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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글 읽기
지성수  |  sydneytax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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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년 08월 19일 (수) 18:39:17
최종편집 : 2016년 03월 06일 (일) 17:09:51 [조회수 :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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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뉴스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을 보고있자니 아이가 처음 한글을 배워서 책을 읽을 때 한 글자 한 글자 힘들게 읽어 나가다가 혹시라도 틀릴까 마음을 졸이던 기억이 났다.

어떤 사람의 말을 듣고 글을 읽으면 그 사람의 사고력을 짐작 할 수가 있고 점쟁이가 아니더라고 좀 더 예민하게 살펴보면 그 사람의 사주팔자(?)조차 대략 짐작 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이런 현상을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는 멋드러진 말로 표현을 했다.

비트켄슈타인의 '철학적 탐구'를 읽다가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의 한계는 그의 세계의 한계이다."라는 구절에서 그만 가슴이 털컹 내려앉았다.

비트켄슈타인은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는 데는 게임과 같은 규칙이 있다는 '언어게임이론'을 주장했다. 언어활동은 다수가 참여하며 다수가 합의한 규칙 속에서 이루어지기에, 언어란 일종의 집단 게임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공을 가지고 노는 놀이이지만 야구, 축구, 농구는 각기 다른 규칙 속에서 진행되는 것처럼 언어가 일종의 게임과 같은 것이기에 언어에는 공공성이 있다는 것이다.

사물의 의미를 규정하는 것은 그것의 활동이고 쓰임이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하면 ‘말’을 그대로 믿지 말고 그 ‘말’이 어떻게 쓰이는지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장기를 둘 때 장기 알이 돌이냐 나무냐 하는 물리적 성질들을 가지고 따지지 않고 그것이 졸인지 왕인지 규칙들을 따져서 쓰는 것과 같은 것이다.

비트켄슈타인은 “사람은 그가 사용하는 언어 속에서 일치한다. 이것은 의견의 일치가 아니라 삶의 형식의 일치이다.”라고 말한다.

“인간은 아무 생각 없이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언어에 의해서 행동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용하는 언어 속에서 실재를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 간단하게 말하면 '인간은 언어 속에 갇혀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즉 내가 쓰는 언어가 곧 나인 것이다.

“언어게임의 최종적인 정당성은 그 게임의 집단적 실천에 있다”고 하는 비트켄슈타인의 말로 해석하면 박근혜 대통령은 집단적으로 실천되어야 할 ‘민주주의’라는 언어를 사적 언어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어린아이가 처음에 글을 배워서 뜻은 모르고 오직 소리만 익힐 때 자기가 읽는 글의 내용을 모르고 읽을 때가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읽는 것을 볼 때 “자기가 읽고 있는 것을 알고 읽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왜냐하면 아주 복잡한 문제를 단순하고 무미건조하게 읽기 때문이다.

나는 과거에 사람들에게 들려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스스로 연구를 목적으로 항상 설교를 녹음 했었다. 어떤 자료를 찾다가 서랍에서 한 면에는 자료가 있고 다른 면에는 30년 전에 설교 하던 테이프가 있어서 카세트에 넣었다가 잠깐 들어 보게 되었더니 참 부끄러운 내용이었다. 나도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 목에 힘을 주고 설교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마복음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책을 살 때 여러 권의 책이 있었지만 유영모의 선생으로부터 유일하게 졸업장을 받은 박영호 선생의 ‘메타노이아’를 샀다. 왜냐하면 다른 학자들이 쓴 책도 훌륭하겠지만 ‘깨달음’을 주제로 한 도마복음은 학자 보다는 직접 몸으로 깨달은 사람이 쓴 책이 더 좋을 것 같아서였다. 즉 모르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알고 하는 이야기일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복음서는 역사적 사실보다는 복음서가 쓰일 당시의 신학적 입장을 반영하고 있다. 학자들은 복음서들이 예수의 어록(Q자료)을 토대로 쓰였다고 추측하는데 나그함마디에서 발견된 도마 복음이 집필 시기나 양식에 있어 그 어록에 가장 가깝다고 한다.

그런데 도마서가 제시하는 예수의 모습은 정통 기독교 신앙에서 제시하는 예수의 모습과 사뭇 다른 모습이다. 도마서에 예수의 모습은 깨우침을 전하는 지혜의 선생의 모습이다. 영지주의자들은 그노시스(지식)를 앎으로써 구원에 이른다고 믿었는데 그노시스를 안다함은 신성합일을 의미했다. 초기 정통 기독교회는 교권을 확립하기 위해 왜곡된 모습의 영지주의자들을 선전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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