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학 > 성서이야기
초점 흐려놓기의 심리기제: 그래 한 번 해 보자 어떻게 되나....
박경은  |  0117669763@nate.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입력 : 2015년 07월 16일 (목) 12:33:31
최종편집 : 2015년 07월 20일 (월) 11:38:25 [조회수 : 3489]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텔레그램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초점 흐려놓기의 심리기제: 그래 한 번 해 보자 어떻게 되나....

 

마11:16~19

 

   두 아이가 재미있게 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 큰 소리가 나더니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주먹질이 오고가며 서로 뒤엉켜 엎치락뒤치락하며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잠시 후에 두 아이의 엄마들이 나와 아이들을 말렸습니다. 그러다가 한 아이의 엄마가 소리를 지르며 상대방 아이를 꾸짖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상대방 아이의 엄마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그 엄마는 상대방 아이와 아이 엄마를 번갈아 보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광경이라서 무슨 이야기가 오고갔는지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확실한 것은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으로 번졌다는 사실입니다. 오고가는 대화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나타나는 현상이 가관이기 때문입니다. 저러다 아직 집안에 박혀서 리모콘이나 만지작거리고 있는 애 아빠들까지 가세하면 아주 재미난 눈요기 거리가 생길 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은 당사자들 사이에 왜 저러는지 잘 모릅니다. 다만 눈에 보이는 장면이 볼거리일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나중에 어느 쪽이 이겼는지도 관심이 없습니다. 이기거나 말거나 애들 싸움에 애비 에미까지 가세한 볼거리였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사자들은 속이 상합니다. 감정이 폭발했기 때문입니다. 왜 감정이 터졌는지에 대해서는 자신들도 모릅니다. 그냥 그저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느냐고 할 만한 상황일 뿐입니다. 의심할 수 없는 명백한 것은 아이들끼리 놀다가 다툰 핵심사항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고 엄마들끼리 식식댔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애비들에게로 번진다면 아이들이 왜 싸웠는지에 대한 핵심사항은 더욱 더 멀어지고 점잖게 풀 수 있는 문제해결을 위한 초점만 잔뜩 흐려져 그만큼 수습하기만 어려워지고 말 뿐입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중간지대? 중립? 회색분자?

   마태복음 저자는 세례요한과 예수에 대한 여러 반응들 중에 가장 냉랭한 반응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16절~17절). 그리고 세례요한과 예수에 관한 여러 다양한 평가들 중에서 가장 악의적인 평가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18절~19절). 그것은 결과적으로 세례요한과 예수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와 관계된 ‘믿음’의 문제와 결부된 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을 엘리야로 받는다면 세례요한에게 귀신들렸다고 말할 수 없고 예수를 메시아로 받는다면 예수를 향해 식탐가라고 비방하면서 저질인간들과 어울리는 존재라고 손가락질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작심하고 악의적인 평을 해대는 적대자들은 그런 것에 연연해하지 않고 가능한 한 최대한의 타격을 입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저질의 악평을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하게 됩니다. 악평의 근거는 무엇이며 믿음의 근거는 무엇인가? 세례요한에 대한 악평, 예수에 대한 악평은 결과적으로 세례요한을 엘리야로 받지 않는 것, 예수를 메시아로 받지 않는 것과 관련될 텐데, 받지 않고 믿지 않으면 되지, 왜 굳이 악평하고 비방하면서 모멸감을 느끼게 하려고 애를 쓰느냐는 겁니다.

   왜 그러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받지 않고 믿지 않으면 그만이지 왜 비방하고 악평하고 모독감을 주고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행태를 하는 것일까요?

   믿음은 반응으로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예수에 대한 믿음은 예수에 대한 반응이 어떠하냐의 여부로 결정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에 대한 반응이 믿음을 갖는 것으로 나타나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믿음의 사람이 될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믿음을 갖지 못할 것이란 뜻입니다.

   물론 예수에 대한 반응이 매우 긍정적이라고 해서 반드시 반응이 좋은 것만큼 좋은 믿음을 갖게 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을 갖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얼마든지 호의적으로 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부분 예수에 대해 냉담하거나 철저한 무반응을 보인다면 그런 사람에게 예수를 향한 믿음이 생길 가능성은 없습니다. 예수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그가 예수를 향한 믿음을 가졌다고 단정할 수 없는데 예수에 관해 무반응인 사람이 믿음을 가졌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반응하지 않는 것이 낫지 않을까?

