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 > 최재석 칼럼
신앙인의 편향성과 예수님의 뜻
최재석  |  jschoi@cnu.ac.kr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입력 : 2014년 08월 12일 (화) 16:13:10
최종편집 : 2014년 10월 25일 (토) 01:16:04 [조회수 : 3372]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우리는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 하나를 편드는 데에 익숙해져 있다. 손자는 그의 병법에서 전쟁이 일어나서 양편이 싸울 때 어느 한 편에 가담해야 한다고 말했다. 만약 중간입장을 취하면 양측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죽게 된다는 것이다. 정치 현실에서도 여당에 속하거나 야당에 속해야지 무소속은 힘을 쓰지 못한다. 그래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더라도 다음에 어느 한 당에 들어가게 된다.

우리는 삶의 현장뿐 아니라 신앙에서도 두 가지 중에서 어느 한쪽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스라엘 민족은 자기들만이 구원받을 수 있고 이방인들은 저주의 대상이라고 보았다. 기독교인들은 영의 세계를 중시하고 육의 세계를 외면하기 쉽다. 개신교인들 가운데에는 가톨릭교회에는 구원이 없는 것처럼 몰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신학자들은 성경에서 자기의 마음에 드는 것만을 골라서 논리를 전개하는 수가 많다.

이러한 신앙인의 편향성을 예수님은 어떻게 보실까? 40일 동안 금식하신 예수님에게 사탄이 돌들을 떡덩이로 만들라고 말하면서 유혹할 때 예수님은 인간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말씀을 중시하는 독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 말씀만을 중시하신 것으로 읽을 가능성이 있지만, 실상 예수님은 ‘떡으로만’에서 ‘만’을 언급하심으로써 떡의 중요성도 간과하지 않으셨다. 가이사에게 압제를 받는 유대인들이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가 물었을 때 예수님은 예상 밖으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사물을 편향적으로 보는 데에 익숙한 우리와 달리 예수님은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모두 중시하신 것을 본다.

마가복음 12장에서 어느 서기관이 예수님에게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때에 예수님은 첫째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대답하시면서 그 서기관이 기대하지 않았던 둘째 계명까지 말씀하셨다. 그 둘째 계명은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두 계명이 모두 중요하다고 덧붙이셨다. 예수님은 그 서기관이 묻지 않은 둘째 계명을 언급하심으로써 하나님 사랑에만 몰두하면서 이웃 사랑을 외면하는 유대인들의 편향성을 지적하셨다.

당시 유대인들은 인간에 대한 사랑을 소홀히 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일에 치중하면서 부모에 대한 배려를 외면하는 고르반이라는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고 있었다. 예수님은 이 서기관의 질문에 앞서서 마가복음 7장에서 이 고르반의 문제점을 지적하셨다. 유대인의 전통을 잘 알고 있는 그 서기관은 이웃 사랑이 중요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예수님이 인간에 대한 배려를 외면하면서 하나님만을 섬기는 유대인들의 편향성을 지적하신 것을 간파하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누가복음 10장에서는 예수님이 이웃 사랑을 강조하시자 율법교사가 그의 이웃이 누구인가 묻고 예수님이 그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비유 이야기를 해주신다.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끝내면서 예수님은 그 율법교사에게 누가 강도 만난 유대인의 이웃이냐고 물으시자 그 율법교사는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대답한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이방인으로 취급했기 때문에 사마리아인들을 그들의 이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여기서 우리는 자기네 동족만을 이웃이라고 생각했던 당시 유대인들의 편향적 사고와 달리 이방인까지를 이웃에 포함시키는 예수님의 포용적 태도를 보게 된다.

이방인을 외면하지 않고 이웃의 범주에, 구원의 대상에 포함시키시는 하나님의 뜻을 사도행전에서 읽을 수 있다. 사도행전 10장에는 이방인 고넬료가 성령을 받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베드로는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행 10:28) 알고 있었지만, 하나님이 이방인을 구원받을 자들로 삼으셨다는 사실을 환상 중에 보고 그를 청하는 고넬료의 집을 방문한다. 고넬료를 만나 그에게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세례를 베푼다. 여기서 다시 우리는 이방인을 외면하는 유대인들의 편향적 태도를 볼 뿐 아니라 그들의 생각과 달리 이방인까지를 포용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한다.

