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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누구를 재판하는가?’... 재판 받을 사람이 재판을?[책 뒤안길] <빌라도와 예수> 통해 본 ‘죽인 자와 죽임 당한 자’
김학현  |  nazunj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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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년 05월 01일 (금) 08:36:46
최종편집 : 2015년 05월 03일 (일) 14:54:13 [조회수 : 2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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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한민통)의 일본본부는 정부를 참칭하고 대한민국을 변란할 목적으로 불법 조직된 반국가단체인 북괴 및 반국가단체인 제일조선인 총연합회(조총련)의 지령에 의거 구성되고 그 자금지원을 받아 그 목적수행을 위하여 활동하는 반국가단체라 함이 본원의 견해로 하는 바이요”

육군계엄고등군법회의의 1980년 11월 3일, 선고 80고군형항제176 판결에 대한 상고를 기각하면서, 대법원이 1981년 1월 23일 판결한, 선고 80도2756 판결문 일부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사형을 언도한 군법회의 판결에 불복해 상고한 재판에서 “이 상고를 모두 기각한다”며 내린 선고인데, 파결문의 끝부분은 아래와 같다.

“이 판결에는 관여법관들의 견해가 일치되다. 1981. 1. 23. 이영섭(재판장) 주재황 한환진 안병수 이일규 라길조 김용철 유태흥 정태원 김태현 김기홍 김중서 윤운영”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판결의 엇갈림

   
▲ <빌라도와 예수>(조르조 아감벤 지음 / 조효원 옮김 / 꾸리에 펴냄 / 2015. 4 / 169쪽 / 1만7000원)

당시 김대중을 내란음모의 수괴로 몰아 사형시키는 일에 당시 법관들의 의견이 일치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때 판결문은 내란음모죄 성립이 “실행의 계획의 세부에 이르기까지 모의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김대중의 내란음모가 실체 없는 것이었음을 자인하는 내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법관 한 사람도 내란이 아니라고 한 이가 없다.

아울러 이 판결문에 보면 신군부의 비상계엄령선포가 적법한지는 사법부의 판단 권한이 아니라고도 말한다. 그럼 누가 판단한단 말인가, 질문하게끔 만드는 장면이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재심에서  2004년 1월 29일, 무죄 판결을 받았다.

“피고인은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음모하였거나 회동한 사실이 없고, (중략) 내란음모죄의 구성요건인 국헌문란의 목적과 범죄 주체되는 집단이 특정되지 아니하였으며, 원심이 내란음모죄의 행위라고 인정한 학생시위의 규모와 숫자 등이 구체적으로 특정되지 않아 내란의 수단, 방법, 시기 등이 막연히 기재되어 이 사건 내란음모의 점에 관한 공소는 부적하며, 원심은 범죄사실을 특정하지 아니하여 이유 불비의 모순을 저질렀다“- 서울고등법원 제3형사부 2003재노19 판결문

암울했던 우리나라의 시대적 굴곡을 고스란히 보여준 인물이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라 하겠다. 내란음모의 수괴로 사형 언도를 받았으나 후에 그 나라에서 대통령이 된 사람, 그 드라마틱한 인물사야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대한민국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희대의 비극으로 끝난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희비가 엇갈리는 판결을 보며 우린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누가 누구를 재판하는가. 누가 누구를 죽일 수 있는가. 죽이는 자와 죽임을 당하는 자는 각각 누구인가. 죽인다고 정말 죽임을 당하는 것인가. 죽이는 자는 승리자이고 죽임을 당한 자는 패배자인가. 죽이려고 한다고 다 죽는 것인가. 등등.

인류의 비극, 빌라도의 예수 재판

실은 내가 고 김대중 대통령 재판 이야기를 꺼낸 것은 실은 그 이야기만을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요즘 읽은 책, 조르조 아감벤의 <빌라도와 예수>(꾸리에 펴냄)가 예수의 재판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재판 기록과 성경이 쓰고 있는 빌라도가 예수를 재판한 기록이 많은 면에서 닮아있다.

아감벤은 책 제목을 ‘예수와 빌라도’라고 하지 않고 ‘빌라도와 예수’라고 했다. 인간 빌라도를 지나지 않고 신 예수를 논할 수 없다는 지극히 당연한 신학적 논조임에 분명하다. 빌라도의 법정을 지나지 않고 예수의 십자가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라도의 법정(베마)이 정당했는가 하는 논의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는 별개로 생각해 볼 문제다.

저자의 표현대로 한다면, “빌라도가 주재하는 재판 과정은 두 개의 심판, 두 개의 왕국이 맞서 있다.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이 대립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세계가 진리의 세계를 재판하고, 지상의 왕국이 영원한 왕국에게 판결을 내렸다. 십자가 처형! 상상도 할 수 없는 중한 벌을 내렸다.

신학자 칼 바르트의 논리로 말하면, 가룟 유다의 입맞춤으로 예수가 빌라도에게 넘겨졌다. 이는 세속에서의 ‘넘겨줌’인데 이미 하느님의 ‘넘겨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위로부터 권한이 유다나 빌라도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이뤄진 재판에서 빌라도는 “나는 그(예수)에게서 죄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선언한다.