   무반응의 대표적인 예가 16절~17절의 내용입니다. 아이들이 장터에서 놀이를 합니다. 아이들이 피리를 불고 춤을 춘다는 것은 결혼식 놀이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많은 아이들이 놀고 있는 장터에서 그런 놀이를 하는데 다른 어떤 아이들은 그에 대해 전혀 반응이 없습니다. 결혼식 놀이를 하든지 말든지 개의치 않습니다.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습니다. 웬만하면 ‘나도 같이 놀자’라고 할 만한 분위기인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얼마쯤 지나 이번에는 슬피 우는 장례식 놀이를 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반응이 없습니다. 결혼식 놀이를 해도, 장례식 놀이를 해도, 놀이에 참여한 아이들은 열심히 재미있게 놀지만 주변에 있는 다른 아이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도무지 반응이 없습니다.

   그처럼 어떤 사람들은 세례요한이 와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해도 반응이 없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말씀을 전하시면서 그를 뒷받침하는 놀라운 기사와 이적을 행하시는데도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거나 말거나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냥 그저 이렇게 살다 죽으면 된다’는 식입니다.

   더구나 어떤 자들은 냉담한 반응이 지나쳐 비방과 흉보기로 점철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세례요한이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면서 금식하며 정결한 삶을 유지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이자 그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귀신이 들려 저런다고 비아냥거렸습니다.

   예수께서는 세례요한과는 달리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며 교제하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그러자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자’라면서 손가락질을 해댔습니다(18절~19절 참조).

 

초점 흐려놓기에 참여하는 자들의 심리기제

   이 자들은 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요?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그만이지 왜 비방하면서 되지도 않는 손가락질을 하는 것이냔 뜻입니다. 아마도 두 가지 관점에서 풀이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나는 ‘천한 것들’의 일방적인 확대에 대한 거부감일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는 주변인이나 진배가 없습니다. 예수는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모으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비난하는 자들은 그렇지를 못합니다. 그들은 인기도 없을 뿐더러 그들의 가르침은 백성들에게 적용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러니 백성들로부터 멀어지는 그들의 입장에서 가능한 대로 예수를 깎아내리려고 하는 심리기제가 작용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백성들을 결집시키는 중심핵이 자신들이 아닌 세례요한과 예수로 이동을 하자 그에 대해 방어기제가 작용했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백성들을 향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가르침이 중심이 되어 율법을 바탕으로 삼는 유대인들이 결집되므로 힘을 나타내는 사회적 구성단체가 되어야 하는데 그들은 점점 더 영향력을 잃어가는 반면 세례요한과 예수의 영향력은 커져갔기 때문일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이 영향력을 잃어간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그들의 존재성이 위협을 받게 되는 것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세례요한과 예수만 없다면 백성들의 중심이동 경향성은 자연스럽게 줄어들게 되겠지요.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예수와 세례요한에 대한 악평은 예수와 세례요한을 향한 백성들의 움직임을 차단시키려는 안쓰런 시도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와 같은 부정적인 반응들에 대해 마태복음 저자가 보이는 입장은 아주 단호합니다. 믿음은 본인의 결단에 의해 그 여부가 결정됩니다. 본인이 믿음생활을 하느냐 마느냐의 여부는 예수에 대한 본인의 반응과 그에 따른 결정여부에 달렸으므로 믿음을 갖느냐 마느냐의 결과는 전적으로 본인의 몫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결단을 통해 믿음을 갖게 하는 증거들은 객관적입니다. ‘객관적’이라는 것은 믿음을 갖게 하는 동기들이 ‘들리고 보인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듣고 보는 것’을 전하라는 말씀이 주어진 겁니다(11:4).

