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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받은 자들을 회개시키지 못한 예수의 실패
박경은  |  0117669763@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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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년 08월 22일 (토) 16:46:32
최종편집 : 2015년 08월 25일 (화) 14:12:49 [조회수 : 4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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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받은 자들을 회개시키지 못한 예수의 실패

 

마11:20~24

 

   우리의 주님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는 도무지 “실패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자연스럽습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전하셨을 때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은 이해가 잘 안 되는 일이라고 여겨집니다. 선택을 받은 사람들은 당연하게도 예수께서 전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들을 때 ‘아멘’으로 받을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이 전하는 본문을 읽으면 예수께서는 선택받은 사람들을 향해 복음을 전하시며 가장 많은 권능을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결실을 얻지 못하셨음으로 실패하셨음을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실패에 대한 반격적 태도가 매우 감정적이라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고라신과 벳새다 그리고 가버나움의 선택받은 자들이 예수의 권능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음에 따라 거기서 행하신 예수의 하나님 나라 사역이 실패로 끝나고 만 것과 관련된 본문의 말씀을 숙고하면서 그 의미를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 고라신.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성읍 중 하나이다. 옛날에는 큰 성읍이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멸망해서 터만이 남아있다. 화산암지대여서 돌들이 다 검정색 현무암이다.

 

도무지 회개의 가능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선택받은 지역의 도시들”

   고라신과 벳새다, 그리고 가버나움은 옛 이스라엘에 속했던 땅의 도시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의 다른 도시들과는 성격상 틀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알렉산더의 동방원정 때에 알렉산더에게 항복한 이방도시들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이방도시들이 옛 이스라엘의 땅에 속해 있는 도시들보다 오히려 구원에 더 가까울 수 있다는 말씀이 선포되었습니다.

   고라신과 벳새다, 그리고 가버나움에서 행해진 ‘가장 많은 권능들’이 두로와 시돈지방에서 행해졌다면 그들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했을 것이라는 말씀은 “택함받은 이스라엘, 그러나 멸망받을 이스라엘”과 “택함받지 못한 이방, 그러나 구원받을 이방”의 모습을 선명하게 대조시켜 줍니다.

   고라신과 벳새다, 가버나움은 옛 이스라엘의 지역에 있던 도시들이므로 선택받은 선조들로부터 이어지는 지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도무지 회개할 줄을 몰랐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사역에서 ‘실패’하셨음을 나타내는 명백한 내용입니다.

   마태복음 저자에 의하면 아무런 성과도 없이 실패하신 예수께서는 그 도시들을 향해 매우 비관적인 멸망을 선포하셨습니다. 그것도 이미 멸망당해 버린 이방의 도시들에 비교하여 말씀하심으로 그 지역의 상태가 어떻다는 것을 나타내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선택하셨다는 것과 선택을 받았다는 것 사이에서 나타나는 심대한 차이점을 볼 수 있습니다.

 

선택받았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개인의 몫

   예수께서 이방 땅에 들어가셨을 때 만났던 가나안 여자는 마음에 품고 있던 소원을 믿음으로 이루어낸 모범적인 여인으로 소개되었습니다(15:21~28). 이것은 이방 땅의 사람들이 더 신앙적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이런 이방인들의 모습은 요나가 니느웨 성에 가서 회개하라고 외쳤을 때 니느웨성 사람들 전체가 모두 다 회개함으로 멸망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는 구약성서의 내용을 연상케 합니다.

   따라서 선택받은 자들의 최후는 최종적으로 말씀을 들은 본인이 감당해야 하는 몫이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선택을 받았다고 자부하는 본인 자신이 스스로 선택받았음을 포기하는 것과 같은 따위의 행위를 한다면 언제든지 내쳐지기 때문입니다. 구약성서는 이스라엘의 멸망사건을 통해 이와 같은 진리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최종적인 결과는 당신에게 달렸다. 그것은 당신 몫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선택하신 하나님은 선택한 자들을 내칠 수도 있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롬11:20~22 참조). 반대로 말하면 내치려고 하시다가도 돌이켜 사랑을 주기도 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시78:38~40; 렘26:13; 욜2:13~14; 욘3:9). 모든 인간의 구원에 관심을 두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실패와 선택의 포기 효과→ 은총의 수여 중지

   옛 북이스라엘의 땅,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던 땅에 세워진 도시들인 고라신과 벳새다, 그리고 가버나움은 예수 당시에, 혹은 마태복음 저자가 이스라엘의 상태를 관조하고 있던 때에 그들 지역은 도무지 구원의 가능성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곳으로 판단되었습니다. 그래서 엄정한 멸망의 선언이 주어졌음을 말함으로 그 도시들은 이미 단죄되었음을 알리는 분위기입니다.

