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용으로 그린 풍경화 

1. 여름

남쪽에서 몰려온 먹구름으로 하늘이 갑자기 흐려졌다. 학교에 다녀와서 소를 먹이러 산에 올라올 때까지만 해도 땡볕이 내려쬐었는데, 여름 날씨가 변덕을 부렸다. 구름에 해가 가리자, 개울에서 놀던 아이들은 새파래진 입술로 아래턱을 떨었다. 동무들은 물가에 있는 바위에 올라 병아리처럼 서로 몸을 의지하여 웅크리고 앉아서 목청껏 해를 불렀다.

“해야, 해야 나오너라! 김칫국에 밥 말아 먹고, 장구 치고 나오너라!”

나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바위에 납작 엎드렸다. 물에 젖은 바위에서 이끼 냄새가 코에 스며들었다. 개울 위쪽에서는 동네 형들이 부침개를 부치고 있었다. 아이들은 차례로 부침개를 한 쪽씩 얻어먹었다. 파와 달래와 풋고추를 썰어 넣은 부침개는 맨 간장에 찍어 먹어도 별미다. 아이들은 물에서 놀거나, 솔방울을 둥글게 갈아서 구슬치기를 하였다. 풀어놓은 소들은 산등성이와 골짜기에 흩어져 풀을 뜯고 있었다. 부침개를 부치던 형들은 잔뜩 찌푸린 하늘을 쳐다보고는 서둘러 설거지를 하면서, 개울에 있는 아이들을 향해서 소를 찾아오라고 소리쳤다. 개울가에 있던 아이들은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고 검정 고무신을 끌면서 산 쪽으로 올라갔다.

사방이 어두워지면서 곧 소낙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빗방울이 후드득, 나뭇잎에 떨어졌다. 땅에서 흙먼지 냄새가 피어올랐다. 빗줄기가 금세 굵어졌다. 아이들은 소를 끌고 평평한 풀밭으로 모여들었다. 싸움 잘하는 ‘땡삐’가 손짓하며, “먼저 온 사람부터 내리가거라!” 하고 소리쳤다. 그는 우리 또래인데도 싸움을 잘하고 형들과 어울렸다. 아이들은 어깨에 꼴망태를 메고, 한 손으로 고삐를 잡고 아래로 내려갔다. 누렁이는 성질이 온순한데 종종 멀리에 가서 풀을 뜯곤 하였다. 산마루에 있는 누렁이를 끌고 모이는 장소에 도착하니, 아무도 없었다. 나는 낫과 꼴망태를 챙겨서, 고삐로 소의 볼기를 때리며 걸음을 재촉하였다.

골짜기가 끝나는 부근에서 개울을 건너고 산모퉁이를 돌면 서낭나무가 있었다. 동네를 내려다보고 있는 서낭나무는 마을을 지켜주는 신목이라고 어른들은 말했다. 굵은 허리에 새끼줄이 감기고, 가지마다 띠가 걸려 있는 고목에는 머리를 쭈뼛하게 하는 어떤 기운이 서려 있는 것 같았다. 달집을 불태우는 정월 대보름날 밤에, 사람들은 서낭나무에 제사를 올렸다. 아이들은 따라가지 못하고 집을 지켜야 했다. 서낭나무 옆에는 사람들이 소원을 빌면서 하나씩 던진 돌이 쌓여 이루어진 돌단이 있었다. 산모퉁이를 도니, 저만치에 서낭나무가 보였다. 나는 잠시 주저하다가, 걸음을 서둘렀다. 나무 아래에 누군가 웅크리고 있기에 흠칫, 놀랐다. 다가가서 보니, 옆집에 사는 동갑내기 순영이었다. 얼굴을 무릎에 파묻고 울고 있었다. 내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니, 와 여기서 울고 있노?”

“우리 소가, 소가 안 보인데이……”

순영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한다. 어제부터 그의 오빠가 몸이 좋지 않다더니, 순영이를 산에 보낸 모양이다. 그는 소를 먹이는 데 서투르고, 게다가 소가 사나워서 다루기 힘들었던 것이다. 순영이네 소는 크고 기운이 세어 ‘장군’이라고 불렸다. 내가 누렁이의 고삐를 나무에 묶으며 말했다.

“여기서 기다리거라. 걱정마라, 내가 너그 소 찾아올끼다.”

나는 넓적한 돌을 하나 주워서 돌무덤에 던지고, 소를 찾을 수 있기를 빌었다. 산을 오를 때,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며 땅에서 비안개가 일어났다. 앞이 잘 보이지 않고, 나뭇잎을 두드리는 빗소리만 요란했다. 소나기가 쏟아지는 가운데 산등성이와 골짜기를 헤매고 다녔다. 비에 젖은 삼베옷이 몸에 감겼다. 산비탈을 오르내릴 때 물이 찬 검정 고무신이 벗어졌다. 덤불에 긁히고 미끄러져 넘어졌다. 장군을 부르며, 한참동안 여기저기 헤맸다. 마침내 산중턱 후미진 곳에서 “움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소가 놀라 도망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접근하여, 뒤에 끌려 다니는 고삐를 잡았다. 장군을 끌고 순영이가 있는 곳으로 의기양양하게 갔다. 순영이의 얼굴이 밝아졌다. 내가 나무에 맨 누렁이의 고삐를 풀면서 말했다.

