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건기가 끝나려는가!

약 3개월 동안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더니

지난밤에 소나기 한 줄금 요란하게 쏟아 졌습니다.

강물이 얼마나 불었나 볼 겸

오늘 아침은 산책코스를 읍내에서 동쪽 방향에 위치한

알룰링 바랑가이 쪽으로 잡았습니다.

강바닥이 깊어 알룰링 가는 도로가 마치 산허리를 지나는 기분이지요.

읍내를 벗어나 도로에서 강으로 비탈길을 내려가는데

부지런한 베니씨가 이른 새벽 벌써 강을 건너 출근하다 마주칩니다.

까왁 산마을에서 내려왔으니 빨리 걸었어도 30분 이상을 걸렸을 겁니다.

베니씨는 시장 비서실에 근무하며 나의 클라이언트이지요.

당뇨나 고혈압 등 특별한 병은 없으나 비만으로 인해

자주 피곤하고 골이 아파서 수년 동안 진통제를 복용하다가

나를 만나고 부턴 진통제를 끊고

침뜸 균형요법으로 건강을 돌보며 매우 호전되는 중입니다.

뜻하지 않게 새벽 어스름한 오솔길에서 만나니 평소보다 더 반갑군요.

물을 건너오느라고 반바지 차림이 마치 논에 다녀오는 농부 같습니다.

베니씨가 나의 클리닉에 올 때 마다

속옷을 두 장이나 겹쳐 입는 것을 늘 보게 되었습니다.

치료를 받으려면 속옷만 입고 겉옷을 모두 벗어야 하므로

환자들 속옷을 자연히 보게 되지요.

베니씨 뿐만 아니라 이곳의 다른 남자 클라이언트들도

치료하다 보면 거의 모두 속옷을 두 장씩 입었습니다.

어느 날 베니씨에게 물어보았지요.

이 더운 나라에서 왜 속옷을 두 장씩이나 겹쳐 입느냐고.

그랬더니 출퇴근 때에 집을 오가려면

가슴까지 차오르는 강물을 가로질러 가야하므로

평소에 두 장를 입고 있다가 깊은 강을 건널 때,

하나를 벗은 후 짐과 함께 머리에 이고 건너다가,

건넌 후 갈아입으려고 그런다고요.

싱글벙글 웃으며 한 말이라

농담 같기도 하고 진담 같기도 한 대답이었습니다.

오늘 아침 현장에서 확인 해 보니 그게 농담이 아니었군요.

상대방의 상황이나 입장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말을 들으면

상대가 진실을 말해도 때로는 농담 갖기도 하고

거짓말 갖기도 한 말들이 많습니다.

생활환경이나 문화적 차이에서 생기는 현상이지요.

까왁 마을 올라가는 길목의 강에 설치한 섶다리가

지난 밤 비로 물살이 센 쪽 부분이 무너져 가라앉았습니다.

매년 우기가 닥치면 떠내려가고, 다시 건기가 오면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

산에 가서 나무를 베어다 세우곤 하는 임시용 섶다리가

이제 다시 우기의 시작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하였습니다.

지난 밤 잠시 내린 비에도 누런 황토물이 흐르고 제법 물살이 세군요.

이 지역은 높은 산군 한가운데 자리 잡은 분지인지라

수십 킬로로 뻗은 높은 산으로부터 수십 갈래의 계곡에서

모여 내려오는 물이라 조금만 와도 홍수가 납니다.

매일 비가 오는 장마철엔 얼마나 물의 양이 많을지 상상이 갑니다.

무너진 다리를 가까스로 건너 학생들은 등교하기에 바쁘고

가끔 읍내 장보러 가는 어른들도 건너고, 그리고 뒤를 이어

한 농부가 양을 어께에 메고 무너진 다리를 지나

세차게 흐르는 흙탕물을 조심스럽게 건너고 있습니다.

돼지나 말 소 개 등 다른 가축들은

비가 쏟아지고 홍수가 나면 스스로 헤엄을 치든지 하여

본능적으로 위험한 지역을 벗어날 줄 압니다.

그런데 양과 염소들은 스스로 살길을 찾아가지 못합니다.

이들은 반드시 목동이 와서 데리고 가야지

그렇지 않으면 도망도 못치고 그 자리에서 물에 떠내려가 죽습니다.

양은 주인이 없으면 한 발자국도 자기 스스로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하지요.

또한 양들은 매우 순하고 참을성이 많아

주인이 털을 깎다가 살을 베이어 피가 철철 흘러도 소리를 지르지 않습니다.

양은 다른 동물들에 비해, 연약하고 순하고 참을 성 많은 동물이지만

위기상황에 처하면 대책을 강구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다

스스로 죽게 되는 어리석은 면도 있습니다.

이런 양의 모습을 예수께서는 인간에 비유하셨지요.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마9:35-36)

목동들의 주변에서 복음을 전하시던 주님은

목동과 양들의 관계를 잘 아셨지요.

목자가 매일 양들을 보호하듯이,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사시는 동안

사회적으로 고난당하고 소외받는 자들을 목자가 양을 돌보듯이 돌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돌아가신 후에도 어린 양들이 방황하는 것이 못내 염려되어

다시 베드로에게 찾아 오셔서 “내 양을 먹이라”고

세 번씩이나 간곡히 부탁하셨지요.

