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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 속의 독사 교리: 믿음으로 구원받고 행함으로 상급받는다?받은 구원 예수께서 직접 취소시키시는 예
박경은  |  0117669763@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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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년 02월 12일 (목) 15:44:39
최종편집 : 2015년 02월 15일 (일) 14:26:30 [조회수 : 6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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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은 구원 예수께서 직접 취소시키시는 예

마10: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배웠으므로’ 그러련~ 하는 비신학적, 반성서적 구원론이 바로 ‘한 번 받은 구원은 결코 취소되지 않는다’는 가당치도 않은 교리입니다. 이런 구원론이 아무리 정통신학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지라도 성서신학적이지 않을 경우에는 과감하게 내던져버리고 성서의 목소리에 충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폐기물 같은 구원론은 성서신학의 구원론 속에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독사의 교리라고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10:33은 아무리 평소에 예수를 잘 믿었다고 할지라도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부인하면 예수께서도 역시 그를 아버지 앞에서 부인하시겠다는 내용입니다. 예수를 부인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구원을 받기로 예정되지 못한 자였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인지를 막론하고 예수를 부인하기만 하면 그런 사람은 예외 없이 예수께로부터 부인당할 것임을 명백하게 지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예수를 부인한다는 것은 이미 예수를 믿는 자들을 전제하는 표현이므로 예수께서 직접 구원을 취소시키시겠다는 경고로 보아야 적절합니다.

   이때 베드로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일찌감치 구원으로 예정된 사람이라서 예수를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이 취소되지 않았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싶다면 당신도 사는 날 동안 베드로처럼 일단 예수를 부인한 후에 다시 돌아와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 순교하십시오.

   따라서 ‘믿음으로 구원받고 행함으로 상급받는다’는 비신학적이며 반성서적인 구호는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짓거리에 해당할 뿐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런 따위의 구원론은 성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믿음과 행함을 둘로 나누어 “믿음 먼저, 행함 다음”과 같은 구조로 만들어 놓는 짓은 멸망 받아 마땅한 독사의 짓입니다. 이 두 개념이 구별되기는 하지만 성서는 어디에서도 믿음과 행함을 둘로 나누어 별도로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자들은 ‘믿음으로 구원받기 때문’에 구원받음에 있어서 행함은 전혀 불필요하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이 말을 부인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이어지는 말이 가히 천재적이지만 동의하기가 매우 어려우므로 폐기물 같은 구원론이라고 지적하는 겁니다. 그들은 성서가 말씀하고 있는 행함의 문제를 지나칠 수 없기 때문에 ‘행함이 없으면 상급이 없으므로 그 구원은 부끄러운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일단의 말솜씨 좋은 자들이 말하길, “구원받는 일에 행함이 필요 없음에도 불구하고 성경말씀이 행함을 강조하는 것은 상급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행함이 없으면 주어지는 상급이 없을 뿐 구원은 취소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부끄러운 구원이 되지 않으려면 상급을 받을 만한 행함이 있어야 한다. 누가복음에 나타나는 구원받은 강도가 바로 그에 해당한다”고 설을 풀어댑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긴 했으되 아무런 행함이 없어서 상급이 없으므로 그런 사람은 천국 문에 간신히 들어섰을 뿐, 천국의 외곽에서 빵모자 하나 쓰고 거지 같이 살게 될 것이랍니다....... 소설을 써도 좀 지나칩니다. 이것이 바로 정통 속에 숨어서 독을 뿜고 있는 독사의 뻘 짓이라는 겁니다. 언어유희가 얼마나 천재적이며 노련한 말장난인지 감탄이 절로 나올 뿐입니다.

   ‘구원의 은총’ 중에 어떤 은총은 부끄러운 은총이고 어떤 은총은 자랑스러운 은총입니까? 구원의 은총이 부끄러운 것과 자랑스러운 것으로 나누어진단 말입니까? 주께서 일방적으로 주시는 구원의 은총 중 어떤 구원은 부끄러운 선물이라는 얘기입니까? 대체 부끄러운 구원이라는 그런 폐기물 같은 이론이 성서의 어느 본문을 통해 만들어지게 된 겁니까?

