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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가 원흉이다
박창진  |  5016park@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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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년 12월 05일 (토) 07:23:18
최종편집 : 2015년 12월 05일 (토) 13:59:01 [조회수 : 3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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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전대통령은 재임 기간에 100조원의 국부를 유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외자원재발에 쏟아 부은 에너지공기업들의 수십조 부채 이자가 한 해 1조 5천억원이다. 전국의 초·중·고등학생들 모두의 급식비와 같단다. 그의 퇴임 이후 행로는 너무나 뻔하다. 그는 살 길을 만든다. 국정원, 기무사 등의 공적 기관을 선거에 동원하여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 결과 그는 현재 아무런 어려움 없이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이명박은 개신교인이다. 거기다가 장로교인 소망교회의 장로이다. 그에게 당신은 죽음 이후에 영원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할까? 물어보나마나 뻔하다. 영원한 구원을 받는다고 할 것이다.

오정현은 장로교단인 사랑의교회의 담임목사이다. 학력 조작, 논문 표절 의혹을 받고 있다. 전병욱은 성범죄를 저지르고 담임하던 삼일교회를 사임하였다가 지금은 홍대새교회의 담임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역시나 장로교 소속이다. 그들에게도 같은 질문을 한다면 그 답은 무엇일까? 역시나 뻔하다. 영원한 구원을 받는다고 할 것이다.

대한민국에는 그들과 같이 생각하는 신자들이 많다. 왜 그럴까? 교리에서 지지를 받기 때문이다. 칼빈주의 5대 교리 가운데 성도의 견인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서 견인은 인내, 참음이라는 뜻이다. 그 뜻만 생각하면 신자의 책임이 강조되는데 그 안의 내용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거듭나게 하신 자는 인내하게 하셔서 반드시 영원한 구원을 얻도록 하신다고 하는 것이다.

위의 3인은 자신들이 거듭났다는 사실은 분명하기에 그렇게 당당하게 영원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어떤 이들은 거듭났는지 어떻게 아느냐고 반문한다. 바울 사도가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했다. 루디아가 그 마음을 열어 복음을 따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복음을 받아들였다(행 16:14). 그녀는 바울 사도를 자기 집으로 초대하였는데 집 사람들 모두가 세례를 받게 되었다. 루디아가 거듭났는지 거듭나지 않았는지는 모르는 것인가? 바울 사도는 그녀가 거듭났음을 알았고 그 내용을 읽는 우리도 그녀가 거듭났음을 안다. 거듭남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한 역사가 아니다. 알 수 있는 특별한 은혜이다.

거듭남은 하늘로부터 태어나는 것 곧 출생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의 마음을 열어 복음을 따르게 하신다. 그 역사 안에서 당사자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다. 곧 그 이름을 믿는다. 그 결과 세상 임금인 마귀의 종이었다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거듭난 것이다. 위의 3인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않았다고 볼 근거는 없다. 그 이후의 삶에 있어서는 굴곡이 있지만 영접에 있어서는 진실하였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도의 견인 교리에 의하면 거듭남은 확실하기에 영원한 구원도 확실하다. 그들이 그렇게도 열정적으로 강조하는 구원의 확신이 바로 그것이다. 위의 3인이 영원한 구원을 확신하는 것은 바로 그 교리에 철저하게 충실한 결과이다.

 

그 교리에는 거룩한 행실이 없으면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한다는 내용이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거듭나게 하셨다면 거룩한 행실이 반드시 있도록 하셔서 주를 보도록 해주신다는 것이다. 믿음과 함께 하는 행함이라는 주장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교리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루터이다. 종교개혁 정확하게 말하자면 교회 개혁의 출발자인 루터이다. 루터는 로마가톨릭의 사제였다. 거의 모든 사람은 그 일생에 공과가 있다. 위의 3인도 마찬가지인데, 루터도 다르지 않다.

그 당시의 로마가톨릭은 정교일치, 마녀사냥, 성직 매매, 연옥설에 기초한 면죄부 판매 등으로 타락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루터는 그러한 상황에서 잘못됨을 드러내었다. 로마가톨릭의 여러 회유와 협박에 굴하지 않았다. 개신교 탄생을 이루었다. 로마가톨릭을 형님으로 한 동생이 아니라 초대교회에 그 뿌리를 둔 참 교회임을 천명하였다. 공이다.

그 당시에는 선행구원론이 유일한 구원론이었다. 그 당시의 로마가톨릭에서 선행은 로마교황의 말을 따르는 것, 고행, 면죄부를 구입하여 성당 건축에 일조하기 등이었다.

