 받고도 출경 못한 여성이 있었다는데 오늘은 그분도 무사히 통과다.
버스에 다시 탑승해서 북측 분계선을 넘으며 앳된 얼굴의 북한 군인을 보고 손을 흔드니 웃음을 보일락 말락... 버스 안 여성들이 모두 환호성을 지른다. 북측 출입사무소에서는 메르스를 염려하여 모두에게 마스크를 써 달라 요청한다.
보안검색대는 여럿인데 둘만 사용한다. 그중 ‘녀자’용은 하나... 나머지는 다 ‘남자’용이다. 남자들과 함께 여기를 통과해본 분은, 남자들을 모두 통과사킨 후에야 여성들을 통과시켜서, 차별하지 말라도 했더니 북측 사람들이 많이 당황하더라는 경험담을 전한다.
북측 출입사무소를 통과하자마자 개성공단이다. 낯익은 한국 회사이름들... 편의점도 있다. 아직 개성공단을 오가는 이들과 차량들이 있다. 자전거를 힘차게 밟으며 출근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이 활기차다. 여성들은 모두 맵시 있게 차려 입고 굽 높은 부츠를 신은 이들도 많다. 광장에는 출근하는 이들 사이에서 빗자루로 쓰레기를 쓸어내는 이가 있고, 서로 다른 번호를 달고 있는 노선버스들도 몇 대 서 있다.
개성공단을 지날 때 “개성 5km”라고 교통안내판에 쓰여 있었는데 실제로는 개성공단을 지나자마자 이미 개성이다. 나무가 보이지 않는 송악산이 보이고 나지막한 집들이 정겹게 보인다. 여유 있고 검게 그을린 개성 사람들이 거리를 힘차게 걸어 다니고 있다. 집집마다 작은 태양열 전지판을 베란다에 내놓았다. 이제 내놓는 이들도 보인다. 베란다가 없는 집들은 긴 장대를 고정해놓고 태양열 전지판을 따로 세웠다. 자전거 이용과 더불어 자연재생에너지를 적극 활용하는 모습이다. 핵발전으로 빵빵한 전기를 풍족히 누리는 우리네에 비해 얼마나 친환경적인가!
좀 더 시내로 들어가니 주상복합 건물들이다! 3-5층 건물들이 있는데 1층은 주로 상가들이고 그 위쪽은 주택들이다. “고기 남새”를 파는 가게도 있고 “강냉이전분”을 파는 가게도 있다. 음식점들도 있다. 시내 들어가기 전에는 공장들도 여럿 보였다. 몇몇 사람이 공장일 하다 나와 담배를 피우며 낯선 버스를 쳐다본다. (약국도 있고 작은 우체국 역할을 하는 가게도 있고 이런 저런 가게들도 많았는데... 버스 이동 중에는 카메라로 찍을 수 없도록 되어 있어 머리에 담으려 했지만 내 기억은 분명 한계가 있다. 게다가 거리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손 흔드느라 ㅠㅠ)
아파트 단지도 있다. 개성 관광 후 돌아오는 길에는 아파트 단지도 볼 수 있었는데 동마다 앞에 작은 동상들이 하나씩 서 있었다. (동물이었던가? 아이들이었던가? 그랬던 것 같긴 한데... ^^!) 우리로 따지면 신도시? 아파트도 베란다마다 태양열전지판이 나와 있는 건 똑같다.
신기한 건 개성공단을 지나자 개성 시내엔 신호등이 없다. 푸른 제복에 모자를 쓴 이들이 사거리에서 수신호를 하고 있다.
