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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터너
송병구  |  sbkbochu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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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년 12월 26일 (금) 11:17:06 [조회수 :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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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이지 터너’(Page Turner)란 존재가 있다. 말 그대로 ‘악보를 넘겨주는 사람’이란 뜻이다. 연주회에서 피아노 독주자의 악보를 넘겨주는 사람을 보았을 것이다. 그는 연주자가 아니다. 그는 무대 위에 서 있으나 없는 존재와 마찬가지다. 누구도 그를 주목해 보지 않는다. 그는 무대 복을 화려하게 입지 않으며, 따로 조명을 받지도 않는다. 다만 연주자의 연주 속도에 맞춰 조용히 악보를 넘겨주는 사람이다.

  우리 집 큰 애가 독일에서 김나지움 다닐 때 일이다. 어려서부터 바이올린을 배웠기에 학교에 들어가서 자연스레 오케스트라에 참여하였다. 복흠 오케스트라 연주자인 노인 선생님에게 찔끔거리면서 레슨을 받은 솜씨일망정 도움이 된 모양이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학교개교기념일에 콘서트가 열린다는 초청을 받았다. 학교 구경도 할 겸 일찌감치 방문하였고, 강당 앞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독일 학교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여러 선생님들이 함께 참여하였고, 합창단 뒤편에는 나이가 지긋한 털북숭이 선생님들이 멋진 단복을 입고 준비하고 있다. 오케스트라든, 합창단이든 학생과 교사의 경계가 없는 것이 좋아 보였다. 무대 중앙에는 큰 피아노가 놓였는데, 그라프 엥엘베어트 김나지움 출신의 유명한 피아노 연주자가 협연을 한다고 들었다. 말 그대로 개교기념을 자축할만한 프로그램이었다.
 
  오케스트라는 음을 조율하면서 곧 시작될 연주회 준비에 한창이었다. 그런데 오케스트라 속에서 우리 아이가 눈에 뜨지 않았다. 그 뒤에 빼곡하게 줄지어 선 합창단을 향해 눈을 씻고 찾아봤지만 거기에도 없었다. 함께 간 어린 아우는 형의 행방을 몹시 궁금해 하며 이리저리 찾았다. 곧 연주회가 시작할 텐데 도대체 우리 아이는 어딜 간 것일까? 객석에 앉아 있는 부모의 속이 탔다.
 
  드디어 연주회 막이 올랐고, 맨 첫 순서로 유명세를 누리고 있는 피아니스트가 등장하였다. 그리고 곁에는 키 작은 페이지 터너가 함께 나타났다. 조심스레 피아노 옆에 선 페이지 터너는 바로 우리 큰애였다. 부모의 가슴은 두근두근 뛰었다. “형아다!”

  물론 페이지 터너는 주인공이 아니었다. 아이는 피아노 연주자의 악보를 조심조심 넘겨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그 부모 외에는 어느 누구도 페이지 터너를 주목하지 않았을 것이다. 있으나 없는 듯 그림자 역할이었다. 그럼에도 내게는 그 장면이 오래도록 잊혀 지지 않는다. 참으로 눈부신, 가슴 벅찬 순간이었다.
 
  누구든 자기 인생을 걸어간다. 내가 등장하는 인생의 무대에서 나는 항상 연주자이고, 주인공일 것이다. 누가 뭐래도 당당히 내가 주역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나 홀로 연주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 내가 의식하지 않게 속도에 맞춰 악보를 넘겨주고, 연주를 잘하도록 기다려 주고, 처음부터 끝까지 보조를 맞춰주는 존재가 있다. 그는 행여 내 연주가 조금 더디더라도 결코 나보다 먼저 페이지를 넘기지 않는다. 악보 한 페이지, 음표 한 자리, 내 숨과 호흡 사이에서 언제나 동행하고, 나를 리드해 준다.

  어느새 한해를 마무리한다. 365일, 내 인생의 연주무대에서 나와 동행하는 페이지 터너는 누구이던가? 내 인생의 분주한 길에서, 때로는 침묵의 걸음에서, 나와 함께 묵묵히 동행하는 그 분이 계심을 느끼는가? 그런 ‘페이지 터너’가 되신 하나님이 나의 주님이심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의 평생은 든든하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사 4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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