이 고넬료 사건에서 그 이방인을 구원받을 자로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기준은 그의 믿음과 행위, 다시 말해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환상 중에 천사의 음성을 듣는다. 그 천사는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행 10:2,4)라고 말한다. 사도행전 10장에서는 이 외에도 22, 31, 35절에서 거듭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기도하는 사람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여 구제하는 의인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고넬료에 대한 기록에서는 복음서에 기록된 서기관이나 율법교사에게 하신 예수님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이 믿음과 구제로 바뀌어 있다. 여기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는 하나님 사랑에 해당하고,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는 이웃에 대한 사랑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에게 세례를 주는 사건에서 예수님이 중시하신 두 계명과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나타난 이방인의 포용이 반복되고 있는 것을 본다. 그리고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거듭 예수님과 하나님의 뜻은 유대인들의 편향적 사고와 다르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들도 하나님 사랑에 치우친 나머지 이웃 사랑을 외면하는 경향이 있다. 위에서 언급된 것처럼, 하나님 사랑은 믿음의 영역이고, 이웃 사랑은 믿는 자의 행위의 영역이다. 개혁자들은 이신칭의의 교리를 내세우면서 믿음으로 구원받지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성화의 단계를 도입한 칼빈의 경우에도 인간은 자신의 의지를 발휘하지 않는 수동적인 존재였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신칭의의 교리에 의지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을 중시하면서 믿는 자의 의지와 행위를 소홀히 해 왔다.

그런데 믿음만을 강조하는 개혁자들의 편향성은 서기관과의 대화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모두 중시하신 예수님의 가르침 그리고 고넬료의 사건에서 믿음과 구제를 구원받을 자의 조건으로 제시하신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멀다. 개혁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극대화하면서 인간의 전적 무능을 강조했는데, 그들이 주장한 것처럼 믿는 자에게 의지와 선택이 전혀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 인간은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성경에서는 인간을 꼭두각시로 다루고 있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라 혹은 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셨는데, 그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인간의 의지와 노력이 요구된다. 구약을 관통하는 신명기 사관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때 복을 받고 지키지 않을 때 벌을 받는다는 것이다. 신약에는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고 믿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물론 성령이 믿도록 인도하시지만, 인간의 편에서도 노력해야 한다. 이 노력에는 의지가 수반되게 마련이다.

만약 인간의 의지와 노력이 전혀 감안되지 않는다면 인간의 삶에 대한 모든 책임이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에 심판의 날에 하나님은 인간을 벌할 수가 없다.

현대인은 인간이 신의 꼭두각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선택하며 노력하는 존재라고 믿는다. 이것은 우리의 경험이 말해 주는 것이며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성경의 계명에 내포되어 있다. 17, 18세기를 거치면서 특히 20세기에 와서 인간의 경험과 선택이 중시되고 그러한 사상은 신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현대에 와서 축자영감설이나 절대예정론에 대한 주장이 약해진 것은 현대의 문화에서 인간의 역할이 힘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현대의 문화를 외면하고 16세기의 문화적 배경에서 나온 신학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사실, 상황의 지배를 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18세기에 활동한 존 웨슬리가 그보다 200년 전에 살았던 개혁자들과 달리 인간의 의지를 교리에 도입한 것은 당시 그의 모국 영국에서 일어났던 경험주의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 인간의 의지가 중시된 데에는 정치상황도 한 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백성이 꼭두각시에 불과한 절대군주국가에서와 달리 민주국가에서는 국민이 지도자를 선출하고 국민의 여론이 국정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한다. 이러한 민주사회에서 사는 우리에게는 국민이 꼭두각시가 아니라는 생각이 몸에 배어 있기 때문에 전통적인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재고하게 되었다. 정치 상황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와 연관시키는 것은 황당한 발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겠지만, 인간은 주어진 시대의 상황에서 그 시대의 언어로 말하게 되어 있다.

