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에 서술된 구원의 논리(6) “십자가론”

8.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또는 의롭게 하심을 얻었음이라-디카이오오의 수동태)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롬6:6-9)”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죄의 몸이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피조물로 부활하게 됨으로써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이 땅에서 죄를 범하며 살 수 없는 의로운 존재로 변화됩니다.

(첫 번째 믿음, 즉 우상 숭배의 거짓된 믿음을 가진 자들의 관심은 오로지 현세의 복과 내세의 복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저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덕분에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것이 틀림없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문에서 십자가에 대한 사도 바울의 논점이 그와는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죄악된 존재로부터 의로운 존재로의 신비한 전환과 새 생명 가운데 행함입니다. 그리고 그 전환의 중심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에 대한 사도 바울의 논술에서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 할 곳은 두 곳입니다. 첫째는 십자가에 예수 그리스도만 못 박힌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옛사람이 못 박혔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 결과로 우리가 현세에서 디카이오오(의롭다고 판결하다 또는 의롭게 만들다)되었다는 것입니다.

루터의 이신칭의론을 기반으로 한 개신교 정통 교리의 논리는 모두가 잘 아는 대로 예수를 그리스도, 즉 메시아로 믿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에 의해 우리가 여전히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의인으로 간주되어(로기조마이, impute) 내세에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imputation)에 초점을 맞춘 이론이지요.

그러나 사도 바울이 논술하고 있는 구원의 논리는 이와 다릅니다. 현세에서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한다는 것이며 그 결과 우리가 의로운 자로 재창조되어 이 땅에서 새 생명 가운데 행하는 의로운 삶을 살게 된다는, 십자가의 신비한 역사로 말미암은 현세에서의 실제적인 변화에 대한 논리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십자가에 대한 논리는 칼빈이 그리스도와의 연합(the union with Christ)으로, 그리고 웨슬리가 완전 성화(entire sanctification)로 해석한 바 있습니다. 심지어 이신칭의론을 처음 주장한 루터조차도 “Thesis Concerning Falth and Law(1535)”에서 “만일 선행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에 대한 이러한 신앙이 우리 마음에 거하지 않는다는 것과 그것이 죽은 신앙이라는 것은 확실하다(문선희, “루터의 득의론, 연세대학교 신학원 박사학위 논문, 2003” 189쪽에서 재인용)”고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전반에 걸쳐 치밀하게 서술되고 있는 사도 바울의 이러한 현세 구원론은 디도서에서 다음과 같이 단 한 문장으로 압축되어 논술되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2:14)"

로마서는 디도서의 이 한 문장을 상세하게 풀어서 설명하고 있는 서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심으로 우리가 속량된다는 것은 실제로 어떠한 일이 진행된다는 것이며, 우리가 깨끗하게 된다는 것의 의미와 깨끗하게 되는 실제적인 과정은 무엇이며, 선한 일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우리가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존재로 바뀌게 된다는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논술이 바로 로마서에 서술된 사도 바울의 구원의 논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십자가의 신비를 축으로 한 사도 바울의 현세 구원의 논리가 서구 기독교에서 내세 구원의 논리에 가려져버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이러한 심각한 왜곡은 이신칭의론을 주장한 루터에 와서 갑자기 나타난 것은 아닙니다. 큰 틀에서의 왜곡은 심지어 어거스틴 이전, 즉 교부 시대의 초대교회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이는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자리잡아가던 시기에 벌어진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의 논쟁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의 논쟁의 핵심은 내세 구원이 인간의 공로에 의해서냐 아니면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논쟁에서 당시에 이미 사도 바울의 현세 구원의 논리는 실종되어 버리고 구원의 약속을 오로지 내세 구원으로만 인식하는 왜곡이 보편화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내세 편향의 구원론은 지금까지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요?

로마서에 서술된 사도 바울의 구원의 논리를 현세 구원과 내세 구원을 관통하는 논리로 인식하고 있는 우리는 이와 같은 내세 편향의 왜곡된 구원론이 계속 유지되어 온 이유를 다음과 같은 일련의 역사적 전개에서 찾습니다.

(1)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

(2) 로마의 기독교 국교화와 황제와 교황의 역할 분담

(3) 국가교회 체제 안에서의 종교 개혁

이러한 역사적 상황들의 전개에서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되고 변함없이 유지된 것은 세속 권력과 교회 권력의 역할 분담이었습니다. 국가교회 체제 안에서 크리스찬의 현실의 삶은 세속 권력이 장악하고 교회 권력은 오로지 내세 구원의 문제만 다루는 역할에 국한되었으며 현세의 문제에 관여하더라도 세속 권력의 보조자로써 각 시대의 사회가 원하는 윤리도덕 교육에만 기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성화와 선행에 관련된 여러 다양한 교리들이 모두 세속의 윤리도덕을 기준으로 세워졌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이 인간의 상대적인 선에 가려진 것입니다.

그러던 중 이어서 진행된 다음의 역사적 정황은 새로운 기독교, 즉 진보 기독교를 이 땅에 출현시키게 됩니다.

(4) 프랑스 대혁명과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다종교 사회의 출현

진보 기독교는 내세 편향의 구원론을 유지해온 정통 기독교와는 달리 이 땅에서 사회 구원을 모토로 삼게 되지만 세속 휴머니즘을 기반으로 한 구원의 논리를 전개함으로써 보수 정통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십자가를 중심으로 한 사도 바울의 현세 구원의 논리를 비껴간 것은 마찬가지라 하겠습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제시된 새로운 세속 가치관인 자유 평등 박애를 과거의 윤리도덕을 대치하는 새로운 선으로 설정했던 것이지요.

이러한 역사의 흐름에서 사도 바울의 십자가론을 정확히 해석했던 칼빈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나 웨슬리의 “완전 성화”는 설 자리를 잃고 맙니다. 왜냐 하면 크리스찬의 삶의 기준으로 제시되고 있는 세속의 윤리도덕이나 휴머니즘은 인격의 도야를 필요로 하는 것일 뿐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나 완전 성화를 위한 second blessing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두 사실상 무의미한 논리가 되고 만 것이지요.

로마의 국가교회 체제를 합리화하기 위해 이 땅에 임해야 할 하나님의 나라를 불가시 교회로 치부하고 교황과 황제의 역할을 분리시킨 결과가 크리스찬의 현실의 삶을 변화무쌍하고 상대적일 뿐인 인간의 선에 가두었고 루터와 칼빈과 웨슬리의 통찰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버렸음은 물론 오늘날까지도 윤리도덕을 앞세운 보수 기독교와 휴머니즘을 앞세운 진보 기독교가 크리스찬들로 하여금 세상의 종이 되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왜곡의 배후에 국가교회 체제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나라 한 몸 공동체를 제거하고 로마 국가교회 체제를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었던 교리들이 지금도 버티고 있는 것이지요. 왜곡된 교회론이 구원론까지 왜곡시킨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구원론의 중심에는 현세에서 죄인을 의인으로 변화시켜 이 땅에서 세상이 규정하는 선한 일이 아닌 성경이 규정하는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재창조하는 십자가의 논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사랑할 수 없는 자를 사랑할 수 있는 자로 변화시키는 궁극의 신비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어질 글 성령론과 의인론과 교회론에서 이 궁극의 신비가 현실에서 개개인에게 어떻게 성취되며 이에 따라 새롭게 의인으로 변화된 자들의 선한 삶은 현실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에 대한 사도 바울의 논술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