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부재’라는 말이 넘친다. 정치, 경제, 종교, 사회 전체를 아우르며 어디서나 빠짐없이 ‘소통의 부재’가 메아리친다. 작금에 벌어지는 모든 문제들은 모두 이 ‘소통의 부재’ 때문이라는 것이다. 현재의 문제가 소통의 부재 때문이라니, 그렇다면 예전에는 소통에 아무 문제도 없었다는 말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소통은 예전에도 여전히 부재했다. 아니, 사정은 더욱 심했다. 나의 지난 시절을 돌이켜 봐도 권력자와 국민 사이는 잔인하게 일방적이었고,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말이 없었으며, 스승과 제자 사이의 소통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사람들이 말하는 ‘소통의 부재’라는 현상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어쩌면 지금의 문제는 ‘소통의 부재’가 아니라 ‘들음의 부재’라고 해야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소통의 부재가 아니라 들음의 부재. 누구나 자기 말만 하고자 하는 세상에서 아무도 남의 말을 들으려하지 않는다. PR은 Public Relation의 약자이면서도 더 이상 대중 속에서의 관계를 뜻하지 않고 알리고 드러내는 행위만을 뜻한다. 이 약자의 운명처럼 사람들은 관계를 생각할 때마다 끊임없이 자기를 드러내는 일만 생각한다. 그리고 이에 걸맞게 모든 관심과 훈련 역시 말하는 것에 집중된다. 사랑이라면 결정적인 것은 고백이 된다. 교육이라면 프레젠테이션이다. 그러나 채 고백 못한 사랑이 수줍게 풍성한 열매를 맺기도 하고, 말하지 못한 마음이 신비하게 제 길을 찾아 목적지에 닿기도 한다. 말하기만 중요한 세상에서, 듣기만 하고 가만히 있으면 바보취급 받는 세상에서,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이 없는 것은 지극히도 당연한 일이다.

심지어 들음의 부재는 하나님과의 관계마저도 잠식해버린 듯하다. 기도는 대화라고 배웠으면서도 기도는 더 이상 들음을 포함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수없이 많은 말들을 하나님을 향해 쏟아내는 것, 만약 우리의 기도가 그것뿐이라면 우리의 기도는 도대체 얼마나 빈약하고 가엾을까. 우리는 들음을 회복해야 한다. “쉐마, 이스라엘!” 손에 매고, 이마에 붙이고, 문에도 붙이고, 앉으나 서나, 들으나 나나 끊임없이 되뇌어야 하는 결정적 신앙 고백인 신명기 6:4-9의 말씀은 “쉐마!”, 즉 “들어라!”라는 말로 시작되었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셨다. “귀 있는 자는, 들어라!”(마 13:9) 문제는 들음이다.

무엇보다 들음은 비움을 뜻한다. 마음이 내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한, 다른 이의 말이 들어올 자리는 없다. 그러니 듣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 생각의 일정량을 비워내야만 한다. 더 나아가 들음은 무방비 상태를 뜻한다. 대화를 대결로 간주하는 한 사람은 상대의 말을 들으면서도 듣지 않는다. 상대방의 말을 들으면서 언제나 그 말을 받아 칠 다음 말을 준비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들음은 이런 방어적 태도를 그만두는 일이다. 상대가 무슨 말을 하던 그대로 다 받아들이려는 무방비야말로 진정한 들음의 조건이다. 상처 입을 가능성을 각오하고 그대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 이것 없이 들음은 가능하지 않다.

하나님은 죽음까지도 각오하고 인간에게 무방비 상태로 오셔서 자신을 드러내셨다. 그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달랑 한 권. 그리고 꿈이건 환상이건 하나님의 말씀은 잘 들리지 않는다. 어쩌면 하나님은 꼭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내 말은 이게 다다. 이제 난 할 말을 다 했으니 이제부터는 네 말을 들으마.”

“너희의 귀는 지금 듣고 있으니 복이 있다.” (마 1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