두 가지 사랑을 모두 중시하신 데서 나타나는 것처럼, 예수님은 두 면을 모두 받아들이는 양면수용적 태도를 취하셨다. 하나님이시며 인간이신 예수님은 양면수용을 몸소 체현하신 분이시다. 그 예수님이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을 모두 중시하신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고 인간을 지으신 모든 인간의 아버지이시다. 그 하나님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모두 당신의 자녀로 품으신 것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일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 방문을 계기로 가톨릭과 각을 세우는 개신교인들이 있다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톨릭과 개신교는 모두 당신을 믿는 충성스러운 자녀들이다. 그리고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도 가톨릭 교인들은 개신교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믿는 형제들이다. 가톨릭 교리와 개신교 교리 사이에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 차이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공통점에 비하면 사소하다. 과거에 이 두 교회가 맞서서 피투성이가 되어 싸운 일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들의 편향성의 결과였다. 형제끼리 서로 찔러 죽이고, 목매달아 죽이고, 때려 죽이고, 수장시키고, 화형시킨 참극은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을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형제를 사랑한다고 말할 경우 보통 믿음의 형제를 염두에 둔다. 이렇게 형제의 범위를 한정하면 나와 믿음을 같이 하지 않는 사람을 이웃의 범위에서 제외하게 마련이다. 나와 종교가 다른 사람, 교회가 다른 사람, 심지어 개신교 안에서도 교파가 다른 사람을 이웃에서 제외하면서 그들과 대화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분명히 예수님의 뜻과 다른 편향적인 사고이다.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드러나는 예수님의 뜻은 우리가 이웃의 범위를, 사랑할 대상의 범위를 믿지 않는 사람으로까지 확대하라는 것이다.

21세기의 글로벌 시대에는 편향성을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을 열린 시대, 대화의 시대, 소통의 시대라고 말한다. 『인도로 가는 길』의 작가 E. M. 포스터는 20세기 초에 발간된 그 작품에서 수용적인 태도의 중요성을 보여주면서 그러한 태도는 ‘황혼의 비전’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황혼의 비전’이라는 말로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은 나와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들과 선을 긋지 않고 대화하는 태도는 노년에 이른 사람의 성숙한 정신에서 나온다는 점이었다. 미숙한 사람은 편향적이기 쉽다.

편향성을 벗어나서 양면을 수용하는 태도는 일찍이 예수님이 성육신을 통해서 체현하신 일이고 예수님이 그 중요성을 강조하신 계명이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뜻을 외면하면서 나만이 옳다는 독선적 태도를 가지고 너와 나 사이에 선을 긋는다. 그런 교인들에게는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가 흔히 말하는 대로 공염불에 불과하다.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편향적인 태도를 버리지 못한다면, 예수님의 뜻을 저버린다면, 분파와 분쟁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교회 안에서조차 이루어질 가망성이 없다. 교회 안에서도 예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없다면 어떻게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수 있겠는가?

기독교인이 예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을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세상 사람들이 대화와 소통을 추구하는 때에 기독교인들이 마음의 문을 열고 포용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외면한다면 세상을 따라가지도 못하는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겠는가? 세상의 기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교인들 때문에 기독교 전체가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뜻에 맞게 변해야 한다. 기도하면서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이 변화시켜 주시기만을 기다리는 것은 자신의 책임을 외면하는 일이다.

대화의 시대를 맞이해서 지금까지 신앙인들이 지니고 있던 편향적인 태도의 오류를 돌이켜 보면서 예수님의 뜻을 묵상하는 것은 시의적절한 일이며 올바른 교리 혹은 신학의 정립을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다.

인간이 자기들의 생각을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 것은 경솔한 태도일 뿐 아니라 오만한 일이다. 오만은 천사도 타락시킨 죄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서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고 말씀하셨다.

