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여름이 지나가고 진부령은 벌써 두 주 전부터 새벽에는 얼음이 얼었습니다. 10일 동안 안개와 구름 속에서 날마다 비를 내리던 진부령에도 추수감사 주일인 오늘은 해님이 방긋이 얼굴을 내밀어 주었습니다. 예배에 드려질 과일과 점심 애찬을 돕기 위한 반찬거리를 들고 오시는 교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 한 해의 감사 제목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가장 감사한 것은 바로 이 곳 진부령으로 삶의 자리를 옮길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진부령 정상의 고즈넉한 여유와 함께 삶을 다듬어 갈 수 있도록 허락하신 주의 은혜가 참으로 감사합니다.

   토요일 저녁에 두 명의 청년이 저희 집을 찾아왔습니다. 제대한지 두 달이 된 두 명의 청년은 추수감사 주일 예배를 함께 드리기 위해 멀리 인천과 대전에서 하루 온 종일을 들여 진부령으로 왔습니다. 우스갯소리로 군대를 제대하고 나면 그 방향으로는 소변도 보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 두 청년은 그동안 아르바이트를 한 돈으로 아이들을 위한 과자와 도넛을 한 아름 사서 왔습니다. 토요일 저녁 교회에 찾아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교회에서 잠을 자고, 주일 예배를 함께 드리니, 마을의 교인들도 다들 반가운 마음에 어쩔 줄을 몰라 하셨습니다. 한 명은 사촌 형과 함께 창업을 하기 위해 다음 주에 전주로 내려간다고 합니다. 또 한 명은 바이올린 전공으로 다음 학기에 복학을 해야 하는데 레슨을 받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합니다. 궁금해 하는 교인들에게 소식을 전하며 이들을 위한 기도 제목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예배 시간에 맞추어 나온 아직은 복무중인 군인들이 얼마나 반가워했을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겠지요?

   누군가 찾아와 준다는 것은 가슴 설레는 일입니다. 문득 차를 마시다가, 퇴근 길 길게 늘어지는 가로등을 보면서, 늦은 저녁 책을 읽다가, 그 사람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단숨에 달려가 만나고 싶은 사람, 두 손을 모아 기도할 때 생각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또 제가 그런 대상이 되기도 한다는 것 또한 감사한 일입니다.

   삼 주 전쯤에 저희 집에 제가 모르는 손님이 다녀가셨습니다. 저는 일터로, 아이들은 학교와 어린이집으로 가고 없는 낮 시간에 제 칼럼을 보고 저와 아이들이 너무 궁금해서 보고 싶어 찾아오셨다고 하셨답니다. 집으로 들어오시라는 남편의 권유를 마다하시고 두 장의 예쁜 책갈피와 20장의 문화상품권을 저와 아이들의 선물이라며 주고 가셨다고 남편이 전해 주었습니다. 집에서 도로로 내려가시는 손님의 뒷모습을 남편이 사진으로 찍어 제게 보내 주었습니다. 저는 사진 속에 담긴 고마우신 분의 뒷모습을 찬찬히 들여다보았습니다. 따뜻하고 아름다운 뒷모습을 오래오래 마음속에 간직할 것입니다. 그리고 두 손을 모은 아이의 모습이 그려진 책갈피는 다이어리 속에 간직하며 날마다 바라보고 있습니다.

   두 주 전에 인천에서 목회하시는 목사님이 다녀가셨습니다. 속초에 일이 있어 들리신 목사님과 교인들께서 돌아가시는 길에 잠시 진부령에 들러 함께 기도하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 소포가 하나 도착했습니다. 그 날 함께 다녀가신 집사님 한 분이 저희 집 두 아이의 내복을 두벌씩 사서 보내셨습니다. 진부령 정상에 이렇게 어린 두 아이와 젊은 목사 내외가 살 것이라 생각을 못하셨는데 적잖이 놀라셨다며 곱게 손 편지도 써서 넣어 주셨습니다. 추운 겨울을 지낼 아이들이 눈에 밟혀 예쁜 내복을 사서 보내 주신 것이었습니다. 큰아이는 분홍 내복을 입고 좋아하고, 작은 아이는 파란 내복을 입고 만화 주인공 흉내를 내며 재롱을 떱니다. 두 아이의 몸에는 내복이라는 이름의 사랑이 입혀져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하나 떠올려 보면 진부령 밤하늘의 별들처럼 감사할 것들이 삶 속에 촘촘히 박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장 어려운 일이 생기면 원망하고 후회하는 염치없는 사람이 바로 저입니다. 큰 은혜는 잊고 작은 불편을 참지 못해 조급하게 불평한 광야의 사람들이 제 안에도 살고 있습니다. 아홉 번 감사할 것은 잊고 한 번 실수한 것으로 저 자신도, 타인도 용서하지 못하는 머리 검은 짐승이 바로 저입니다.

   이런 저에게 하나님은 오늘도 넉넉한 사랑과 조용한 이해로 ‘당신이 바로 나의 기쁨이고 영광’이라는 바울의 칭찬 편지를 보내주셨습니다.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이 넘치는 칭찬과 사랑을 받으며 날마다 감사할 것이 더해져 갑니다. 행복한 인생입니다. 이 하루 하나님의 넉넉한 사랑을 빌어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거기 그곳에서 부족한 필력의 저와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