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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적교회① 60년간 믿었던 미신적 확신, “교회성장”KOMIS세미나에서 앨런교수, 운동과 프로그램, 교회와 성직자 중심의 교회 비판
심자득  |  webmaster@dangdang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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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년 09월 15일 (화) 00:12:53
최종편집 : 2015년 09월 21일 (월) 03:43:17 [조회수 : 2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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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에서 일어난 <선교적 교회>라는 운동의 근원적 사건은 1998년 <미셔널 쳐치>라는 책의 출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앨런 교수는 이 책의 공동저자로 참여했다. <선교적 교회>에 몸담고 지속적으로 담론을 발전시켜 온 학자가 많지 않은 현실에서 알렌교수는 목회를 하면서 얻은 현장감을 중심으로 <선교적 교회>를 꾸준히 이끌어 온 대표적 학자다. 현재까지 13권 정도의 미셔널 쳐치와 미셔널 리더십에 대한 책을 저술해 온 북미에서 가장 권위있고 영향력 있는 교수다.

한국교회선교연구소(KOMIS, 이사장 황문찬)는 14일 미국 풀러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선교학자 앨런 교수와 마크 교수를 한국으로 초청해 두 시간에 걸쳐 강연을 들었다. 이 두 신학자는 <선교적 교회>를 중심으로 지역사회에서 어떻게 교회를 섬기며 어떻게 선교적교회를 만들어 갔는지 한국교회에 선교적 보탬을 바라며 북미적 상황에서 설명했다.

 

   
▲ 앨런 교수

앨런 교수는 북미에서 기독교가 침체된 이유로 교회지도자들이 △기능적 합리주의 △교회성장프로그램에 의지 △교회중심적이어야 한다는 신념 △성직자 중심의 교회 등 ‘선교적 교회’가 아닌 교회를 성장시키는데 목적을 둔 인간중심적 교회론을 꼽으며 이를 ‘미신적 확신’이라고 비판했다.

이 비판은 앨런 교수가 “목회자들이나 교회지도자들, 그리고 학자들이 어떤 것을 읽고 가르쳤는지를 거꾸로 추적해 보면 그들이 교회를 어떻게 믿고 있는지 알 수 있다.”고 말한데서 알 수 있듯이 지난 1950년부터 2010년까지의 교회에 대한 책을 읽고 그가 발견한 것들에 기초하고 있다.

성경과 하나님이 중심이 되지 않은 이 ‘미신같은 인간중심적 교회론’을 믿은 탓에 북미 교회가 하강을 불러왔다고 주장한 앨런교수는 결론적으로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는 중간 매개체라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교회를 이끌어 가시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면서 인간중심적 교회에서 하나님 중심적 교회로의 관점의 회복을 제시했다.

또 앨런 교수는 성경을 주의깊게 읽으면 “하나님의 임재나 역사하심은 항상 소외됐고 변두리의 무기력하고 힘없는 소외된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지금도 일하시고 계신 하나님과 동역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미리가셔서 일하고 계시는, 지역사회와 소외된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는 데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선교적’이라고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당당뉴스는 앨런과 마크 교수의 강연을 2회에 걸쳐 연재한다.

 

   
▲ 앨런 교수(좌)와 마크 교수


앨런 (Alan Roxburgh)

   
 

기회를 주어 감사합니다. 앞으로 나누게 될 강의는 북미에서 진행되고 있는 ‘선교적 대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강의가 한국교회 안에서 <선교적 교회>란 무엇인지 깊은 논의를 이끌어 내 한국교회의 선교적 상황에 보탬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북미에서 ‘선교적 대화’가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지 잠간 말씀 드리겠습니다.

