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라고 앞에다 수식할만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 세월호 때문에 생각난 이야기이다. ‘안전’이라는 단어가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인상 깊게 들린 것은 고교 3년 때였다.

당시는 성당에 다녔기 때문에 명동의 학생 회관에서 미군 법무관 중령이 영어로 교리를 가르치는 클럽에 나가고 있었다. 클럽에서 야유회를 가는데 중령이 미 8군에서 버스를 빌려와서 강화도로 가기로 했었다. 당시에는 강화도로 가는 다리가 없었기 때문에 배에다 버스를 싣고 건너가야 했다. 나중에야 중령이 다리가 아닌 배로 버스가 건넜다는 것을 알고서 안전하지 못하다며 장소를 바꾸어야 한다고 해서 산정호수로 야유회를 갔었다.

그 때 우리들은 모두 섬인 강화도를 가보고 싶었기 때문에 이제까지 사고가 안 나고 잘만 다니는데 ‘안전’을 이유로 갈 수 없다니 속으로는 불만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책임을 져야 하는 중령으로서는 당연한 결정이었겠지만 당시의 우리들은 도무지 이해 할 수가 없는 처사였다.

서구 사회에서는 모든 방면에서 ‘안전’을 최우선적으로 취급한다. 그래서 무슨 일이든 안전하지 않으면 아예 시작도 하지 않는다. 보험도 마찬가지이다. 보험이 없으면 동네 아이들 축구시합도 안한다.


9.11 이후 세계는 변했다.

빈 라덴은 단순히 맨해튼의 쌍둥이 타워만 폭파시킨 것이 아니고 서구 세계에 ‘불안’이라는 엄청난 선물을 안겨 주었다. 그런데 이 ‘불안’이라는 선물은 워낙 값이 비싸서 지금 세계는 경제적으로는 시간적으로나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있다. 실제로 심지어는 우리가 비행기를 탈 때마다 안전 비용으로 추가 비용을 지불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한 번 생각해보자.

폭탄을 던진 쪽은 아예 애초부터 안전이라는 것이 없는 쪽이었다.
그들에게 안전이 있다면 절망 속의 안전일 뿐이다.
절망이 주는 안전이라니? 세상에 그런 것도 있는가 싶을 것이다.
절망이 주는 안전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 안정은 내가 경험해 보아서 잘 안다.
나는 한 때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다.’라는 신념 하나로 살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니 겁나는 것이 무엇이 있겠나? 아무런 희망이 없기 때문에 불안도 없는 것이다.

‘맹인과 벙어리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맹인이 이길 수밖에 없다. 왜? 뵈는 게 없으니까?’

이 이야기는 세상에 보이는 게 없는 것이 제일 무섭다는 것을 말해 주는 농담이다. 지금 무슬림을 상대로 미국이 고전하는 거 봐라. 미국은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무슬림을 이길 수 없다. 목숨을 아까와 하는 놈과 아까워하지 않는 놈과 싸우면 결과는 뻔 한거다. 아무리 좋은 무기를 가졌다 한들 목숨을 아까워하는 놈이 목숨을 버린 놈을 이길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럴 때 신앙을 만나면 그 안에서 안전을 찾게 된다. 자살 테러범들은 바로 이런 심리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다.


보통 인간은 가정적, 사회적, 경제적, 법적, 육체적 그 어느 하나라도 안전하지 못하면 불안이 찾아온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과 전혀 상관이 없는 불안이 있다.

바로 ‘신앙적 안전'이 지켜지지 못한다는 불안이다. 그들은 자기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떤 대가도 치르겠다고 생각하고 ‘신앙적 안전’에 지장이 있다면 언제든 일전을 불사할 각오를 가진다.


미국 역산에서 가장 멍청했던 대통령으로 기록될 부시 대통령 때의 일이다.
다음은 2005년 8월 28일 볼티모어 선(Baltimore Sun)에 실린 기사다.