바울은 분명히 하나님의 이 말씀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그는 로마서에서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11:33-34)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고 노력한 바울은, 그의 글을 읽은 많은 신앙인들이 그를 편향적으로 이해한 것과는 달리, 편향성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애쓴 신학자였다.

편향적 사고에 휩쓸리기 쉬운 우리는 예수님의 깊고 높고 넓은 뜻을 헤아리려고 노력해야 한다.

최재석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를 추천하시면 "금주의 좋은 기사" 랭킹에 반영됩니다   추천수 : 3015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의견나누기(5개)
0 / 최대 22400바이트 (한글 11200자)
- 금지어 사용시 댓글이 제한 될 수 있습니다.
* [댓글운영원칙] 욕설, 반말, 인신공격, 저주 등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은 글과 도배성, 광고성, 허위성 댓글은 통보 없이 삭제합니다.
신앙의 편향성? (72.37.249.108)
2014-08-13 07:09:49
오직 하나님!!!
신앙에 있어서 중립성 혹은 포용성이란 다른 신앙과 균형을 이룬다든가 포용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 물론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건 그들의 문제이고 '구원은 오직 예수께만 있다'고 하는 기독교에서의 중립성 혹은 포용성이란 외적으로 비록 타 종교인이라 하더라도 구원의 대상으로 '강도 만나 거반 죽게된 사람'과 같은 존재로 여기고 대하는 태도를 포함한다. 그렇다고 저들에게 예의를 차린다고 '너희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하는 것은 포용적이지 않다. 당연히 종교다원주의로서의 '포용성'과는 개념의 차이가 있다. 내적으로는 교리적 차이를 포용하고 아우르는 것을 말한다.

인간의 의지에 대하여 칼비니즘과 알미니즘이 차이가 나는 것은 인간의 원죄에 대한 교리의 차이 때문이다. '인간의 전적부패'냐 아니면 '부분부패'냐에 따라 인간의 의지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다. 칼비니즘은 '전적부패'에 따라 '인간 의지'도 완전히 부패하여 전혀 선한 것을 택하지 못한다고 한다. 이에 반해 알미니즘은 '부분부패'로 말미암아 '인간 의지'도 어느 정도 선을 택한다고 한다. 내 생각에는 아담의 의지는 어떤 의지인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의지는 전적으로 선하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사람은 어떤 의지를 갖고 있을까? 아담이 사단의 유혹으로 선악과를 따먹은 것으로 보아 하나님의 의지와는 다르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고 '보기에 좋았다'고 하신 것은 그것이 최상의 상태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만약 하나님이 사람의 의지까지도 자신과 똑같이 만들었다고 하면 이는 또 다른 신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피조물이면서 신인 존재? 그러므로 신이 아니면서도 최상의 상태이며 말 그대로 로봇이 아닌 의지를 가진 존재는 그리고 타락 이전의 존재는 그 의지의 상태가 중립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선이나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중립 상태의 의지를 지닌 존재, 이것이 타락 이전의 인간이다.

그러나 사람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전적부패'든 '부분부패'든 이제 인간 의지는 악으로만 향한다. 중립 상태의 아담도 악을 행했는데 '부분부패'했다면 더 말해 무엇하랴!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의지요 모습이다. 그러므로 이제 타락한 인간은 악을 향하는 자신의 의지로 말미암아 멸망받을 수 밖에 없고 하나님께는 책임이 없다. 이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가 이 땅에 오신 것이고 믿고 거듭날 때 '새마음'으로 태어나 늘 악으로 향하던 의지가 선을 향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나가게 된 것이다. 거듭나지 않은 마음에서는 선을 향하는 의지가 생겨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새마음'을 주시겠다고 하셨지 '새의지'를 주시겠다고 하시지 않았다.

