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쿼바디스(Quo vadis)어디로 가는가, 한국교회!
임종석  |  seok9448@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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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년 12월 30일 (화) 23:03:47
최종편집 : 2015년 01월 13일 (화) 02:50:36 [조회수 : 1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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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가 이재용한테 주면 되는데 교회세습은 왜 안 되지?

부패한 대형교회의 실상을 드러낸 <쿼바디스>라는 이름의 다큐영화가 교계에 적잖은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그로 인한 파장은 교계뿐 아니라 교회 밖의 사회에까지 미치고 있으니 그 영향력은 작은 것이라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무엇인가를 새롭게 밝힌다거나 하는 그런 참신한 내용을 다룬 건 아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교회는 3천억이라는 엄청난 건축비로 세인들의 입이 딱 벌어지게 한 사랑의 교회, 각종 비리로 악취를 풍긴 조용기 목사의 여의도순복음교회, 세습으로 교회를 복마전으로 만든 유공자(?) 길자연 목사의 왕성교회, 성추행으로 낯부끄러운 꼴이 되어 삼일교회로부터 쫓겨난 전병욱 목사가 다시 세운 홍대새교회 등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교회들이다.

그런데도 이 영화가 결코 무시할 수 없을 만큼 큰 파문과 긴 파장을 일으킨 것은 왜일까. 날카로운 흉기에 의한 살인의 현장을 말로만 듣는 것과 생생한 동영상으로 보는 것은 같을 수 없다. 느껴지는 강도의 차이는 운니(雲泥)만큼이나 크다. 사건의 하나하나를 여기저기에서 하나둘 주워듣는 것과 전문가가 계획적으로 모아 체계적으로 꾸려 놓은 것의 차이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는 썩을 대로 썩어 버린 대형교회들의 실상만을 조명하지 않고 예수를 잃어버려 비틀거리는 한국 기독교의 민낯도 들추어낸다. 예장 합동교단의 총회장 광경은 아수라장의 진면목 그대로였다. 저러고도 목사요 장로란 말인가 하는 탄식과 함께 터져 나오는 분노를 누구라서 누를 수 있을 것인가 싶었다.

영화는 한국교회가 걸어온 발자취 가운데에서도 결코 있어서는 안 되었던 일들 을 가려내어 조명한다. 조선예수교장로회는 일제강점기의 1938년에 신사참배를 가결하는가 하면, 1942년에는 목회자들이 성도들로부터 헌금이라는 명목으로 돈을 모아 일본 해군에 ‘조선장로호’라고 명명된 전투기를 헌납이라는 이름으로 바쳤다.

그런가 하면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은 군사정권 때인 1980년 8월 6일에 서울 롯데호텔에서 ‘전두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을 위한 조찬기도회’를 열어 군부세력을 찬양하였다. 전두환이 이끄는 군부가 광주민주화항쟁을 어떻게 무력으로 진압했는가 모르지 않을 터인 저들인데도 말이다. 그때 541명의 사망자와 행방불명 76명에 3139명의 부상자가 나왔고, 1589명이 감옥으로 보내졌다. 사진이나 동영상에 담긴 그 현장의 참혹상이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었다는 것을 지금도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다.

그리고 한국 교회는 2010년 6월엔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서 ‘6.25전쟁 60주년 평화기도회’를 열었는데, 이날의 간증자로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초청되어 나왔다. 그는 이라크 전쟁을 승인해 14만 4천명의 목숨을 잃게 한 대통령으로 유엔과 서방 여러 나라의 의견을 무시하고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게 한 장본인이었다. 그는 간증을 하는 내내 털끝만큼의 반성의 빛도 보이지 않았다.

영화는 말한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로마로 가서 제도가 되었고, 유럽으로 가서 문화가 되었고, 마침내 미국으로 가서 기업이 되었다. 결국 한국으로 와서는 대기업이 되었다”라고.

코메디 같지만 코메디가 아니어서 저절로 공감이 되는 지적이다. 오늘의 일부 대형교회들을 보면 기업인지 교회인지 구별이 잘 안될 만큼 탐욕스런 모습으로 몸집 불리기에 여념이 없다. 거기에다 세습에 이르기까지 기업과 일란성 쌍생아와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름만 대면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만큼 유명한 한 목사는 영화에서 “이병철이 이건희, 이건희가 이재용한테 주면 되고 이건 왜 안 되지?”라고 교회의 세습을 당연한 것이라 항변한다. 이에 영화는, “교회는 점점 커졌고, 예수는 점점 작아졌다. 아버지 목사가 교회의 주인이고, 아들 목사가 다음 주인이다. 다들 탐욕에 미쳐 버렸지만 교회엔 침묵만 흐를 뿐이다”라고 비통해 한다.

