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민족, 지역, 계급... 모든 곳에 분쟁과 갈등이 있으며 어디에서도 평화는 보이지 않는다. 밖에서 뿐일까? 내 안에서도 역시 평화는 보이지 않는다. 세상은 평화 원하지만 전쟁의 소문 더 늘어간다는 옛 복음성가의 노랫말은 더욱 더 절실해지기만 한다. 사람들은 어디서나 평화를 갈망한다. 그러나 여기서 미처 주의 깊게 생각해보지 않는 것이 있으니 평화에도 여러 종류의 평화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야말로 결정적인 문제인데도 말이다. 따라서 평화를 원하는 마음 이전에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도대체 우리는 ‘어떤’ 평화를 원하는가?

<전쟁과 평화>. 톨스토이의 이 작품 제목은 아마도 사람들이 평화를 이해하는 방식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평화를 전쟁의 대척점에 놓인 것으로 이해한다. 평화는 전쟁이나 분쟁, 갈등이 그친 상태라는 것이다. 즉, 이 평화는 전쟁이 끝나면, 다시 말해 승자가 결정되면 이루어진다. 결국 이 평화는 힘의 승리가 가져다주는 평화이고 그 힘이 다른 힘보다 강한 한에서만 유지될 수 있는 평화다. 이 전통적인 서양의 평화 이해는 역사 속에서 ‘팍스 로마나’(Pax Romana), 즉 ‘로마의 평화’라는 말 속에 각인되었다. 로마제국이 폭력적 힘으로 정복 전쟁을 끝낸 후 이룬 로마의 평화는 또 다른 힘의 승자가 나타날 때까지 로마의 힘에 의해 유지되었던 평화이기도 했다. 힘이 가져다주고 힘으로 유지되는 힘의 평화, 이것이 서구세계가 이해하는 평화의 본질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평화에 대한 유일한 이해일까? 서양과 달리 동양은 평화에 대해 다소 다른 이해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동양이 지녔던 평화에 대한 이해는 ‘平和’라는 한자어에 잘 나타나 있다. 平和의 ‘平’자는 물 위에 뜬 물풀의 모양을 본 따 만든 상형문자로 꼭 평평한 저울의 모양처럼 생겼다. 이어서 ‘和’자는 두 개의 한자, 즉 입 구(口)와 벼 화(禾)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면 동양의 세계가 이해했던 평화에 대한 태고의 이상은 평화란 모든 사람의 입에 골고루 평등하게 쌀이 돌아가는 상태인 셈이다. 전쟁이 그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평화는 올바른 분배를 통해서만 실현되는 평화다. 올바른 분배란 결국 정의, 다시 말해 동양의 평화는 분배의 정의가 실현된 평화, 즉 정의를 품은 평화다.

이 평화에 대한 태고의 동양적 이해는 성경의 이해와도 닮았다. 사도 바울은 주님이 오실 날이 언제인지를 묻는 신자들에게 그 때가 갑작스럽게 임할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사람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하고 말할 그 때에 아기를 밴 여인에게 해산의 진통이 오는 것과 같이 갑자기 멸망이 그들에게 닥칠 것이니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살전 5:3) 평화와 안전. ‘팍스 에트 세쿠리타스’(Pax et Securitas). 이 구호는 당시 로마제국의 모토요 복음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제국이 주장하고 보증하는 평화와 안전을 거부한다. 그는 다른 평화를 믿고 있었던 것이다. 평화를 만드는 자(peacemaker)는 복이 있다(마 5:7)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이 평화가 어떤 식으로든 분쟁만을 없애는 평화, 힘으로 얻어지는 평화일 리 없다. 이 평화는 정의를 실현하는 평화, 정의를 품은 평화다. 하나님의 자녀들이라 불리게 될 사람들은 바로 이 평화를 몸소 누리고 만들어 나가는 사람들이다. 우리의 평화,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결단코 다른 평화여야 한다. 주께서 분명히 말씀하신 것처럼.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요 1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