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거 지

 나는 경상도 한 산골마을의 지지리도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일곱 살까지 거기에서 자랐다. 여덟 살 터울의 누나가 하나 있다.

부모님은 첫 딸을 낳고 몇 해를 기다렸으나 아기가 없자 거의 포기상태였다고 한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내가 생겼다는 것이다. 나의 어린 시절 부모님은, 특히 어머니는 그건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말을 자주 했다.

남아선호사상이 강했던 때였고, 그게 다른 지방에 비해 더 극성스러웠던 지역이었던지라 부모님은 없는 살림 가운데에서도 나를 불면 날아갈까 쥐면 깨질까 애지중지 길렀다.

내가 학교에 갈 나이가 되자 아버지는 말을 낳으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을 낳으면 서울로 보내랬다며 집이며 손바닥만한 땅뙈기를 팔아 서울로 이사를 했다.

아버지는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채소며 과일을 팔기도 하고 막노동도 하는 등 무슨 일이든지 닥치는 대로 했다. 어머니는 병약하여 집안일하기에도 벅찼으나 아직 나이 어린 누나까지도 이 공장 저 공장을 전전하여 돈을 벌었다. 모두가 나 하나를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나는 머리가 나쁘지 않아 공부를 썩 잘했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언제나 돈이었다. 학교에 내야할 돈을 내지 못해 쫓겨 오는 일이 다반사였고, 학년, 학기가 바뀔 때마다 책이며 학용품을 사는 것도 예삿일이 아니었다.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나는 아버지와 누나 덕분으로 대학에 대학원까지 나올 수가 있었다. 물론 나도 가정교사에 방학 때면 막노동까지 안 해 본 일이 없다.

나의 꿈은 대학교수였다. 하려들면 취직도 못할 건 아니었지만 모교에 남아 지도교수님을 도왔다. 교수님 연구실 한쪽 구석에 작은 책상 하나를 놓고 자료도 찾아 드리고 잔심부름도 했다. 사실을 말하면 나의 주된 업무는 교수님의 번역 일을 도와 드리는 것이었다. 도와 드린다기보다 초벌번역은 모두가 내 몫이었다.

그러며 교수님의 집안일까지 돌봐 드렸다. 사모님은 말할 것도 없고 자녀들까지 날 하인 취급을 했다. 더럽고 치사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잡고 있는 교수님의 바짓가랑이를 놓치면 돈 없고 빽 없는 나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러며 받은 것이라고는 차비에 점심값을 제하고 나면 책을 몇 권 사는 것으로 바닥이 날 정도의 푼돈에 불과했다. 모자라는 용돈은 연로하신 아버지 몫이 되었다. 결혼 전까지는 주로 누나가 대었으나 자기의 가정을 갖고부터는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누나는 내가 대학원을 나오고 나서 그 이듬해, 정확히 말해 나이 서른다섯이 되어서야 결혼을 했다. 당시로서는 혼기를 놓쳐도 한참이나 놓친 후였다. 그러니 결혼 같은 것은 아예 포기한 상태였다. 그런데 운 좋게 노총각 전도사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동생 하나 출세시키려고 치른 희생은 그만큼 컸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다 하나님의 은혜라 했다.

나에게는 결혼 같은 건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대학교수만 되면 찰찰 골라 할 수 있을 턴데 뭐 하러 궁상을 떨며 서두른단 말인가.

지도교수의 연구실에서 종살이 아닌 종살이를 하기 시작하고 만 6년이 되면서 꿈에도 그리던 대학교수가 되었다. 본래는 모교에 남기를 원해서 한 종살이였으나 두 번의 기회를 해외 유학파들에게 밀려 놓치고 말았다. 그러다 지방의 한 국립 대학교에 학과가 신설되어 가게 된 것이다. 그만한 규모의 국립 대학교에 그때까지 불문학과가 없었다는 건 이상한 일이지만, 나를 위해서는 다행한 일이었다.

학과 신설에 별 어려움은 없었다. 6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을 대학 공기로 숨을 쉬었으니 대학의 생리도 알만큼은 알게 되었다. 큰 문제는 학장이나 총장이 해결할 일이고, 내가 해야 할 일에 어려움이 생기면 두 손을 싹싹 비벼 상대의 비위를 적당히 맞춰 주는 것으로 대개는 끝이 났다.

