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를 추억함 / 정연복

배움도 거의 없어
겨우 까막눈 신세 면하셨지

결혼한 지 몇 년만에
청상과부 되어

외동딸 집에 얹혀 살며
온갖 집안 살림 다하셨지

여든 셋의 연세로 돌아가시던 그날도
어김없이 새벽밥 지으셨지

좋은 곳 며칠 여행은커녕
맛있는 음식 한번 못 드셨지

설탕을 탄 딱 막걸리 한잔으로
고달픈 삶 달래셨지.

정말이지 한평생
죽도록 고생만 하셨지

그러면서도 얼굴에
온화한 미소 달고 계셨지

내게 단 한번이라도
얼굴 찡그리신 적이 없었지.
 
용미리 공동묘지에 묻히신 지
어느새 스물 네 해 흘렀으니

가녀렸던 그 몸 모두
이제 고운 흙 되었을 거야.

나의 탯줄 잘라주셨고
매일의 밥과 마음의 평화 주셨던

아,
내 곁에 머물던 '사랑의 천사'이셨던

외할머니 생전에 가끔 하시던
말씀 하나 오늘 문득 내 가슴 치네

"참을 인(忍)자 세 번 맘에 새기면
살인도 면할 수 있단다."

그래, 할머니는
이렇게 모진 맘으로 사셨던 거야

남을 해코지한 적 없고
늘 선한 모습만 보이셨지만

뭔가를 죽이고 싶도록
보이지 않는 원망도 깊었던 거야

이런 독한 마음 안으로 품으셨기에
고달픈 세상살이 견디셨던 거야.

외할머니!

작년 이맘때 벌초 가서
무덤을 덮은 얄미운 풀들

마치 이발하듯
한 올 한 올 가위로 다듬었는데

지금은 또 풀들
무성히도 자랐을 테지요
 
며칠 뒤면 추석이니
그리움 가득 안고 찾아갈게요

온 우주에서 나의
가장 귀한 보물이고 추억이신

내게는 꼭
사랑의 신이나 마찬가지인

석노마(石老馬) 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