   반대의 측면에서 본다면, 이방의 땅에 있는 두로와 시돈은 옛 이스라엘의 땅에 속해 있는 도시들과는 달리 “열려진 구원의 가능성”을 갖고 있는 도시들로 비쳐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버나움은 저 먼 옛 시대에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린 소돔보다도 못한 도시로 판단되었으므로 가버나움은 이제 구원의 가능성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래서 구원의 문이 완전히 닫혀져 버린 도시임을 마태복음 저자가 적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던 옛 북이스라엘과 그들이 살던 땅이 예수 시대에 이르러 심판받아 멸망당할 도시로 단정되었다는 지적은 그들 도시들이 “예수께서도 포기한 땅”이라는 인상을 남깁니다. 그에 따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구원의 은총은 이제 중단되기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관계가 끊어져 ‘심판’만이 남았을 뿐이라는 그림을 그리게 되기 때문입니다(22절,24절).

   물론 하나님은 선택하셨다가 택하심을 포기하고 내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롬11:1~2). 한 번 택함을 입은 자에 대해서 가지시는 사랑의 마음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롬11:26,29). 그러나 열매 없는 가지는 꺾일 수밖에 없습니다(롬11:20~21). 열매를 맺어야 하는 부분은 전적으로 개인의 몫이기 때문입니다(눅13:6~9 참조). 불순종의 열매는 본인이 감당해야 하는 부분이기에 더욱 그렇게 보아야 합니다(요3:36; 히2:2; 4:6; 벧전2:8; 3:20참조)

   이에 대해 식물학적으로 반론을 제기하면서, 토양을 통해 공급되는 영양분이 부실해서 열매가 없는 것이라느니, 재배 및 관리를 잘 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라느니, 원래 품종이 나쁜 것이어서 그런 것이라느니.... 등의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 핵심은 ‘너 하기에 달렸다’에 있기 때문입니다.

 

선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버림받을 수 있다

   선택받은 자들이 멸망의 심판을 당하는 것에 관한 한 하나님 편에서는 이미 하실 만큼 하셨으므로 열매가 없는 책임을 하나님께 물을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불순종한 아담과 이브에게 불순종의 책임이 있는 것이지, 선악과를 만들어 놓으신 하나님을 향해 ‘왜 선악과를 만들어 놓고 먹지 말라고 한 것이냐, 고양이 앞에 생선 갖다 놓고 먹지 말라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며 자신이 감당해야 할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가장 많은 권능을 행하신 도시들이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선택하셨기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셨고 더 많이 사랑하심으로 권능도 더 많이 행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선택의 은총을 받은 자들이 멸망을 당한다면 그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돌릴 수 없습니다. ‘최종적인 결과는 네 몫’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분명하게도 옛적 북이스라엘의 땅에 세워진 고라신과 벳새다, 그리고 가버나움은 예수 시대에 이르러 버림받은 곳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택받았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선택받은 자들의 지속적인, “선택받은 은총을 계속 유지하는 삶”이 더욱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명백히 인식하고 생활해야 합니다. 그래야 선택받은 자로서의 지속적인 믿음과 삶을 심판의 날까지 올곧게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택받은 자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다는 것은 선택받지 않은 자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곧은 목을 갖는다는 뜻인데 그것은 하나님께 항거한다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하나님께 의도적으로 맞서는 인간의 죄악된 행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만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다는 것에 직결되므로 인간의 불순종은 하나님께 맞서 대항하거나 항거한다는 뜻으로 해석되기 때문입니다.

 

선택되었으나 감히 하나님께 맞서는 목이 곧은 백성들(행7:51~53 참조)

   한 번 받은 선택의 은총은 본인이 잘 관리, 유지해야 합니다. 선조가 선택받았다고 해서 후손도 여전히 선택의 은총 안에 놓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록 선조는 선택받았을지라도 그 후손은 선조가 받은 선택의 은총을 무효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죄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어 있으므로 그와 반대되는 방향에서 복 받을 만하면 복을 받도록 되어 있기에 더욱 그렇습니다(신24:16; 28:15 이하 참조).

   물론 선택받은 자들이 불순종하며 회개하지 않는다고 해서 선택의 은총 그 자체가 취소되거나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에게 허락된 선택의 은총은 취소되거나 무효화된 것과 똑같은 효력을 나타낼 뿐입니다. 그래서 주시는 분은 거두어 가기도 하신다는 말을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삼상2:7).