그럴 것이 차도에 차가 없다. 우리를 마중 나왔던 북측 여성대표단의 차량 두 대와 우리측 여성대표단이 탄 버스 2대 이외에, 개성공단 노선버스 몇 대와 길가에 주차돼 있는 차 한두 대 이외에 도로를 달리는 건 오토바이 몇 대뿐이다. 나머지는 두 발로 씩씩하게 걸어가거나 자전거를 타고 울퉁불퉁한 인도를 지나다닌다. 도로는 잘 정비돼 있고 인도는 울퉁불퉁한 곳이 많은데도 자전거는 도로로 내려오지는 않는다. 손 흔드는 남측 버스에 간간히 미소 지으며 (어떤 이들은 씨크한 표정이나 멋쩍은 표정으로) 슬쩍, 자전거 손잡이 잡고 있던 손 하나를 들어 흔들어 주면서도 비틀거리지 않고 곧잘 타고 다닌다. 자전거 바구니에 아이들을 태우고 가는 이들, 포대기로 업고 가는 엄마들도 많다. 그렇게 거리에서 만난 개성 사람들은 활기차면서도 참 여유가 있어 보인다.
옷차림은 우리네 70년대 같은 분위기의 옷을 입고 다니는 이들과 인민복 차림도 없지 않지만 대부분은 세련된 차림이었다. 몇몇은 우리네 명동에 나타나도 전혀 꿀리지 않을 만큼 멋쟁이들이었다.
▲ 마주잡은 북측 여성들의 손끝은 따스했다. 비록 포근했어도 살어름 남아 있는 겨울 날씨에 외투조차 벗은 채 기다려 차가워진 손끝이었지만... 마주친 눈빛은 온전히 반가움...이었다. "반갑습니다" 노래가 울려퍼지던 고려민속려관 입구 마당 ⓒ최소영
▲ 민속여관 안뜰엔 이미 북측 여성대표들 수십 명이 화사한 한복을 곱게 입고 맞아준다
금방 목적지인 ‘민속려관’에 도착한다. 두 대의 버스가 민속여관 뜰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도로를 90도로 가로막고 꽁무니부터 후진해가는 동안, 자전거 타고 가던 이들, 지나가던 이들이 멈춰서 우리를 쳐다본다. 손을 흔드니 마주 흔들어주는 이들도 있고, 겸연쩍어 하며 눈을 피하는 이들도 있다.
민속여관 안뜰엔 이미 북측 여성대표들 수십 명이 화사한 한복을 곱게 입고 손을 흔들고 있다. 벌써부터 가슴이 벅차오른다. ‘야 진짜 왔구나!!! 진짜 만나게 되는구나!!!’ 입구에 들어서며 왼쪽에 기념품상점이 있고, 거기에서도 고운 한복 입은 북측 젊은 여성들이 몇 나와 서서 손을 흔든다. “반갑습니다” 노래가 울려 퍼진다. 흥분한 남측 여성단들이 카메라를 꺼내들었지만 인사가 먼저. 북측 여성대표단이 남측 여성대표단들에게 꽃다발을 전해준다. 수십 명 북측 여성대표들과 일일이 손을 마주잡고 눈을 들여다보며 “반갑습니다” 인사를 건넨다. “잘 오셨습네다” “먼 길 오셨습네다” “반갑습네다”... 때로는 수줍은 미소를 주고받는다. 겨울답지 않게 포근한 날이었지만 개성 외곽 하천(아마도 흐르지 않던 걸로 보아 저수지?)엔 살얼음이 미처 녹지 않았던데, 화사한 한복 차림으로 맞이하기 위해 외투조차 벗고 기다린 이들. 손끝이 차갑다. 따신 손으로 마주잡아주니 서로의 마음이 온전히 오고간다.
어제까지만 해도 날이 궂었단다. 아니 오늘 새벽 대한문 앞에 모일 때만 해도 빗방울이 떨어졌었다. 그런데 하늘은 맑고 화창하다. 기온은 포근하고 바람도 거의 없다. 기후마저도 모두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하다.