   그러면 누가복음에 나타나는 구원받은 강도는 행함이 없이 받은 구원이므로 부끄러운 구원이란 뜻입니까? 누가복음 저자가 그것을 말하고 싶어서 부끄러운 구원을 받은 강도에 대한 내용을 기록한 것입니까? 주께서 운명 직전에 선물하신 구원의 은혜가 강도에게 부끄러운 선물이었단 말씀입니까? 천만에....... 구원은 결코 인간의 노력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주시는 일방적인 은총의 선물이라는 명백한 진리를 단적으로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이처럼 말씀의 진의와 상관없이 교리를 내세워서 결과적으로 독을 뿜어내는 짓을 하는 말씀의 왜곡을 일컬어 “정통 속에 똬리를 틀고 앉아 독을 뿜어내는 독사의 교리”라고 말하는 겁니다. 대체 이런 따위의 구원론이 성서 어디에 기초하고 있는지 모를 일입니다. 칼빈이나 루터가 이런 방식으로 말을 했다면 이런 따위의 비신학적이며 반성서적인 폐기물 같은 구원론은 발견되는 즉시 곧바로 폐기되어야 하겠습니다.

   단언하건대 이런 따위의 구원론을 펼치는 자들은 돌이켜 회개하지 않으면 마지막 날에 예수께로부터 부인당하게 될 자들입니다. 그러니 아직 죽음에 이르기 전, 회개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지금 철저히 돌이켜 성서의 어떤 본문도 “부끄러운 구원”에 대해 언급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새로운 성서신학적 구원론에 올곧게 서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서에서 말하는 행함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위에서 지적한 대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 자체에는 아무런 하자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선행을 쌓는다거나 하나님을 감동시킬 만한 공로를 쌓아 그것으로 구원을 따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의 선물인 구원을 취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성서는 구원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본인의 믿음이 과연 진정한 믿음인지의 여부를 확증할 것을 곳곳에서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에 대한 확신이 감정 차원에서 머무는 잘못된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운명적 이중 예정론을 기치로 내걸고 있는 듯 보이는 요한복음에서도 이런 따위의 폐기물 같은 구원론을 말하고 있지 않음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명백하게도 요한복음은 ‘믿음으로 받는 구원’을 말합니다. 그래서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고 쓰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자는 이미 영생을 얻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이라고 선언됩니다(5:24). 그에 따라 예수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3:18).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기 때문입니다(3:36a).

   하지만 요한복음은 믿음으로 받는 구원을 본인 스스로가 확증하기 위해서라도 행함을 통해 그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 진정성 있는 믿음인지를 증명해야 한다고 요청합니다(3:36). 명백하게도 아들을 믿노라 하면서도 순종하지 않는 자에게는 영생이 없다(3:36b)고 말씀합니다. 순종이라는 것은 주께서 원하시는 행함을 실천하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믿는다고 하면서도 행함으로 그 믿음을 증거 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을 뿐입니다. 행함으로 증명되지 못하는 믿음을 제시해 봐야 영생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뜻이지요.

   그리스도교 교리의 우물로 알려진 로마서를 직접 기록한 바울도 예수를 고백하는 믿음이 실천행동으로 증명되지 못하면 그 믿음은 구원과 전혀 상관없음을 전제합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2:6)’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10절).

   그런데 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나라는 평강의 나라입니다(롬14:17). 그렇다면 두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평강의 나라인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 주어진다"고 했으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믿음으로 가는 나라이긴 하지만 그 믿음이 행함으로 증명되지 못하면 못 가는 나라’라고 진술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바울은 ‘참고 선을 행하여.......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신다’고도 말씀했습니다(롬2:7). 그리고 이어서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않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신다(8절)’는 말씀도 했습니다. 바울의 이 선언은 ‘한 번 받은 구원은 절대로 취소되지 않는다’를 말한 내용이라고 볼 수 있을 만한 여지가 도무지 없습니다.