‘북미’라고 얘기할 때는 한 개의 나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북미는 커다란 덩어리이기 때문에 그 안에 아주 다양한 나라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북미에서 왔지만 캐나다 사람입니다. 또, 이 선교적 대화가운데 교단적, 교리적 배경을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대화는 북미에서 벌어지고 있는 선교적 대화의 맛보기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이야기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때는 내가 좀 젊었을 때여서 젊은 목회자, 학자들이 전문사역을 시작하는 초기였습니다. 그 때 나를 포함해 젊은 신진 학자들이 모여 ‘선교적교회’라는 주제로 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선교적교회라는 책을 쓰게된 여러 배경중에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당시 미국교회가 겪고 있는 상태 때문이었습니다. 300년 정도의 미국 역사가운데 유럽 중심의 교회운동이 주를 이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교회 개혁 이후에 북미에 수많은 교회가 개척되었습니다. 그 종교개혁 이후에 유럽에서 시작된 감리교회, 루터교, 침례교 등 교리 중심적 운동이 유럽신학에 뿌리를 두고 북미에 개척된 것입니다. 계속 유입되는 이민인구들과 새로 출생하는 인구들 때문에 교회가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북미사회의 주류라고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교회라는 것은 목회자를 잘 양성해서 건물이나 장소를 구하고 그 건물에 교인들을 채우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생각이 60년대 부터70년대에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60년대부터 유럽 교회가 침체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자유주의 신학을 가진 교회들이 침체됐습니다. 보수적인 교회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보수신학 때문에 계속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우리는 보수적인 신학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교회가 성장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보수적인 교회가 성장한게 아니라 자유주의신학에 기반한 교회에 다녔던 성도들이 보수적인 교회로의 이동했기 때문에 엄밀하게 교회의 성장은 아니었습니다. 수평이동은 교회의 성장이 아닙니다. 그래서 90년대 초반이 됐을 때 교회에서 벌어지는 이 수평이동 현상에 대해 초조해 하기 시작했습니다. 북미에서 ‘선교적 교회운동’이 시작된 단초가 바로 이런 현상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이유중에 하나는, 그것도 유럽에서 시작된것이지만 교회생활의 중심에 선교가 놓여 있다는 개념입니다. 북미에 있는 유럽형 교회들이 경험하기에는 매우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세 번째 이유는 뉴비겐이라는 여러분이 잘아는 신학자, 선교적교회를 썼던 모든 저자들은 뉴비겐을 개인적으로 알거나 그 사람의 책을 많이 읽어서 그 사람에게 참 많은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그 책을 썼을 때 기대하지 못했는데 신선하게도 굉장히 빠른 속도로 확장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사서 읽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베스트셀러가 됐습니다. 교회중심적 리더들의 관심을 끌었고 그 사람들의 주요 관심사를 건드리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 오른쪽 맨 앞이 한국교회선교연구소 황문찬 이사장

내가 컨퍼런스를 인도할 때마다 두가지 질문을 합니다. 첫째는 선교적 교회란 무엇인가? 둘째 어떻게 선교적 교회가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개의 질문에 답하려고 전 세계를 강의하고 다녔습니다. 1년전 뉴질랜드에서 강의했는데 내가 어떻게 소개됐냐면 선교적교회에 대해 강의하게될 선교학자라고 소개됐습니다. 당시 구성원들이 장로교, 성공회, 감리교 등 다양한 그룹이었습니다. 내가 그 때 북미에 있었던 교회현상에 대한 긴 연구를 마친 때였기 때문에 내 연구실에는 열 개의 책더미가 있었습니다. 그 책 더미마다 사실은 10년씩의 교회 역사와 현상에 대한 책들이었습니다. 1950년대부터 2000년까지 교회에 대해 씌여졌던 책들을 20년동안 수집했습니다. 부끄럽게도 다 읽었습니다. 그런 교회사적 연구를 하고 나서 뉴질랜드에서 선교학자로 소개됐던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강의를 시작할 때 이렇게 이야기기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신념을 가졌는지 알려면 당신의 신념이 무엇인지 묻지 말고 그 삶을 보라”
“어떤 사람이 무엇을 믿는가를 알고 싶다면 어떤 믿음을 가졌는지 묻지 말고 그 사람이 어디에서 어떤 삶을 사는지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한 관찰 방법이다”라고.

사실 이것은 서양의 합리적 사고와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발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믿는 것을 바꾸면 행동도 바뀔거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날 밤, “오늘 밤에 여러분이 내 강의를 듣고나서 여러분의 생각이 바뀌게 될 것이다. 왜? 지금까지 교회가 무엇을 했던가를 살펴보면 교회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를  추측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무엇을 읽고 무엇을 가르치는가, 또 학자들이 무엇을 가르쳤고 무엇을 쓰고 있었는가를 보면 그들이 진짜로 믿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마크교수님이 분명히 말씀하시겠지만 내 머릿속에는 굉장이 많은 생각들이 있습니다. 난 매우 똑똑한 사람입니다(웃음). 왜냐면 철학적 교육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렇게 얘기하는 것, 신념체계보다 행동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철학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씀을 드리려는게 아닙니다.