바로 모임 장소인 백송식당으로 이동한다. ‘민속려관’은 이런 만남이 있을 때마다 모임 장소로 이용되는 곳이라고 한다. 꽤 너른 대지에 작고 아담한 숙소들이 작은 개천 양쪽에 늘어서 있다.(가뭄으로 개천에는 물이 별로 없었다.) 입구에서 기념품상점 반대쪽(오른쪽)으로 개천을 따라 가다 왼쪽에 백송식당이 있다. 150-200명 정도 들어갈 수 있는 연회장이다. 지금은 1부 만남의 장이 열릴 예정이라 의자가 모두 앞을 향하게 놓여 있다. 무대로 쓰일 앞쪽을 바라보고 왼쪽은 남측 여성들의 자리, 오른쪽은 북측 여성들의 자리다. 정면에는 "민족의 화해와 단합, 평화와 통일을 위한 북남녀성들의 모임"이라는 펼침막이 달려 있다. 들어오며 보이는 곳에는 북측에서 준비한 펼침막이, 입구 윗쪽엔 남측 여성들이 준비한 문구가 적힌 펼침막이 달려 있다. 이미 북측 언론들도 다 와 있다. 언론인들과 남측 버스 운전자들만 남성이고 모두가 여성이다.
북측은 현재 우리보다 30분 빠른 시간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의 표준시간이 일본을 기준으로 하고 있으니 이걸 ‘주체적으로’ 바꾼 모양이다. 북측 시간으로 오전 10시, 드디어 만남의 장을 열기 위해 남측과 북측에서 1명씩의 사회자가 앞에 선다. 양쪽 인사말은 각각 3명씩이다. 양쪽 6.15 여성위원회가 준비한 행사지만, 허가 과정에서 단체별로 초대하는 형식이 된 터라, 양측 모두 대표단체가 셋씩이다. 남측은 김금옥 여연 상임대표·안김정애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상임대표·이광옥 한국천주교여자수도회장상연합회 회장이, 북측은 김명숙 조선민주여성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변규순 615공동선언실천 북측위원회 교육자분과위원회 부위원장·리산옥 조선카톨릭교협회여성회 회장이 인사말을 전했다. 감동적이긴 한데 역시 인사말이 여섯이나 되풀이되는 건 고역이다. 다행히 45분 정도에 끝이 났다. 15분의 휴식시간. 사진 한 장을 찍고 화장실을 다녀오니 벌써 시작한다고 들어오란다. 백송식당 앞 정자에 캔 커피와 생수가 쌓여 있었는데, 고운 한복 입은 젊은 여성이 생글생글 웃으며 서 있었다. (그러고 보면 교회마다 큰 행사에 한복을 입고 안내하게 하는 것도 역시 한민족의 전통인가? 생각하다가 고개를 내젓는다.) 집어들지도 못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중에도 있겠거니...는 오산이었다. 바로 치워버렸다. ㅠㅠ)
▲ 전국여성연대 중창단
▲ 남측 강허달림 공연 ⓒ사진제공 - 한국여성단체연합
문화공연이 시작된다. 오늘 새벽 경의선 남측 출입사무소 한편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리허설을 마친 “전국여성연대 중창단”이 첫 순서다. 모두가 연보라색의 커다란 코사지를 달고 있다. 웬 거지? 싶었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평화의 나무 합창단”에서 빌려온 거란다. “직녀에게”와 “경의선 타고”. 곡 선정도 좋고 노래도 잘 한다. 분위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이어지는 남측 공연은 가수 강허달림 님. 자작곡 “기다림, 설레임” 등 2곡을 부르고 앵콜이 터져 “홀로아리랑”을 함께 불렀다. 관중을 휘어잡는 가수 덕분에 분위기는 한참 고조됐다.
▲ 북측 여성중창단 공연 ⓒ사진제공 - 한국여성단체연합
북측 공연은 완전히 메들리다. 쉬지 않고 나오는 반주에 맞춰 세 명의 멋진 가수들이 합창과 독창 등을 번갈아가며 쉬지 않고 노래하며 춤춘다. 벽장식이라고 생각했던 휘장이 열리고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가수들이 등장할 때부터 이미 모두는 열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북측 노래들에 이어 “번지 없는 주막”, “무정한 사람” 등 남측 노래들까지. 남측 노래들은 발성까지 완전히 남측 트로트 창법으로 열창하는데 보통 솜씨가 아니다. 북측 노래 중에는 젊은이들의 사랑을 다룬 노래도 있고 우리가 익히 아는 “반갑습니다”도 있었다. 남측 여성들은 북측 여성들의 아름다움에 계속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공연 마지막에는 참여자들 모두가 일어나 서로의 어깨를 겯고 함께 화답하며, 평화통일을 한마음으로 기원했다.