취직이 되자 을에서 갑으로 입장이 바뀌었다. 필요할 때마다 신임 교수도 내 손으로 뽑았다. 실력보다 나에게 충성할 수 있는지부터 보았다. 실력이 너무 좋은 사람은 이리저리 핑계를 붙여 탈락시켰다. 그래야 내 입지에 탈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혼도 했다. 부잣집 딸을 원했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아 차선책으로 국민학교 선생과 했다. 다행히 아내는 이재에 밝은 사람이었다. 남들은 나를 보고 구두쇠라 하는 모양이지만, 그런 면에서도 아내는 나보다 한수 위였다. 용돈은 매주 받아 썼는데, 말이 용돈이지 학교 식당에서 사먹는 밥값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차는 이제껏 한 대를 가지고 쓴다. 그런데도 차가 아파트 주차장을 벗어나는 일이 별로 없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보다 교통비를 효과적으로 줄이는 방법이 없는데, 기름 한 방울도 안 나는 나라에서 무엇 때문에 낭비를 한다는 말인가. 남들이 묻기라도 하면 운전에 신경을 안 쓰니 쉬기에도, 무엇을 생각하기에도 좋다고 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그 아까운 돈을 안 쓸 수가 없게 되었다. 대학에 박사학위 소지자들이 늘어 가고 있는데, 나라고 그걸 외면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학위를 딸 바에야 눈 딱 감고 유학을 가기로 한 것이다.

나는 운이 참 좋은 사람이다. 수속을 마치고 프랑스에 와 보니 같은 전공의 한국 유학생이 하나 이미 와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이름은 맹달수, 고등학교 불어교사를 하던 사람으로 나이가 나보다 다섯 살이나 위인데 무슨 바람이 불었던지 그만두고 유학을 와 공부를 하고 있었다. 나는 옳다 싶었다. 갈수록 대학 취직이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을 그라고 모르지 않을 터, 나는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생각해 주는 척하여 나를 의지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는 나의 생각대로 잘 움직여 주었다. 아주 좋은 호구가 되어 준 것이다. 식사는 물론 가끔 술까지도 사게 하는 건 문제도 되지 않았다. 식사는 가능한 한 같이 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식대야 으레 그가 냈지만, 어쩌다 체면상 내는 척이라도 하기 위해서 지갑을 꺼내 들면 그가 재빨리 치른다. 술을 마시고 싶으면 내가 사겠다며 데리고 간다. 그리고 돈을 낼 때면 지갑을 되도록 천천히 꺼내어 만지작거리는 것으로 만사 OK이다. 그의 행동은 언제나 나보다 빨랐다.

여름방학이 되어 나도 그도 일시귀국을 했다. 귀국 전날 지도교수가 나를 부르셨다. 나이 많은 그분은 참으로 마음이 따뜻한 분이었다. 서양인이면서도 동양인 같은 자애로움을 파란 눈의 깊숙이에 간직하고 있는 분이었다.

“한국에 가면 미스터 맹의 취직자리를 좀 알아봐 줘요.”

그 진지함이 나의 호구 맹달수의 취직을 얼마나 염려하고 있는지 말해 주는 듯했다. 맹은 다음 학기를 끝으로 해서 학위를 받아 귀국한다.

“있는 힘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나 나에겐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나의 호구 맹달수는 맹해 보이면서도 고집스런 데가 있어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면 누가 뭐래도 듣지 않는 구석이 있다. 이런 자를 들였다가는 학과에 있어 만인지상으로서의 내 위치가 위협을 받을 수 있다.

그렇다고 지도교수의 말을 무작정 무시할 수만도 없는 일, 귀국을 하자 나는 맹을 데리고 대학들을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수도권보다는 지방을 주로 돌았다. 맹이 교통비며 가는 곳마다의 맛집에다가 간간히 술까지 모두 해결해 주니 여행치고는 최상의 것이라 못할 것도 없었다. 그러며 하는 일이라고는 관련학과 교수들에게 인사를 시키는 것으로 끝이 났다.

돌아오는 길에는 충청도 어느 산골에서 목회를 하는 매형의 교회로 누님을 찾아갔다. 말이 교회이지 교인이라야 예닐곱 명이나 될까 말까한 데다가 교회당은 부스러져 떨어져나가고 있는 시멘트벽돌의 오막살이다. 맹을 그런 두메까지 데리고 간 것은 그가 기독교 신앙이 돈독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눈치 없는 이 자는 그런 불쌍한 모습을 보고도 내가 바랐던 헌금을 한 푼도 하지 않았다.