    그렇지만 바울이 말한 대로 하나님은 절대로 후회하지 않으십니다(롬11:29). 그러므로 가룟유다를 선택하신 예수께서도 가룟유다를 괜히 선택했다고 후회하지 않으셨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제자로 선택 받았던 가룟유다는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으므로 선택을 받지 못한 것과 다를 것이 없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차라리 선택을 받지 못했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본인의 처신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게 됩니다(마26:24; 막14:21).

   따라서 선택을 받았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선택을 포기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내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본인의 몫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맞섬으로 인해 목이 곧은 백성이 되어 하나님에 의해 내쳐지는 자들, 가지치기 당한 가지들과 똑같은 결과를 초래하는 선택된 자들이 반드시 있기 때문입니다(롬11:21). 가룟유다의 경우는 이에 대한 아주 좋은 예들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어떤 입장에 서 있어야 하겠습니까? 모쪼록 믿음이 있노라하면서도 감히 하나님께 맞서는 자들과 같이 되지 말고, 그리스도인들의 행태에 실망하여 교회에 다니느니 차라리 지옥에 가겠다는 사람들을 말씀으로 도닥거려 믿음의 능력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 자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 파멸을 향해 치닫는 세상을 예수의 영으로 보듬으며 함께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복스런 주인공들이 될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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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실함 (50.191.138.232)
2017-02-19 03:34:34
주님이 실패하셨다면 그 실패의 기준이 무엇인지요?
왜 '실패'라고 보시는지요?

만일 고라신과 벳새다 지역을 통해서 하나님이 드러내고자 하신 내용이
'더 많은 기적이 더 많은 구원으로 열매맺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라면
주님의 사역은 실패가 아니라
그 진리를 더 분명하게 드러내었을 뿐입니다.

무엇을 실패라고 정의하려면 명확하게 목표와 기준을 세워야 하는데
고라신과 벳새다 지역에서 주님이 가지셨던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확인하고 논증하는 것이 우선 순서일 것 같습니다...
이런 식으로 접근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도 실패한 결과물로 보는
이상한 논리가 가능해 질 수도 있을 것 같아 걱정이 됩니다.

전도와 선교현장에서 단 한 사람도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실패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복음을 증거하는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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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6
Philip Im (70.62.49.64)
2015-08-30 02:49:43
하나님의 선택하심
구원하고자 선택하신 자들에 대하여 실패가 있을 수 없습니다. 결단코!
만약 구원하고자하는 의지를 가지고 선택하셨음에도 실패한다면 하나님의 의지가 인간의 의지에 의하여 꺾였다는 결론입니다.
인간의 의지에 의하여 꺾이는 하나님의 의지? 그런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래도 믿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을 믿으며 이용하는 정도일 것입니다. 이것은 엄밀히 말하여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격려, 자기위로에 지나지 않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의지를 이루어드리기 위해 인간이 노력해야 한다는 것도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는 어떤 분이십니까?
인간 의지에 그의 의지가 꺾이고 인간의 노력에 비로소 그의 뜻이 이루어지는 그런 분이십니까?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쫒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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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7
박창진 (110.46.124.235)
2015-08-25 11:53:37
위 글이 제가 아래에 적은 가항력적인 은혜라고요?에 대한 반론의 성격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표면적으로 볼 때에는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는 바에 대한 정당한 평가라고 보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예수님 당대의 이스라엘은 선택받은 민족이었습니다. 모두가. 그들은 포로 회복 후 언약 아래에 있는 언약의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전에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도 모두 선택받은 민족이었습니다. 모두가. 그들은 시내산 언약 아래에 있는 언약의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는 불순종하였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멸망입니다. 하나님께서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고 멸망을 당합니다. 위 글을 쓴 목사님의 관점을 따르면 선택받은 자들을 회개시키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 중에 어떤 이들이 남은 자로 부르심을 입고 포로되었다가 후에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포로 후 회복 언약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멸망당한 이들과 특별히 달라서? 자신들이 글을 적은 목사님이 말하는 본인들의 몫을 잘해서? 전혀 아닙니다. 그들은 멸망당한 이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언약의 계승을 위해 그들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푸신 것이었습니다.

