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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신대에서 ‘목원(牧園) 이호운 목사’ 추모식 열려
5월30일(화) 오후 5시 감신대 웨슬리채플에서 이달의 감리교인물로 추모식 및 강연회
입력 : 2006년 05월 31일 (수) 00:00:00 [조회수 : 1807] 당당뉴스leewaon3@chol.com

지난 5월 30일(화) 오후 5시에 서울의 감리교신학대학교 웨슬리채플에서 이 달의 감리교 인물 ‘목원(牧園) 이호운 목사’ 추모식 및 강연회 가 열렸다.

그 동안 대전의 목원대학에서는 이호운 목사님을 추모하는 행사가 간혹 열렸으나,  서울 감신대에서 이호운 목사님의 생애와 사상을 재조명하는 행사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더욱이 지금까지 주로 추모식으로만 그쳤던 행사를 탈피해서 학자들을 통해 이호운 목사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결과를 발표하는 행사까지 겸했기에 그 의미는 더욱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1부 추모기도회에서는 차흥도 목사(농촌선교훈련원)가 사회를 맡아, 이호운 목사님께서 생전에 작사하셨던 ‘부름받아 나선 이몸’(찬송가 355장)을 회중들과 함께 불렀으며, 오봉근 목사(영동제일교회)의 기도와 김용주 감독(경신교회)의 설교(삼상19:18-24, 제목: 사무엘을 볼 때에)로 진행되었다.

윤춘병 감독(감신대 역사자료관)은 인사말씀을 통해 “그동안 감리교의 숨은 인물들을 발굴해, 새롭게 재조명하는 일을 해왔다고 강조하면서, 이호운 목사를 이렇게 새롭게 조명해 봄으로써, 앞으로 후학들이 이 강연자료를 통해 이호운 목사의 삶과 사상을 더욱 면밀히 알아 갈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했다.

   
▲ 감신대 이원규교수

유족인사 시간에는 이호운 목사님의 막내 아들인 이원규 교수(감신대)가 찾아준 모든 분들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으며, 이날은 이원규 교수 내외와 더불어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이호운 목사님의 장녀인 이정렬씨와 사위(윤경의 박사)가 이 행사를 참석하기 위해 특별히 내한하기도 했다. 

 2부 강연회를 시작하기에 앞서 약 5분에 걸쳐 진행된 이호운 목사의 생애를 다룬 영상자료는 많은 참석자들의 마음에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이호운 목사의 생전의 모습들은 지금도 살아 있는 듯 영상을 통해 생생하게 전해졌다. 

2부 강연회(사회: 김홍기 교수, 감신대)는 첫 번째로 이정배 교수(감신대)갰‘꿈의 사람’ 이호운의 “목원(牧園)신학” 연구』라는 제목아래 이호운 목사의 사상과 정신을 중점으로 연구발표를 했다.

이정배 교수는 본 논문을 통해, 이호운은 이용도 목사와 이호빈 목사로부터 신앙적인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이들의 신앙적 영향을 자신의 신학과 교육사업, 실천적 삶에 반영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정배 교수는 이호운 설교들을 분석함으로써 이호운 목사의 사상을 종합적으로 분석하고자 하였며, 이호운의 농촌에 대한 각별한 사랑과 관심의 구체적 실현이 바로 ‘목원신학’의 실상이며, 이러한 ‘목원신학’은 다른 어느 신학들 보다도 구체적이며 현실적임을 강조했다.

이정배 교수는 결론에서 “이호운의 ‘목원신학’ 속에는 교회를 향한 개혁신학, 민중을 위한 민중신학, 그리고 자연과 문화를 토대로한 토착화신학의 씨앗까지 두루 담겨져 있으며, ‘목원신학’에서 21세기의 신학적 과제인 ‘생명신학’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다. 

   
▲ 강연하는 목원대 김흥수교수

두 번째 강연으로는 김흥수 교수(목원대)가 『이호운과 목원대학교의 신학교육』이라는 주제로, 이호운 목사의 감리교 대전신학교에서 교육활동들에 대해 중점적으로 연구 발표를 하였다.

이 발표를 통해, 이호운 목사가 대전 신학교로 파송받아 가게 된 경위와, 그 곳에서 자신의 꿈을 구체적으로 실현해 나가게 되는 과정을 면밀하게 소개해 주었다. 특히 농촌목회자 양성을 위한 이호운 목사의 커리큘럼 편성과 그 노력들은 주목할만 했다.