맹은 내가 학위를 받아 귀국할 때까지 취직을 못하고 이 대학 저 대학을 전전하며 소위 보따리 장사라 불리는 시간강사로 입에 풀칠을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본래 모아 놓은 것이라고는 별로 없던 자인데 장기간의 유학으로 아파트까지도 팔아 없앴으니 하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건 내 알 바가 아니고, 그때까지도 일시 귀국이라도 할 때면 호구 역할을 하도록 잔머리를 굴렸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우리 학과에 자리가 하나 더 생겼다. 물론 맹도 나를 믿고 서류를 냈다.

어떻게 알았는지 프랑스의 은사님으로부터 그의 취직을 부탁하는 전화가 몇 번이나 왔다. 그런데다가 나와 그가 어떤 사이인지를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으니 대놓고 반대를 했다가는 욕을 먹을 게 빤한 일이었다. 그러니 겉으로는 힘을 쓰는 척하고 뒤로 방해를 했다. 그러며 뜯어먹을 수 있는 대로 뜯어먹었다. 그렇게 하는 게 오히려 나를 믿게 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나는 모르지 않았다. 꿩 먹고 알 먹기며, 도랑치고 가재 잡기란 이런 게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한 방해는 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런데다가 학과의 다른 교수들은 맹의 인품과 실력을 들어 알고 있는 듯 적극 찬성하였다.

결과는 나의 패배로 끝이 났다. 기왕 일이 이리 되어 버렸으니 어쩌랴. 나는 그에게 내가 힘을 써 취직이 된 것이라며 한껏 유세를 떨었다. 충실한 나의 호구로 묶어 두기 위해서다. 그런데도 이 맹한 인간은 아무것도 모르고 자못 고맙다는 듯 호구노릇을 기대 이상으로 잘해 주었다.

누군가를 대접해야 할 자리에는 반드시라 해도 좋을 정도로 그를 데리고 나갔다. 프랑스에서 손님이 와도 그랬다. 귀한 손님인데 소개하겠다며, 같은 사람을 다시 만날 때는 그가 맹 교수님을 보고 싶어 한다며 데리고 나가기만 하면 내 지갑에서 돈이 나갈 일은 없다.

나도 이제 많이 늙었다. 내년 2월말로 정년퇴임이다. 2개월 남짓밖에 남아 있지 않다.

맹은 이미 5년 전에 정년이 되어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다. 호구가 없어져 아쉬웠지만, 가끔 여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그의 고향 C시로 가서 대접을 받았다. 식사 대접을 해 드리겠다며 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생색은 내가 내고 돈은 나의 고마운 호구가 쓴다. 손님을 데리고 가기도 했다.

맹이 퇴임을 하고 난 뒤로는 제자들이 그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벌써 제자가 둘이나 학과의 교수가 되었고, 시간강사도 칠팔 명이나 된다. 나이 든 대학원생들도 써먹을 수 있는 대로 써먹었다.

맹이 어쩌다 이곳에 오기라도 하면 제자들에게 연락을 한다. 나의 제자들은 그의 제자도 되니 오래 만나지 못했던 사제 간의 회포를 풀게 해 준다는 생색도 낼 수 있어 일거양득이다. 비용이라고 할 것도 없지만 하여튼 내 돈은 한 푼도 쓰지 않아도 된다.

나에게 있어 기독교는 참으로 고마운 종교이다.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만약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면 내 어떻게 되겠는가.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실 뿐 아니라 무소부재하시어 사람의 속마음까지 꿰뚫어 보신다 하니 맹을 비롯한 사람들처럼 속일 수도 없는 일이니 말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도 내세가 있다는 것도 잘 알지 못한다. 있다고도 없다고도 확신할 수가 없다. 그러나 만약 있다면 큰일이니 교회에 다니는 것이다.

행위 같은 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못되니 헌금도 하는 시늉만 내면 된다. 그렇다고 남들이 구세군 자선냄비에 적선하듯 넣는 구제금처럼 하지는 않는다. 천 원짜리 지폐 한두 장일지라도 나에게는 큰돈이니 망설여지는 일도 없지 않지만, 마음만은 경건하게 가지려 애를 쓴다.