루터도 성당 계단을 무릎으로 오르며 피를 흘리는 고행에 참여하였다. 그는 그러한 행위를 통해 도무지 구원에 대해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런 중에 로마서를 읽으며 믿음 구원이라는 깨우침을 얻는다.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바울 사도의 가르침에 깊은 감명을 받고 이신칭의를 주장한다. 로마가톨릭과는 결별하며 선행구원론을 폐기한다. 그 이후로 개신교 대부분은 그의 가르침을 철저하게 따랐다. 너무나도 당연하고 옳은 것으로 여겨지는 그 일이 그의 과이다.

선행구원론이 무엇인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선이다. 그 뜻을 행하는 것이 선행이다. 그 선행으로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이 선행구원이다. 선행구원론은 예수님의 말씀을 명사화한 것이다. 사도적 교부와 초대 교부 그리고 그 이후의 교부들은 선행구원론을 문제 삼지 않았다. 예수님의 말씀을 명사화한 것인데, 무슨 문제가 있을 수 있겠는가?

로마가톨릭의 문제는 선행구원론 자체가 아니라 선행구원론을 오용 내지 남용한 것이었다. 그런데 루터는 선행구원론 자체를 폐기해 버렸다. 더러워진 목욕물만 버려야 하는데, 아기도 함께 버린 것이다.

선행구원론에서 선행의 의미는 자명하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 6:40).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을 가지고 와서 선행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고 한다. 매우 그럴 듯하지만 전혀 아니다. 요한복음이 주어지기 전에는 마태복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는 말이 되는 그런 성경 읽기는 성경을 암호 책으로 보고 해독하는 것일 뿐이다. 초대교회의 영지주의자들의 태도이고 오늘날에는 신천지의 모습이다. 그 구절에서 선행은 예수님이 앞에 언급하신 산상수훈의 내용을 지키는 것이다. 산상수훈의 내용이 바로 예수님에 의해 완전하게 된 율법이다. 그것을 좀 더 줄이면 팔복의 내용을 구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이신칭의에 대한 이해 문제이다. 이신칭의는 선행구원론과 똑같이 성경에 명백하게 진술되어 있는 바로서 성경적인 진술이다. 문제는 그 의미이다.

성경에서 칭의는 둘로 구분된다. 하나는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일반인이 믿음으로 곧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함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용서받아 의롭다고 선언되는 것이다. 법정적 칭의이다. 다른 하나는 신자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지 않고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것이다. 이를 관계적 칭의라고 한다.

바울 사도는 로마 교회에 편지를 써서 복음을 설명한다. 비록 직접 방문한 적은 없지만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상황과 연계하여서 복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들은 바에 의하면 로마 교회는 율법을 지키므로 현재적으로 의롭다함을 받으려고 하고 있다. 현재적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방식으로 유대인 교사들이 가르친 율법 준수를 수용하고 지키는 중이었다. 바울 사도는 율법 준수를 행위라고 표현하고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말씀하였다.

율법 준수를 가르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나 로마교회는 모두 법정적 칭의에 대해서는 이미 공감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법정적 칭의는 이미 전제되어 있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음으로 의롭다는 법적인 선언이 주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화두는 삶에 관한 것이었다. 그 화두에 어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율법 준수를 내세웠고 로마교회가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곧 관계적 칭의의 문제가 그 내용이었던 것이다. 바울 사도는 율법 준수가 아니라 성령의 (율)법(롬 8:2)을 준수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1). 성령의 (율)법은 예수님께서 공생애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모세의 율법을 완전하게 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율)법(갈 6:2),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약 1:25)이라고 불린다.

율법 준수는 그 당시의 유대인들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정 기간 동안 허용되었던 것이다. 율법이 중심인 옛 언약이 공적으로 파기되지 않은 상황에서 옛 언약 안에 있었던 이들에게 옛 언약이 공적으로 파기될 때까지 허용된 것이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은 그와 달랐다. 그들은 율법과 아무 상관이 없었다. 옛 언약을 통하여 예수님에 의해 완전하게 된 새 언약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다. 곧장 새 언약으로 들어왔다. 새 언약의 법은 성령의 (율)법이다.

율법에서 음행은 이미 배우자가 있는 상태에서 다른 이성과 성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성에 대해 음욕을 품는 것도 음행이라고 하셨다. 성적 관계를 맺지 않아야 하는 것에서 음욕을 품지도 않는 것으로 변화가 생겨났다. 마음에 음욕을 품고 생각으로 끊임없이 성관계를 맺으면서도 실제적으로 성적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있다. 그 상태는 언제든지 실제적인 성 관계로 나아갈 수도 있다. 나아가든지 나아가지 않든지 간에 하나님 보시기에는 범죄이다. 음욕을 품지 않는 것만이 그 범죄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길이다. 율법의 간음하지 말라가 완전하게 된 것이다. 살인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모든 율법 내용도 완전하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유추할 수 있다.