“너그 소가 사나우니까, 내가 산 아래까지 끌고 갈끼다. 니는 내 뒤에 서거라.”

장군을 앞세우고, 나와 그는 가운데서 누렁이를 끌고 산을 내려갔다. 소의 턱밑에서 딸랑거리는 워낭 소리가 빗속에서 명랑하게 들려왔다. 서낭나무를 지나서 언덕으로 난 길을 따라가다가 저수지를 끼고 돌면, 마을로 들어가는 길로 이어진다. 동네 근처에 가서, 나는 순영에게 고삐를 넘겨주었다.

“소가 뿔로 받을 수 있으니까, 소 앞에서 가지 말거라. 그렇다고 너무 바짝 쫓아가면 뒷발에 차인다 아이가. 조심하거라.”

순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마당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서둘러 골목을 따라서 집으로 갔다. 저녁밥 짓는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와 함께 돌담길에 어둠이 땅에 깔렸다. 내가 누렁이를 데리고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부엌에서 일하던 외숙모가 예상대로 역정을 냈다.

“다른 아들은 벌써 왔는데, 니는 뭐 하다 이제 오노?”

“옆집 성네 소를 찾아 주었심더.”

“그 아는 눈이 없고, 손발이 없더나?”

외숙모로부터 꾸중을 들었지만, 그다지 서럽지 않았다. 순영이가 오빠 대신에 소 먹이러 왔다는 말을 구태여 하지 않았다. 누렁이를 외양간에 들이고 꼴망태를 정리했다. 돌담장 너머 순영이네 집 쪽을 바라보았다. 비에 젖고 추워서 몸이 떨리지만, 가슴은 뿌듯했다.

2. 가을

집에서 학교까지 가는 길은 십리쯤 된다. 아이들은 책보를 메고, 산길을 걸어서 학교에 다닌다. 산야에는 철따라 꽃이 바뀐다. 지나다니며 만나는 야생화는 새삼스레 반가웠다. 이른 봄에 산허리에서 꽃망울을 터뜨리는 진달래, 양지바른 곳에 옹기종기 모여 피는 남빛 봄까치꽃, 다소곳이 숨어 피는 제비꽃, 여름에 흰색 또는 보라색으로 피는 도라지꽃, 붉은색 패랭이꽃, 가을이면 길가에서 한들대는 코스모스, 산비탈에 퍼져있는 하얀 구절초……. 교실 뒤 학급문고에 낡은 야생화 도감이 한 권 있는데, 나는 종종 그 책을 뒤적이며 풀꽃들의 이름을 익혔다. 나는 산으로 나무하러 가거나 소 먹이러 가는 일을 좋아했다.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았다. 산과 들은 나에게 푸근한 벗이었다. 거기서는 무서운 외숙모의 꾸중이 없고, 가탈을 부리는 외사촌들에게 시달리지 않아서 좋았다.

맑은 하늘 아래 햇볕을 받으며 벼가 여물어가는 가을날이었다. 교실 청소를 마친 우리 분단은 담임선생님의 검사를 받고 하교했다. 마을 아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혼자서 탱자나무 울타리를 지나 미루나무가 서 있는 신작로를 따라 걸었다. 풀밭에서 여치가 찌르르찌르르 하고 울고, 논에는 고추잠자리가 날아다녔다. 멀리 저수지 아래에 있는 논두렁에 누군가가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순영이었다. 왜 동무들과 어울려 집에 가지 않았을까? 누군가를 기다린 것 같았다. 나는 그냥 지나치려다가, “거기서 뭐 하노?” 하고 말을 건넸다. 그는 수줍어하며 자연 숙제를 한다고 대답했다. 그제야 며칠 전에 선생님이 주변에서 가을에 피는 꽃을 관찰하고 풀꽃의 이름을 알아보라는 숙제를 내준 것이 생각났다. 순영이가 “이건 무슨 꽃이고?” 하며 논두렁 아래에 피어 있는 작은 꽃들을 가리킨다. 나는 논두렁으로 내려가면서 대답했다.

“고마리 아이가!”

“고마리…, 꽃이 작아서 그렇지, 가만히 보니 참 예쁘데이.”