 

극히 기독교적인 것을 반기독교적이라며 억지를 부리는 사람들

이 영화 <쿼바디스>는 우리 사회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응시하여 <트루맛쇼> <MB의 추억>을 연출한 바 있는 김재환 감독의 작품으로, 앞에서 언급한 일부 대형교회들의 부패상을 가지고 한국의 기독교계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김 감독은 이 영화를 “예수님을 팔아 장사하는 사람들의 좌판을 엎는 이야기”라 말한다. 그리고 그는 또 “나 역시 어린 시절부터 교회를 다니는 크리스천이다. 이 영화는 교회를 디스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에 대한 애정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도 말한다.

필자는 그가 ‘좌판’을 엎으려 한 것을 ‘교회에 대한 애정’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교회가 교회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데에 도움이 되기 위해 영화를 만들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교회와 교계의 일각에서는 이 영화의 상영을 노골적이고도 조직적으로 방해했다. 사랑의 교회는 <쿼바디스> 제작진에게 내용증명까지 보내 영화 개봉 전에 자기네 교회 및 오정현 목사와 관련한 장면들을 모두 삭제할 것을 요구하며 이를 들어주지 않고 영화를 개봉한다면 “법적 조치를 포함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강력히 대응할 것”이라고 협박했다.

그런가 하면 38개 교단 연합체이며 주로 보수교단 쪽 입장을 대변해 온 한국교회언론회는 공문을 통해 각 교단에 영화 상영 방해를 획책했다. 공문의 주요 내용을 들여다보면 이렇다.

“이 영화는 극히 일부 한국교회와 목회자에 대한 비난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는데, 그럴 경우(영화가 상영될 경우: 역자 주) 한국교회 전체가 입을 이미지 손상은 이루 말하기 어려울 것이며, 젊은이들을 교회에서 떠나도록 할 것”이다.

“이미 위 상영관(메가박스, 롯데시네마, CGV 등: 역자 주)에 영화 상영을 중지하라는 공문을 보냈으나, 더 많은 교계의 목소리가 필요하다”.

“중요 교단들과 연합단체도 한 목소리로 반교회적이고 반기독교적인 다큐 영화 상영의 중지를 요청할 필요가 있다”.

조직적인 대응을 요구하는 것들인데, 여기에서 필자는 저들에게 “무엇이 반교회적이고 반기독교적이냐?”고 묻고 싶다. “반교회적이고 반기독교적인 것은 다큐영화 <쿼바디스>가 아니라 교회당 건축에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붓고, 목사가 성추행을 하고, 교회 돈을 횡령하고, 교회를 세습하는 것이 아니냐?”고 묻고 싶다. 그리고 저들을 두둔하는 사람들이 아니냐?”고도 묻고 싶다.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 말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그 잘못을 고쳐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영화야 말로 극히 교회적이고 기독교적인 것이다.

 

‘좋은 것이 좋다’는 식의 비뚤어진 온정주의의 병폐

우리는 6.25의 잿더미로부터 불과 60년 만에 이 나라를 오늘의 대한민국으로 성장시켜 온 우수한 민족이다. 우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부강했던 서구의 많은 나라들이 추락하는 틈바구니에서도, 종전도 아닌 휴전의 역경 속에서도, 누구도 얕잡아 볼 수 없는 나라를 만든 것이다. 그럼에도 의식수준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게 된 원인 중의 하나가 ‘좋은 것이 좋다’는 식의 생각이다. 좋은 것이 좋다! 말이야 틀리지 않다. 좋은 것이 좋다는데 어떻게 틀렸다 하겠는가. 문제는 좋지 않은 일인데도 ‘좋은 것이 좋다’며 덮어 두고 지나치려 한다는 데에 있다. 우리 한국 교회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데에도 이 ‘좋은 것이 좋다’는 식의 의식이 적잖게 작용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좋지 않은 것까지 그런 식으로 덮고 넘어간다면 어디에도 성장이나 발전은 없다. 좋지 않은 것은 좋지 않다고 인정하여 고치려 노력할 때 성장하고 발전도 하는 것이다.

물론 매사에 다 시시콜콜 따지고 들려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고쳐야 할 것에 침묵하거나 무관심하여 우리의 교회들이 이 지경으로 되어 버린 것이다. 김재환 감독은 한국 교회, 한국의 크리스천들을 향하여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며 애를 태운다.