믿음과 행위를 하나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사랑함으로 구분하지만 믿음과 행위는 나눌 수 없는 것이다. 비록 믿음대로 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믿음과 행위로 구분하지만 추상적인 우리의 믿음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행위로 알 수 있다. 물론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또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는 말씀처럼 형제 사랑이 곧 하나님 사랑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면 형제를 사랑할 수 없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를 어떻게 아는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 오직 하나님 사랑이 우선 되어야 한다. 믿음과 행위로 구분하는 것은 편의상 그럴 뿐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구분도 편의상 그럴 뿐이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이런 사랑 없이 이웃 사랑? 있을 수 있다. 다만 그 사랑은 인간적인 사랑일 뿐이다. 그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는데 쓰이는 사랑일 뿐이다. 가끔 희생적인 사랑도 있지만 그것마저도 자기 신념과 유익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리플달기
8 2
최Ray (220.118.20.224)
2014-08-13 16:49:38
감사 드립니다.^^
리플달기
0 0
거짓교인 (115.23.105.99)
2014-08-13 22:29:48
가죽 옷을 걸친 채 파라다이스행이라니... 수치심이 없으요.
아담은 죄를 짓고 숨은 것은 부끄러웠기 때문 입니다. 간음한 여자를 향했던 자들이 돌을 내려놓았던 것 또한 죄를 깨닫고 비로소 부끄러움을 느꼈기 때문이죠.

뜬금없이 부끄러움을 말하는 바는, 수치심 없이는 겸손해지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스스로의 한계와 오류를 깨닫고 부끄러움을 알았을 때, 그제서야 아담 부부와 투석자들 처럼, 알아서 기어들어가는 여건이 되지요.

사실, 사랑의 시작 가운데 하나는 부끄러움을 아는 것 아닐까 합니다. 투석자들이 부끄럼 없이 옷을 벗어주지는 않았지만, 어찌되었던 그들은 이를 갈지 않았고, 돌을 던지지 않았으며, 결과적으로 자비가 베풀어져(?) 여자는 다시 살아가게 되었으니까요. (powerd by 예수)

한국 개신교계가 미쳐 날뛰는 건 부끄러움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PS) 예수에 대한 소유권 주장하는 것은 교회가 오래된 전통을 답습하는 과정에서 온 결과물에 의의가 있다. 이러한 소유권을 통해 교회는 정통성을 확립할 수 있었고, 가톨릭의 경우 그 이름 처럼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었으나, 불행하게도 구교에서 신교로 이어진 전통은 보편주의가 박살나고 말만 남은 채, 모두에게 해로움을 선사하고 있다.

PS2) 개신교는 종교다원주의 취급하지 않아요~ 개신교는 종교, 나 ONE주의~
리플달기
0 2
포이멘 (183.109.98.143)
2014-08-13 12:53:39
.
요한복음 3장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과 성령으로 접속하여 예수살이를 하는 성도들은

사랑의 하나님을 닮아서 편향적이고 독단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나타난 금대가리 디오드레베가 문제지요.

이 자들은 강단에서 성도들을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사도바울의 '육체에 가시'를 인용해

어떻게 목사 자신의 가시를 성도들이라고 강단에서 말할 수 있는지

그 가시가 어떻게 사탄의 사자가 될 수 있는지

그것이 하나님의 대언인지

또는 자기 자신의 탐욕의 저주인지 궁금합니다.

마라나타.


예수의 눈에는 예수만이 보이고 사탄의 눈에는 사탄만이 보입니다.

사랑의 예수로 사는 성도들은 모든 사람들이 사랑의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편향적이지 않고 독단적이지 않습니다.


사도 요한은 디오드레베의 행위를 지적하겠다고 했습니다.

정죄하여 불못에 던지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디오드레베 마저도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모습입니다.

오늘 이 시간 금대가리 디오드레베들이 악한 영과의 접속을 끊고

성령을 받기를 기도합니다.

.
리플달기
2 2
신앙의 편향성? (72.37.249.108)
2014-08-13 07:09:49
오직 하나님!!!
신앙에 있어서 중립성 혹은 포용성이란 다른 신앙과 균형을 이룬다든가 포용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 물론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건 그들의 문제이고 '구원은 오직 예수께만 있다'고 하는 기독교에서의 중립성 혹은 포용성이란 외적으로 비록 타 종교인이라 하더라도 구원의 대상으로 '강도 만나 거반 죽게된 사람'과 같은 존재로 여기고 대하는 태도를 포함한다. 그렇다고 저들에게 예의를 차린다고 '너희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하는 것은 포용적이지 않다. 당연히 종교다원주의로서의 '포용성'과는 개념의 차이가 있다. 내적으로는 교리적 차이를 포용하고 아우르는 것을 말한다.