나도 그의 옆에 앉아서 묶음으로 이루어진 작은 꽃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고마리와 여뀌가 습지를 따라 무리지어 있었다. 군데군데 하얀 쇠별꽃도 숨어 있었다.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나는 꽃 이름을 말해 주었다. 우리는 제방에 난 길을 따라 저수지 쪽으로 올라갔다. 둑비탈에 며느리배꼽이 얽혀 있었다. 내가 열매를 따서 엄지와 검지로 누르자 배꼽처럼 생긴 푸르스름한 주머니가 찢어지면서 까만 씨알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목걸이 만들면 좋겠다는 그의 말에, 나는 공책을 한 장 뜯어내어 봉투를 만들었다. 우리는 둑비탈에 앉아서 며느리배꼽의 씨알을 모았다. 얼마쯤 지나서 둘은 둑에 올라서서 저수지를 바라보았다. 저수지는 학교 운동장만큼 넓었다.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이 물거울에 비쳤다. 물 위에 날던 잠자리들이 가끔씩 꼬리로 수면을 건드려 작은 파문을 그렸다. 우리는 억새가 무성한 둑길을 걸어서 신작로 쪽으로 갔다. 집에 가려면 신작로를 따라서 고개를 넘어야 했다. 산비탈에는 구절초, 쑥부쟁이, 산부추 등이 여기저기 피어 있었다. 순영은 쪼그리고 앉아서 꽃을 가만히 살펴보고 향기도 맡아보았다. 그러다가 꽃 이름을 물었다. 그의 물음에 대답할 때마다, 나는 내심으로 자랑스러웠다.

고갯마루에 있는 샘터에 이르러, 우리는 칡 이파리를 고깔 모양으로 접어서 샘물을 마셨다. 목이 말랐는데 샘물이 시원했다. 문득 청소하고 나서 받은 강냉이 빵이 생각났다. 나는 책보를 풀어, 구운 빵을 꺼내 반으로 쪼갰다. 갈색 껍질이 갈라지면서 노란 속살이 드러났다. 한쪽을 순영에게 내밀었다. 우리는 갈참나무 그늘에 앉아서 빵을 먹었다. 시장하던 차에 빵은 고소하고 맛있었다. 가을 오후의 따가운 햇살이 산야에 비쳤다. 순영이는 오면서 꺾어온 꽃을 간추리면서 말했다.

“니는 와 외갓집에서 사노? 너그 엄마는 언제쯤 오시노?”

“엄마가 서울에서 돈을 많이 벌면, 나를 데리러 올 끼라.”

“그라먼 니는 엄마 따라 서울로 갈끼가?”

“하머! 다른 애들처럼 내도 엄마하고 같이 살고 싶데이.”

그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란대, 너그 아부지는 어디 있노?”

“……”

갑자기 나는 잘못하다 들킨 사람처럼,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이 막혀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우리 가족에게 아버지라는 존재는 입에 올리거나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는 금기였다. 아버지 이야기만 하면 엄마는 눈을 꿈적이고 손으로 입을 가리며 아무 말도 못하게 했다. 엄마의 그러한 행동은 두려움과 부끄러움의 감정을 품게 하였다. 나는 먼 산 위를 흐르는 조각구름을 바라보았다. 얼마쯤 지나서야 나는 크게 숨을 쉬고 나서 겨우 말을 이었다.

“우리 아부지는… 산에서 산데이.”

“산에서 무슨 일 하노? 약초 캐나, 숯 굽는 일 하나?”

“좋은 세상 맹근다 카는데…, 무슨 일인지 내도 모르겄다.”

나는 힘들게 대답했지만, 순영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다행히도 아버지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순영은 산 아래서 꺾어온 꽃으로 꽃다발을 만드는 데 마음을 모으고 있었다. 주변을 살피며, 꽃마다 이름을 지닌 것이 신기하다고 말했다. 나도 그를 따라서 주위를 살펴보았다. 근처에서 며느리밑씻개 이파리를 따서 입에 넣고 씹었다. 시큼한 맛이 났다.

“시어무이가 똥꼬 닦으라고 딸한테는 보드라운 딸밑씻개 이파리를 따주고, 며느리한테는 가시 돋친 며느리밑씻개를 준다 아이가.”

내 말을 듣고 그는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 * *

문득 나는 할머니로부터 꾸중을 듣던 엄마를 떠올렸다. 무슨 까닭인지 할머니는 자주 엄마를 나무랐다. 아버지가 산 속에 숨어 있는 것도 엄마가 아버지를 잘 섬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할머니는 어서 가서 아버지를 찾아오라고 하였고, 그때마다 엄마는 홀로 부엌에서 한숨을 쉬며 눈물짓곤 하였다. 왜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미워할까? 왜 가시가 돋치고 못생긴 풀이름에는 ‘며느리’가 붙어 있을까? 어째서 아버지가 산에서 숨어서 살아야 할까? 언제쯤 집으로 돌아올까? 세상에는 어린 내가 이해하지 못할 일이 참 많았다.