지금 우리 한국 교회는 교인들의 ‘침묵’ 때문에 부패되어 가고 있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나 속은 곪을 대로 곪아 부어올라 있다. 그 부어올라 몸집이 커진 것을 보고 저들은 성장이라 하는데, 정말 그런가. <쿼바디스>는 그 환부를 수술하기 위한 메스로 제작된 영화이다.

해야 할 말이 있는데 침묵하여 지켜지는 평화는 평화가 아니다. 이에 대해 김 감독은 말한다. “한국교회는 문제가 있는 걸 모두 알고 있는데, 절대 고쳐지지 않을 거라는 아주 이상한 공감대가 형성돼 있어요. 고치려고 하지도 않고 다들 가만히 있음으로 유지되는 ‘이상한’ 평화가 있죠. 결국 그 평화는 상식적인 시선에서는 아주 조롱받을 수밖에 없는 평화예요. 그런데 교회 안에서는 그런 평화로움이 믿음이 좋은 것으로 여겨지죠”라고.

이제는 말해야 한다. 그래도 고치려 하지 않으면 교회를 떠나 옮겨야 한다. 아무리 고집불통의 목사라 할지라도 다 떠나고 없는데 무슨 수로 견디겠는가. 그러나 목사들은 교인들이 그러지 못하도록 막는 데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에 대해서도 김 감독은 말한다.

“교회가 두려움을 심어 온 것 같아요. ‘십일조 안 하면 암 걸린다’ 이런 엽기적인 방식 말고도 일방적으로 그냥, 문제 제기하는 걸 믿음이 없는 것으로 여기는 문화로 만들어 놨어요. 목사를 하나님과 성도 사이에 있는 어떤 존재쯤으로 포지셔닝해서 자신의 권위에 순종하지 않는 행동은 아예 막아 버렸죠. 교회가 자체적으로 깨끗해질 여지를 차단한 거예요.

성도들이 표현을 해야 변화가 시작될 텐데, 하지 못하니 변화 자체가 일어날 수 없죠. 문제 제기가 없으니 또다시 오만한 일들이 일어나고 교인들은 다시 침묵하죠. ‘두려움’ ‘침묵’ ‘변화 없음’, 이런 악순환 때문에 한국교회가 이 지경에 왔어요.”

필자는 설교를 통해 “목회자를 섭섭하게 하도고 벌을 받지 않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하나님의 종인 목회자에게 잘해야 축복을 받는다.” “교회는 어떤 일이 있어도 옮겨서는 안 된다.” 이런 말들을 수도 없이 들어 왔다. 순전히 사기요 공갈이며 협박이다. 목회자만이 하나님의 종은 아닐 테고, 설령 그들만이 하나님의 종이라 해도 그들 종에게 잘하는 것보다 예수님으로 오신 지극히 작은 자인 사회적 약자에게 더 잘하는 것이 백 번 천 번 옳은 일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가 아닌 교회는 떠나 예수께서 계시는 교회로 옮기는 것이 옳다는 것은 재언을 요치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 어느 블로거의 말에 잠시 귀를 기울여 보자. “당신의 교회는 안녕하신가? <쿼바디스>의 질문에 침묵하는 순간, 그 다음 차례는 당신이 다니고 있는 교회가 될 것이다.”

 

나를 포함한 한국교회여,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제 몇 시간 후면 기드론 골짜기 건너편에서, 자신을 배반한 제자 유다가 데리고 온 경비병들에 의해 붙잡히게 되는 그 기가 막힌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자녀들아, 이제 잠시 동안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다. 내가 전에 유대 사람들에게 말한 대로 너희에게도 말하는데,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이에 성미 급한 제자 베드로가 스승께 묻었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요한복음 13장 참조)

여기에서의 ‘어디로 가십니까?’의 라틴어가 ‘쿼바디스(Quo Vadis)’이다. 그리고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는 ‘쿼바디스 도미네 (Quo Vadis Domine)이다.

‘쿼바디스’는 기독교가 로마제국에 포교될 당시의 네로황제에 의한 박해를 배경으로 한 폴란드의 헨리크 시엔키에비치(Henryk Sienkiewicz, 1846-1916)의 소설 제목이기도 한데, 이 작품은 1905년 노벨상을 받았다. 이 제목 <쿼바디스>는 작품의 에필로그에서 사도 베드로가 폭군 네로의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로마를 벗어나 도망갈 때의 장면에 의한 것인데, 그 도망 길에서 그는 스승 예수의 환영을 만나 묻는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Quo Vadis Domine)”

이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이랬다.