김흥수 교수는 이외에도, 이호운 목사가 교권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원치 않는 가운데 목원대학을 떠나야 했던 이유와 과정에 대해서도 비교적 구체적으로 소개함으로써, 이호운 목사의 생애의 안타까운 단면 또한 새롭게 바라 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이 날  사회를 본 이덕주 교수(감신대)는 본 행사를 통해 목원대와 감신대가 그동안의 학연으로 인한 갈등들이 치유되고, 화해의 계기 마련되는 뜻깊은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전했으며, 얼마전 감신대 52학번들이 졸업 50주년을 맞아 홈커밍 행사를 가졌는데, 1952년이 바로 이호운 목사가 감신에 처음으로 부임했던 해였음을 강조했다.

감신과 목원 두 곳에서 자신의 열정을 바쳤던 이호운 목사님을 바라 볼 때, 이 행사의 의미가 크다고 전했다. 또한 감신 52학번이며, 이호운 목사의 제자이며. 감신대와 목원대에서 학장과 총장을 역임했던 박봉배 목사가 마지막으로 이호운 목사에 대한 회고담을 이야기함으로써, 본 행사의 대단원의 막을 내릴 수 있었다. 

 이날 행사에는 목원대학교 신학과 동문 원로 목사님들과 목원대학교 신학과 재학생들, 이호운 목사님의 지인들, 감신대 교수, 학부, 대학원 학생들, 감리교회의 농촌 목회자들 등이 8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많은 관심과 성원을 보내주었다.

이를 계기로 농촌선교훈련원에서는 이호운 목사님을 기념한 ‘호운 기념사업회’가 조직하는데 노력하고, ‘호운상 제정 및 시상’을 비롯해 이호운 목사의 사상과 생애를 재조명하는 다양한 심포지엄과 세미나를 개최할 예정이다.   

* 이 기사는 당당뉴스가 사정상 직접 취재를 하지 못하여, 농촌선교훈련원 홍승표간사가 정리한 기사와 사진을 이메일로 보내준 것을 편집한 것이다.

이호운 (李浩雲, 1911. 5. 3~1969. 1. 24)
목회자, 신학자, 교육가
호는 ‘목원’(牧園)

  이호운은 평남 강동군 원탄면 상리에서 부친 이민조와 모친 최일구 사이에서 3남 2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만주 용정의 영신중학교를 졸업하고, 1932년 감리교신학교에 입학하여 1936년 3월 24일 졸업과 동시에 차경화와 결혼하고 동부연회 춘천지방 화천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 그 후 서부연회 해주지방 옹진으로 옮겨 마산구역을 담임하다가 옹진읍교회에서 시무하고 1939년 3월에 준회원에 허입하였으며 연회 해산 직전인 1941년 3월 9일 목사 안수를 받았다. 같은 해 9월 친일 교단을 반대하는 의미로 옹진교회를 사임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지사대학에서 청강하였다. 1942년 귀국하여 해방을 맞기까지 고향에서 농사를 지었다.

  1945년 9월부터 평양 성화여학교(평양여자고등성경학교)에서 교무주임으로 시무하였다. 이듬해 교회 측의 기념예배와 동시에 진행된 3.1절 기념대회에서 폭탄투척사건이 발생했는데 이호운 목사가 그 배후로 지목되어 일경에게 체포되어 곤욕을 치르고 석방된 후 곧바로 월남하였다.

  월남하여 쿠퍼(K.E. Cooper) 선교사가 서울 충정로의 옛 여자신학교 건물에서 개설한 "보혜성경학원"에 교사로 참여하였고, 1947년 4월부터 서울 중앙신학교(현 강남대학교) 교수로 활동하다가 미감리교에서 제공하는 십자군 장학금을 받고 1949년 9월 도미하여 에반스톤 개렛신학교에서 공부하다가 1951년 9월 달라스 소재 남감리교대학교 퍼킨스신학대학원 3학년에 전입하여 1952년 6월 졸업하였다.