몇 해 전 난리가 날 즈음에, 마을 사람들은 두 패로 나뉘어 다투곤 했다. 그때 아버지는 소리 높여 언쟁하고,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기도 하였다. 마을에는 아버지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제 곧 모든 사람들이 잘 사는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얼마 지나서 전쟁이 일어났다. 설날을 앞두고 한 무리의 군인들이 공비를 소탕하는 작전을 수행한다면서, 산골 부락 사람들을 마구 죽였다. 주로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나 어린이들이 죽었다. 우리 할아버지도 그때 돌아가셨다. 딴 곳에 일 보러 갔다가 뒤늦게 마을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집에 들르지도 않고 지리산으로 도망했다. 그 길로 아버지는 산사람이 되었고, 우리 가족은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엄마는 몇 차례 경찰서에 다녀왔고, 잠을 잘 때 앓는 소리를 냈다. 이따금 아버지가 산사람들과 함께 식량이나 약품을 구하러 마을에 다녀갔다는 소문이 돌았다. 마을의 이장인 큰아버지는 경찰이 시키는 대로 마을 사람들을 장터에 불러 모아, 산사람들에게 절대로 양식과 옷을 내주어서는 안 된다고 부락민들을 단속했다. 장정들을 데리고 다니는 큰아버지는 권세가 있어 보였고, 경찰 아저씨들과도 친하게 지냈다. 그런데 아버지가 왜 산 속에서 숨어 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종종 아버지에 대한 엄마의 푸념과 원망을 듣곤 했다.

오랫동안 아버지한테서 연락이 끊어졌다. 아버지가 산사람이 된 이후로, 우리 집은 갈수록 살기가 어려워졌다. 엄마가 경찰서에 다녀온 뒤에 앓아누워 있을 때, 우리 가족은 며칠 동안 끼니를 굶었다. 친척집에서는 우리가 드나드는 것을 꺼려했다. 큰집 주변을 기웃거리는 나를 발견한 큰어머니는, 잘못하면 경찰서에 붙들려 가니까 다시는 얼씬거리지 말라고 하면서 등을 떠밀어 보냈다. 집에 양식이 떨어지면 이웃에서 곡식을 얻어 오거나 남은 밥을 빌어 왔다. 때로는 양조장에 가서 술찌끼를 얻어서 사카린을 넣고 냄비에 데워서 먹곤 했다. 빈속에 술찌끼를 먹고 뺨이 발그레하게 취하기도 했다. 어느 날 누나와 나는 그릇을 들고 아랫담에 있는 양조장으로 내려갔다. 마당에 있는 평상에서 술을 마시던 몇몇 어른들이 우리를 아는 체 하였다. 구레나룻이 무성한 아저씨가, 누나더러 “아직도 아부지 소식이 없나?” 하며 말을 걸었다. 누나는 “야!” 하고 짧게 대답했다. 옆에 있던 홀쭉하고 키 큰 아저씨가 혀를 차며 “우짤라꼬 처자식을 버리고 산으로 갔을꼬?” 하고 말했다. 앞에 앉은 구레나룻 아저씨가 단숨에 술잔을 비우고 말을 받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그 상황에서 너라면 우찌 했겠노?”

키다리 아저씨는 고개를 흔들면서 담뱃불을 비벼 껐다.

“산에 들어간다고 일이 해결되나? 가족한테 몹쓸 짓이제.”

구레나룻 아저씨가 김치 조각을 씹으며 말을 받았다.

“모두 잘 사는 세상 맹글어 보겠다고 하다가 그리 된 거 아이가.”

“그렇다고 빨갱이 편을 들어서야 되겄나?”

“산에 들어갔다고 모두 빨갱이는 아니제.”

“국군하고 싸우면, 빨갱이고 공산당이제. 안 그러나?”

“양민을 해친 군인과 경찰이 산사람보다 나은 게 뭐가 있노?”

“말조심하거라!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아이가.”

그들이 말싸움을 하는 동안, 나와 누나는 재강이 담긴 그릇을 들고 양조장을 나섰다. 우리는 얻어온 재강과 동치미로 저녁식사를 대신했다.

3. 겨울

살림에 쪼들린 엄마는 돈을 벌려고 무작정 객지로 나갔고, 누나는 아이 보고 심부름하며 남의 집에서 살게 되었다. 나는 몇몇 친척집을 옮겨 다니다가, 일곱 살이 되던 해에 외갓집으로 왔다. 남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는 나는 늘 춥고 배가 고팠다. 외숙모는 먹기 싫다고 투정하는 자기 아들에게는 솥 가운데 따로 지은 쌀밥을 소복이 담아 주고,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하는 나에게는 보리밥을 피워 주었다. 때때로 나는 잠자리에서 오줌을 쌌다. 이른 아침에 키를 쓰고 이웃집에 소금을 얻으러 가면, 이웃집 아주머니는 버릇을 고쳐야 한다면서 밥을 푸던 주걱으로 내 뺨을 때렸다. 하지만 그러한 충격 요법은 나에겐 별로 효험이 없었다. 어느 초겨울 아침, 눈을 뜨니 또 바지와 이부자리가 젖어있었다. 외숙모는 역정을 내며 오줌에 젖은 바지를 그대로 입고 학교에 가게 했다. 바지는 뻣뻣하게 얼어서 걸을 때마다 서걱거렸다. 학교 가는 길에 아이들은 내 뒤를 따라오면서 놀려댔다.

