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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에 대한 미흡한 이해가 근본 원인이다
박창진  |  5016park@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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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년 10월 28일 (수) 20:39:43 [조회수 : 5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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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언약의 책입니다. 구약은 옛 언약, 신약은 새 언약입니다. 언약이란 무엇일까요? 흔히 언약을 약속이라고 말합니다. 언약에 대한 이해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언약은 구약 성경이 기록될 그 시점의 사회에서 사용되던 표현입니다. 동맹관계를 가리킵니다. 언약에는 동맹의 주체들이 나오고 그 사이에서 이루어진 일들과 조약의 내용이 나옵니다. 조약에는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각각엔 그것을 지키면 주어지는 보상과 어길 때의 처벌이 뒤따릅니다.

성경은 이 개념을 차용하여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과 그 백성이 두 주체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 기록되고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나옵니다. 지킬 때의 보상과 어길 때의 처벌도 있습니다. 보상을 일반적으로 약속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언약의 일부분이지 언약 자체는 아닙니다. 성경에서 언약은 자기 백성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구약과 신약에서 언약의 주체는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들입니다. 옛 언약에서는 옛 언약의 방식으로, 새 언약에서는 새 언약의 방식으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보상과 처벌도 역시나 같이 있습니다. 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 변화되지만 언약의 체계 자체가 바뀌지는 않습니다. 그 안의 내용에 변화가 있을 뿐입니다. 예를 들면 옛 언약 특히 출애굽 이후의 언약에서는 율법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제시하고 있고 새 언약에서는 그 율법을 완전하게 하신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상과 처벌도 내용에 있어서 변화가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순종에 대한 보상이 물질적 번영이었는데 신약에서는 그런 보상이 없어지고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로 바뀐 것은 한 예입니다. 물질적 번영이 하나님의 약속인 메시야를 바라보게 하는 방편이었는데 신약에서 그 실체가 왔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구약을 근거로 얘기되는 번영신학은 다른 복음에 해당됩니다.

구약 성경은 출애굽을 하나님의 구원 역사라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 출애굽에 참여한 이들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입니다. 그들은 홍해를 건너면서 하나님과 그 종 모세를 믿었다고 진술되어 있습니다(출 14:31). 모세가 옛 언약의 중보자이기에 신약적 관점에서는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믿었다는 말과 의미에 있어서 같습니다. 바울 사도가 홍해를 건넌 것에 대해 세례를 받은 것(고전 10:1~2)이라고 말함도 같은 맥락입니다.

신약에서 세례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그 마음을 열어 복음을 따르게 하시는 역사 안에서 한 사람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게 됩니다(행 16:14). 이를 신학적으로 불가항력적인 은혜(효력 있는 부르심)라고 합니다. 이는 출애굽을 한 이들이 하나님의 그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였다는 말이 됩니다. 그들은 광야 생활에서 반석에서 나온 물을 마셨는데, 바울 사도는 그 반석이 그리스도이고 그들이 마신 물은 신령한 물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0:4). 이는 그들이 구약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였고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여러 은택들을 누렸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서 어떤 이들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범죄합니다. 바울 사도는 그 목록- 우상 숭배, 음행, 주를 시험, 원망-을 쭉 제시하면서 멸망했다고 진술합니다. 이어서 그는 그 일이 고린도 교회 곧 고린도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 거울이 되고 말세를 만난 신자들에게 경계로 기록되었다고 하였습니다(고전 10:11). 효력 있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곧 거듭난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이사야서에는 포도원 비유(사 5:1~7)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포도원을 갖추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좋은 포도를 맺기 위해 더할 것이 없을 정도로 수고하였습니다. 당연히 극상품 포도가 맺힐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들 포도가 맺힙니다. 그에 대해 하나님은 진노하시고 심판하십니다. 바벨론을 통한 유다 멸망입니다.

예수님은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다고 하셨습니다(눅 6:43). 많은 사람들은 이런 내용의 예수님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말합니다. 그래서 거듭나서 진실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곧 믿은 사람은 반드시 행함이 뒤따른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이해는 이사야의 포도원 비유와 정면으로 부딪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정반대의 말씀을 하셨다는 것이 됩니다. 정말 그런가요? 전혀 아닙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무와 사람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있습니다. 나무는 뿌리로부터 주어지는 영양분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만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은혜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무와 열매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은 은혜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에 대한 것입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은혜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은혜에도 불구하고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이사야의 포도원 비유에서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신자는 두 가지가 다 가능하며 선택은 자신의 몫입니다.

출애굽을 생각하면 그 구원에 참여한 이들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를 누린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기계적으로 끌려갔다는 말이 아닙니다. 개개인이 애굽에서 나가는 선택을 하였는데, 그러한 선택이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께서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그 결과를 나오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포도원 비유를 생각하면 유다가 멸망할 때에 그루터기로 분류된 이들이 있습니다(사 6:13). 그들은 바벨론의 침략 때에 죽지 않고 포로 되었다가 돌아오기도 합니다. 멸망한 이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었습니다. 멸망한 이들과 달리 회개하였던 것도 아닌데도 그러한 은혜를 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의 계승을 위해 남긴 자였던 것입니다. 모세 언약에서 포로 후 회복언약인 새 언약(렘 31:31~33:26)으로 넘어가는 역사를 행하시면서 그들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신약 시대에서는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에서 그 마음을 열어 복음을 따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당사자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게 됩니다. 죽었다는 것은 시체라고 보면 됩니다. 스스로 생명을 취하지 못합니다. 외부로부터 생명이 주어져야만 살아납니다. 흙에 생기가 들어감으로 사람이 된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를 불가항력적 은혜 곧 불가항력적 효력 있는 부르심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들어가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부르심으로 가능합니다. 그 부르심이 블가항력적이지 않으면 그 누구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자신 안에 그 부르심을 받아들일 능력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모세 때에는 출애굽이 아니라 그냥 애굽에 남았을 것입니다. 이사야 직후 때엔 회개가 없었기에 다른 이들과 같이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신약 시대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칼뱅의 이중선택사상이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도 확인하게 됩니다. 그는 출애굽 후의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선택에 대한 기술(신 7:7~8)은 민족적 선택의 근거로 제시하고 신약에서 바울 사도의 선택에 대한 기술(엡 1:4~5)을 개인적 선택의 근거로 제시합니다. 언약에 대한 미흡한 이해의 결과입니다. 언약의 한 주체인 하나님의 백성이 민족적 단위이었던 때와 개인적이었던 때의 차이로 인한 것이지 사실은 같은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된 각 시점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질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었습니다. 모두가 동등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중선택의 여지는 아예 없습니다.