   믿음은 그 특성상 개인적인 차원에서 개인의 결단으로 이루어지는 특수영역의 차원이지만 아무런 근거나 바탕도 없이 무턱대고 ‘생각으로만, 감정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듣고 보는 것’에 의해 믿음이 설 수 있는 토대가 세워지기 때문에 그것을 통해 믿음의 여부를 결정지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롬10:17; 요1:3,9; 4:29 참조). 그래서 마태복음 저자는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은 예수의 말씀을 전합니다.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지혜가 참다운 지혜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행한 일’입니다. 행한 일이 근거가 되어 지혜가 어떤 지혜인지 그 지혜의 참과 거짓의 여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을 엘리야로 받느냐,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느냐의 여부는 세례요한과 예수의 ‘행한 일’에 근거하여 되는 일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내용들과 행하신 일들을 ‘듣고 보는 것’을 통해 예수가 메시아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고 그에 근거하여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가르침이 되겠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각자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지극히 개인적이며 주관적인 성격을 지니지만 믿음을 갖게 만드는 바탕은 객관적인 성격을 지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듣고 보는 것’을 바탕 삼아 내린 자신의 판단에 근거를 두기 때문입니다.

 

핵심사항을 정확히 보고 들은 후 초점을 선명하게 맞추면 문제는 쉽게 해결 된다

   문제해결을 위한 방법은 문제의 발생 원인을 정확히 알면 어렵지 않게 나옵니다. 그런데 문제를 일으킨 자들이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알고자 하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결자해지의 차원에서 문제를 일으킨 원인제공자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면 애초에 문제를 일으켜 욕망을 채우려던 속셈을 이룰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방법이 시간을 질질 끌면서 이런 인간, 저런 인간 동원하여 저질스럽고 추악한.... 초점 흐려놓기 전술을 펼치는 일입니다.그러므로 차라리 초점 흐려놓기 전법을 구사하는 자들보다 차라리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자들이 좀 더 문제 해결에 가까이 있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확신하건대, 이기적이고 사특한 아집적 속셈 다 털어내고 핵심초점에 눈 돌리면 문제는 쉽게 해결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핵심논점은 점점 더 흐릿해지고 풀어야 할 문제 위에 잿가루를 더 짙게 뿌려대는 짓만 계속될 뿐입니다. 삶의 문제를 명쾌하게 해결해 내는 그리스도인의 지혜가 문제투성이인 삶을 깔끔하게 정리하여 복스런 생활이 되게 하는 다윗의 물매돌입니다!

박경은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를 추천하시면 "금주의 좋은 기사" 랭킹에 반영됩니다   추천수 : 275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의견나누기(1개)
 * 100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20000byte)
 * [운영원칙] 욕설, 반말, 인신공격, 저주 등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은 글과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올린 글은 통보 없이 삭제합니다.
  
Philip Im (70.62.49.64)
2015-07-17 10:22:47
마11:16-19 비유의 초점은 무엇인가?
비유를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그와 비슷한 다른 사물이나 현상에 빗대어 표현함"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마11:16-19 말씀은 바리새인(예수님을 배척하는 대표적인 유대인)들이 요한이나 예수님에 대하여 비난하는 그 현상을 아이들의 놀이에 빗대어 예수님께서 표현하신 것입니다. 이같이 예수님을 비난하는 저들을 '이 세대'라 부르고 있으며 '이 세대'는 비유 속에서 '아이들'로 표현되고 있지요.
정리하자면 비유 속의 '아이들' 곧 '이 세대'는 자기 중심으로 놀이를 하는데 여기에 호응하지 않는 '동무들'을 비난한다는 것입니다.
이같이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을 비롯한 유대인들이 자기 중심, 자기 기준에 의하여 판단하고 비난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지적하고 계십니다. 먹지 않는 자 요한은 귀신들렸다하고 먹는자 예수는 먹기를 탐한다고 비난한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저들의 판단 기준이 흔들리는 배와 같습니다. 그래서 이루어진 판단이 이현령비현령이니 누가 지혜롭다 하겠습니까?
그 행한 일(판단)이 옳지 않으니 그 지혜도 옳지 않습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초점은 이 세대의 (흔들리는 자기중심에서 판단하는) 어리석음이라 하겠지요.
리플달기
5 4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20-012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가 35 기사연빌딩 401호 ☎ 02-393-4002(팩스 겸용)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심자득
제호 : 당당뉴스  |  등록번호 : 서울아00390  |  등록연월일 : 2007.7.2  |  발행인 겸 편집인 심자득(010-5246-1339)
Copyright © 2005 당당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dangdang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