이제는 개성시내 문화유적지 탐방을 하러 갈 시간이다. 우리가 나가줘야 백송식당에 연회장이 차려진단다. 교과서에서나 배웠던 선죽교를 가볼 시간이다. 거리를 지나는 개성 사람들에게 정신없이 손을 흔들다보니 벌써 내리란다. 선죽교는 작은 돌다리였다. 설명을 맡은 안내원도 역시 한복 차림이다. 한복은 북측 여성, 한복 아닌 차림은 남측 여성이다. 오늘 가볼 선죽교, 표충사, 고려성균관(박물관)은 모두 “개성 역사유적지구”로 유네스코에 등록된 문화유적들에 속한다.
정몽주의 핏자국이 서렸다는 돌다리를 찍고, 그 후손들이, 선조의 핏자국을 밟고 다닐 수 없다고 돌난간으로 다리를 막고 옆으로 돌다리를 더 놓았다는 설명을 듣는다. 하마비 옆에 ‘선죽교’라 쓰여 있는 표지석은 한석봉의 글씨라 한다.
표충사는 선죽교 바로 건너편이다. 선죽교와 관련된 유적인 그럴 만하다. 들어가 보니 돌거북 두 마리가 커다란 돌비석 둘을 등에 지고 있다. 정몽주의 절개와 충의를 기린다는 두 비석은 세운 시기가 다른데도 하나의 건물 안에 들어가 있다.
안내원은 돌거북 중 암수를 알아보겠느냐고 묻는다. 화려한 것이 수컷, 수수한 것이 암컷이라는 상식 이외에, 힘들어서 혀를 빼물고 있고, 등이 휘어 있는 것이 암컷 거북이란다. ㅎㅎ
암수 한 쌍에 대한 관심은 고려민속박물관(고려성균관)에서도 이어진다. 개성의 한 왕궁터에서 발견되었다는 돌로 된 용(머리 부분이 땅에서 올라오는 듯한 조각 한 쌍)도, 현대식으로 지어진 대학 입구에 서 있는 돌호랑이 한 쌍도, 안내원이든 리산옥 조선카톨릭교협회여성회 회장이든 수행하던 남성이든 모두 암수 구분의 기준을 열심히 설명하며 신나 한다.
남측의 성균관과 개성의 성균관은 닮았지만 조금 다르다. 건물도, 오래된 은행나무들도, 너른 뜰도 비슷하지만, 건물 배치가 어그러진 서울의 성균관과 다르게, 개성의 성균관은 옛 배치가 그대로 살아 있어, 입구에서 찍으면 저 멀리 다른 건물들이 일직선으로 보인다. 건물의 일부를 고려박물관으로 사용하는데, 남측의 박물관과 달리 사진도 자유로이 찍을 수 있고, 가까이에서 국보라 지정되어 있는 문화재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감히 만져볼 엄두는 내지 못했다. 온도를 엄중히 관리하는 것은 같았다. 자세히 살펴볼 시간 없이 ‘날래날래’ 이동해야 하는 것도 역시!
그러고 보니 남측과 북측이 공유하고 있는 게 ‘빨리빨리’다. 외국인이주노동자가 남측에 와서 가장 먼저 배우는 한국어가 ‘빨리빨리’라고 한다. 북측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실무준비를 위해 얼마 전 방북했던 실무진들은 리산옥 회장으로부터 “참새 10마리 줄 세우는 게 남측 여성 10명 줄 세우는 것보다 쉽다”고 했다며, 제발 시간에 맞춰 빨리빨리 이동하라고 버스 안에서부터 누누이 강조했다. 선죽교에서는 참고 참던 리산옥 회장이 표충사와 고려성균관에서는 “날래날래 움직이라요” 하며 혀를 끌끌 차곤 했다. 리산옥 회장은 체구가 크고 카리스마가 있어 보이는 멋진 여성이었다.
