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성남에 사는 민영씨가 지난 14일, 은행현금지급기에서 겪은 황당한 일화다.

민영씨가 현금지급기 앞에 섰다. 얼마를 뽑을까. <예금인출>을 눌렀다. 금액을 얼마로 할 거냐고 물어온다. 30만원. ‘5만원권’으로 할 거냐, ‘1만원권’으로 할 거냐. 그야 물론 가벼운 ‘5만원짜리’로.

기계가 시키는 대로 차례차례 누르고 나니 돈이 ‘쑥’ 튀어 나온다. 오늘따라 신사임당이 잘 생겨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었으면 기분 좋았을 것을. 명세서를 출력할 거냐고 물어온다. 0.5초 망설이다가 <명세표 출력>을 누른다.

명세표가 나온다. 뽑은 금액과 잔액이 제대로 되어 있는지 확인한다. ‘음, 제대로 되었군. 그런데, 통장에 잔고가 이 정도라니, 아껴 써야겠는 걸’. 민영씨는 그렇게 명세표를 들고 현금지급기 코너를 유유히 빠져 나왔다.

그 코너를 나와 평소대로 집을 향해 가다가 전광석화처럼 떠오르는 생각 하나. ‘앗! 내 돈’. 맞다, 민영씨의 손에는 명세서만 들려있었다. 5만원자리 6장은 현금지급기 안에 고이 모셔두고 나왔던 거다.

늦다고 생각할 때가 빠르다고 했던가. 지금 민영씨가 해야 할 것은 무엇? 그렇다. 빛의 속도로 현금지급기 앞으로 달려가는 것. 달려갔다. 아, 그런데 이미 누군가가 그 자리에서 자리 잡고 있었고, 돈을 지갑에 넣고 있다.

▲ 민영씨가 페이스북에 올린 해당 이야기다. 이 이야기로 인해 민영씨의 많은 페이스북 친구들이 "나도 그런 경험 있담"며 유사한 경험담을 올려 서로 웃었다.

이 일을 어쩌지. “실례지만, 그건 내 돈이니 돌려주세요”라고 대놓고 말해야 하나. 아니면, “혹시 여기 30만원 있는 거 못 보셨나요?”라고 돌려 말해야 하나. 아니면, 그 사람이 들을 수 있는 거리를 두고 “이상하다, 좀 전에 현금지급기에다 30만원을 두고 왔는데, 어디 갔지”라고 아닌 척 연극을 해야 하나.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이미 그 사람은 현금지급기 앞을 떠나 자기 길을 가고 있다. 그렇지 뭐. 답답한 건 L씨이지, 그 사람이야 횡재(?)한 것이니 범행(?) 현장을 빨리 떠나야겠지.

민첩한 그 사람의 행동을 보면서 민영씨의 생각은 더욱 복잡해졌다. 이걸 어쩌나. 지금이라도 당장 멱살을 잡고 돈을 달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지금은 타이밍이 더욱 좋지 않다. 차라리 현금지급기 앞에 그가 있을 때 말할 걸. 현금지급기를 나온 그에게 말했다간 오히려 민영씨만 우스운 꼴이 될 수도 있다. 섣불리 말했다간 돈도 못 찾고, 남사스럽기만 할 수도 있다.

짧은 시간 아주 센 고민을 하다가 민영씨는 속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래, 저 사람이 얼마나 어려웠으면, 저 돈을 가져갔을까. 그냥 내 버려두자. 잘 먹고 잘 사시겠지. 좋은 데 쓰시겠지. 이렇게 자신을 위로했다.

그 일은 이솝우화의 한 장면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여우가 숲속에 있는 포도를 따 먹으려고 갖은 애를 쓰다가 그 포도가 높게 달려 있는 탓에 결국 따먹지 못하고 뒤돌아서면서, “그래 저 포도는 신포도 일거야”라고 말하는 장면 말이다.

민영씨도 그 여우처럼 뒤돌아 섰다. 그럼 이젠 어디로 가야할까. 그랬다. 민영씨는 또 다시 현금지급기로 돌아갔다. 어쨌든 돈이 필요해서 뽑았으니, 잃어버린 것은 잃어버린 것이고 하던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하니까.

이런 저런 복잡한 마음을 뒤로 하고, 민영씨는 다시 현금지급기가 시키는 대로 해당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좀 전에 기계가 시키는 것보다 더 착실하게 민영씨는 말을 잘 듣는다. 혹시나 이번에도 실수할까. 그 짧은 시간에 벌써 ‘트라우마’가 생겼을까.

얼마를 뽑겠냐고 또 묻는다. 당연히 30만원. 5만원 아니면 1만원? 5만원자리 6장. 눌렀다. 5만원짜리 6매(30만원)가 맞느냐고 기계가 물으니 <확인>이라고 그가 누른다. ‘확인’이라고 누르자 튀어나오는 돈보다 더 놀라운 일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상하다. 분명히 또 30만원을 찾았으니 통장잔고가 60만원이 빈 금액이 찍혀야 하는데. 30만원만 인출된 걸로 뜨다니. 이게 무슨 조화일까. 무슨 일이 생긴 거지.

민영씨는 그 답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당장 찾았다. 바로 은행직원이다. 직원에게 물었다. 그들의 대답은 이랬다.

“아 네. 고객님. 당황하셨겠네요. 고객님 중에 간혹 그런 분이 나오시더라고요. 그래서 이 기계는 출금한 고객님이 깜박하시고 돈을 챙기시지 않을 경우, 30초가 지나면 자동으로 덮개가 닫히고, 해당금액은 고스란히 그대로 고객님 통장에 입금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설계되기 전엔 은행 직원들이 일일이 잔고를 확인했어야 했죠. 하하하”

아하. 그랬구나. 기계가 사람보다 똑똑한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나 똑똑할 줄이야. 민영씨는 십년감수했다는 생각과 함께 한 장면을 떠올렸다. ‘내가 만약 아까 그 사람에게 30만원 달라고 했다면 어떡할 번했나’. 생각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안 하길 정말 잘했다며 또 한 번 자신을 위로했다.

한 번의 실수로 인해 마음이 천국과 지옥을 오간 경험을 혼자 갖고 있기엔 황당하기도 하고, 재밌기도 한 것이다. 거기다가 자신의 실수를 세상에 알림으로서 한 사람이라도 이런 좋은 정보를 알게 하자는 자신의 평소 오지랖을 발동시켰다.

민영씨는 이런 이야기를 평소 습관대로 페이스북에 올렸다. 올렸더니 ‘좋아요’가 빗발치기도 하지만, 장문의 이야기들이 쏟아진다. 자신도 그런 비슷한 경험을 했다며 자신들의 경험담이 쏟아진 게다.

‘좋아요’를 누르는 한 사람 중에 나도 있었다. 그래서 민영씨에게 양해를 구하고, “이 좋은 정보를 공유하는 차원에서 기사로 낼 텐데 괜찮겠느냐”고 물으니 “실명이 아니라면 좋다”고 쾌히 승낙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신문기사란 이름으로 세상에 나와 당신의 눈앞에 있게 된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