인간의 의지에 대하여 칼비니즘과 알미니즘이 차이가 나는 것은 인간의 원죄에 대한 교리의 차이 때문이다. '인간의 전적부패'냐 아니면 '부분부패'냐에 따라 인간의 의지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다. 칼비니즘은 '전적부패'에 따라 '인간 의지'도 완전히 부패하여 전혀 선한 것을 택하지 못한다고 한다. 이에 반해 알미니즘은 '부분부패'로 말미암아 '인간 의지'도 어느 정도 선을 택한다고 한다. 내 생각에는 아담의 의지는 어떤 의지인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의지는 전적으로 선하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사람은 어떤 의지를 갖고 있을까? 아담이 사단의 유혹으로 선악과를 따먹은 것으로 보아 하나님의 의지와는 다르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고 '보기에 좋았다'고 하신 것은 그것이 최상의 상태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만약 하나님이 사람의 의지까지도 자신과 똑같이 만들었다고 하면 이는 또 다른 신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피조물이면서 신인 존재? 그러므로 신이 아니면서도 최상의 상태이며 말 그대로 로봇이 아닌 의지를 가진 존재는 그리고 타락 이전의 존재는 그 의지의 상태가 중립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선이나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중립 상태의 의지를 지닌 존재, 이것이 타락 이전의 인간이다.

그러나 사람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전적부패'든 '부분부패'든 이제 인간 의지는 악으로만 향한다. 중립 상태의 아담도 악을 행했는데 '부분부패'했다면 더 말해 무엇하랴!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의지요 모습이다. 그러므로 이제 타락한 인간은 악을 향하는 자신의 의지로 말미암아 멸망받을 수 밖에 없고 하나님께는 책임이 없다. 이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가 이 땅에 오신 것이고 믿고 거듭날 때 '새마음'으로 태어나 늘 악으로 향하던 의지가 선을 향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나가게 된 것이다. 거듭나지 않은 마음에서는 선을 향하는 의지가 생겨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새마음'을 주시겠다고 하셨지 '새의지'를 주시겠다고 하시지 않았다.

믿음과 행위를 하나님을 사랑함과 이웃을 사랑함으로 구분하지만 믿음과 행위는 나눌 수 없는 것이다. 비록 믿음대로 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믿음과 행위로 구분하지만 추상적인 우리의 믿음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행위로 알 수 있다. 물론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또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는 말씀처럼 형제 사랑이 곧 하나님 사랑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면 형제를 사랑할 수 없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를 어떻게 아는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 오직 하나님 사랑이 우선 되어야 한다. 믿음과 행위로 구분하는 것은 편의상 그럴 뿐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구분도 편의상 그럴 뿐이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이런 사랑 없이 이웃 사랑? 있을 수 있다. 다만 그 사랑은 인간적인 사랑일 뿐이다. 그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는데 쓰이는 사랑일 뿐이다. 가끔 희생적인 사랑도 있지만 그것마저도 자기 신념과 유익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리플달기
8 2
최Ray (220.118.20.224)
2014-08-13 16:49:38
감사 드립니다.^^
리플달기
0 0
최Ray (39.7.54.175)
2014-08-12 18:46:14
아멘.^^

오직 예수그리스도.!!!

종교다원주의 경계.
리플달기
3 5

최재석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20-012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가 35 기사연빌딩 401호 ☎ 02-393-4002(팩스 겸용)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심자득
제호 : 당당뉴스  |  등록번호 : 서울아00390  |  등록연월일 : 2007.7.2  |  발행인 겸 편집인 심자득(010-5246-1339)
Copyright © 2005 당당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dangdang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