“올라리 꼴라리, 오줌싸개 나왔네. 키를 쓰고 나왔네, 소금 꾸러 나왔네!”

미술시간에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가족을 그리게 했다. 나는 어릴 때 헤어진 아버지의 얼굴을 알지 못했고, 서울로 떠난 엄마의 모습도 잘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크레용이 없어서 나는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내 옆을 지나가던 선생님은 왜 그림을 그리지 않느냐고 물었다. 크레용이 없다고 대답했다. 선생님은 옆에 앉은 짝에게 함께 나누어 쓰라고 하였지만, 짝은 새로 산 크레용이 아까운지 선뜻 내어놓지 않았다. 선생님은 교사용 책상을 뒤지더니 크레용을 빌려 주었다. 나는 엄마의 모습을 떠올리려 애썼다. 그러다가 머리에 비녀를 꽂고, 하늘색 저고리와 남색 치마를 입은 여인을 그렸다. 내 그림은 다른 아이들 그림과 함께 교실 뒤에 있는 게시판에 붙어 있었다. 그림을 볼 때마다 엄마가 하늘색 저고리와 남색 치마를 입고 교실에 들어 올 것 같았다.

때때로 서울로 간 엄마가 사무치게 보고 싶었다. 해가 질 때면 그리움과 설움이 더욱 짙어졌다. 산에서 들려오는 구슬픈 산비둘기 울음을 따라서, 나도 소리 내어 울었다. 언젠가 엄마를 찾으러 나섰다가 깊은 산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었다. 저 멀리 건너편 산기슭에는 언제나 그 자리에 한복을 입은 사람이 서 있었다. 나는 엄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덤불을 헤치고 골짜기를 지나서 산기슭으로 올라갔다. 그곳에 가보았더니, 거기에는 줄기만 남은 고목나무가 서 있었다. 멀리서 보면, 나무의 밑동 부분이 사람처럼 보였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다가 방향을 잃고서 산속을 헤맸다. 배가 고파서, 약초꾼들이 바위에 올려 둔 고수레 밥을 먹었다. 날이 어두워져서 폐허가 된 산막에서 하룻밤을 울면서 지새웠다. 다음날 다행히도 심마니 할아버지가 근처를 지나갔기에, 나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대로 물을 길어 나르고, 뒷산에 나무하러 갔다. 해질녘에 솔가리를 한 짐 지고 산에서 내려왔다. 마을 어귀에서 순영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근래에 제대한 삼촌이 사 준 것이라며, 크레용 한 통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평소에 가지고 싶어 하던 열두 가지 색 크레용이었다. 그는 집에 돌아와서 크레용 뚜껑을 열어보았다. 깨끗한 종이옷을 입은 크레용들이 얼굴을 내밀고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 크레용 냄새를 맡으니, 풀꽃 향기가 나는 듯했다. 그런데 그날, 외사촌 형이 학용품을 살 돈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내가 부엌에서 불을 때고 있을 때, 형이 나에게 돈을 보았느냐고 물었다. 나는 못 보았다고 말했다. 조금 지나서 형은 내 책보를 들고 와서 새 크레용을 꺼내 보이며, 그것이 어디서 났는지 물었다. 나는 당황하여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우리만이 간직한 비밀을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 때문에 순영이가 놀림받을 것이 싫었다. 형은 우물쭈물하는 나를 더욱 의심했다. 그때 마을 샘터에 갔던 외숙모가 물동이를 이고 부엌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고?” 하고 묻자, 형은 내가 제 돈으로 크레용을 샀다고 일렀다. 나는 아니라고 하였지만, 성격이 급한 외숙모는 일의 속내를 알아보지도 않고 악악댔다. “어디서 거짓말을 하노! 훔친 것도 나쁜 데, 거짓말까지 할끼가?” 하며, 부지깽이로 내 머리와 어깨를 거듭 때렸다. 나는 매를 맞으면서도 크레용이 어디서 났는지 끝내 말하지 않았다. 크레용은 써보지도 못하고 형의 몫이 되었다. 그날따라 아궁이에 불이 잘 들지 않았고, 바람이 거꾸로 불어서 연기가 많이 났다. 눈에 맺힌 눈물로 시야가 흐렸다. 나는 숨죽여 울면서 아궁이에 나무를 집어넣었다. 순영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서.

미술시간에 나는 그림을 그리지 않고 멀거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까부터 흘끔거리는 순영이의 눈길이 뒷머리에 와 닿았다. 선생님이 도화지와 크레용을 갖다 주었다. 마음이 어지러워 내가 무엇을 그렸는지 모르겠다. 방과 후에 교실 청소를 마치고, 나는 혼자서 신작로를 따라 걸었다. 길 양쪽에는 잎이 다 진 미루나무가 서 있었다. 추수가 끝난 논은 텅 비어 쓸쓸했다. 하늘이 흐린 걸 보니 눈이라도 올 것 같았다.