“네가 로마를 버리었으니 나는 또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로마로 간다. 네가 나의 어린 양들을 버리었으니…….”

이는 전설로 전해 내려온 이야기이기도 한데, 머빈 르로이가 감독하고 로버트 테일러와 데보라 커가 주연한 같은 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어져 명화로서의 명성을 날렸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내용이 사도행전 외경인 <베드로행전(Acta Petri)>에 기록되어 있으며, 가톨릭 전승으로도 전해지고 있는데, 간단히 소개해 본다.

베드로가 로마 군인들의 박해를 피해 도망가던 길에 예수의 환영을 보게 되는데, 거기에서 예수는 베드로가 로마에서 왔던 길을 거꾸로 가고 있었다. 이때 베드로가 예수에게 물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Quo vadis, Domine?)”

예수가 대답한다.

“십자가에 다시 못 박히러 로마로 간다.(Venio Romam iterum crucifigi.)”

이 말을 들은 베드로는 스승 예수가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로마로 되돌아가 순순히 잡혀 순교하게 된다. 그는 이때 스승과 같은 십자가로 형을 받는다는 것이 송구스러워 거꾸로 된 십자가에서 죽겠다고 원한다. 그리고 그대로 처형된다.

위의 예들에서는 베드로가 예수께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Quo vadis, Domine?)”라고 묻는다. 그러나 김재환 감독의 다큐 영화 <쿼바디스>는 한국 교회와 한국 사회에 묻는다.

쿼바디스 한국교회?

쿼바디스 한국사회?

필자는 예수께서도 같은 질문을 우리에게 하고 계시리라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에 대답해야 한다. 그런데 대답에 앞서 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교회나 사회와 함께 나 스스로를 돌아 봐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 영화가 비판하는 것은 한국 기독교 자체가 아니라 일부 대형교회 목회자들이라고 말하는데, 아니다. 그들을 예로 들었을 뿐, 그와 같은 부패의 요소는 우리 교계의 전역에 걸쳐 전염병처럼 만연되어 있다. 김재환 감독은 “각자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해 봤으면 좋겠”다며, “저한테는 그게 쿼바디스를 만드는 일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쿼바디스가 교회나 목사들의 이야기가 아니고 나의 이야기라는 걸 생각하면서 봤으면 좋겠”다고도 말한다.

일부 교회나 목사들의 이야기로 끝나고 만다면 이 영화는 그리 큰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이를 나의 내면으로 가지고 와서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자성을 불러오게 할 때, 그것이 한국의 교회나 사회, 그리고 나 자신을 치유하여 건강한 성장을 이루게 할 것이다.

 

내 입은 닫아 두고 돌들더러 소리치라 할 것인가?

나는 아니라고, 내가 다니는 교회는 그렇지 않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정말이지 사소한 문제까지 번뜩거리는 눈으로 찾아내어 미주알고주알 문제로 삼으라는 말이 아니다. 의인이 없는 것처럼 문제없는 교회도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덮어 두면 그것이 커지거나 쌓여 교회를 병들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말해야 한다.

김 감독은 “‘문제는 은혜로 덮어라’는 식의,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좀 이상한 상황”이 교회 안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교회의 문제점을 말하는 교인에게 가시노릇을 한다고 매도하는 환경 속에서 신앙생활을 해 왔다. 그와는 달리 문제 아닌 것을 문제라며 교역자를 헐뜯거나 교우들을 비방하는 일 또한 비일비재한데, 안 될 일이다. 그리고 또 그에 못지않게 안 되는 일은 해야 할 말을 하지 않고 침묵한다는 사실이다.

교회가 썩어 가고 있는데도 아무런 불편도 느끼지 않고 마음 편하게 교회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뿐 아니라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신앙이 좋고 은혜가 충만하다며 찬사까지 아끼지 않는 일도 적지 않다. 기독교 신앙도 은혜도 모르는 사람들이 교회를 온갖 부패의 산실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쿼바디스 한국교회?”라는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교회에서의 탈세‧배임‧성범죄‧세습, 떠나는 목사에게 지급되는 거액의 전별금, 천문학적 건축비와 그로 인한 내부분쟁 등등 온갖 부정과 부패를 일삼아 교회를 비리의 온상으로 만들어 버린 현실에 침묵한다면 한국 기독교에 희망은 없다.