1970년대부터 시작했습니다. 북미 교회가 급격히 하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내 생각은 목회자들이나 교회지도자들, 그리고 학자들이 어떤 것을 읽고 가르쳤는지를 거꾸로 추적해 보면 그들이 교회를 어떻게 믿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서 북미에서 선교적 대화가 어떻게 시작되고 진행됐는지 알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1950년부터 2010년까지, 내가 뉴질랜드에 가는 그 시점까지 북미지역의 교회지도자들이 어떤 사역을 했는지 그 사역패턴을 그들에게 설명했습니다. 북미에서 교회가 했던 프로그램들이 아마 어떤 것은 익숙하고 낯선 것일 수 있습니다. 그게 다 중요한건 아니겠지만 나열해 보겠습다.

50년대는 ‘산업선교’라는 개념이 아주 유명했습니다. 60년대부터 70년초반까지는 ‘일터에서의 신앙’이라는 개념이 유행했습니다. 장로교 지도자들은 ‘관계적 계시’라는 표현을 썼고 그것을 강화하는 프로그램을 도입했습니다. 소그룹 운동이 시작된 시점이 바로 그 때입니다. 소그룹에 참여하고 함께 성경공부를 하며 다른 사람들과 관계성을 맺기 시작하면 교회가 성장할 것이라고 믿는 것이 당시에 유행했습니다. 또 예배갱신운동이 그 무렵에 시작됐습니다. 그래서 올겐을 저 한쪽 구석으로 치우고 기타로 올겐이 하던 일을 대신하면 교회가 성장할거라는 생각이 그 때 유행했습니다.

70년대에 학자들이 발명한 것이 ‘교회 성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특히 풀러신학교가 그 일을 많이 했는데 곳곳에 다니며 어떻게 하면 교회가 성장할 수 있는지를  가르쳤습니다. 80%가 찼다면 그 시점에서 교회를 보다 크게 건축하라, 교회를 성장시키고 싶다면 주차장을 확보하라고 말합니다. 또 교회를 성장시키고 싶다면 종교적 상징을 치우고 큰 스크린과 음향시설을 설치하라고 말했습니다. 100명에서 200명, 200명에서 300명으로, 한국에서의 단위는 다르겠지만 1천명에서 2천명으로 성장하는 비결을 가르치는 책들이 막 출판됐습니다.

70년대와 80년에 교회성장운동이 판쳤다면 90년대에 들어서면서 부터는 건강한 교회운동이 시작됐습니다. 그래서 그 전에는 어떤 교재를 가지고 교회를 어떻게 성장시킬 것인가를 고민했다면 이제는 새로운 책들이 소개되는데 어떻게 하면 우리 교회의 건강도를 측정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가지 설문지를 통해서 건강척도를 재기 시작했습니다. 제자훈련, 예배, 전도 등 각 영역에서 자기 교회의 건강도를 진단받는 것이 유행했습니다.

80년대부터 90년대 까지 교회 목사들은 또 지도력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다시 목사님들이 신학교에 돌아와서 목회학 박사 학위를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박사라는 타이틀이 목사앞에 서면 교회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얄팍한 기대를 가졌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교회운동들이 시작됐습니다. 우리가 잘아는 구도자 예배, 이머징교회운동, 교회2.0운동 등 여러 가지 운동이 시작됐습니다. 내 포인트는 여기에 있습니다.

 

   
▲ 앨런 교수

교회지도자들이 지금까지 했던 일들, 신학교 교수들이 가르쳤던 것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그들이 믿는 교회란 무엇인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선교적 대화’도 그런 프로그램들중 하나로 전락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뉴질랜드 교회 지도자들에게 잘못된 네가지 미신같은 확신에 대해 가르쳐 줬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는다라고 고백했던 것 보다 진짜 믿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네 가지 지표가 유럽교회의 현상들인데 바로 이것입니다. 네 가지입니다.