고개를 넘고 신작로에서 벗어나 마을로 이어지는 길로 들어섰다. 언덕을 넘어서니 바람이 없는 곳에서 순영이가 혼자 앉아 공기를 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한동안 서서 지켜보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다가가자, 그는 벼르고 있었다는 듯이 따졌다.

“니는 와 미술시간에 구리용 안 썼노?”

갑작스러운 물음에 나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내가 준 구리용 어쨌노?”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머릿속이 하얗게 되고 혀가 굳어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가 재차 물었을 때, 나는 간신히 대답했다.

“그건…… 그걸 성한테 줬다.”

“머라꼬? 내가 준 걸 남한테 줬다고?”

순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치마에 들어있던 공기돌이 바닥에 흩어졌다.

“와? 내가 준 게 싫더나?”

그는 차가운 표정으로 흘겨본다. 그의 큰 눈에 눈물이 맺혔다.

“아, 아이다! 사실은……”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옹크리고 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잘못한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울음이 잦아들 즈음에 나는 조심스레 순영에게로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미안하데이. 내가 잘못했데이.”

나는 흩어진 공기돌을 주우며 말했다.

“사실은…… 성한테 구리용을 뺏깄다 아이가.”

나는 그날에 일어난 일을 조심스레 이야기했다. 순영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니는 자기 물건을 뺏기면서 바보같이 한 마디도 못했나?”

“훔친 게 아이라 캤는데도……”

속마음을 털어놓고 나니 마음이 후련했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해졌다.

“우리 아지매하고 성한테는 아무 말도 하지 말거래이.”

나는 오늘 한 말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다짐을 받았다.

그날 저녁에 여물을 삶는 가마솥 아궁이에 내가 불을 때고 있을 때, 순영이네 삼촌이 찾아왔다. 그의 삼촌은 제대하고 농사일을 도우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어린 것이 일도 잘하고 공부도 잘한다고, 순영 삼촌은 나를 대견스러워했다. 잃어버린 소를 찾아주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에게 고마워했다. 그 집에 심부름을 가면 그는 언제나 나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외삼촌과 순영 삼촌은 한참동안 이런저런 환담을 나누었다. 그런 다음에 순영 삼촌은 크레용에 관하여 이야기를 꺼냈다. 자초지종을 들은 외삼촌은 형과 나를 불러들였다. 우리가 방에 들어가 앉자, 외삼촌이 형에게 말했다.

“구리용이 우찌 된 일이고?”

“야가 내 돈을 가지 가서 구리용을 샀어예.”

형이 대답하자, 외삼촌이 타일렀다.

“다른 사람을 함부로 의심해서는 안 되재. 구리용은 아재가 야한테 준 기다.”

외삼촌은 아들에게 크레용을 가져오라고 하였다.

“자, 그건 네 끼 아이다. 동생한테 돌려 주거라.”

형은 나에게 눈을 흘기면서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크레용을 내게 내밀었다. 이어서 순영 삼촌이 그에게 공책 한 권과 연필 몇 자루를 주었다.

“이건 너한테 주는 선물이데이. 서로 사이좋게 지내거라.”

형은 공책과 연필을 받고 좋아라 했다. 순영 삼촌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마당에서 걸음을 멈추고 뒤따라 온 내 등을 토닥거리며 말했다.

“힘내고, 열심히 공부하거라. 시간 나는 대로 우리 집에 놀러 오너라.”

얼마 후에 형은 책갈피에서 돈을 찾았다. 다행히도 나와 순영을 두고 놀리는 일도 없었다. 나는 산에 갈 때도 크레용과 공책을 가지고 갔다. 갈퀴로 솔가리를 긁어모아 바지게에 얹힌 발채에 가득 채워놓고, 전망이 좋고 양지바른 곳에서 크레용으로 풍경화를 그렸다. 저 멀리에 학교 가는 길과 고개가 보였다. 그 뒤로 산봉우리가 거리에 따라서 명암을 달리하여 연이어 있었다. 서울에 간 엄마가 하늘색 저고리와 남색 치마를 입고,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고갯길을 넘어오는 듯했다. 하늘과 산과 고갯길이 어우러져 한 폭의 풍경화를 이루었다. 나무하러 가는 산에서, 학교 오가는 길에서, 짬이 날 때마다 다 쓴 공책에 그림을 그렸다. 미술시간에 선생님이 내 그림을 칭찬하곤 했다.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릴 때, 나는 시름과 설움을 잊었다.