공민왕의 무덤 석실을 꾸며놓은 곳이 있었지만 들어가 볼 시간이 없었다. 들어가 본 이들이 안에 아무것도 없다고 하기도 했지만. 아마 우리 남측이라면 이리 담백하게 놔두진 않았겠지?
돌아 나오는 길, 북측 여성들도 자기들끼리 기념촬영을 한다. 옆에 서서 같이 촬영을 해본다. 표정들이 밝고 곱다.
돌아오는 짧은 길, 개성시내를 흐르는 하천에도 물이 많지 않다. 하천에서 쓰레기를 걷어내는 남자도 있고, 세상에! 빨래를 하는 여성들도 있다. 당연히 고무장갑도 없이 흐르는 물에 빨래를 한다. 빨래방망이를 두드리고 물에 헹구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하다.
▲ 백송식당
백송식당에는 엄청난 연회장이 차려져 있다. 탁자마다 14명이 앉게 배치되어 있는데 개인마다 먹을 수 있도록 13첩 반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왕이나 먹을 수 있었다는 13첩 반상... 새벽에 출발해서 남측 시간으로 오후 2시에 첫 식사지만, 워낙에 공지를 잘 해놔서 모두가 간식을 듬뿍 싸왔던 터라 그리 시장하진 않다. 그런데 양이 장난이 아니다. 돼지고기찜, 소고기찜, 명태찜을 비롯해서 반찬이 13가지에, 주식으로 닭이 한 마리씩 올라와 있다. 백숙처럼 속이 찹쌀과 대추, 은행, 삼 등으로 차있지만 겉을 보니 구운 것이다. 이걸 다 먹으면 만두국과 밥이 나온단다. 채식하는 이들은 단호박밥을 따로 주문한다. 저게 탐나지만 거기에 신경을 오래 쓰고 있을 수가 없다.
2번 테이블은 종교여성들의 차지다. 가톨릭 여성들과 개신교 여성들... 맞은편에 앉은 조그련 김혜숙 여성대표, 옆자리에 앉은 여맹 백명애, 최◯◯ 위원(한 자리 건너라 이름을 명확히 못 들었다)과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기독여성들끼리 만나자는 얘기, 내년에 캐나다연합교회의 초청이 있을 터인데 거기도 오라는 얘기에 이어, 아이들 얘기, 교육 얘기, 결혼 얘기... 끊임없는 이야기에 열중하다보니 벌써 오찬시간이 끝이란다. 에고 만두국과 밥을 못 먹었다. 나중에 후회한다던데.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배는 든든하게 부르다.
80년대 대학 다닐 때는 북측 여성들이 탁아소, 밥공장 등으로 인해 육아로부터 보다 자유롭고 보다 해방적일 거라고 추측했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듯하다. 점심식탁에서 북측 여성들은 “남측 여성들은 세다” 혹은 “자기 일을 열심히 해서 신문에도 난다”며 부러워한다. 여기서도 여성들의 삶은 쉽지 않은 모양이다.
30대 싱글 여성에게 빨리 결혼하고 빨리 애도 낳아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는 건 남측과 똑같다. 그게 ‘애국’이라는 것과 ‘효도’라는 점에서만 단어가 다를 뿐... 요즘 남측에서도 ‘저출산’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이들 중 일부가 ‘애국’이란 용어를 사용하긴 하지만.
▲ 전시마당 ⓒ사진제공 - 한국여성단체연합
▲ 전시마당 ⓒ사진제공 - 한국여성단체연합
이제 민속여관 한쪽에 전시되어 있는 남북여성작품 관람시간이다. 남측은 직접 만든 천연비누, 향초, 가죽가방 등 수공예품을 전시했지만, 북측에서는 세계적인 화가 오은별의 그림과 인민예술가 우복단의 도자기, 북측이 자랑하는 다양한 크기의 자수작품들을 전시해놓았다. 오은별 화가의 그림에 감탄하고, 우복단 작가의 사진도 찍고 그의 작품도 찍어보지만, 가격을 물어볼 엄두가 안 난다. 달러만 받는다는데 좀 더 환전해올 것을...