  1952년 9월부터 1956년 9월까지 감리교신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감리교사, 교리사, 교회인물사 등 교회사 관련 과목을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남녀 서리 교역자와 신학을 공부하려는 평신도를 모아 신학을 가르친 전수과가 1953년 9월 21일 설치되자 과장으로 쿠퍼 목사와 함께 전수과를 담당하였다. 1956년 9월 대전신학원(현 목원대학교)의 교수로 전임하였고 1958년 4월 11일에는 목원대학 제2대 학장으로 취임하여 농촌 목회자 양성에 전력을 다하였다. 1968년 12월 15일 신경성 고혈압으로 뇌출혈을 일으켜 혼수상태로 세브란스병원에 누워 있다가 40일 만인 1969년 1월 25일 세상을 떠났다(목원대 내부 분규 등이 요인이 되었다). 1월 27일 정동제일교회에서 장례식을 가졌다

  그는 이용도 목사의 설교를 통해 은혜받고 자신을 주님께 헌신하기로 작정하였다. 이용도 목사를 처음 만난 것은 1930년 봄 간도 용정 부흥회에서였다. 그 후 신학교 입학을 위해 서울에 와서 몇 개월간 현저동 이용도 목사 집에 머물면서 함께 생활하기도 했다.

  "저도 주님을 위하여 몸 받치기를 원합니다. 평안과 영광과 칭찬을 요구하지 않사오며 주께서 지고 가는 십자가를 요구합니다. 골고다까지라도 가기를 원합니다. 옛 성도들이 졌던 십자가 지금 목사님이 지신 십자가를 저도 지려고 합니다. 오로지 저도 주님을 위하여 몸 받치렵니다. 주님 위하여 일하고 살고 죽기를 원합니다."(1932년 6월 25일 이용도 목사에게 보낸 편지)

  이러한 그의 약속대로 많은 사람들이 관심 갖지 않는 농촌에 들어가 주님의 십자가를 졌다. 그리고 일제 말기에는 친일적인 어용교단이 들어서면서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이 훼손되는 일이 나타나자 신앙 양심을 버리지 않기 위해 목회를 그만두고 농촌에 묻혀 농사일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교역자 양성을 위한 후진 양성에 전념하게 된다. 이 후진 양성도 주님을 위한 십자가를 지는 일이었다. 이것이 자신의 명예나 출세를 위한 길이 아님은 찬송시 355장 "부름받아 나선 이 몸"에 잘 나타나 있다.

1950년 개렛신학교 유학중 주님의 부르심에 복종하리라는 신앙고백으로 지은 이 찬송은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지어진 찬송가로서 신학교에서는 교가처럼 불리던 것인데 1967년 개편찬송가에 수록되면서 일반에 보급되었다. 나라의 존망이 위태롭고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는 상황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고 우리의 역사적 상황 속으로 보냄을 받은 존재임을 일깨워주는 "주님 중심의 신앙체계"(민경배)를 표현한 이 찬송가는 지금도 많은 사람에게 애창되고 있다. 그와 함께 목원대학에서 일했던 조석환 교수는 이호운 목사를 가리켜 "부름받은 몸이란 찬송가대로 사신 분"이라 했다.

1.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만따라 가오리니
어느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어느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2. 아골골짝 빈들에도 복음들고 가오리다
소돔같은 거리에도 사랑안고 찾아가서
종의몸에 지닌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
종의몸에 지닌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
3. 존귀영광 모든권세 주님홀로 받으소서
멸시천대 십자가는 제가지고 가오리다
이름없이 빛도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이름없이 빛도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그리고 〈감리교생활〉에 교회를 빛내는 인물들을 소개한 적이 있는데 여기에 소개된 사람들은 모두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주님께 헌신하는 사람들이었다. (전금주 권사, 조기호 목사, 황영호 목사, 허태행 권사, 시율린 목사).
  박대선 총장이 장례식에서 조사를 통해 "이호운 학장은 꿈의 사람이었다"고 표현한 것처럼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가 '꿈을 지닌 사람'으로 그를 기억하고 있다. 항상 학생들에게 가르칠 때에 열정적이었고, 예언자처럼 교회의 부패상을 질타하기도 했다. "큰 교회 가려고 넘실거리는 너절한 목사가 되지 말고 꿈을 가진 그리고 신념 있는 목사가 되라"고 부탁하였다(김상봉 목사).