1. 기능적 합리주의

한 번 간단하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자랄 때 6백만불의 사나이가 아주 유명했습니다. 미국 우주선 조종사가 대기권에 진입했다가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 프로그램이 시작될 때 거의 죽은 사람이 의료용침대에 누워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때 외과의사가 등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기술이 있기 때문에 고칠 수 있다”고. 이 기능적 합리주의라는 미신은 정확한 정보와 기술만 가지고 있다면 주어진 문제들을 반드시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1960년부터 지금 현재까지 미국에 있는 유럽교회의 공통된 특징이 바로 기술만 있다면 어떤 문제던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 해석학적 관심을 가지고 다시 미국교회를 바라보면 미국교회 현상이 이해될 것입니다.

2. 경영과 통제 - 교회성장프로그램의 허구 

교회성장을 위한 모든 프로그램과 모든 활동들을 제대로 활용하기만 하면 역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신념이 있었습니다. 교회의 모든 프로그램이 이 특정한 신념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지도자들은 모든 지식과 정보를 통제해야 하고 그것을 가지고 경영해야 할 뿐 아니라 전략을 세워 사람들을 훈련하여 그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제대로 된 경영기법으로 성도들을 통제만 할 수 있다면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다는 이 믿음은 비성경적이고 심지어 이단적인 생각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우리교회를 움직여 왔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신념체계입니다.

3. 교회중심적이라는 신념

많은 사람들이 교회가 하나님의 모든 것의 중심이기 때문에 이거만 고치면 나머진 다 고쳐질거란 신념이 있었습니다. 50년부터 2010년까지 현대 교회사에 있었던 모든 운동을 한번 살펴보십시요. 구도자교회, 2.0교회, 이머징처지 등 모두가 교회 교회... 다 교회입니다. 그 하나의 렌즈만을 가지고 모든 것을 보려고 합니다. 사실 하나님은 그보다 더 크신 분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신학교 교수들은 당연하겠지만 교회 지도자들 역시 교회가 모든 우주의 중심이어서 교회만 고치면 모든 문제가 해결 될 것이란 신념을 가지고 지금까지 교회를 이끌어 왔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많은 교회들이 ‘선교’ 혹은 ‘선교적’이라는 단어를 교회를 형성하는 형용사 정도로 생각했지 교회의 핵심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뉴비겐스가 처음에 선교적 교회에 대한 개념을 설명했거나 우리가 선교적교회라는 책을 썼을 때 선교는 그런 형용사적 표현으로 사용한 것이 절대 아닙니다.

4. 성직자 중심

네 번 째 잘못된 신념은 성직자 중심으로 교회가 움직여 나가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목회자들은 안수를 받았기 때문에 그들의 모든 생각의 중심은 교회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잘못된 교회론이 선교적 대화를 방해하는 장애물 역할을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내가 이 네가지 특성들이 북미에 어떻게 보여지고 표현되는지를 연구해서 내린 두가지 결론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는 중간 매개체라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교회를 이끌어 가시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중심이기 때문에 기술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경영기법과 전략기술이, 그런 건강한 교회가 필요하다고, 그리고 내가 성직자이거나 교수이기 때문에 내 중심으로 교회가 움직여야 한다는 인간중심적 교회론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연구하면서 발견한 것이 북미의 유럽중심적 교회운동 중심에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땅을 운행하시고 경영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놓쳤기 때문에 인간중심적 교회경영기법을 추구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사람을 보낸 것은 맞습니다. 그리고 전략을 놓고 기도하시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교회를 합리화 하기위한 도구로 사용했지 성경이 중심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 가운데 우리가 잊고 있는 것 중의 핵심은 하나님이 직접 역사하시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 앨런 교수와 통역 전병철 Acts 교수

그렇다면 북미에서 진행되고 있는 선교적 대화가 여러분에게 시사하는 바는 뭘까요?

1. 첫 째는 이 모든 대화가 교회중심적 대화였다는 사실입니다. 이 ‘선교적 교회’라는 대화를 통해 다시금 교회를 고치고 싶어 했지 하나님과의 관점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북미에는 적어도 ‘선교적교회운동’라는 것이 교회성장의 또 하나의 운동으로 전락하면서 선교적이라는 하나님 중심사상을 잃어 버리게 되는 또다른 장애요소로 전락했습니다.