고갯마루에는 두 산봉우리 사이에 놀기에 적당한 평지가 있었다. 거기에서 아이들은 학교 오가는 길에 갖가지 놀이를 하면서 쉬어갔다. 여자애들은 한쪽 구석에서 공기놀이나 고무줄을 하고, 남자애들은 비석치기나 말 타기를 했다. 때로는 지기 싫어하는 사내아이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기도 했다. 싸움꾼 땡삐는 한두 살 많은 아이들을 이겼다. 이웃 마을 형들도 그를 집적거리지 않았다. 고갯마루에 오르자, 아이들은 집에서 가져온 고구마를 꺼내놓았다. 성미 급한 아이는 날것으로 먹었다. 살짝 얼린 날고구마를 꼭꼭 씹으면 단물이 배어나온다. 군고구마는 더욱 맛있다. 나뭇가지를 줍고 솔가리를 긁어모아 가지고 와서 불을 피웠다. 아이들은 불가에 둘러서서 언 몸을 녹였다. 모닥불이 사그라질 즈음에 고구마를 던져 넣고 흙과 재로 덮었다. 아이들은 땅 따먹기와 비석치기를 했다. 한참 놀고 나서 재를 뒤적여 익은 고구마를 꺼냈다. 껍질을 벗기자 노란 알몸이 드러나고, 달콤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아이들은 호호 불며 군고구마를 먹었다. 제대로 익지 않아 서걱거려도 맛있었다. 집에서 고구마를 가져오지 못한 나는 무리에서 빠져나와 책보를 쌓아둔 곳에 혼자 앉아서, 나뭇가지로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머리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흐린 하늘에는 눈발이 서있었다. 집에 가는 대로 샘물을 길어놓고, 솔가리를 한 짐 해 와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때 순영이가 다가와서 책보를 찾는 체하더니, 아무도 모르게 조그만 고구마를 하나 내 손에 쥐어주었다. 손 안에서 군고구마가 따뜻했다. 잿빛 하늘도 포근하게 느껴졌다.

산골마을의 겨울은 춥고 길었다. 한겨울에도 아이들은 옷이 얇았고, 거의 장갑이나 양말 없이 지냈다. 불에 달군 돌멩이는 손난로 구실을 한다. 아침 식사를 하는 동안 아궁이에 조약돌을 묻어두었다가, 헝겊에 싸서 학교까지 품고 간다. 나는 종종 개울에서 돌멩이를 주워서 아궁이에 넣어두었지만, 외사촌들이 먼저 차지하는 바람에 내 몫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느 날 아침, 외양간에 여물죽을 나르느라고 다른 애들보다 출발이 늦었다. 책보를 등에 메고 빠른 걸음으로 서둘렀다. 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언덕 아래 양지 바른 곳에 이르니, 순영이가 혼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그는 일어나서 수건에 싼 물건을 내밀었다. 불에서 끄집어낸 지 오래 되지 않은 따끈한 조약돌이었다. 나는 두 손으로 조약돌을 꼭 쥐었다. 우리는 별 말 없이 고갯길을 함께 넘었다. 저 멀리에 학교가 보이는 곳에서 그는 단발머리를 나풀거리며 앞서 뛰어갔다. 나는 멀찍이 떨어져 걸어갔다. 고개를 넘기 전에 조약돌은 식었지만, 호주머니 속에서 그것을 움켜쥐고 걸었다. 한겨울의 날씨지만, 돌에 깃든 온기로 춥지 않았다. 그 뒤로 그는 두어 번 더 조약돌을 몰래 건네주었다.

4. 봄

새 봄이 오자, 마른 풀 밑에서 새싹이 돋아났다. 갯버들에 물이 오르면, 아이들은 버들개지를 따서 먹는다. 논두렁이나 들에 돋는 띠의 새순인 삘기를 뽑아 까서 씹으면 솜처럼 보드랍고 달짝지근한 맛이 우러난다. 지난겨울에 눈이 많이 와서 보리도 잘 자랐다. 그루갈이할 무렵이었다. 나는 수업을 마치는 대로 서둘러 귀가했다. 그날따라 엄마가 무척 그리웠다. 왜 그런지 마음이 불안했다. 집에 도착하니 아무도 없었다. 나는 툇마루에 책보를 벗어던지고 골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 순영이가 조약돌을 줄 때마다 나는 그것을 깨끗이 씻어서 골방 구석에 걸린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힘든 일을 겪거나 엄마가 보고 싶을 때면, 가만히 골방에 들어가서 그것을 꺼내어 어루만지곤 했다. 주머니 안에 있는 돌멩이는 나에게 비밀스러운 보물이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주머니 안에는 순영이가 준 조약돌이 들어있어야 했다. 그런데 빈 주머니만 벽에 걸려 있었다. 쌀가마니와 곡식자루들의 자리가 달라진 것을 보아, 어른들이 골방을 청소하고 정돈한 모양이었다. 나는 골방 구석구석 뒤졌으나, 조약돌을 찾지 못했다. 마침 밭에서 돌아오는 외숙모에게 주머니에 든 것을 물어보았다. 그는 모른다고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쓸 데 없는 것은 거름 쌓아둔 데 갖다 버렸다고 말했다. 거름 터에 가 보았지만, 그것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 논에 거름을 실어 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눈물이 그렁그렁하여 논으로 달려갔다. 논에서는 외삼촌이 “이랴, 저랴!” 하면서 소를 부리며 써레질을 하고 있었다. 인사도 잊은 내게 외삼촌이 먼저 말을 걸었다. “학교에 댕겨왔나?” 하는 말에 나는 “야!” 하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흙탕물 속을 손으로 더듬었다. 외삼촌은 내가 미꾸라지를 잡는 줄로 알았을 것이다. 날이 어두워지도록 여기저기 찾아보지만, 내 보물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날 밤에 나는 이불 속에서 소리를 죽이고 서럽게 울었다. 먼 산에서 소쩍새도 솟쩍, 솟쩍, 하며 애잔하게 울었다. 한동안 나는 시린 가슴을 안고 산과 들판을 헤매곤 했다. 신록의 계절이 왔건만, 내 마음에는 아직도 서러움이 잔설처럼 남아있었다.

