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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바울의 가르침이 다르다?
박창진  |  5016park@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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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년 09월 14일 (월) 17:03:19 [조회수 : 4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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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그 수가 더 심히 많아졌습니다(행 6:7). 그들로부터 복음을 전파 받은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는 주를 경외함으로 그 수가 더 많아졌습니다(행 9:31). 오늘날의 교회는 그와 다릅니다. 너무나 다릅니다. 과거에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도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하고 주를 경외함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기 힘듭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여러 이유가 제시되고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예수님은 삶을 가르쳤는데 바울 사도는 교리를 가르쳤고 그로 인해 복음의 능력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바울 사도의 가르침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구원론과 관련하여서는 바울 사도가 행위를 말씀하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다르게 오직 믿음으로 변질시켰다고 말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일차적으로 교회 역사는 그러한 주장이 옳지 않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경 시대 이후부터 그리스도교가 로마에서 공인되고 국교가 되기까지 복음은 여전히 그 능력을 나타내었습니다. 국교가 되지 않았다면 세계 복음화의 정도가 지금과 비교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이야기될 정도입니다. 그러한 시대에 지금과 똑같은 예수님의 말씀과 바울 사도의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만약에 위의 주장이 옳다면 그때에도 복음은 지금과 같이 능력을 상실한 상태이었어야 합니다.

성경의 진술은 어떠한가요?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만나 거듭나지 않으면 누구라도 하나님 나라에 볼 수 없다(요 3:3), 들어갈 수 없다(요 3:5)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을 통하여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다스림에 참여하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거듭남은 하늘로부터 태어나는 것입니다. 부모의 뱃속에 다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유대인입니다. 그는 언약의 백성입니다. 그는 예레미야가 말한 새 언약(렘 31:31) 곧 포로 후 회복 언약 아래에서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포로 회복 후에 새 언약의 내용은 완전히 성취되지 않았고 부분적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포로 후 회복 언약을 완전하게 하십니다. 그 내용을 완전하게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완전하게 된 새 언약입니다. 예수님은 완성된 새 언약의 시대를 펼치시고자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레미야가 말한 새 언약은 완전하게 된 새 언약과 비교할 때에 옛 언약입니다. 니고데모는 옛 언약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었지만 새 언약의 관점에서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옛 언약의 백성들을 새 언약 안으로 이끄시고자 하셨습니다. 옛 언약과는 다른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 이끄심을 받아들이고 새 언약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은 거듭나야 가능합니다. 니고데모는 옛 언약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새 언약의 관점에서는 비신자와 같았고 거듭남으로 새 언약 안으로 들어가고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게 됩니다. 그러한 새로운 관계 형성이 바로 구원입니다.

니고데모에게 주어진 거듭남의 교훈은 새 언약의 백성이 되어 옛 언약과는 다른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로 들어가는 것 곧 구원에 대한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거듭난다는 것은 무엇을 말씀하는 것일까요? 다르게 말하면 새로운 출생이란 무엇을 뜻하느냐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와 같은 상태인 한 사람 곧 루디아가 복음을 듣습니다. 그때에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 곧 복음을 청종하게 하셨습니다(행 16;14). 하나님께서 복음 밖에 있던 어떤 사람의 마음을 열어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심으로 그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는 하나님의 역사가 바로 거듭남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듭나게 하심으로 복음 밖에 있던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 출생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다스림에 참여하게 됩니다.

바울 사도는 이방인이었다가 복음 안으로 들어오게 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주 대상으로 사역하였습니다. 그는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롬 11:13).

그가 에베소 교회에 편지하면서 그들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기술하였습니다. 과거엔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합니다(엡 2:1).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입니다. 그들이 복음 안에서 새로운 상태로 들어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큰 사랑으로 살리신 것입니다. 부활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늘에 앉혀졌습니다(엡 2:6). 이를 정리하면서 그는 에베소 교회(또는 각 지체인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고 했습니다(엡 2:8).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던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곧 복음의 가장 초보인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함으로.