   고린도전서의 경우 ‘아버지의 아내를 취한 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5:1)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우들에게 그 일 행한 자를 왜 쫓아내지 않았느냐며 통분히 여겼습니다(2절). 뿐만 아니라 ‘불의한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6:9)’고 규정하였는데 바울의 이 말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준 말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 이미 들어 와서 믿음생활을 한다는 자들 중에 이런 따위의 비윤리적이며 비도덕적인 행태를 보이는 자들이 있기 때문에 그들을 향해 한 말입니다(11절). 그들은 모두 애초에 구원으로 예정 받지 못해서 그런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롬11:29)’는 바울의 말을 왜곡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구원을 주셨다가 취소시키는 분은 결코 아니시지만 순종하지 않으면 긍휼을 베푸시지 않기 때문입니다(30절~32절 참조). 이 말씀은 ‘어떤 경우에도 이미 받은 구원은 영원히 취소되지 않는다’는 뜻을 바탕에 둔 표현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지 않는다는 말은 심판을 연상시키는 표현입니다. 심판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그런데 그 심판이 교회 안에 들어 와 있는 자들을 향한다면 그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이 표현은 ‘받은 구원을 스스로 취소시키는 일을 벌인 자는 결국 심판에 처해지게 된다’는 뜻을 갖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말한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말씀(롬10:10)이 ‘믿음으로 구원받고 행함으로 상급받는다’는 가당치도 않은 교리를 뒷받침하는 것이라면서 바울의 진의를 왜곡하는 독사의 교리에 빠지면 안 됩니다. 바울의 말씀을 보건대 믿음과 행함은 별개의 것이 분명하다면서 믿음과 행함을 둘로 분리시키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결코 믿음과 행함을 둘로 나누거나 분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분리할 수도 없고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고 볼 수도 없도록 바울은 그의 모든 서신들에서 믿음을 말한 즉시 이어서 ‘순종’을 말합니다. 마치 머리와 몸통이 구별되긴 하지만 머리와 몸통을 서로 나누어 둘로 분리하거나 이중구조로 보아 떼어내려고 해서는 결코 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과 행함은 도무지 떼어낼 수 없도록 한 덩이로 이어진 하나의 몸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빌2:11에서 바울은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렇지만 바로 이 말씀만 토막치듯 잘라내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어지는 12절 이하의 말씀에 따르면 ‘그러므로...항상 복종하여...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되어 있고 13절은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로 되어 있어서 입으로 말한 그것을 행함으로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적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구원받지만 행함이 없으면 상급이 없다’는 개의 토사물 같은 교리는 마치 출발하는 열차에 목만 달랑 끼인 채 몸통은 열차 밖에 있는 것 같은 그림을 그리게 할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모습이 정상적으로 열차에 탄 모습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행함으로 증명되지 못하는 믿음은 머리만 달랑 열차 안으로 들어간 형태일 뿐이므로 믿음으로 받은 구원이 진정한 구원인지의 여부를 행함을 통해 검증하라는 겁니다. 제대로 구원열차에 탔는지의 여부는 자신을 돌아보기만 해도 확인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바울도 요한복음과 같이 예수를 구주로 믿어 받게 된 구원이 참다운 믿음으로 허락받은 진정한 구원이라면 그 구원을 받게 한 자신의 믿음이 과연 어떤 믿음인지를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행동을 통해 증명해야만 한다고 말씀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바울의 말씀을 왜곡하고 교리화시켜 그에 편승하면서 행함의 문제를 믿음으로부터 따로 떼어내어 둘로 분리시키면 그 믿음은 가짜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으로 다시 돌아와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마태복음 10:33의 말씀에 의하면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로 되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받게 된 구원이지만 그 상태를 지속해 나가지 못하고 어느 순간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부인하면 예수께서 친히 그런 자를 모른다고 하면서 그 자에게 주어진 구원의 은총을 취소시켜 버리시겠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그런 자를 부인하셨는데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아들이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주셨던 구원을 그대로 유지시켜 주신다는 암시가 이 안에 들어 있습니까? 아들 예수께서 부인하심으로 그에게 주어진 구원을 직접 취소시키길 원하시는 데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그럴 수 없다면서 거절하실 것이라는 암시라도 들어 있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구원을 받게 한 믿음이 참으로 진정성 있는 믿음인지의 여부를 삶 속에서 지속적인 행동으로 증명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진작부터 택함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가룟유다 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열심히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이런저런 이유로 예수 믿는 생활을 끝까지 유지 못한다거나 믿다가 중도에서 그만둔다거나 혹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부인하는 사람은 예수께서 직접 그가 받았던 구원을 취소시키신다는 점을 명백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그에 따라 예수를 주로 받은 사람이라면 “끝까지, 중간에서 포기하지 말고,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신앙생활”을 해야만 합니다.

   여기서 “끝까지”라는 표현은 신학적으로 두 가지 차원의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는 ‘믿는 자 당사자인 본인이 죽을 때까지’라는 뜻을 가지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종말의 그날까지’를 뜻합니다.

   결국 당신이 죽는 날까지 당신의 성서신학적 믿음 상태에 어떤 변질적 이상 징후가 나타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더구나 마태복음은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도록 “입으로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다(7:21이하 참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들에 근거해 볼 때 당신이 죽게 되는 날까지, 혹은 살아 있는 동안 주의 날이 임할 때까지 구원받았음에 이상증세가 나타나지 않도록 건강한 믿음생활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왜곡되어서는 안 될 진리의 말씀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기술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고 행함으로 상급받는다는 말은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과 같은 독사의 교리일 뿐이므로 집어치우고 ‘믿음으로 받은 구원, 행함으로 증명하라!”

