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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의 예루살렘 행이 순종인가?
박창진  |  5016park@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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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년 07월 27일 (월) 09:39:30 [조회수 : 5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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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는 제 3차 전도 여행 중에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한다(1). 그 과정에서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는 말을 하였다. 하나님께 사명을 받은 자로서 최고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예루살렘 행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그렇지만 최고의 고백 가운데 행해진 일이라고 해서 반드시 순종인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일을 하면서도 그러한 고백을 할 수도 있다. 시기와 방향이 맞지 않으면 불순종이 되기 때문이다. 과연 어느 쪽일까?

바울 사도는 여러 지역 교회의 연보를 모아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하여 가려고 한다. 동시에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역사를 증거하고 시기가 나게 하여 많은 유대인들이 복음 안으로 들어오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그는 얼마 전에 로마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3)고 말하였다. 그런데 성령님의 감동을 받은 성도들이 바울의 예루살렘 행을 막으려고 한다. “그 제자들이 성령님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행 21:4하). 이에 대한 해석은 분분한데, 본문 자체는 그 제자들의 행동이 성령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은 복음 전파의 종착지라고 할 수 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된 후에 예루살렘에서 그 복음을 다시 확증하는 것이다. 그 역할을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 사도가 수행하는 것은 성령님의 뜻이다.

문제는 시점이다. “성령님께서 의도하신 시점이 언제인가?” 바울 사도가 예루살렘으로 가려는 지금인가, 아니면 다른 때인가? 성령님의 감동된 제자들의 말은 정확하게 번역하면 “지금 올라가지 말라”(2)이다. 이 말은 ‘며칠 후’를 뜻할 수도 있고 ‘다음 기회’를 뜻할 수도 있다. 바울 사도는 “여러 날이 지난 후에”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만약 ‘며칠 후’였다면 그는 성령님의 뜻에 순종한 것이다. ‘다음 기회’를 뜻하였으면 그는 순종하지 않은 것이다. “여러 날이 지난 후에”는 “며칠 후”로 해석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그가 가이사랴에 이르렀을 때에 선지자 아가보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바울 사도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고 성령님께서 말씀하셨다고 한다. 아가보 선지자의 말은 단순히 있을 사실에 대한 설명이라고만 말할 수 없다. 앞의 문맥과 연결되기에 금지의 의미가 담겨 있다. 바울 사도의 일행과 성도들이 함께 바울 사도를 만류하는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바울 사도는 만류하는 그들을 책망하며 “죽을 각오도 하였다”면서 그들의 만류를 뿌리친다. 그리고 “여러 날이 지난 후에”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올라간다. “여러 날이 지난 후에”가 “지금 올라가지 말라”는 만류를 받아들인 결과가 아니다. 이는 앞에서 제자들의 만류가 있고 난 후의 “여러 날이 지난 후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 올라가지 말라”는 “다음 기회에 올라가라”는 뜻이었다. 바울 사도가 예루살렘으로 가야한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시점이 지금은 아니었던 것이다.

지금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바울을 통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바울 사도를 통하여 하시고자 하신 일이 있었다.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롬 15:23). 성령님께서는 바울 사도가 서바나로 가기를 원하셨다. 그 여정에 로마에 들러 교제하고 로마 교회가 서바나로 보내주게 될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것이라고 말한다. 이 모두는 바울 사도가 미결수의 신분으로 로마에 가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자유인으로 로마에 들러 로마 교회를 말씀 위에 더욱 굳건하게 세우는 사역을 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바울 사도는 결국 예루살렘을 갔고 유대인들에게 붙들려 미결수로 로마에 가게 된다. 로마서에서 말하였던 로마 방문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비록 그러한 중에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심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이 계속되지만 자유인으로 가는 것보다는 훨씬 못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전설에 의하면 그가 연금 상태에서 풀려나 서바나로 갔다 왔다고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이다. 그가 자유인으로 서바나를 다녀왔다면 복음 전파에 있어서 엄청난 진보가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가 서바나로 가서 복음을 전파하여 복음의 진보를 이루고 예루살렘으로 가기를 원하셨다. 그런데 그는 동족 구원에 대한 열정으로 예루살렘으로 먼저 갔다. 자신의 열정이 하나님의 뜻보다 더 앞섰던 것이다. 결국 로마에서 연금 상태로 살면서 디모데에게 편지를 썼다.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딤전 1:15)라는 고백은 이러한 깨달음으로 인한 것이다. 성령님께 전적으로 순종하지 않은 죄에 대한 공적 고백이라고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님께 긍휼을 입었다. 그것은 이후의 성도들에게 본이 된다. 오래 참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바울 사도의 고백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한 일반적인 진술이 아니다. 자신의 잘못을 얼마나 크고 중요한 죄로 보고 있느냐에 대한 회개의 고백이다.

