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에서 목회할 때, 매 주 월요일 아침은 피곤하면서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날이었습니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몇 사람의 목회자가 함께 모여 ‘성서일과’에 따라 함께 성경을 읽고 말씀의 의미를 깊이 나누는 시간을 가졌거든요. 그 시간을 통해 주일 설교가 구상되었고, 생활 속에 깊이 녹아든 말씀의 힘을 실감할 수 있었지요. 성서일과’는 ‘교회력’(The Church Year)에 따른 성경말씀의 목록입니다. 기독교회는 대림절,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 그리고 성령강림절기 후반을 창조절, 혹은 왕국절기로 그 의미를 확장하여 교회력을 지켜왔습니다. 성서일과에 따른 말씀 선포는 참 유익했습니다.

교회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이야기입니다. 교회력을 좇아 사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애, 그 분의 삶과 호흡을 같이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나라 이야기를 살아가는 것이지요. 우리에게는 자신의 만족에 따라 예배의 성공여부를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신앙은 개인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니까요. 하지만 교회력은 이런 신앙의 사유화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줍니다. 나와 내가 속한 교회 공동체를 뛰어넘어 더 큰 우주적 교회의 일원임을 일깨워주는 주는 것이지요. 교회력은 ‘하나님나라는 나와 내 교회보다 크다!’고 말해줍니다. 교회력에 따른 신앙생활을 하면 멀게만 느껴졌던 하나님나라의 삶이 손에 잡힐 듯 들어오게 됩니다.

기독교회는 초대교회부터 교회력을 소중하게 여겨왔습니다. 개신교회 역시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에서 지키는 성인들의 기념일을 제외하고 교회력의 큰 틀을 지켜왔습니다. 그러나 초기 미국의 청교도들은 교회력을 가톨릭교회나 영국 교회만의 제도로 잘못 인식하여 교회력을 소홀히 하였습니다. 그 결과 많은 미국 교회들이 교회력에 대한 잘못된 전통을 가지게 되었지요. 그래서 가정주일이나 감사절등이 교회력보다 더 강조되는 교회문화를 갖게 되었습니다. 한국교회는 이런 미국교회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아 미국보다 더 미국적인 교회력 부재의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교회력을 더욱 풍성하게 보충해 주는 것이 ‘기독교 배너’입니다. 기독교 배너는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을 상징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배너’는 우리말로 ‘걸개그림’ 혹은 ‘깃발’이라는 말로 번역됩니다. 기독교 배너는 천의 색상과 특별한 상징물을 도안해서 절기를 나타냅니다.

배너는 교회력에 사용되는 기본 색깔 네 가지를 응용합니다. 첫째, 보라색입니다. 보라색은 위엄의 색이면서 겸손과 참회를 상징합니다. 오시는 왕을 기다리는 대림절과 참회와 슬픔, 고난을 나타내는 사순절의 색으로 사용됩니다. 둘째, 흰색입니다. 흰색은 신성한 순결의 색이면서 기쁨과 영광, 승리를 상징합니다. 그리스도의 축제를 나타냅니다. 성탄절과 부활절, 주현절 같은 절기에 이 색을 사용합니다. 셋째, 녹색. 번영과 성장을 나타내는 색입니다. 다른 색에 비해 가장 많이 사용되는 색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성장을 강조합니다. 넷째, 붉은색. 붉은 색은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자기희생, 그리고 성령을 상징합니다. 성령강림절이나 종교개혁일 등에 사용됩니다.

교회력에 따른 신앙의 삶을 살 때 그리스도의 중요한 사건들을 제대로 기념하며 살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을 잘 뒷받침해줄 수 있는 배너는 그 풍성한 상징을 예배와 강단의 풍성함으로 이어지게 합니다. 

실제로 우리 교회의 경우에도 한국의 고유전통인 조각보를 신앙적으로 해석하여 제작한 배너를 통해 교회공동체가 깊고도 다양한 예배의 표정을 갖는 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물론 조각보 작가 이해은 선생의 작가적, 신앙적 역량에 빚진 바가 큽니다. 한 해의 교회력을 마무리하면서 새해의 절기인 대림절을 준비하는 마음이 이렇듯 남다른 데는 배너의 보이지 않는 힘이 크게 작용하고 있음을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