 

   칭찬받는 한국교회, 존경받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자는 말....... 왜 이렇게 멋 적고 쑥스러운지....... 솔직히 말해서 덩달아 칭찬 받는 일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교인들처럼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자(17:11)고 권하지도 않습니다. 언감생심 바울처럼 날마다 죽자(고전15:31)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 성서신학에 맞지 않는 개 토사물 같은 구호, ‘믿음으로 구원받고 행함으로 상급받는다’는 독사의 교리에 빠져서 정통신앙 운운하지 말고 예수께 부인당할 짓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날마다 자신을 돌아보며 반성하는 모습이나 좀 보였으면....하는 바람뿐입니다. 그래서 제언하건대, 적극적으로 남들에게 칭찬 듣는 것은 고사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 주지 않도록 자신을 관리하는 모습이라도 좀 보이며 삽시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나마 주를 덜 욕 먹이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참고하시죠. 벧후2:20~22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개가 그 토한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그 더러운 곳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말씀에 충실한 그리스도인들로 인해 주의 영광이 가득한 날이 임하길 고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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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JD (72.253.134.6)
2018-07-11 00:49:38
진정한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을 확신하는 것을 독사교리라니?
똑 바로 가르치도록 도와 주지 못할 망정 교회들을 그렇게 무식하게 비판을 하면 당신은 뭐가 된줄을 아나본데... 당신은 지금 교회를 욕하고 있는 것임.
착각 말고 성경을 좀더 많이 읽어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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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구원과 믿음과 행위의 관계 (72.37.249.108)
2015-02-17 02:22:48
구원은 믿음으로 시작하여 행위로 완결 짓는가?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
그런데 믿음은 행위로 나타난다.
따라서 행위를 보면 구원받은 자인지 알 수 있다.

이 논리를 살펴보면 아주 간단하다. 행위가 없으면 구원받지 못한다. 믿음이 있으되 행위가 없으면 말이다. 더나가서 믿음 있다하면서 악한 행위 심지어 예수를 부정하는 행위는 확실히 구원받지 못한다.

그런데 예수를 부정하는 자가 믿음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그후 또다시 에수를 긍정하면 믿음이 있는 것인가?
그리하여 믿음은 있다가 없다가 반복하는 것인가?
예수를 어느 시점에서 부정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는가?
믿다가 결국에 가서 예수를 부정하는 자를 믿음이 있었다고 할 수 있는가?
극단적으로 '예수부정'이라는 말을 하지만 일반적으로 '예수부정'을 하지 않지만 선한 열매가 거의 없는 자들은?



믿음은 구원의 조건이지만 행위는 구원의 증거이다.

믿음 없이는 구원을 받을 수 없지만 행위는 구원의 결과로 나타난다.
문제는 구원받은 자들의 행위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그 행위가 구원받지 못한 자들과 같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선악간에...

그러므로 전적으로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증거를 조건으로 삼으려면 그렇게 하도록하라.
말이 힘들 뿐이다. 아니 사람이 힘들 뿐이다.
헛된 수고요 십자가를 허상으로 만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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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거짓교인 (118.43.147.164)
2015-02-18 15:58:07
전기로...ㅡ-;
구원은 전기로 받는다.
그런데 전기는 전등의 불빛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전등의 불빛을 보면 구원받은 자인지 알 수 있다.

이 논리를 살펴보면 아주 간단하다. 전등의 불빛이 없으면 구원받지 못한다. 전기가 있으되 전등의 불빛이 없으... (이하 생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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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0
penualnam (27.118.79.102)
2015-02-14 05:29:10
믿음으로 구원받고 행함으로 상급받는다
“믿음으로 구원받고 행함으로 상급받는다는 말은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과 같은 독사의 교리일 뿐이므로
집어치우고 ‘믿음으로 받은 구원, 행함으로 증명하라’!”
<본문 중에서>