2. 두 번 째는, 정말 우리가 심각하게 하나님이 선교의 중심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우리가 만일 네스닉 뉴비겐의 가르침을 심각하게 고민한다면 이 문제를 새로운 관점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뉴비겐의 논문들을 잘 읽어보면 알겠지만 교회론에 관한 논문이 아닙니다. 서구 사회 가운데 복음이 어떠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고 어떻게 이 복음이 관계성을 지을수 있을까 하는 질문, 지나치게 단순화 할 수 있겠지만 뉴비겐의 초점은 복음과 문화 사이의 상관관계였습니다. 이 복음과 상황이라는 관계가운데서 교회론은 두 번째로 이것을 설명하기 위한 기법으로 시작한 것이지 교회론이 중심에 있지 않았습니다.

내가 북미 학자의 관점에서 여러분에게 이런 제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구약과 신약을 다시 주의깊게 읽었을 때 하나님의 통로는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습니까? 특히 하나님의 임재나 역사하심은 항상 소외됐고 변두리의 무기력하고 힘없는 소외된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이 더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만일, 이 하나님께서 북미에서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고 가정한다면 지금도 일하시고 계신 하나님과 동역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미리가셔서 일하고 계시는, 지역사회와 소외된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는 데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선교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북미 상황에선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길 원하는지 아는 분별력, 그리고 하나님이 지금 어디에서 일하고 계시는지 확신하고 있을 때 비로소 동참하게 됩니다. 또한 우리가 가서 직접 그렇게 살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릴 교회로 부르신 부름이 어떤 것인지 알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북미교회에서 그런 분별력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현실입니다. 이 선교적이라는 단어가 형용사로 전락하면서 교회가 안고 있는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또다른 프로그램으로 소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북미에서 강의할 때. 선교적 교회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이유들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합류하고 동행하는 것이 선교적이라는 것입니다.

 