예수님은 자신이 완전하게 하신 새 언약 안으로 들어오는 새 백성들이 그러한 삶을 살기를 원하셨다. 자신의 피를 값으로 그 삶으로 초대하셨다. 그 삶은 새 언약의 백성들에게 절대적이었다. 예수님께서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란 율법 준수를 통한 의이다. ‘너희 의’란 바로 앞에서 말씀하신 모세의 율법을 완전하게 하신 그분의 (율)법 준수를 통한 의이다. 그 의가 없이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예수님께서 농담을 하신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바울 사도의 이신칭의는 예수님의 말씀을 길게 풀어서 설명한 것이다. 법정적 칭의가 아니라 관계적 칭의를 좀 장황하게(?) 진술한 것이다.

이는 그가 인용하는 아브라함을 통하여서도 확인된다(롬 4:3).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많은 민족에 대한 약속을 주셨는데,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종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염두에 두고 하나님께 말씀드린다. 하나님은 그의 몸에서 태어날 아들이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대답하신다. 그리고 하늘의 별과 같이 자손들이 많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에 대하여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다. 믿음이란 아브라함에 주신 그 시점의 약속 신뢰 곧 그 약속을 주신 하나님을 의지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아브라함은 이미 이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믿음으로 받아들였다(히 11:8). 법정적 칭의는 그때에 이미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왔다. 다만 자손에 관한 부분에 있어서는 아무런 조짐이 없었다. 종을 상속자로 생각하였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생각을 포기하고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였다. 믿음이다. 그 믿음을 하나님은 의롭다고 보셨다. 법정적 칭의가 아니라 관계적 칭의이다. 이제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몸을 통하여 자손을 주실 것이기에 종을 상속자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동시에 자신의 자손들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질 것이라고 사실에 대하여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되었다.

로마서의 이신칭의는 옛 언약을 통하지 않고 곧장 새 언약으로 부르심을 받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이 아니라 현재에 그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인 성령의 (율)법 준수를 통하여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로마교회는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그것을 완전하게 하신 율법- 성령의 율법, 그리스도의 율법,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준수함으로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받아야 했다. 그들에게 믿음이란 완전하게 된 율법을 받아들이고 그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었다. 이는 그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었다. 바울 사도가 ‘그러므로’로 시작하여 진술한 내용들을 지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의를 갖추게 되는 길이었다.

바울 사도는 이 부분에 있어서 철저했다. 고린도교회의 음행자에 대한 처분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고전 5:1~8). 어미와 음행한 자에 대해 고린도교회가 곧장 출교시키라고 명령하였다. 성경에서 출교는 몸에서 지체를 끊어내는 것이다. 완벽한 죽음이다. 그 시점에서는 다시 붙이는 것이 불가능하였기에 다르게 생각할 여지가 없다. 그렇게 끊어낼 때 남은 몸은 부패하지 않을 수 있다.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고전 5:5)는 말씀의 의미이다. 여기에서 육신과 영은 한 존재의 두 부분을 가리키지 않는다. 육신은 몸을 가리키는 헬라어(소마)가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부패한 전 존재를 가리키는 헬라어(사륵스)이다. 곧 어미와 음행한 자이다. 영은 그리스도와 합한 고린도교회이다(고전 6:17).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을 받지 못한다며 진술한 내용도 같은 의미이다(고전 6:9~11). 다르게 생각할 여지가 없다.

바울 사도는 새 언약만의 신자들이 옛 언약의 율법을 준수하는 것을 행위라는 말로 정죄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옛 경륜을 임의로 꺼집어내어 적용하는 것으로 불순종이었다. 곧 로마서에서의 행위는 불순종이다. 그가 말하는 믿음은 새 언약의 백성이 새 언약의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었다. 이는 새 언약의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었다. 의지함인 믿음이 순종과 함께 움직이는 것이다. 곧 동전의 양면인 것이다.

어떻게 가능한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라고 진심으로 받아들인 사람에게 선물로 주어진 성령을 통하여 가능하다. 그 안에서 육체의 욕심을 거스르는 역사를 행하시는 성령을 좇음으로 가능하다. 그 자신으로는 불가능하고 오직 성령을 좇음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이는 완전하게 된 율법을 지키는 삶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성령을 좇아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다(갈 5:16).