이 말에서 믿음이 무엇이고 행함이 무엇인지가 중요합니다.
1. 믿음의 주요 완성자이신 에수를 바라보라(히 12:2)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믿음은 우리의 믿음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입니다. 따라서 행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행함, 곧 그리스도를 사는 삶(빌 1:21)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사는 삶이 바로 믿음과 행함입니다.
2. 그런데도 마치 믿음과 행함을 따로 국밥처럼 얘기하니 맞지가 않는 것 같습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구원받고, 그리스도를 사는 삶으로 구원을 이룸(빌 2:12)으로 상급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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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 (173.66.7.245)
2015-02-13 21:56:40
행함이 없는 궤변인들의 진부한 신학 이론은 더 이상 관심없습니다
예수 잘 믿으세요 그리고 열심히 사세요 그리고 복받으면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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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는돌 (218.38.162.72)
2015-02-13 10:25:53
위험한(위해한) 구원론?
“믿음으로 구원받고 행함으로 상급받는다는 말은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과 같은 독사의 교리일 뿐이므로
집어치우고 ‘믿음으로 받은 구원, 행함으로 증명하라’!”
<본문 중에서>

과연 백미입니다!

문제는 기독교와 교회에서
<구원이 과정>이라는 사실을
회피하고 왜곡하는 데 있습니다.

공관복음서의 <천국>,
요한복음의 <영생>,
사도 바울의 <칭의> 등과 같은 단어들은
구원은 다양한 모습을 표현한다고 보여집니다.(죠오지 래드)

어떤 근본주의자이신 듯한 분은

성경에서 구원은 죽음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당연히 두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는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에서 건짐을 받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죽음 이후의 상태에서 불 못에 들어가는 것에서 건짐을 받는 것입니다. 곧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과 영원토록 교제하는 것입니다.(박창진)

라고 그의 기독교 신앙적 구원을 천진스럽게(!) 정의합니다.

그래서 무릇돌은 댓글에서

무슨 지구의 암적 존재인 인간이
시간적으로 영원히 사는 것을 바란다면
그것은 신에 대한 모독일 뿐이오

라고 쓰기도 하였습니다.

현실기독교에서 가르치는 구원론은
대다수의 신앙인들을 혼돈스럽게 하고
자칫 다중인격자로 만들 수있는 위해한 것입니다.
특히 칼빈에 의한 예정론은 쓰레기 중에서도 갑입니다.

또한 모든 이단과 사이비는
깨끗한 영혼과 인간의 보편적 정서에
지극히 위험하며 위해한 구원론에서 출발합니다!

대부분의 구원에 관한 신학과 교리는
성경의 극히 일부를 전부인양 과대 해석하고
잘못 해석하면서 만들어집니다.

여기 박경은 님은 다양한 성구들을 솜씨좋게 인용하여
기존의 구원론의 허구성을 열정적으로 설명하십니다.

그러나 종교의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않은 시점에서
우리는 성서가 통전적으로 말하는 구원에 관한 교설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성서적 구원론이 지금과 미래의 세대들에게
'아멘'을 이끌어낼 수 있는지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성서적 구원을
신구약성서의 기록과 정경 형성 과정에서의
실질적인 핵이라 할 수 있는
하느님의 백성(자녀)로의 부르심에 대한
'사명적 구원'으로 이해합니다.

박경은 님의 역투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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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5
무릇돌 (218.38.162.72)
2015-02-13 11:05:23
덧붙여
김영봉 교수의 <새 시대를 위한 구원론>을 추천합니다.
부제가 <예수의 성령론적 구원론>으로 되어 있는데
조직신학자가 아닌 성서(신약)신학자의 구원론이라
성서적 구원론을 논의하기에는 단연 참고하여야 할
진정한 성서적-영성적 구원론의 한 예시일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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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받은 구원 (72.37.249.108)
2015-02-13 06:41:11
행함으로 증명하라.
참으로 안타까운 구호가 아닐 수 없다! 우리의 믿음이 행함으로 나타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누구나 행함으로 자신의 믿음이나 받은 구원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행하여야 증명할 수 있는가? 어느 정도여야 남들이 인정할 만한 수준인가?
소자에게 한 것이 곧 주님께 한 것이 되어 구원의 결정적인 증거라면 이 한 번 행위로 족한가? 우리가 어느 정도 주님을 부인할 때 주님이 우리를 부인할 것인가?
우리 밖에 있는 양을 우리로 이끌어들이는 것이 구원이다. 주님의 인도로. 우리에 있는 양들 가운데 자기 꼴을 먹은 후 남은 꼴을 짓밟는 자들은 심판의 대상이 된다. 이 두 비유에서 우리를 같은 우리라 볼 수 있는가? 아니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부인할 자들은 과연 누구일까? 주님을 부인한 자들? 그들만일까? 주의 이름으로 일한 자들도 주님께서 부인하신다 하셨다. 행함으로는 주님을 시인하고 주의 이름을 내세우며 일을 하지만 주님께서는 저들을 부인하셨다. 저들이 과연 처음부터 구원받은 자들인가?