그런 기가 막히도록 자비로우신 주님의 관심 속에 살면서도

그렇게 가슴 벅차도록 은혜로운 사랑을 받으며 살면서도

가끔 열악한 선교현장에서 주님을 잊어버리고, 혼자 괴로워하고 방황하는 때가 있지요.

그러나 그럴 때 마다 주님이 들려주신 음성을 기억하며 다시 힘을 얻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믿음은 평안과 구원의 주님이 언제나 나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그 분의 품안에 나를 온전히 맡기는 행위이지요.

그런 믿음은 연약함이나 포기가 아니고

더 큰 일을 하고 더 큰 것을 바라보기 위한 마음의 결단이지요.

불가지론자나 교만한 자는 쉽게 믿음을 가질 수 없고

오직 순수하고 온유한 자만이 믿음으로 주님의 품안에 안길 수 있습니다.

온유한 자라야 하늘나라를 기업으로 물려받을 수 있습니다.

나 스스로 하나님을 잘 믿는다 생각하지만, 진실로 우리 주님처럼 사심을 버리고

하늘나라가 내 자신으로부터 시작되길 소망하며 이웃과 함께 행복하게 더불어 살고 있는지

아니면 나와 관계있는 사람들과만 잘 지내고 있는지 스스로 점검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넓은 강바닥 삼각주 자갈밭에도 오도 가도 못하고 갇힌 양들이 있습니다.

이 양들은 밤새도록 주인이 구출해 주러 오기만을 기다리며

주인이 오는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지친 몸으로 자갈 바닥에 털썩 주저앉기도 하네요.

“아! 바로 저 모습이 목자 잃은 양의 모습이구나!”

목동이었던 시편 기자는 저런 모습을 여러 번 경험한 모양입니다.

그리고 주님만이 고난의 현장에서 구출해 낼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며 늘 노래와 시로 적어 두었지요.

“주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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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23:1-6)

인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갑작스러운 재난을 당할 경우

우린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지요.

의지 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자체가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그게 바로 축복이지요.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나는 혼자가 아니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강한 믿음의 확신은

마음의 평안과 함께 놀라운 기적을 만들어 냅니다.

주인을 기다리다 지치고 불안해하는 양들에게 혹시 위로라도 되지 않을까하여

가까이 다가가 알아듣거나 말거나 시편을 암송 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어떤 양은 알아들었다는 듯이 “음매에-헤-” 하는군요.

고등학교 학생정도 되는 어린 학생들이 세차게 흐르는 황토물속에서

무너진 다리를 고쳐보려고 한 참 애를 쓰다가 안 되겠는지 그냥 포기하고 등교 길을 갑니다.

멀리 소를 몰고 가는 사람이 강물 위로 지나가고,

나도 출근시간이 임박해 서둘러 돌아갑니다.

양들에게 시편을 암송 해 주긴 했지만, 구해 주지는 못하고 말 보시만 하고

그냥 강변에 두고 가자니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그런 말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다고 양들이 비웃는 것 같아요.

우기와 그로인한 여러 가지 위기가 본격적으로 닥쳐오면

지구촌 구석구석에는 목자 잃은 양들이 많아질 것이며

그렇게 되면 목자들은 양들을 구하느라 정신없이 바쁘겠지요.

무거운 양을 어깨에 메고 땀을 뻘뻘 흘리며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는 목자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주님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요10:11-12)

우리 주님은 위험에 빠진 양들을 목숨을 다하여 구해내는 분이셨습니다.

말은 쉬워도 행동은 어려운 일이지요. 참으로 고마운 분이십니다.

흔히들 목사를 목자라고 부르지요.

나는 그 말을 들을 때 마다 부끄러워 잘 사용하지 않는 말이지만,

보편적으로 그렇게 사용하고 있으니

나도 그렇게 불리는 무리에 속하여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내가 과연 잃은 양을 찾아 나서 목숨까지 버리시는 주님처럼

내 주변의 고난당한 사람들을 위하여

희생과 헌신과 아낌없는 사랑의 수고를 할 수 있을까!

혹시 제도화된 교회에서 습관화된 직업정신으로

립서비스와 공염불에 치하 받는 데만 수단이 나진 않았나?

주님 앞에 서게 되는 날, 아무 한 일도 없이 말로만 덕을 쌓았다고

이 세치 혀가 책망 받을까 두렵습니다.

“주님, 저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처음처럼 정결한 마음과 정직한 영으로

꾸준히 선한목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날마다 격려해 주시고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의 세치 혀가 말한 대로 선한 일을 행함으로 이루게 하옵소서.”

혀를 위하여 (시인, 정호승)

봄이 와도 내 혀가 자라지 않기를 바란다.

산수유 피는 노란 봄날이 와도

더 이상 내 혀에 봄이 오지 않기를 바란다.

해마다 내 혀는 자라

꽃이 피고 가지마다 거짓이 푸른 우듬지는 돋아

나는 후회한다.

무릎을 꿇고 참회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입춘이 지나면서 운주사 석불들이

한 해 동안 자란 혀를 스스로 자르듯

나도 내 혀를 잘라

곰소젓갈 담그듯 천일염에 담그거나

배고픈 개들에게 던져줘야 한다.

침묵의 말을 잊은

내 거짓의 검은 혀를 위하여

봄이 와도 내 혀는 산새가 되어 멀리 날아가라

날아가 다시는 돌아오지 마라.

2015년 3월 25일

까왁 마을가는 강변 산책을 다녀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