   
▲ 두 교수의 한국 방문과 일정을 이끌고 있는 이상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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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어쩌랴 (112.163.179.132)
2015-09-15 12:57:26
천국복음은 회개에 합당한 삶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신념을 가졌는지 알려면 당신의 신념이 무엇인지 묻지 말고 그 삶을 보라”
“어떤 사람이 무엇을 믿는가를 알고 싶다면 어떤 믿음을 가졌는지 묻지 말고 그 사람이 어디에서 어떤 삶을 사는지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한 관찰 방법이다”(본문 중)
위의 문장이 오늘날 교회와 목사들을 평가하는 잣대가 되어야 한다.
천국복음의 시작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천국복음에서 말씀하시는 회개는 우리가 생각하는 거창한 죄목들, 곧 칠계명, 살인 등과 같은 것도 포함되지만 누가복음에서 세례요한이 말씀하신 회개는 삶의 자세 변화가 진정한 회개라고 말씀한다.
세례 요한께서는 사람들에게 헐벗고 굶주린 이웃들에게 양식과 옷을 나누는 삶과 세리에겐 정직한 삶, 군인들에겐 힘으로 약한 자를 억눌러 강탈하지 않는 삶, 그것이 진정한 회개의 삶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이와 같이 적은 일에 내 삶을 바꾸는 실천적인 사람이 진정한 변홛된 새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될 수 있다. 이웃이야 굶주리던 말든 자기만 잘 살면 되고 남을 속여서라도 나만 잘 되면 그만이며, 나에게 갖다 바치지 않으면 내 힘으로서 남의 것을 빼앗아 나만 배부르면 그만 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목회를 하던지 사업을 하든지 그 무엇을 하더라도 진정한 회개에 이른 기독교인들이라 할 수 없다.
성경을 보라. 그 어디에 오늘날 교회와 같이 과도한 헌금을 강조하며 모든 일을 제쳐두고 전도를 강요하며 오직 교회에서 생활하고 봉사하는 것이 헌신적인 삶이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오히려 사도 바울의 서신을 보면 그는 오직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다운 성도들로 성장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눈물로서 호소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성도들은 많은 헌금을 하고 전도를 하며 헌신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많은 복을 주신다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그것은 본문에도 있눈 것처럼 우상을 섬기는 것과 다름 없다. 오히려 지금까지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들 곧 내 삶을 주님께서 원하시는 회개에 합당한 삶을 이루어야 함이 먼저이어야 함을 기억하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리플달기
22 20
hsjung (99.31.216.242)
2015-09-23 05:01:17
'믿는다'고 스스로 말하는 자, 각 개인이 '나부터'!
리플달기
6 15
hsjung (99.31.216.242)
2015-09-23 05:01:09
'믿는다'고 스스로 말하는 자, 각 개인이 '나부터'!
리플달기
9 14
지나가다 (99.225.53.85)
2015-09-26 19:37:33
선교단체와 교회의 기능을 합쳐진 모습이 현재의 교회 모습
선교단체와 교회의 장점을 같이 살리려다보니 생긴 문제가 여기 있네요. 교회보다 선교단체가 교회보다 더 강한 리더쉽으로 무장이 되어 있기 때문에, 교회속으로 들어옴으로 가뜩이나 리더쉽에 문제가 있는 교회에 더 큰 영향을 주기 시작한 겁니다. 두 차이는 선교와 전도라고 보시면 됩니다. 예전에는 이질감 때문에 서로 실어했는데, 요즘은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주고 있으니 아이러니입니다.
서구나 한국이나 교회개척은 쉽지 않습니다. 같은 색깔을 공유해야 하는데, 요즘은 이 색깔의 공유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화 수준의 편차가 점점 커질수록 교회는 설자리가 점점 없어집니다. 공유가 안되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교회 가느니 인터넷으로 내 입맛대로 설교는 어디교회, 찬양은 어디교회, 헌금은 어디교회 따로 드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이러한 시대속에서 어떻게 하면 서로를 공유하고, 나누게 만들수 있을까 하는 숙제를 풀어야 교회가 개척도 될수 있고, 미래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리플달기
11 16
중국에서 (218.58.51.185)
2015-09-25 21:24:22
하 어쩌랴 당신부터..
리플달기
7 16
하 어쩌랴 (112.163.179.132)
2015-09-15 12:57:26
천국복음은 회개에 합당한 삶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신념을 가졌는지 알려면 당신의 신념이 무엇인지 묻지 말고 그 삶을 보라”
“어떤 사람이 무엇을 믿는가를 알고 싶다면 어떤 믿음을 가졌는지 묻지 말고 그 사람이 어디에서 어떤 삶을 사는지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한 관찰 방법이다”(본문 중)
위의 문장이 오늘날 교회와 목사들을 평가하는 잣대가 되어야 한다.
천국복음의 시작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천국복음에서 말씀하시는 회개는 우리가 생각하는 거창한 죄목들, 곧 칠계명, 살인 등과 같은 것도 포함되지만 누가복음에서 세례요한이 말씀하신 회개는 삶의 자세 변화가 진정한 회개라고 말씀한다.
세례 요한께서는 사람들에게 헐벗고 굶주린 이웃들에게 양식과 옷을 나누는 삶과 세리에겐 정직한 삶, 군인들에겐 힘으로 약한 자를 억눌러 강탈하지 않는 삶, 그것이 진정한 회개의 삶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이와 같이 적은 일에 내 삶을 바꾸는 실천적인 사람이 진정한 변홛된 새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될 수 있다. 이웃이야 굶주리던 말든 자기만 잘 살면 되고 남을 속여서라도 나만 잘 되면 그만이며, 나에게 갖다 바치지 않으면 내 힘으로서 남의 것을 빼앗아 나만 배부르면 그만 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목회를 하던지 사업을 하든지 그 무엇을 하더라도 진정한 회개에 이른 기독교인들이라 할 수 없다.
성경을 보라. 그 어디에 오늘날 교회와 같이 과도한 헌금을 강조하며 모든 일을 제쳐두고 전도를 강요하며 오직 교회에서 생활하고 봉사하는 것이 헌신적인 삶이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오히려 사도 바울의 서신을 보면 그는 오직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다운 성도들로 성장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눈물로서 호소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성도들은 많은 헌금을 하고 전도를 하며 헌신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많은 복을 주신다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그것은 본문에도 있눈 것처럼 우상을 섬기는 것과 다름 없다. 오히려 지금까지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들 곧 내 삶을 주님께서 원하시는 회개에 합당한 삶을 이루어야 함이 먼저이어야 함을 기억하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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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sjung (99.31.216.242)
2015-09-23 05:01:17
'믿는다'고 스스로 말하는 자, 각 개인이 '나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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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sjung (99.31.216.242)
2015-09-23 05:01:09
'믿는다'고 스스로 말하는 자, 각 개인이 '나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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