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은 하나님의 임재를 알리는 사건이다. 구약에서 보면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구원자의 모습으로 사람들의 삶의 자리에 등장한다. 영적 신비를 문자 그대로 표현하는 일은 쉽지 않다. 따라서 ‘입김, 호흡, 바람, 폭풍’ 등과 같은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로 영(靈)의 현상을 설명해 왔다. 구체적 개념으로 실증하기 어려우니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를 들었다든지, “불의 혀”처럼 불꽃 형태로 나타났다든지 상징적 언어를 활용한다. 긴박함, 뜨거움으로 성령의 현존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를 말로 설명하기도 쉽지 않지만, 회화적으로 보여주는 일은 화가들의 탁월한 역량에 달려있다. 따라서 성경에서 묘사한 상징성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보편적인 선택이었다. 제자들의 머리마다 그 위에 불꽃을 그려 골고루 임하신 강림의 체험을 강조하는가 하면, 공중에 깃든 비둘기와 사람들을 가는 실선으로 연결하여 각자가 하늘의 메시지를 듣는 것처럼 묘사하기도 한다. 중세기 전형적인 기법이었다.

  다른 차원의 접근 방식도 있다. 오스트리아 빈 국립도서관에 있는 작품 ‘성령강림절’(das Pfingstfest)은 성령강림을 다룬 주제와 그 표현방식에서 다른 작품들과 큰 차이가 있다. 꼭대기에 위치한 비둘기 입에서 구름을 뚫고 성령이 내리고 있으며, 성령을 나타내는 불꽃의 각 가닥이 모든 제자들 위에 내려앉는 모습은 이전 것과 대동소이하다. 그런데 성령강림의 현실 앞에서 열 한 명의 제자들은 한결 같이 실망과 의심에 찬 눈초리를 하고 있다. 성령충만의 감동은커녕 그 입술 모양이 비죽하게 아래로 처져 있는 것이다. 그 와중에도 그들은 열심히 논쟁을 벌이고 있다.

  이 작품의 배경은 초대교회의 오순절 상황이 아니었다. 화가는 불안한 자기 시대의 상황을 그린 것이었다. 제자들의 혼란스런 표정은 갈 길을 알지 못한 채, 자신의 미래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던 당시 시대상을 담고 있다. 작품의 제작연대인 12세기는 그리스도교가 유럽에서 한창 번성하던 중세기였다. 교회는 황금으로 자신을 치장할 만큼 부유해졌다. 그럼에도 화려한 교회와 제도 안에 성령의 감동이 없었다. 이 그림은 바로 성령부재의 시대를 비판한 것이다. 성령이 없는 교회는 곧 죽은 교회와 같다는 것을 지적하려는 것은 아닐까?

  오늘도 그런 고민은 의미 있다. 오랜 그리스도교 국가인 독일의 경우, 성령강림절은 3대 명절의 하나에 속할 만큼 대접받아왔다. 전국 공통의 국경일 가운데 이틀간을 내리 쉬는 연속공휴일은 부활절, 성령강림절 그리고 성탄절뿐이라는 데서도 이론의 여지는 없다. 그러나 사순절의 경건생활을 통해 준비하는 부활절기와 대림절 4주간의 기다림 속에서 맞는 성탄절기와 달리 성령강림절은 의미가 가장 퇴색한 명절처럼 보인다. 주일과 월요일에 성령강림을 축하하는 예배를 드리지만 생동감은 찾아보기 힘들다. 게다가 다음 주일부터는 삼위일체절기로 바뀌니, 성령강림의 의미가 설 땅이 거의 없는 셈이다.  
 
  이런 현상을 두고 폴만은 “현대 독일교회는 성령을 책으로 만들어 열심히 책장에 진열하고, 성령의 은혜를 전문목회자들에 의한 습득의 대상으로 삼으며 또한 예언을 사회와 잘 적응하는 것으로 대치함으로써 성령의 불길이 꺼지고 재만 남은 상태”라고 지적하였다. 사실 반면교사는 독일교회만이 아니다. 성령충만을 유난히 강조해온 한국 교회의 경우, 모든 문제해결의 약방문이나 된 듯 성령을 받으라고 열심을 냈지만, 성령현상은 갈수록 위축되고 있다. 모든 문제의 대안처럼 대증요법으로 활용한 까닭에 정작 성령충만한 사람과 본이 되는 교회의 모델을 만들어 내는 데에는 실패한 듯하다. 누군들 ‘이 사람을 보라’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한다.

  오히려 무분별하게 성령현상을 남발하면서 영적 분별과 영적 관리를 소홀히 하였다. 그리스도인다운 신령한 삶에 부실한 결과, 비신앙적인 영성론과 영성운동이 우후죽순처럼 무성하게 자라나고 있다. 마음공부, 건강, 웰빙, 심리치료란 이름으로 전파되는 대안적 생활운동도 역시 영성이란 이름을 강조한다. 그런 유사 영성운동에 많은 사람이 기웃거리고 있다. 

  그러기에 성령강림은 겨우 1년에 한번 기념하는 연중행사여서는 안 된다. 시도 때도 없이 만병통치의 처방전처럼 남발될 수도 없다. 형식과 제도에 얽매여 부활과 성령강림의 중간쯤에 멈추어 버린 성령부재의 현실도 위험하지만, 오직 구호로 통하고 수단으로 남용되는 성령부실의 현장은 얼마나 큰 위기인가? 오순절 다락방의 성령강림은 유일회적 역사이지만, 성령의 선물은 ‘일용할 양식’처럼 일상적으로 존재하게 마련이다.

  성령의 열매가 단적인 본보기이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갈 5:22-23, 새번역). 우리는 매순간 성령의 역사와 은총을 우리의 삶 한복판에서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다운 체질로 바뀌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되어야 한다. 성령임재는 어느 시대, 누구와도 함께 하시는 은혜의 사건이다. 성령의 교통하심(Communion of Holy Spirit)은 날마다 누릴 생명의 풍성함이다.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갈 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