일반적으로 바울 사도의 이 고백은 의인이면서 죄인인 신자, 죄인이면서 의인인 신자라는 주장의 근거로 사용된다. 그렇지만 그것은 옳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모두 용서받은 신자는 의인이다. 다만 죄를 범하였을 때에는 죄인인 것이다. 신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한 의인으로 스스로를 인식하여야 한다.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게 되었다. 이는 성도가 범죄를 정당화하거나 당연시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바울 사도의 예루살렘 행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이 순종의 결과물이 아니다. 그의 자기 열심히 만들어낸 불순종이다.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생각과 열심히 더 앞서서 만들어낸 안타까운 일이다. 이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본보기로서 충분하다. 우리의 인간적인 생각과 열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깨어 있어야 한다. 우리 앞서 가시며 우리를 이끄시는 하나님을 따르는 삶 곧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삶이 있어야만 한다. 언제 어디에서나.

 

(1) 이 사건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의 전제가 필요하다. 쳣째, 예수 그리스도 외의 모든 성도는 결정적인 죄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망령되이 말하여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모세나 사역의 현장을 떠나 죽기를 청하였던 엘리야와 같이 말이다. 바울 사도라고 여기에서 근본적으로 예외일 수는 없다. 둘째,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자신의 뜻을 나타내실 때에 변경하시기도 하신다는 사실이다. 엘리야의 심판 선언을 들은 아합 왕이 겸비하게 행하자(왕상 21:27), 하나님은 재앙을 아합의 시대에 내리지 않고 그 아들의 시대에 내리시리라고 말씀하셨다(왕상 21:29). 하나님은 히스기야 왕이 병들었을 때에 죽고 살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으나(사 38:1) 히스기야가 마음의 교만함을 뉘우치고 눈물의 진실된 기도를 한 후에 그의 생명을 15년 연장하여 주셨다. 이렇게 짧은 순간에도 하나님의 뜻은 바뀌기도 한다. 이는 하나님의 불변함의 훼손이 아니다. 언약의 하나님의 언약적 행동이다. 그리고 실현되는 하나님의 뜻은 후자이다. 바울 사도의 예루살렘 행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뜻도 변화가 있을 수 있다. 만약 변화가 있다면 실현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뜻은 후자이다.

(2) 문법 구조를 보면, ελεγον .... μη επιβαινειν 이다. ελεγον(말하다)는 미완료이고, επιβαινειν(올라가다)는 현재 부정사이다. 부정사가 “말하다” “생각하다”라는 동사의 목적어로 사용될 때, 부정사는 행동의 시간과 단계를 나타낸다. 현재 부정사는 일반적으로 직설법의 현재 명령을 나타낸다. 이것은 말하는 순간에 진행되고 있는 행동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직역을 하자면, ““지금 올라가지 말라”고 말했다”이다. 이 부분은 다음카페 양무리마을에서 토론 상대자(Andere28)의 글을 인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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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 Im (70.62.49.64)
2015-08-03 06:31:29
그리스도인들은 죄인일까요 의인일까요?
"신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한 의인으로 스스로를 인식하여야 한다."는 말로 보아 그리스도인들은 의인이군요. 또한 그리스도의 은혜가 의인으로 만든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은혜없이는 의인이 될 수가 없지요. 그래서 '오직 은혜'라는 구절이 나왔겠지요.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모두 용서받은 신자는 의인이다."는 말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과거, 현재 뿐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는 미래의 죄까지도 모두 용서해 주시는군요. 사실 그렇게 되어야 그리스도의 은혜가 완전한 은혜가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완전한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한 의인으로 스스로를 인식할 수가 있지요.

만약 미래의 죄 때문에 죄인이 되어 의인이 아니라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요? 지금까지 은혜로 죄용서받은 것은 무효가 되며 그 미래의 죄로 인하여 멸망받을 수 밖에 없겠네요.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죄인'인 상태의 개념과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 실제적인 죄를 짓거나 하나님께 순간적인 불순종의 죄를 지을 때 '죄인'이라는 개념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이 성령의 뜻을 거슬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이 심각한 불순종의 죄라면 이는 성령을 훼방한 죄이기에 죄사함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예루살렘행에 대하여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생활 속에서 실질적인 죄를 범하거나 영적인 죄를 저지르지 않는 자 없을 겁니다. 비록 없다할지라도 우리가 자고할 수 없는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의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의인이 되었다면서도 죄를 범하는 우리를 용서하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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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110.46.124.235)
2015-08-04 10:48:03
문맥도 없고 머리 속에 있는 자기 생각만 반복 또 반복이네요
바울 사도의 불순종이 성령을 훼방한 죄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불순종도 다 성령을 훼방한 죄라고 보아야지요.
근데 생활 속에서 실질적인 죄를 범하거나 영적인 죄를 저지르지 않는 자 없다?

성령 훼방 죄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시점에서 성령께서 유대인들을 예수님께로 이끄시고자 하시는 데에 그것을 훼방하는 것을 뜻합니다요.

언제쯤이면 그 상태에서 벗나려는지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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