이는 언약의 시대가 바뀔 때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예수님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일한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완전하게 하시는 새 언약 안으로 부르시는 것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 이전 언약의 관점에서는 선택되었음에도 그들은 회개하라는 예수님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예수님께서 완전하게 하시는 언약 안으로 들어오도록 선택되었습니다. 그 언약 안으로 들어오도록 택하심을 입은 이들을 부르심에는 실패하지 않습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고라신과 벳새다 그리고 가버나움에 있었던 일들은 일차적으로 실패가 맞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과거에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에서 멸망당했던 일과 같은 성격입니다. 이전 언약 아래에서 그들에게 주어진 회개의 기회에서 회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완성하시는 새 언약의 관점에서 그 언약 안으로 부르시는 일은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그 언약 안으로 부르시고자 선택하신 모든 이들이 그 부르심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제사장 중에서도 말입니다(행 6:7). 바울 사도는 이에 대해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롬 11:26)라고 적었습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은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새 언약 안으로 부르시고자 하신 언약의 백성을 가리킵니다. 과거에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 중에서 포로되었다가 되돌아와서 포로 회복 후 언약에 참여하였던 이들과 같습니다. 남은 자들입니다. 이렇게 이전 언약에 속하였다가 새 언약 안으로 부르심을 받게 되는 이들입니다. 그 선택을 받은 이들은 모두 새 언약 안으로 부르심을 받습니다. 이를 신학적으로 불가항력적인 은혜라고 합니다. 예수님 이후에는 이방인 가운데서도 예수님에 의해 완전하게 된 새 언약 안으로 부르심을 받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이들이 동일한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출애굽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언약의 시대를 마감하고 가나안 언약의 시대를 펼치시고자 아브라함의 후손들과 중다한 잡족들을 부르신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들을 주권적으로 행하셨습니다. 바로 왕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시는 방식의 역사도 행하셨습니다. 홍해를 건넌 후에 그들은 모두 하나님과 그 종 모세를 믿었습니다. 실패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언약의 대표로서 아담과 하와의 창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그들을 창조하셨습니다. 실패하지 않으셨습니다.

위 글은 성경이 진술하는 바로서 언약의 시대가 변하는 시점에서 나타나는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을 평면적으로 적용시킨 잘못입니다. 이러한 잘못이 알미니안주의에서 ‘가항력적인 은혜’ 좀 더 세밀하게 표현하자면 ‘저항할 수 있는 은혜’라는 교리가 탄생하는 한 원인이 됩니다.

성경은 언약의 책입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에 바르게 읽기 위해서는 언약에 대한 이해가 필수입니다. 특히 원래 있던 언약의 시대에 새로운 언약이 주어지고 이루어지는 시점에 대한 이해가 너무나 중요합니다. 원래 있던 언약 곧 옛 언약과 새 언약이 겹치는 시기에 나타나는 독특성을 이해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르게 이해하고 본문에 적용하여야 피상적인 성경 읽기로 인한 잘못된 해석을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완성된 새 언약 안에서, 그 언약의 백성으로 살면서 선택의 기회가 부여됩니다. 이방인 가운데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인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잘못된 삶에 대해 회개하느냐 회개하지 않느냐.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몫입니다. 겸손한 신자로 범죄하지 않고자 주님을 의지하면서 범죄하였을 때에 회개하느냐 아니면 목이 곧은 백성이 되어 하나님을 맞서느냐.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몫입니다. 시내산 언약이나 포로 후 회복 언약의 시점에서 회개하도록 만들어주셔서 멸망하지 않도록 하지 않으셨던 것과 같습니다. 이제 후로는 다른 언약이 없습니다. 지금 시점에서의 언약과 다른 새 언약이란 없습니다. 곧 새 언약으로 부르시는 특별한 역사는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언약이 그대로 역사의 종국까지 쭈욱 갑니다. 겸손하여 죄에 대해서는 회개하면서 언약의 복을 누리느냐 아니면 목이 곧은 백성이 되어 하나님을 맞섬으로 화를 입느냐. 곧 영생인가 아니면 영멸인가의 양자택일이 있는 것입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은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고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은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둘 것입니다. 이를 신학적으로 ‘조건적 (성도의) 견인’이라고 합니다.

이 글에 반론을 제기하려면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멸망 때에 포로되어 나중에 포로 후 회복 언약에 참여하는 은혜를 누리는 이들이 멸망당한 이들과는 달리 회개하였다는 증거를 제시하시기를 바랍니다. 만약 그러한 증거가 있다면 위의 제 글은 잘못되었고 박경은 목사님의 글은 전적으로 옳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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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7
익명 (110.46.124.235)
2015-08-24 16:31:53
구분을 해야 하는데...
본인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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