예수님께서 대화한 니고데모와 이방인 교회(또는 신자)의 각 상황이 표면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만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새 언약이라는 관점에서는 같습니다. 양자가 다 그 언약 밖에 있었고 그 언약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그렇게 언약 안으로 들어올 때에 그 언약의 하나님과 관계가 가능해집니다. 관계 회복의 구원입니다. 그 구원은 각자의 행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양자 모두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인 거듭남으로 그 구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양자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행위와 천국을 연계시킨 대표적인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란 문맥에 의해 결정되어야 합니다(1). 산상수훈의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에서 자신 앞에 나아온 무리들에게 완전하게 된 새 언약의 내용들을 설명하셨습니다. 그 내용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 뜻을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천국은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다스림이 아닙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 다스림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거듭나면 들어갑니다. 여기에서 천국은 죽음 이후의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가리킵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 곧 순종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이러한 내용의 가르침은 아주 많습니다.

그렇다면 믿음과 무관한 행위를 말씀하신 것일까요? 전혀 아닙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순종은 육체의 욕심을 거스르는 성령의 역사를 따르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을 의지할 때에 가능합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의지할 때에 이루어집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함으로 가능합니다. 의지한다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인 믿음과는 다른 믿음입니다. 의지함인 믿음은 순종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따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어떨까요? 그는 죽음을 앞두고 주님께서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라(딤후 4:18)고 했습니다. 그 이전에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을 언급하면서 얻었다거나 온전히 이루었다 함이 아니라고 했습니다(빌3:11-12). 여기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이야기된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죽음 이후에 천국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는 빌립보서를 쓰는 그 시점에서도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이 고백은 앞에 언급된 예수님의 말씀을 자신에게 바르게 적용시킨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는 주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후에 지속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시켰습니다. 날마다 죽는다는 고백은 대표적입니다(고전 15:31).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8:6). 예수님께서 자신을 믿는 소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거짓된 믿음이거나 잘못된 믿음일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는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을 적용시키면 거듭났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거듭나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경우입니다.

실족한다는 것은 가는 길을 잠간 벗어나는 경우에도 사용될 수 있고 완전히 벗어나는 경우에도 사용됩니다. 여기에서는 어떤 의미일까요? 그 일을 일으킨 이에게 뒤따르는 심판을 살피면 알 수 있습니다.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깊은 바다에 빠지는 것보다 더 심각한 심판입니다.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나오는 영원한 불 곧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입니다(마18:8, 9).

성부, 성자, 성령 곧 삼위의 하나님은 상벌에 있어서 완벽하게 공평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소자를 잠간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길에서 벗어나게 했다고 영원한 불, 지옥 불의 심판을 행하실까요? 그것은 너무나도 불공평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완전히 벗어나게 하는 경우에 대한 심판이라면 공평합니다. 영원한 불 곧 지옥 불에 던져지는 심판은 예수님을 믿는 소자를 믿음의 길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만드는 행위에 대한 것입니다.