사랑의 교회 건축비로 쓰였다는 3000억 원은 아프리카 어느 한 나라의 1년 예산과 맞먹는다고 한다. 교회건물을 짓는 것이 아니라 바벨탑을 쌓는 것이다. 이는 누군가의 말처럼 침몰 전 타이타닉 호의 모습과 닮았는지도 모른다.

독버섯이 돋아나듯 퍼져가고 있는 교회세습은 어떤가. 세습된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세습되는 그 순간 교회로서의 자격을 잃고 만 것이다. 그런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 세습 받은 자의 재산일 뿐이다. 교인들 하나하나는 그 소중한 재산의 일부일 뿐이다. 다들 아는 사실을 그들만이 모르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그런데 어떤가. 한기총은 교회세습으로 예수의 얼굴에 오물을 끼얹은 왕성교회의 길자연 목사에게 ‘자랑스런 지도자 상’까지 받쳤다니 이를 보고 웃어야 하는가, 울어야 하는가.

여신도에게 몹쓸 짓을 하여 성범죄가가 된 전병욱 목사는 교회에서 쫓겨나면서도 전별금으로 13억 원을 받았다 한다. 그뿐 아니라 그 사건이 아직 사람들의 기억에 생생한데 또 하나의 교회를 세워 운영하고 있단다. 교회는 교인들이 있어야 유지되는 것인데, 그 교회의 교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그런데도 전병욱 목사가 소속된 평양노회는 아직까지 그에 대한 징계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남의 잘못은 사랑으로 감싸야 한다는 말로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병을 악화시키는 독이다. 사랑으로 따스하게 보듬는 것은 실수가 됐건 고의가 됐건 잘못을 저지르고 그 사실을 바르게 인식하여 반성으로 아파 몸부림칠 때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또 “쿼바디스 한국사회?”라는 질문에도 대답해야 한다. 사탄의 세력이 대통령 되는 것을 막고 장로 대통령을 세워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던 교회와 교계의 지도자들, 흐르는 물은 썩고 고인 물이 맑아진다며 벌인 4대강 사업, 해외자원개발이라는 미명하에 마구잡이로 쏟아부은 혈세, 이 두 사업의 무리한 진행으로 각각 보게 된 수십조 원씩의 손실 등은 덮고 넘어가선 안 된다.

민족 최대의 비극 세월호 참사, 그 진상의 규명, 그 당일 골든타임임에도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조차 알 수 없는 대통령의 7시간, 비선실세의 국정개입 의혹, 대통령의 가이드라인, 서민을 위한다며 대기업과 부자들만 살찌우게 하는 국정운영, 입으로는 소통을 말하며 실제로는 불통으로 일관하는 이중적 행보 등도 국민들이 침묵하면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흐르는 세월 속에 유야무야 묻히고 말 것은 자명한 일이다.

 

“쿼바디스 임종석?”이라는 질문에부터 대답하자!

자기 자신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면서 한국의 교회에게, 그리고 한국의 사회에게 어디로 가는 거냐고 따지고 든다면 말이 안 된다. “쿼바디스 한국교회?” “쿼바디스 한국사회?”라는 질문에 보다 “쿼바디스 OOO?”의 O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 물어야 하고 그에 대답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내 눈에 들보가 들어 있는 채 남의 눈의 티를 빼라 하는 어이없는 상황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잘된 일에는 나의 공을 내세우고, 잘못된 일에는 네 탓만 해서는 분란과 분쟁만 키울 뿐 얻는 것이 없게 된다. 기독인으로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을 걷고 있고, 그리스도의 빛과 향기를 내며 소금으로 녹아져 다른 사람들의 생활이 티끌만큼이라도 살맛을 내도록 도움이 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그리고 국민으로서는 국민 된 도리와 사회인으로서의 도리를 다하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정말 어떠한 선입감도 없이 조금이라도 더 정직하고 조금이라도 더 사회적 약자들 편에 선 후보자에게, 그리고 올바른 가치관의 소유자에게 투표했는지도 돌아봐야 한다.

