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내 마음을 무던히도 아프게 하던 사람이 아직 젊은 나이에 갑자기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쉬운 것은 그가 마음을 상하게 했던 사람들과 화해를 하고 갔으면 좋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투병 중에 본인의 고통이 너무 커서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을 것이고 본인도 그렇게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될지 몰랐을 것이다.

장례식에서 헌화를 하는 사람들 중에 내가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그가 비난했던 사람, 그와 갈등을 빚었던 사람들이었다. 고인과 가깝지도 않고 오히려 고인과 앙금이 있었지만 장례식에 오지 않으면 자신의 마음이 불편할까 보아서 스스로를 편하게 하기 위해서 왔을 것이라고 짐작되었다.

고인은 항상 정의와 민주주의를 말하면서도 성격이 독선적이고 독단적인 사람이었다.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났으니 본인도 어쩔 수가 없어 늘 외톨이가 되어 외롭게 지냈다. 그렇기 때문인지 자신의 투병 사실에  대해서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아서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슬프지는 않았지만 찬송을 부르는데 눈물이 솓구쳤다.

"뜻 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 아니요
운명에 맡겨 사는 그 생활 아니라
우리의 믿음 치솟아 독수리 날듯이
주 뜻이 이뤄지이다 외치며 사나니

약한 자 힘주시고 강한 자 바르게
추한 자 정케함이 주님의 뜻이라
해 아래 압박 있는 곳 주 거기 계셔서
그 팔로 막아 주시어 정의가 사나니"

고인이 누구보다 정의에 목 말라했던 것에는 분명했고 많은 갈등을 빚으면서도 그 점에서 함께 했었기 때문에 나는 흐르는 눈물을 억제하지 못하면서도 목이 터져라 찬송을 불렀다. 목표는 같았으면서도 결코 동지는 될 수 없었던 그를 그렇게 보냈다.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는 것이 아니고 상식의 궤도를 벋어나거나 허탈하게 만들거나 신뢰할 수 없을 때 주로 쓰이는 말로  ‘웃기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무엇인가 딱 맞아 떨어지지 않아 달리 표현할 말이 없을 때 쓰는 말이다.

여기서 웃기는 인간이란 황당한 것도 아니고 사기꾼도 아니고 정신병자도 아니다. 무엇인가 자기는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남이 볼 때는 그만큼 되지는 않은 사람을 말한다.

▲ 라 만차의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1863년 귀스타브 도레 작품)

우리는 엉뚱한 인간의 상징으로 돈키호테를 곧 잘 떠올린다. 그러나 돈키호테는 엉뚱한 사람이 아니라 그 시대에 남들이 가질 수 없는 무한한 이상을 품은 사람의 모습의 전형이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였다. 그러나 웃기는 인간은 사람들에게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이들에게 혼돈을 안겨주는 사람이다.

웃긴다는 것은 그가 내세우는 것이 가치가 없다든가 혹은 비현실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내거는 것은 고상하고 거창한데 땅에 굳게 두 발을 디딘 자세가 아니라서 어쩐지 불안한 자세라고 해야 할 것이다.

냉정하게 평가한다면 그는 과대망상적인 이상주의자였다. 물론 현실정치인 의회에도 녹색당처럼 언제 어디서나 항상 옮은 소리만 골라서 하는 이상주의적인 정당이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들의 의견대로 될 수가 없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지만 그들의 의견을 경청한다. 왜냐하면 판단해야할 기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녹색당은 집권의 가능성은 없지만 단일하고 순수한 이념의 힘으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정당이다. 즉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할 정당'인 것이다. 독일의 녹색당처럼 현실 정치에 큰 영향력을 가질 수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대안세력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이 이상을 품는다는 것은 고귀한 일이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과의 차이는 항상 우리들을 괴롭히고 있는 문제이다. 이상이 현실과 너무 괴리가 심할 때 그 결과는 참담하다. 현실을 따라 주지 않는데 이상만 높으면 무능력 할 수 있다.

아마 나만큼 평생 이상만 쫓아다니는 경우도 흔하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나는 내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현실에 한 순간도 소홀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 사이의 간극 때문에 비겁과 비굴, 용의주도함과 치밀한 계산, 허세와 위장이 뒤섞일 수밖에 없었다.

세상의 모든 것에는 양면이 있는 것이다. 내가 내세우는 이상은 앞모습이고 먹고 살아야 하는 현실은 뒷모습일 수 있다. 앞모습과 뒷모습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처럼 내가 생각하고 주장하는 것과 현실은 다를 수 있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세금을 내야하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예수는 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는 알쏭달쏭한 대답을 했을까?그러면서도 예수는 성전에 세금을 냈고-그것도 물고기 입에다 미리 준비를 해 놓았다가-결국은 성전 세력에게 죽임을 당했다.

예수는 철저하게 현실을 살았다.그에게 있어서 이상과 현실은 둘이 아니라 하나였다. 예수의 생애 마지막에 세상의 힘의 상징인 로마 총독인 빌라도와 벌였던 시비를 한 번 복기해 보자.

아마도 유대 지배계급에게 예수는 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자로 보였을 것이고 빌라도 눈에는 과대망상환자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빌라도가 “네가 왕이 아니냐?”고 물었을 때  예수는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라고 대답 했다.

모더니즘적인 질문에 포스트모던적 대답을 한 것이다. 왜냐하면 빌라도는 현실에서만 살고 있지만 예수는 이상과 현실을 동시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이상이 현실에 패배한 것이 아니라 이상이 현실을 이겨낸 것이다. 현실과 이상 사이의 긴장을 해결할 수 없는 신앙은 더 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 지성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