특히 농촌 목회에 대한 꿈을 학생들에게 심은 것으로 유명하다. 박봉배 목사의 회고에 의하면 "포플라 나무를 심어 몇 년만 기다리면 얼마나 크게 자라고, 소를 키우면 얼마나 농촌이 발전할 수 있는가" 등으로 밤늦게까지 대화하였기에 "이대포"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한다.
  이러한 농촌에 대한 꿈은 목원대학으로 전임하면서 서서히 실현되었다. 그는 10년 후인 개교 10주년 기념행사 기념사에서 그 꿈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요한은 예수를 가리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말씀이 흙에 개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이상은 '복음을 흙에 개이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직자로 초연하고 성별된 사람들이라 해서 은근히 허세를 부리고 권위를 내세우기에 여념이 없는 교역자를 기르기보다는 민중을 이해하고 그들 속에서 그들과 함께 사는 친구와 일꾼을 기르렵니다."(1964. 5. 5)

  위의 기념사에 나타난 것처럼 그의 사상은 "꿈(복음)을 흙 속에 민중과 함께 생활로 드러내는 것"(《목원신학 반세기의 발자취》, 88쪽)이었다. 이 꿈의 실현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 이호운 학장을 나는 "꿈을 가진 농촌운동가"로 표현하고 싶다. 그는 정말 목원의 개척자로서 자신을 돌보지 않고 일했다. "불도저"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굽힐 줄 모르는 용기로 학교행정을 처리하여 1965년에는 대학인가를 받아냈고, 수십만 평의 계족산을 확보하고 거기에 35만 주의 낙엽송과 각종 나무를 심었다. 성산목장, 실습농장을 가꾸어서 목원대학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3년간 4백여 명의 교역자를 비롯하여 5백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그의 회고에서처럼 "마치 딸을 양육하는 어머니의 마음과 성의를 학교를 위하여 시간과 지혜와 정력을 바쳤다. 그리고 학교가 자라는 것을 보고 기뻐했고 학교가 입을 피해를 보고 슬퍼했다. 학교는 나의 기쁨, 슬픔, 사랑이었다. 학교와 함께 기뻐하고 슬퍼했으며 학교가 나의 재산, 나의 영광이었다. 나에게는 다른 욕심은 없었다." ("학교를떠나는 마음", 〈대전신학보〉, 1968. 12)

출처 : 한국감리교인물사전


▶ 이호운 목사 약력

1911년 5.3. 평남 강동군 원탄면 상리에서 출생
1932년 3월 만주 용정 영신중학교를 졸업
1930년     간도 용정 부흥회에서 이용도 목사의 설교에 큰 감명을 받음
1932년 4월 감리교신학교 입학
1936년 3월 감리교신학교 졸업(차경화와 결혼)
1936년     동부연회 춘천지방 화천교회를 담임
           서부연회 해주지방 옹진 마산구역, 옹진읍교회 시무
1941년 3월 목사 안수
1941년 9월 친일 교단을 반대하는 의미로 옹진교회를 사임,
           일본 동지사대학(同志社大學) 수학
1942년     귀국 후 해방을 맞기까지 고향에서 농사를 지음.
1945년 9월 평양 성화여학교(평양여자고등성경학교)에서 교감 시무
1946년     서울 충정로 "보혜성경학원"에 교사로 참여
1947년 4월 서울 중앙신학교(현 강남대학교) 교수로 활동
1949년 9월 미국 에반스톤 개렛신학교 수학
1951년     게렛신학교 유학 중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작사
1951년 9월 미국 텍사스 달라스 남감리교대학교(SMU) 퍼킨스신학대학원
           3학년에 전입
1952년 6월 남감리교대학 졸업 (B.D 학위 취득)
1952년 9월 감리교신학교 교수 재직
           (감리교회사, 교리사, 교회 인물사 등 교회사 관련 과목 교수
             및 전수과 담당)
1956년 9월 대전신학원(현 목원대학교)의 교수로 전임
1958년 4월 목원대학 제2대 학장으로 취임 (농촌 목회자 양성에 집중)
1960년     삼화중학교 이사장 피선
1961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개최된 세계 감리교 제10차 3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
1962년     대전 YMCA 이사장 피선
1963년     말레이시아 포트 딕슨에서 개최된 아시아 감리교 대회 참석
1964년     감리회 총리원 이사, 기독교서회 이사, 대전 보육대학 이사,
           감리교 대전 신학대학 학장 취임  
1967년     개편찬송가에 ‘부름 받아 나선 이 몸’(355장) 수록
           신학교육 및 목회사정 연구차 미국 감리교회와 교육계 시찰
1968년     찬송가 편찬 위원회 위원, 중앙신학교 재단 이사장 피선
1968년 12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남태평양 지역 복음 전도회 참석  
1969년 1월 25일 소천 (1월 27일 정동제일교회에서 장례식)



▶ 이호운 목사 주요저서 및 역서:

《주기도문 연구 : 그 특색, 목적, 및 해설》E.F. 스칼, 대한기독교서회, 1953. (역서)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생활》 H.F. 로울, 감리교 총리원, 1954. (역서)
《푸른 초장, 웹박사 설교집》 L. Webb, 진리사, 1954. (역서)
《개신교 입문》 J.H. Nichols, 진리사, 1955. (역서)
《크리스마스 사료》이호운 편, 감리교총리원 교육국, 1956.
《예언자 연구》존 페터슨, 한국기독교문화원, 1957. (역서)
《기독교교육 원리》A. 빅토 머리, 대한기독교서회, 1957 (역서)
《신교와 구교의 다른 족아더 G. 레이놀드, 대한기독교서회, 1958. (역서)
《주께 바친 생애- 쿠퍼 목사전》 이호운 저, 총리원교육국, 1960
《개신교 원리》 이호운 저, 총리원 전도국, 1960.
《시편 설교집》 해롤드 A. 보슬리, 감리교대전신학대 출판부, 1964. (역서)
《그의 나라와 그의 생애- 양주삼 박사》 이호운 저, 감리교대전신학대 출판부, 1965
《기도생활》 L. Webb, 감리교대전신학대 출판부, 1966. (역서)
《한국교회 초기사》 이호운 저, 대한기독교서회, 1970

▶ 이호운 목사 연구 논문

『이호운 목사의 농촌목회론 연구』
  탁현균, (목원대학교 신학대학 석사학위논문, 1997)
『이호운과 목원신학 - 이호운의 메시지 분석을 통한 목원신학 정체성 고찰』
  남재영, (목원대학교 신학대학 석사학위 논문, 1999)
『이호운 목사의 신학연구』
  원용철, (목원대학교 신학대학 석사학위 논문, 2000)
『이호운 목사의 영성에 관한 연구』
  김재훈, (목원대학교 신학대학 석사학위 논문, 2001)

▶ 이호운 목사 관련 도서

『牧園의 꿈 : 이호운목사 설교. 강연. 시집』
   감리교 대전신학대학 동문회 편, (감리교 대전신학대학, 1972)
『牧園의 꿈․농촌선교 - 흙에 사람, 땅의 친구 이호운』
   전성성, (목원대학교 신학대학동문회 부설 농촌선교연구소, 2000)


[가족사항]

부인 차경화, 2001년 작고

長男 이성규 (미국 록펠러 대학원 생화학과 교수)
며느리 조봉옥, 손 진우, 미란

長女 이정렬 (미국 버지니아 거주)
사위 윤경의 박사, 손 영준, 희경, 영호

二男 이은규 (미국 버지니아 거주)
며느리 강선희, 손 진하, 진기

四男 이원규 (감신대 종교사회학 교수)
며느리 장혜옥, 손 애리, 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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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표 (218.XXX.XXX.239)
2006-06-05 11:32:33
빠진 내용이 있네요....
제가 이 행사를 마치고 당일 밤에 급하게 원고를 작성하느라고 약간 빠진 내용이 있네요, 이 행사는 감리교 농촌선교훈련원이 그동안 이호운 목사님의 생애와 사상을 재조명하는 행사를 오래전 부터 준비를 해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행사를 대전이 아닌 서울의 감신대에서 하려다 보니, 감신대 역사자료실에서 그동안 진행해 오던 '이달의 감리교 인물' 행사와 접목해서 개최하는 것이 더 의미가 있겠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감리교 농촌선교훈련원'이 발의하여, 이번 5월 감리교인물로 이호운 목사님을 선정해서 감리교신학대 역사자료관과 공동으로 이 행사를 주최하자고 제의했습니다. 감신대 역사자료관 측에서도 이 제안을 흔쾌이 받아들여, 이 행사는 저희 '농촌선교훈련원'과 '감신대 역사자료관'이 공동주관이 되어 치러지게 되었습니다. 막상 공동주관이 되고보니, 더욱 의미있고 내실있게 행사가 잘 마쳐진 것 같습니다.

이번 행사를 통해 그동안 잊혀졌고, 무관심 속에서 기억되지 못했던 이호운 목사님의 삶과 그 정신이 어느정도 세상에 구체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 같습니다. 이번 행사를 통해 이호운 목사님께서 농촌선교에 얼마나 많은 꿈을 가지졌었는지도 잘 알려진 것 같습니다. 농촌선교훈련원은 앞으로 이호운 목사님의 기념사업회를 조직하고, 이 사업회 아래 '호운상 시상', '농촌선교 장학사업', '농촌선교 세미나 개최' 등의 구체적 활동들을 전개해 나갈 계획입니다. 많은 분들의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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