루터는 선행구원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님의 말씀을 명사화하였을 뿐인데, 성경적이지 않다는 말이 어떻게 가능한가? 지극히 무지하든가 아니면 예수님을 너무나도 하찮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루터는 이신칭의의 의미도 잘못 이해하였다. 그로 인해 구약과 신약에서 지속적으로 이야기되고 있는 순종 구원을 행위구원이라는 타이틀을 붙여 거부하게 만들었다. 구원은 행동과는 아예 무관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2). 위의 3인과 같은 신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생겨나는 토양을 만든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현실의 원흉인 것이다.

물론 그 교리를 따르면서도 삶에 있어서 완벽하진 않지만 존경을 받을만한 사람들이 있다. 그 교리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나보다 훨씬 나은 삶을 사는 신자들이 있다. 많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것이 잘못된 교리를 정당화시켜주진 못한다. 위의 3인의 생각이 그 교리와 직결되어 있다는 것은 불변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성경 분문을 잘못 읽은 결과물이기 때문이다(3).

구약과 신약, 신약에서는 예수님과 사도들 그리고 다른 성경 기자들의 구원에 관한 가르침은 동일하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위와 무관하게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부르셔서 그 시점의 언약 백성을 삼으신다. 관계 회복의 구원이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 당사자의 믿음으로 얻게 되는데, 그것은 당사자의 행위와 무관하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 시점에서 맺으신 언약을 따라 살기를 명령하신다. 그 명령을 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면 곧 믿으면 그 명령을 따른다. 그 결국은 영생이다. 곧 순종하면 영생이다. 따르지 않으면 언약 관계가 깨어진다. 돌이키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께 죽임을 당하거나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나면 영원한 멸망이다. 곧 불순종으로 인해 영원한 멸망을 당하는 것이다. 스스로 하나님 자체를 저버리는 배교가 가능하며 그 결국도 영원한 멸망이다.

구원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온전히 밝히고 신자들이 그 구원론으로 무장되어야 한다. 산상수훈의 팔복이 새 언약의 백성으로 사는 데에 필수이며 그것이 영원한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 그나마 위의 3인과 같은 괴물들을 최소화할 수 있는 길이다. 지금과 같은 비난과 조롱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진다. 아니 사람들이 하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가능성이 높다. 하늘 영광으로 가득한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움을 입는 하나의 길이다. 그 길이 온전히 열리고 그 길을 가는 신자들이 많아져서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는 교회가 이 땅에 가득차는 그 날이 하루 속히 임하기를 소망한다.

 

주 -------------------------------------------------------------

(1) 법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노모스인데, 전후에서 율법으로 번역되었다. 그리스도, 성령과 율법을 연결시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율법으로 번역하지 않고 법으로 번역하였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 오히려 율법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모세의 율법과 확실하게 대조되는 유익이 있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약 1:25)법과 곧바로 연결되는 효과도 있다.

(2) 성경에는 행동과 아예 상관이 없는 믿음 구원에 관한 진술이 있다(엡 2:8~9, 딛 3:5~5). 그런데 여기에서 구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일반인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분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가리킨다. 곧 그 마음을 열어 복음을 따르게 하심으로 마귀의 종에서 불러내시는 것이다. 곧 출생과 관련된 것이다. 출생은 당사자의 행위와 어떤 연관관계도 없다. 일반 법칙에서는 오직 부모의 사랑에 의해 이루어질 뿐임과 같이 하나님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의해서 이루어질 뿐이다. 영원한 구원은 이와 전혀 다르다. 출생 이후의 삶에 관한 것이다. 앞에 언급된 예수님의 말씀이나 자기-주 예수 그리스도-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이 되신다(히 5:9)는 히브리서의 진술과 같다.

(3) 성도의 견인을 주장하는 자들이 그 주장의 근거로 바울 사도의 글을 가장 많이 인용한다. 완전히 아이러니이다. 바울 사도의 가르침과 정반대의 주장을 하는 데에 그를 가장 많이 인용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어이없는 현실의 근원적인 배경에 루터가 자리를 잡고 있다. 로마서의 이신칭의를 잘못 읽은 것이 가장 근원적인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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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113.130.235.221)
2015-12-10 07:22:57
율법 준수는...
율법 준수.
시편 1편에서 복있는 사람이 되는 길이었다.
옛 언약에서 하나님과의 교제의 방편이었다.
율법의 정화가 십계명이다.
그것은 압축하면 예수님의 말씀하신 바와 같이 하나님 사랑, 내 몸같이 이웃 사랑이다.
어떤 유대인 교사들이 로마교회에게 현재적으로 의롭다하는 방편으로 율법 준수를 말한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것을 지키는 것인데, 나쁜 것인가? 잘못된 것인가? 
전혀 아니라고 여겨지는데, 바울 사도는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다른 복음이라면서 천사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전하면 저주를 받으리라고 선언하였다(갈1:8).
오늘날 한국 보수교회의 십일조도 모두 여기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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