믿음은 무엇이며 구원은 또 무엇인가?
우리의 믿음이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며 더구나 구원은 내가 발버둥쳐서 얻거나 이루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야고보서는 네 믿음을 행함으로 증명하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믿음이 있다고 말로만 떠들지 말고 행함으로 나타내라고 하신 것이다. 아마도 이 말씀은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헛된 짓을 일삼는 자들에게 하셨을 것이다. 혹은 믿음은 있으되 아직 성숙하지 못하여 잘못을 저지르는 자들에게 하신 말씀일 수도 있다. 우리는 이런 자들에 대하여 어떤 판단을 할 것인가? 구원받은 자들이 그렇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명목상 구원받았다고 떠벌이는 자들이라 할 것인가? 이도저도 판단할 수 없고 판단해서도 안된다 할 것인가?

궁극적인 판단이 하나님께 달렸다면 무엇이 구원의 증거로 채택될 것인가?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 심지어 예수를 부인하는 행위를 증거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제대로 행하지는 못하지만 예수의 피공로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바라는 참믿음을 증거로 채택할 것인가?
오해하지 마시라! 지금도 강단에서 말씀을 외치지만 행위가 바르지 못한 일부 목회자들에게 면죄부를 주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부족한 소자의 말이 저들 악한 행위의 핑계거리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면서 의도적으로 죄를 범하는 자들에게도 핑계거리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중심이 되는 믿음을 보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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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교인 (118.43.147.164)
2015-02-14 09:40:32
108의 글쓰기 스타일을 따라해보자.
그냥 공짜 좋아하는 심보가 아닐까?

108의 논조를 참고한다면,
'믿음' 역시 '행위'와 다를 바 없이 그에 대한 판별과 준거가 희미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위는 논외로 치면서 믿음(참믿음??)은 또 부여잡고자하는 바는
그의 공짜 구원을 향한 사랑이 아닐지?

왜 108은 행위와 믿음에 대한 잣대가 다른가?
왜 그는 이중잣대를 사용하고 있을까?

...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면서 의도적으로 죄를 범하는 자들에게도 핑계거리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중심이 되는 믿음을 보시기 때문이다."

정말 그럴까? 이 말을 하는 108은 자기 믿음을 자기가 보고 평가하면서
당당히 구원 욕심을 내는 것 같은데?

(여기에 타인의 믿음에 대한 자평은 덤.)

PS. 시작이 대담해 보여서 읽었다가 너무 공허하게 끝나버리는 바람에 글을 덧붙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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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72.37.249.108)
2015-02-15 02:06:34
거짓교인
보이지 않는 믿음을 행위로 나타내 보이라고 야고보는 말한다.
예수는 너희가 제자라면 내 계명을 지키라고 한다.

행위는 볼 수 있는 것이요 믿음은 볼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판단 기준이 같을 수 없다. 그리고 판단자가 같을 수 없다.

사람은 행위만 보고 판단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믿음을 판단하신다.
그러나 사람의 그 판단은 오류가 많다. 하나님은 오류가 없으시다.

야고보가 행하라 한 것이나 예수가 계명을 지키라 한 것은 참 믿음을 전제로 하신 것이다. 그 믿음을 행위로 나타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믿음이 없이도 있는 양 꾸민다. 그 겉모습을 보고 올바로 판단할 수 없다.

그러니 행위를 보고 판단하시는 듯하나 하나님은 그 중심되는 믿음을 보신 것이다. 믿음이 주냐 행위가 주냐?
사람에게 행위를 강조하신 것은 중심되는 믿음 오직 그 믿음으로 행할 것을 강조하신 것이다.
믿음이 없는 행위는 돛없는 배와 같아서 자세히 살펴보면 이리저리 흔들림을 알 수 있다.

논의의 초점은 구원은 믿음으로만이냐 아니면 결국 행위로이냐다.
구원은 오직 믿음인가 아니면 믿음 더하기 행위인가?
사실 믿음 더하기 행위라고 하지만 이는 행위구원론일 뿐이다.

이야말로 우물에 독을 푸는 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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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교인 (118.43.147.164)
2015-02-15 21:28:40
자삭함.
글쓰기 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음.

글 초반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점점 마음 한 구석에서...ㅡㅡ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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