그 일은 누구든지 가능합니다. 같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통해서 일어날 수도 있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통해서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후자는 핍박으로 인해 배교하게 되는 것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전자는 다양한 양상을 띤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떠하든지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사람 -거듭난 사람 곧 하나님의 자녀-이 영원한 멸망의 자리로 떨어질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실족함으로 인해서든지 아니면 실족시킴으로 인해서든지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불의한 자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면서 몇 가지 범죄자들을 언급하였습니다(고전 6:9~10). 처음부터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지도 않은 비신자들에 대한 이야기일까요? 아닙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것은 별도로 언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입니다(고전 6:11). 곧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 곧 신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가 불의하면 곧 지속적으로 범죄 가운데 살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다스림이 아닙니다. 신자는 그러한 다스림에 이미 들어온 사람입니다. 미래의 하나님 나라입니다. 곧 바울 사도가 죽음을 앞두고 말한 바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과거 광야생활에서 멸망한 이들을 쭉 언급하였습니다(고전 10:5~10). 그들은 모세에게 속하여 다 세례를 받았습니다. 모두 신령한 음식을 먹었습니다. 신령한 음료를 마셨습니다. 반석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지는 음료였습니다(고전 10:2~4).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여 멸망했습니다. 그는 그 일이 고린도교회 곧 고린도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된다고 했습니다. 말세를 만난 우리 곧 자신과 고린도교회를 깨우치기 위해 기록되었다고 했습니다(고전 10:11). 만약에 구약에서는 그러한 범죄로 인해 멸망하지만 신약에서는 그러한 범죄로 멸망하지 않는다면 본보기일 수가 없습니다. 정직하게 글을 읽는다면 구약과 신약이 이 땅에서의 삶과 연관하여 영원한 구원을 얻음에 있어서의 원리가 같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밝힌 바와 같이 예수님과 바울 사도의 가르침은 다르지 않습니다. 구원과 연관된 원리에 있어서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삶을 말씀하셨는데, 바울 사도는 교리를 말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삶을 말씀하셨고 바울 사도도 삶을 말했습니다. 그 삶에 관한 기술에 교리가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그렇고 바울 사도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삶을 말씀하셨는데, 바울 사도는 교리를 얘기했다는 것은 성경을 표피적으로 읽은 잘못일 뿐입니다. 아무리 좋은 마음으로 곧 교회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교회를 바르게 세우고자 하는 좋은 마음으로 말했다고 하더라도 잘못된 것일 뿐입니다. 예수님이나 바울 사도나 새 언약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과 그러한 자녀로서 이 땅에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것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에 있어서 가르침은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1)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 6;40). 어떤 이 구절을 마 7:21에 대입시켜서 그 의미를 결정하려고 합니다. 이는 바른 해석 방식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듣는 사람들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씀 곧 암호를 말씀하셨다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을 읽은 당대의 신자들은 요한복음이 기록되어 전해지기 전까지는 그 말씀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암호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완전히 잘못된 접근 방식입니다. 각각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이나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행하는 것 모두 하나님의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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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돌 (175.202.216.168)
2015-09-16 11:06:18
무식하면 용감하다?
전형적인 먹사는
성경 구절 이리저리 꿰어 맞추어
제 허설을 정당화하려는 자이다.
성경이 고생하는 것은 불보듯 훤하다.
그러나 그런 짓거리를 하느님의 종이란 신분(먹사)으로 하니
하느님이 욕보시는 것이다,
고추장 종지만한 깊이와 내용의 제 능력으로 이해하는 성경조각들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포장하여 마구마구 세상에
허설을 뱉어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독교판은 개독판이요 개판이다.
G,O,D가 잘못 되면 d,o,g가 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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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
무릇돌 (175.202.216.168)
2015-09-15 18:19:07
예수와 바울의 다름을 모르는 목회는 사기다!
기독교는 바울을 따르는 종교이다.

엄밀히 말하면 바울이 해석한 예수를 숭앙하는 종교이고

그것도 바울을 왜곡하며 예수를 더욱 오해하는 종교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개독교이다!

이는 무릇돌의 가장 근본적인 확신이요 주장이다.



기독교적 목회?

적확하게 평가한다면

사기질이거나

무지몽매에 근거한 밥벌이에 불과하다.



하여

기독교를 개혁하자는 소리는

한마디로 웃기는 소리이다.

기독교는 떠나야 할, 버려야 할

구시대의 착각이요, 미신일 뿐이다.



평생을 기독교 신학과 성서를 연구하며 살았던

문동환 박사와 송기득 교수를 보라!

철저하게 궁구하여 솔직하게 이른 결론이

그분들의 최근 저서들이다.



얼치기 신학, 밥벌이 목회로는

근원이신 예수를 만나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99% 대다수의 목회자와 신학자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진실을 알려고도 않고

혹 알았다 해도 애써 외면한다.

그리하여 기독교판은 개독판이요 개판이 된 것이다.



멋지게, 통크게 사기치는 자가

큰 교회를 이루고 크게 성공한 목회자가 되어

기독교가 개독교임을 찬란하게 증명하고 있음이다.



바울과 예수의 다름을 모르는 목회?

그것은 사기의 시발점인 것이다!
리플달기
3 2
박창진 (113.130.235.221)
2015-09-16 14:00:10
참으로 허접한 글쓰기
선동만 있고 근거는 없는 글쓰기가 허접한 글쓰기지요.

이런 수준을 벗어나야 그나마 희망이 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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