무엇보다 자신을 믿음의 인격체로 변화시키기 위해 얼마나 기도하며 노력하고 있는지를 돌아봐야 한다. 그것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께 드리는 산제사, 즉 삶을 통한 예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승리하세요”라는 말을 인사말로 쓰기도 하는데, 승리란 겨루거나 싸워서 이기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누구와? 아마 많은 사람들은 사탄의 세력과라는 뜻으로 그리 말할 것이다. 필자는 이를, 그러니까 사탄과 싸우는 것을 자기와의 싸움이라고 생각한다. 사탄은 그도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다. 그러니 물리적으로 싸워서 이길 수는 없다. “사탄아, 물러가라!” 소리친다고 물러갈 사탄도 아니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것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다. 욕심과의 싸움, 일어나는 음란한 생각과의 싸움, 넓은 길로 가고자 하는 발걸음과의 싸움, 부정한 생각과의 싸움 등에서 이기면 된다. 어떻게? 성삼위 하나님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최고의 가치로 여겨 그 외의 것은 그 밑에 두는 것이다. 말씀에 따라 기도하며 노력함으로 그리하는 것이다.

이제 2015년의 새해가 밝아 오고 있다. 새해에는 우리 다 같이 대답하자.

쿼바디스 한국교회?

쿼바디스 한국사회?

쿼바디스 OOO?

이들 질문에 적극적으로 대답하며 보다 나은 앞길이 되도록 노력하자. 붉게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두 손을 높이 들고 힘차게 기지개를 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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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봉성도 (122.101.20.217)
2015-01-03 08:14:40
인간의 욕망의 끝은.....
대형교회 목사님들 잘 나가시는 목사님들 그럴수록에 낮아지시고 더 겸손해
지셔야 하겠습니다.
대형 교회라고 다 그렇지는 않을거라 생각을 합니다만 대형교회가 아무렴
중,소형 교회보다 교인이 많을것이고 교인이 많으니 당연 헌금도 많을것입니다.
그 헌금을 하나님의 일에 쓰는것처럼 위장하여 담임목사 자신의 사리사욕에
쓰여진다거나 투명하지 않게 사용을 하게되면 분명 언젠가는 탈이나게
마련일것입니다.
여의도 순복음 교회가 이지경이 된것도 따지고 보면 조용기 담임목사의
장기집권(?)에 따른 욕심에서 생긴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무었보다 그곳의 장로님들께서 투명성있게 헌금을 사용하지 못한것도
교회가 그렇게 된 원인이 될것입니다.
조용기 목사님 잘 나가시다가 인생말년에 이 무슨 망신(?)이란 말입니까?
전병욱 목사도 마찬가지 입니다.
자신이 설교할때엔 룰을 준수해야되고 안되는것은 안되는것으로 끝나야지
왜 살길을 모색하냐고 한적이 있었습니다.
교인 성추행으로 실형까지 받은 사람이 삼일교회를 나오면서 그 교회에서
외로금조로 13억을 받고 그곳 교인들과 굳게 약속한 서울내에서의 교회개척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손바닥 뒤짚듯 그렇게 쉽게 뒤짚고 결국은 교회를
개척을 했다는군요.
아무리 성경의 지식이 훌룡하고 실력이 좋으면 뭐합니까?
이런 기본적인 인격조차 갖춰지지않은 목사들인데요.
그런 사람들이 무슨 성경을 들먹여가면서 양들을 가르칠수가 있다는것인지....
아무튼 한순간의 탐욕으로 그동안 쌓아온 명성을 그냥 허물어 트린 안타까운
목회자 분들이 몇분 계시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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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청교육대 (175.223.45.238)
2015-01-01 00:29:22
종석이 아저씨 제가 하나 묻고싶은게 있는데
이제 종석이아저씨는 살만큼 살았고 노후대책은 확실하게 세워서
이런저런 이야기해도 나한테는 십원짜리 손해보는게 없어서
여러가지 말을 해도 괜찮다면

제가 제안하면

정말

성경에 나오는 예수의 말처럼 모든것을 다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준 다음 나를 따라와라 하신 예수말을 그대로 실천할 생각이
없습니까



참고로 제가 종석이 아저씨 비슷한 나이의 목사에게 이소리했다가

그목사가 나에게 "에라이 호로XX야 " 하는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아니 성경에 나오는 말대로 해라고 씨부리는 목사가 자기한테 십원이라도

손해가 될 성경에
나와있는 행동을 해라 하니 바로 호로XX야 하는게 어디있습니까

세상은 말잘하는 사람은 많지만 과연 실천하는 사람은 몇명이겠습니까

아무튼 종석이 아저씨 새해주님의 복많이많이 받으세요
물론 나같은 잡놈의 인사를 종석이 아저씨가 좋아할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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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125.25.59)
2015-01-05 00:36:28
삼청아!
넌 호로자식임이 틀림없다 쓰는아이디를보니 분명 호로자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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