눈에 확 뜨이는 자수작품들이 벽에 높이 걸려 있는데 하나에 1000불씩이란다. 그런데 정말 멋지다! 바닥에 기대놓은 작은 자수작품들 중에 고양이 두 마리를 수놓은 것이 눈에 확 뜨인다. 딸아이가 고양이 사달라고 노래를 부르는데, 감당할 엄두가 나지 않아 미안했는데! 물어보니 50달러. 고민하는 모양을 보며 제일 작은 사이즈의 다른 자수 작품을 추천한다. 그쪽 사이즈 작품에도 고양이 작품이 하나 눈에 뜨인다. 앗싸! 40달러에 멋진 자수 작품을 구입했다.
그러고 나니 다른 선물 살 돈이 부족하다. 남은 돈 한도에서 이것저것 골라본다. 다들 선물 보따리가 한 짐씩이다. 선물을 다 고르고 버스에 올려다놓고 그제야 정신을 차려보니, 우리가 전시회를 보고 선물을 장만하는 동안 북측 여성들이 계속 뜰에 서서 기다리는 중이다. 에고, 이런! 얼른 카메라를 들고 북측 여성들과 기념촬영을 한다. 개신교 여성들과 함께... 우리 테이블에 함께 둘러앉았던 여성들과 함께... 그리고 남측 기독교(가톨릭, 개신교) 대표들과 함께... NCCK 여성위원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나니 바로 헤어질 시간이다. 갑자기 울컥해온다. “긴 기다림 짧은 만남”이란 말이 절로 나온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게 이런 심정이구나. “내년에 평양에서 만납시다!” 약속의 말을 주고받으며 인사를 나눈다. 다시 만날 수 있기를!!!
▲ 전시마당 ⓒ사진제공 - 한국여성단체연합
▲ 전시마당 ⓒ사진제공 - 한국여성단체연합
▲ 전시마당 ⓒ사진제공 - 한국여성단체연합
▲ 북측 조그련 여성대표 두 사람... 사이로 보이는 이는 북측 가톨릭 대표 ⓒ최소영
▲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했던 2번 테이블조... 개신교 여성들과 여맹 위원들... ㅎㅎ 그러고보니 가톨릭 측이 없군요. 왼쪽부터 황보현 NCCK 간사, 북측 가톨릭 대표, 다른 테이블에 있던 조그련 여성대표, 우리 테이블에 있던 김혜숙 조그련 여성대표, 나, 여맹 위원인 최...,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신미숙 총무, 내 오른쪽에 앉았던 여맹 위원 백명애 ⓒ최소영
▲ 함께 방북했던 가톨릭 장상수녀회 대표들과 개신교 NCCK 여성위원회 대표들 ⓒ최소영
▲ 개신교 NCCK 여성위원회 대표들 ⓒ최소영
버스가 다시 출발한다. 거리에는 벌써 퇴근하는 이들이 많다. 북측 시간으로 4시. 우리가 아침에 개성공단을 지날 때 출근들을 했는데, 그때가 오전 9:30경, 오후 4시에 벌써 퇴근이다. 개성 사람들의 얼굴에 있던 여유는 이것 때문이었나?
아이들도 다들 하교 중이다. 빨간 얼굴의 건강한 아이들은 다들 장난꾸러기들 같다. 언덕을 기어오르기도 하고 마른 논이나 골목길에서 놀기도 한다. 집으로 향하는 아이들도 발걸음이 가볍다. 손을 마주 흔들어주는 아이들의 모습은 너무나도 예쁘다.
돌아 나오는 길도 참 빠르다. 서울에서 개성까지가 평양에서 개성까지보다 가깝단다. 이 가까운 길을 오가지 못해 가족을 그리다 생을 마감하는 이들이 많은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이산가족들의 만남이 정례화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걸림돌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자주 만나고 소통하고 마음을 나누면서 우리는 평화를 지어갈 수 있을 것이다. 평화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가져다주는 선물이 아닐 것이다. 모두의 노력과 바램, 실천이 모여 평화를 만들어갈 수 있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