오늘은 나의 정년퇴임기념논문집의 헌정행사가 있는 날이다. 학과에서 처음으로 정년을 맞은 맹이 자기의 기념논문집 추진을 한사코 말려 못하게 했었음으로 그 피해를 내가 받을 뻔했다. 내 때에도 구렁이 담 넘듯 은근슬쩍 지나치고 말려는 낌새를 느껴 잔머리를 굴리고 굴려서는 오늘의 행사까지 오게 된 것이다.

오늘 같은 날 맹이 얼굴을 내밀어 주면 내 낯이 서게 된다. 인덕이 있어 퇴임한 동료까지 와 축하를 해 주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교를 시켜 와 달라 전화를 했다. 그런데 연락을 받으면 감지덕지 달려와 줄줄 알았던 맹이 뭐 가정행산가 뭔가가 있어 못 오겠다 했다.

하는 수 없이 내가 직접 전화를 했다. 그래도 대답은 같았다. 죽어도 거짓말은 못하는 작자이고 보면 집안에 뭔가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물러설 나도 아니다. 미리 만나 점심이라도 같이 하며 밀렸던 이야기라도 나누자며 통사정을 하고서나 겨우 허락을 얻어냈다.

열두 시에 학교 근처 커피숍에서 맹을 만났다. 내가 먼저 가 기다리고 있다가 그가 들어오자 차는 식사 뒤에 마시자며 데리고 나왔다.

“뭘 드시겠어요?”

칼국수나 뭔가 가벼운 것으로 먹자는 대답을 기대하며 물었다.

“아무거나 먹지요, 뭐.”

(이거 봐라.)

기대는 보기 좋게 엇나갔다. 그래도 제 입으로 싼 것을 먹자는 말이 나오도록 해야 한다.

“그래도 오랜만에 만났는데….”

“정말 아무거나 괜찮아요.”

(이 맹한 것이 혹 눈치를 챈 게 아니야?)

이 때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좋은 집으로 안내하겠다는 몸짓을 해 보이며 앞장서서 걸었다.

어느 지점에 이르러 “어?” 하며 멈춰 섰다.

“맛있는 집이 있었는데…, 없어졌네요.”

이번에는 일부러 칼국수집이라든가 값싼 음식집들이 많은 골목으로 데리고 갔다. 한참을 돌아다녔으나 당연히 괜찮아 보이는 음식점이 있을 리 없다.

‘우거지 해장국’이라는 간판 옆을 지나다가 물었다.

“여기라도 들어갈까요?”

이리되면 아니라고는 할 수 없는 일,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아뿔싸! 벽에 붙은 메뉴를 보니 ‘우거지 해장국’만 있는 것이 아니라 6천원에서 2만 3원짜리까지 다양한 식사들이 있다.

“뭘로 하시겠어요?”

안 물을 수가 없다.

맹이 벽의 메뉴판을 훑어본다. (이 맹한 것이 비싼 것을 고르면 어쩌지?)

“나는 콩나물 국밥으로 하겠습니다.”

조바심이 나서 내가 먼저 7천 원짜리 콩나물 국밥을 지정했다. 이렇게 해서 둘은 콩나물 국밥을 먹었다. 내가 그릇을 다 비우도록 맹은 아침을 먹은 지 얼마 안 됐다며 먹는 시늉만 하다 수저를 놓았다.

“차는 내 연구실에서 마시며 이야기나 하지요.”

식사를 마치고 나오며 내가 한 말이다. 아직까지 내 돈 내고 커피를 사 마셔 본 적이 별로 없다.

맹의 차로 캠퍼스로 들어와 파킹을 해 놓고 연구실로 가는데 후생회관 1층의 커피숍이 보인다. 말이 후생회관이지 민자로 지어진 기숙사 건물이다. 1층에는 은행이며 편의점, 커피숍, 세탁소 같은 편의시설이 들어 있고 2층에서 15층까지는 기숙사, 16층은 스카이라운지로 식사와 커피 등을 판다. 1층 커피숍은 값이 스카이라운지의 3분의 1에도 못 미쳐 학생들이 이용하고, 스카이라운지에는 주로 교수들이 간다. 학생들은 특별히 호사를 부릴 때에나 올라간다.