오늘날 이 땅의 교회에서는 하나님께서 거듭나게 하신 사람이라면 하나님에 의해 반드시 영원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주장이 있습니다. 참으로 요상하게도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의 근거로 바울 사도의 가르침을 가장 많이 인용합니다. 바울 사도가 말씀한 바와는 완전히 다른 주장을 하면서 그를 가장 많이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 이야기된 바울 사도의 진술은 아주 명백합니다. 다르게 생각할 여지가 없습니다. 만약 신약의 신자들에게 불순종으로 인한 멸망이 없다면 그의 글은 완전히 엉터리가 될 것입니다. 전혀 해당사항이 없는 것을 신자들에게 말하여 공포분위기를 조성한 것일 뿐입니다. 그럴 여지는 전혀 없습니다. 그는 주 예수님께 세움을 입은 사도이며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셋째 하늘에 가서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계시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말씀하고자 하신 바를 그대로 전달한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무조건적인 견인론, 인간적으로 너무 좋습니다. 머리에 총을 맞은 것이 아니라면 그걸 거부할 이유가 없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고 그분의 부르심을 받기만 하였다면 하나님에 의해 영원한 구원을 반드시 받는다는 것이니 말입니다. 절대 안전에 대한 보장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성경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근거로 성경 구절들을 제시하긴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주장이 성경적인 것이 되진 않습니다. 왜냐하면 잘못된 근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견인에 대한 말씀이 아닌 경우입니다. 불가항력적인 부르심에 관한 것인데, 견인에서 사용하는 경우입니다. 다른 하나는 견인에 관한 것이긴 한데 해석을 잘못한 경우입니다. 나무와 열매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과 같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아버지이시기에 그 자녀들에 대해 절대적으로 지키시고 보호하신다고 합니다. 굉장히 그럴 듯하지만 전혀 아닙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역시나 아버지이십니다(시 89:26). 그들의 논리가 옳다면 출애굽하고 홍해를 건넌 이후의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범죄로 멸망하는 이들이 없어야만 합니다. 같은 아버지이시니 말입니다.

성경은 단 한 구절에서도 무조건적인 견인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것을 고수할까요? 성경을 잘못 읽은 것과 절대 안전을 보장받으려는 인간적인 욕심 때문입니다. 이 욕구는 참으로 무섭습니다. 집요합니다. 어떻게든지 붙들고 싶어 합니다. 그래야만 평강이 가능한 줄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놓아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놓아야 합니다. 매순간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영원한 구원을 받으려고 하여야 합니다. 그 길에서 벗어나면 멸망이 있음을 인식하고 두려움과 떨림 가운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참 평강이 있습니다. 두렵고 떨림과 평강이 함께 가는 것입니다. 신앙의 신비인 역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은 언약이라는 틀은 동일하기에 그 안에는 하나님과 그분의 일하심에 있어서 통일성이 있습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은 그 백성들에게 아버지이시고 신약에서도 하나님은 그 백성들에게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은 불변하십니다. 언약에 신실하시다는 말입니다. 무조건적 견인론에서 이 말을 많이 사용하는데,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언약에 신실하다는 말은 명령을 순종함에 대한 보상 곧 약속만이 아니라 불순종에 대한 처벌에도 동일하게 신실하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약속만이 해당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발 좀 바르게 알고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언약에 신실하시기에 무조건적인 견인이 아니라 조건적인 견인이 되는 것입니다. 언약에 신실하시다는 말씀과 무조건적 견인론은 양립불가입니다.

구원의 원리에 있어서도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상태의 어떤 사람들을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부르십니다. 구약에서는 출애굽, 신약에서는 각 개인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들은 산 자가 되었습니다. 산 자는 하나님과 그분의 뜻에 반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약에서는 성령을 선물로 받았고 내주하십니다. 그분이 신자를 이끄시는데, 신자가 그 역사를 따를 수도 있고 육체의 욕심으로 거스를 수도 있습니다. 전자는 영생을 거두고 후자는 썩어진 것 곧 영원한 멸망을 거두게 됩니다(갈 6:8). 이와 다르게 말하는 것은 속이는 것이며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갈 6:7).

신자라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알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따르고자 하는 신자라면 벗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그 놀라운 효력 있는 부르심이 저항할 수 있는 것인데, 내가 받아들여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오만에서 말입니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견인이 선택을 받기만 했다면 영원한 구원이 절대적으로 보장된다는 거짓 복음에서 말입니다. 언약에 대한 미흡한 이해가 아니라 온전한 이해를 통하여 성경적인 구원론을 정립하고 말하며 전하고 실천하는 교회와 신자가 생겨나기를 소망합니다. 간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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