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이라 한국을 방문한 독일 사는 지인의 아이들에게 영화 <암살>을 보여줬다. 외국에서 학생으로 사는 아이들이니 조금이라도 더 한국 역사를 알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였다. 영화가 그럭저럭 흘러가고 있었을 때 갑작스럽게 대사 하나가 마음을 쳤다. “나도 독립운동 하는 사람들 좋아해. 그런데 넌 안 했으면 좋겠어.” 친일파 아버지의 딸로 호의호식하며 자란 쌍둥이 언니가 아기 때 헤어져 독립군으로 활동하고 있는 쌍둥이 동생을 처음 만나 한 말이었다. 이상하게도 이 말은 수 년 전 고려대를 자퇴하며 남겼던 김예슬 양의 글 한 대목을 기억나게 했다.

그녀는 ‘자격증 브로커’와 ‘취업학원’으로 전락해버린 지금의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생각 있다던 사람들마저 자신에게 이렇게 조언하더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공해서 세상을 바꾸는 ‘룰러’가 되어라”,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 나는 너를 응원한다”, “너희의 권리를 주장해. 짱돌이라도 들고 나서!” 그리고 칼날처럼 덧붙여지는 한 줄, “그래도 대학은 나와야지”……

그녀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조언들 속에서 희망은커녕 더 큰 절망을 발견했을 뿐이었다.

표현은 달랐어도 영화의 대사와 자퇴생의 글은 닮은 내용을 지니고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타협’이었다. 옳은 길은 알지만 그 길을 선택하지 않는 것, 선택하지 않은 것을 선택하지 못했다고 믿는 것, 정말 어쩔 수 없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 타협은 언제나 그런 모양으로 우리를 감싼다.

예수께서 받으신 광야의 시험 역시 어찌 보면 이 타협과의 싸움이었다. 전혀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효율 제로의 길 앞에서 예수는 다른 대체재를 고민하셨다. 물질과 기적과 힘.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주님은 효율과 타협하지 않으시고 옳은 길을 걸으셨다. 그분은 말씀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이것은 유혹을 향한 말일 뿐만 아니라, 분명 자신을 향한 각오의 말이기도 했으리라.

타협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각오’뿐이다. 신앙은 결국 각오다. 그리고 나는 이 각오에 관한 한 가장 아름다운 문장 하나를 만화가 김한민의 <카페 림보>에서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각오란 무엇인가? 그것은 두 가지 능력이다. 예상보다 훨씬 나쁜 상황도 삼키는 능력. ‘닥쳐 보니 이 정도인 줄 몰랐다’는 말을 수치로 여기고 입 밖으로 안 꺼내는 능력.”

“그러자 엘리야가 그 모든 백성 앞에 나서서, 이렇게 말하였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머뭇거리고 있을 것입니까? 주님이 하나님이면 주님을 따르고,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십시오.’ 그러나 백성들은 한 마디도 그에게 대답하지 못하였다.” (왕상 1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