그러고도 빌라도는 정치적인 이유로 예수를 유대인들에게 넘겨줌으로 방치했다. 예수의 목숨을 담보로 한 빌라도의 정치적 결단은 치졸한 것이었다. 그래서 피에트로 데 프란치시는 “예수의 재판은 전혀 정당성이 없다”며 로마법의 관점에서 볼 때도 ‘왜곡’이었다고 말한다.

“빌라도가 주재한 재판 과정은 본래적인 의미에서 전혀 재판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법제사가들은 로마법의 견지에서 예수의 재판과정을 평가하려는 시도를 해왔다. 거기서 상이한 결론들이 제출되었다는 사실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중략) ‘예수는 사형을 당한 것이 아니라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의 처형은 부당한 처벌이 아니라 살인이었다.’(로사디)”- <빌라도와 예수> 90~91쪽

“우리는 최종적으로 결정내릴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으며, 끊임없이 계속되는 결정은 실제로는 아무것도 제대로 결정하지 못한다. 그렇지 않다면 위기는 빌라도에게 벌어진 것처럼, 갑작스럽게 파국으로 치달을 것이다. 결정하지 못하는 사람(빌라도)은 계속 결정하고, 결정할 수 있는 사람(예수)은 아무것도 결정할 게 없다.”- <빌라도와 예수> 101~102쪽

죽였지만 산 사람... 김대중·예수

아감벤의 논리로 말하면, 신군부가 행했던 재판을 지나야 김대중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신군부의 재판으로써의 가치가 없는, 12명의 판사들이 일제히 “참여 법관들의 의견이 일치되다”고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재판을 지난 후 대통령의 자리까지 올랐다.

김대중에게 주어진 언도는 사형! 예수에게 주어진 언도도 사형! 둘은 같다. 그러나 다르다. 하나는 죽지 않았다. 후에 복권되었고 대통령이 되었다. 다른 하는 실제로 죽었다. 그리고 다른 죽을 사람들을 살렸다. 물론 이런 논리는 기독교 신앙의 논리이긴 하지만.

재판도 아닌 재판으로 산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죽은 사람이 있다. 이것이 바로 땅과 하늘의 신비이다. 땅에서는 살아서 대통령이 되었다. 하늘에서는 죽어서 구원자(신)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치른 땅의 재판은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김대중과 예수는 처절하게 재판 기록에서 맞닿아 있다.

김대중과 예수의 재판을 아우르며 이제는, 다시는, 재판할 수 없는 자들이 재판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재판할 사람이 재판을 받는 사태는 역사에서 사라져야 한다. 하지 말았어야 했던 재판을 한 빌라도는 계속 ‘사도신경’에서 죄인 취급을 받고 있다. 아무리 정치적인 이유라 해도 다시 쓸데없는 ‘사형 언도’는 사라져야 한다.

※책 뒤안길- 뒤안길은 뒤쪽으로 나 있는 오롯한 오솔길입니다. 책을 읽으며 떠오르는 생각의 오솔길을 걷고 싶습니다. 그냥 지나치면 안 되는 길일 것 같아 그 길을 걸으려고요. 함께 걸어 보지 않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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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돌 (218.38.162.72)
2015-05-02 09:06:24
빌라도 와 예수, 역사는 반복된다!
빌라도는 “나는 그(예수)에게서 죄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선언한다.
<본문 중에서 그리고 성경 본문 중에서>

물론, 빌라도가 예수의 무죄를 선언했다는 이야기는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라, 기독교(예수)는 로마에 위협적인(반체제적인)
종교(인물)가 아니라는 후대 성경 기자의 신학이 반영된 것이겠지요.

예수(운동)는 현상유지에 전전긍긍하는 권력에게는 위협적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말도 안되는 종교(유대교)와 정치(로마)가 야합한 재판에 의해
살해('사형'이 아닌!)당했지요.

그런데 기독교 또한 새로운 권력이 되자 예수의 전복적인 모습은
점차 기독교에서 가리워지게 되었고 달리 해석되었지요.

분명 정치적인 예수의 죽음은 속죄의 죽음으로 해석되면서
예수의 죽음이 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죽음으로...
그러나 예수의 속죄로 살아났다는 이 많은 군상들의 재생된 삶이
과연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삶인가는 따져보아야 합니다.

현금(현실)기독교를 정당화하기 위해 예수가 죽었다면,
예수의 죽음은 개죽음보다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 허접한 개독교와 먹사들을 산출하기 위하여
예수가 당연히 죽을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면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니라, 역사의 지독한 스캔달입니다.

사실, 기독교는 속죄의 교리로
예수를 끊임없이 십자가에 매어다는
머리없고 추악한 종교일지도 모릅니다.
유대교권력이 로마권력과 결탁하여 예수를 살해했다면,
기독교는 교리와 신학으로 계속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하는
추잡하고 머리없는 흡혈 종교일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는 언제나 되풀이되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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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
흥미 (72.196.233.169)
2015-05-02 05:01:16
흥미있게 읽고 갑니다.
예수와 김대중 비유, 아주 신선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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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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