(킥킥…) 그때 일이 생각나서 나는 속으로 웃었다. 그날은 맹이 부인과 같이 내가 부탁한 자료를 가지고 왔다. 온 김에 들릴 데가 있어 부인과 같이 왔다 했다. 나는 그들 부부를 스카이라운지 아닌 1층 커피숍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학생들로 붐벼 자리 잡기가 힘들 정도였다. 나는 방금 마셨다며 커피를 두 잔만 시켰다. 학생들이 내 앞 탁자를 흘끔거리는 것 같다. 카운터로 가 일회용 컵 하나를 얻어왔다.

“사모님은 커피 별로 안 좋아하시죠?”

손을 뻗어 부인의 커피를 가져다가 3분의1쯤 내 컵에다 나누어 따랐다. 그런데도 그 맹한 것들은 내가 돈이 아까워 그러는지를 눈치 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연구실로 왔으나 나는 차 준비 같은 것은 할 생각도 않고 무엇을 찾기라도 하는 듯 서가의 책들을 만지작거리다가 제자 교수 하나에게 전화를 했다. 연구실에서 차를 마시자고 했던 것은 처음부터 거짓말이었다. 연구실에 차 같은 건 아예 없다. 마실 일이 있으면 조교를 시켜 과 사무실에서 날라 오게 하는데, 오늘은 행사 준비로 한창 바쁠 터이니 그럴 수도 없다.

“성 교수, 맹 교수님이 오셨는데, 와서 인사나 드리지.”

성 교수는 맹의 후임으로 들어온 제자다.

맹을 보자 성 교수의 눈이 반가움으로 파르르 떠는 것 같다.

“모시고 가서 회포를 풀지 그래.”

이렇게 해서 맹을 성 교수에게 떠넘겨 버렸다.

행사 뒤에는 저녁에 과 교수들과 시간강사들, 그리고 대학원생들이 열어 주는 환송회가 예정되어 있다. 나도 제자들도 참석해 달라고 권했으나 맹은 볼일이 있다며 행사가 끝나자마자 돌아가 버렸다.

식사를 하며 술이 몇 순배 돌다보니 이야기가 무르익어 환송회는 생각보다 길어졌다. 내가 인덕 있는 사람이라는 게 확연히 느껴졌다. 설마한들 떠나는 뒤꼭지가 예뻐서는 아닐 거 아닌가.

자리를 마친 뒤 남자 제자 둘과 술을 한 잔 더하고 나니 연구실에 들르고 싶어졌다.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생각하니 어쩐지 허전한 생각이 든 것이다.

복도 저만치에 연구실 문이 하나 빼꼼히 열려 있어 불빛이 새어나고 있다. 성 교수의 방이다. 그냥 지나칠까 하다가 잠깐 들여다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막 문을 열려는데, 말소리가 들린다.

“천 교수님 말야, 어쩜 그렇게 살고 싶을까?”

(이것들이 내 말을 하는 거야?)

박 교수의 목소리다. 박 교수는 성 교수보다 이태 뒤에 들어왔는데, 둘 다 여자로

제자들이다.

“그러게 말이야, 언니.”

박 교수는 성 교수보다 2년 선배지만, 취직은 늦게 됐다.

“돈 안 좋아하는 사람 없다지만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 밥은 고사하고 차 한 잔 제대로 사는 걸 본 적이 없으니 할 말 다했지 뭐야.”

“아무리 그렇다고 손님이 올 때마다 우리야 그렇다지만 시간 강사에다 대학원생들까지 불러내어 돈을 쓰게 하는 데는 할 말 다했지 뭐야.”

“당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야 누가 알겠어? 하지만 그걸 모를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냥 모른 척하는 거지.”

“그러면서도 재산 자랑하는 걸 봐. 가관도 그런 가관이 없다니까.”

현기증이라도 날 것 같다. 한 손으로 벽을 짚었다. 이제 아무 소리도 귀에 들리지 않는다. 얼굴의 핏기가 싹 가시는 것 같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께서 슬픈 표정을 하고 지긋이 내려다보는 것 같다.

더 들어서는 안 될 것 같아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다시 귓전을 스치는 소리가 들린다. 아니 귓속으로 스며들어 가슴을 헤집는 소리다.

“맹 교수님의 반의반이라도 닮았다면 뭐 하러 욕을 먹겠어?”

나는 쓰러지려는 것을 간신히 버티고 비틀거리며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