모내기를 할 즈음에, 서울에 있는 엄마로부터 편지가 왔다. 엄마가 남의 손을 빌려 쓴 편지의 내용은, 이제 내가 엄마와 함께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남의 식당에서 일하던 엄마는 청계천변 노점에서 밥장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일 학기를 채 마치지 못하고, 나는 서울의 동대문 근처에 있는 국민학교로 전학하게 되었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서울 가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수업시간 중간에 선생님은 나를 불러내어, 작별 인사를 하게 했다. 뒤를 쫓아다니며 오줌싸개라고 놀리던 몇몇 개구쟁이들은 서울로 가는 나를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동안 잘해줘서 고맙데이. 두고두고 보고 싶을 끼라……”

나는 목이 메여 말을 잇지 못하고,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창가에 앉은 순영이가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소를 잃고 서낭나무 아래서 울고 있던 모습이었다. 개울가에서 공기 돌을 쏟고 눈을 흘기며 울던 모습이 동시에 떠올랐다. 나는 말을 맺지 못한 채,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외삼촌은 모내기를 마치는 대로 전학 수속을 밟았다. 나는 엄마가 사서 보낸 큰 치수의 검남색 교복을 입고, 외삼촌을 따라 나섰다. 낮에 집을 나서서 먼 길을 걷고 버스를 갈아타고 하여 저녁 즈음에 남원역에 도착했다. 역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국밥을 먹었다. 평소와는 달리, 한 그릇을 못 다 먹고 남겼다. 외삼촌은 매점에서 소주와 안주거리를 사고, 나에게는 건빵과 사이다를 사서 주었다. 대합실에서 한참 기다리다가, 늦은 밤에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열차는 철컥거리며 철로를 따라 움직였다. 창밖의 불빛이 뒤로 지나갔다. 밤이 깊어지자 나는 한기를 느껴 몸을 움츠렸다.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을 때, 부드러운 것이 손에 잡혔다. 앗차! 조약돌을 쌌던 순영이의 손수건이었다. 며칠 전에 깨끗이 빨아서 말렸는데, 건네줄 기회를 찾지 못했다. 그가 준 조약돌을 잃어버려 안타깝고 아쉬웠다. 미안한 마음에 나는 그에게 이별의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엄마의 얼굴 위에 순영이의 얼굴이 겹쳐졌다. 잃어버린 소를 찾아서 산을 헤매던 일, 풀꽃 피는 길을 따라서 함께 걷던 일, 불에 데운 돌과 군고구마를 남몰래 건네던 손, 크레용으로 그린 풍경들…… 그와 함께 겪은 작은 일들이 주마등같이 지나갔다. 불현듯 지난날이 눈물겹도록 그리워졌다. 오던 길을 되돌아가고 싶었다. 잃어버린 조약돌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잠 자고 일어난 외삼촌이 소주잔을 비우고 나서, 자지 않고 있는 나에게 말을 걸었다.

“엄마 만날 생각하니까, 잠이 안 오나? 서울 학교 가이까 좋재?”

호주머니 속에서 손수건을 만지작거리던 나는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마음을 다잡고 외삼촌에게 말했다.

“저, 서울에 있는 학교로 전학 가기 싫어예.”

“머라꼬? 니, 방금 머라 캤노?”

“외갓집에서 학교 댕기면 안 되겠심니꺼?”

“서울 가기 싫다고? 헛참! 네 속을 모르것다.”

외삼촌은 멋쩍게 웃으며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무심한 야간열차는 기적을 울리며 어둠을 뚫고 서울을 향하여 달려갔다. ♣

※ 군소리:

졸작 “크레용으로 그린 풍경화”는 필자가 겪은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기억의 단편들을 재구성하여 엮은 이야기입니다. 암울하고 험악했던 시절을 반어법적으로 표현하여 ‘아름다운 시절’로 묘사하였습니다. 그 시절에는 국가 권력에 의해 양민이 영문 모르게 죽거나, 목숨을 건지고자 산사람이 되었습니다. 가정의 해체로 인하여 겪은 어린 소년의 외로움과 서러움을 용해하여, 그것을 ‘서정적 비애미’로 승화하고자 하였습니다. 이 글을 지난날에 산사람이었던 아버지에게 바칩니다.

(김종길 jpic1990@naver.com)

▲ 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