부시 대통령은 2003년에 150억불의 세계 에이즈 기금 조성 계획을 발표하면서, ‘신앙에 기반 한 (faith-based)‘ 단체들에 상당히 많은 기금을 제공할 것이라고 못을 박았다.

세계 에이즈 계획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의회는 "매춘과 성매매를 명시적으로 반대하는 정책을 가지고 있지 않은 단체들"에게는 기금을 주지 않기로 결정했다. 국제적 활동을 벌이는 단체들이 기금을 수령할 때는 위의 내용을 서약을 할 것을 의무사항으로 부과했고, 지난 봄에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단체들에까지 그것을 확대했다.

우파 기독교 집단이 벌이는 반매춘 십자군 운동이 전 세계의 홍등가에서 HIV감염을 막기 위해 전투를 벌이고 있는 공중 보건 단체들과 충돌하고 있다.

왜냐하면 심사기준이 ‘신앙에 기반한 접근법’을 우선시하는 것으로 바뀌어감에 따라 연방기금수령을 위한 재계약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른 상태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공중보건 활동가들은 에이즈를 줄이려면 콘돔과 위험을 줄일 수 있는 방안에 대한 정보를 성노동자들에게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비영리집단인 세계 에이즈 동맹(Global AIDS Alliance)의 대표 폴라 자이츠(Paul Zeitz)는 이렇게 말한다. "에이즈를 다루고 예방하는 가장 기초적인 지식을 이해하지도 않고, 이 종교적 보수주의 집단은 거친 이데올로기적 아젠다 만을 남발하고 있다."

그러나 보수주의 단체는 이렇게 말한다. "매춘을 눈감아주는 집단에 돈을 주는 것은 용납할수 없는 일이다. 매춘을 눈감아주는 것은 매춘을 지지하는 것이다" 이들은 매춘여성들과 협력해 일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사악한 행위라고 본다.


간단히 말해서 “매춘을 그대로 두고 콘돔만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매춘녀들에게 에이즈 예방을 위해 콘돔을 주는 것은 매춘을 장려하는 것이다“하는 것이다.

그에 대하여 세계 에이즈 동맹의 대변인은 “단순히 금욕과 신앙심만을 진작시키는 것만으로는 매춘여성과 같은 집단들이 겪고 있는 문제를 풀 수 없다.”고 당연한 말씀을 하셨다.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다룬다. 이 세상이 항상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떻게 생각 되는가? 부시와 그의 친구들은 육체의 안전 보다 소위 ‘신앙의 안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아닌가? 그러나 그것이 정말 ‘신앙의 안전’을 위한 것일까?


여기 ‘신앙의 안전’에 글자 그대로 목숨을 건 사람이 있었다. 본회퍼의 가정은 독일에서 최상류층이어서 사회가 아무리 불안해도 최소한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는 형편이었다.

히틀러 통치 12년 동안 히틀러를 제거하려고 하는 지극히 위험하고도 ‘불안전한 삶’에 그의 집안 전체가 매어 달렸다.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가고 모의를 주도하던 저항 세력들이 모두 체포되어 비밀경찰 게쉬타포 감옥에서 ‘사형 선고를 이미 받고서도 죽이지 않고 다른 동조자들을 자백하도록 끊임없이 고문을 당하는’ 처지에 빠졌다.

저항 세력의 동지들은 일망타진 당해서 각기 독방에 갇히고 수감자들 사이의 대화도 금지 되었다. 오직 세면장에서나 복도에서 잠깐 스쳐갈 수 있을 뿐이었다. 총사령관이었던 장군이 손발이 묶인 채로 피투성이 송장 같은 모습으로 본회퍼 옆을 지나면서 “여기가 지옥이요”라고 했다. 본회퍼는 “용기!” 이 한마디를 나지막이 힘주어 던지고 지나친다.

세상에 이보다 더 강한 설교가 있을까?
용기는 어디서 나는 것인가?
용기는 내가 갖는 것이지 하나님이 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해결해주기를 기다리는 것 보다 내가 용기를 내서 극복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러나 그런 용기는 아무데서나 나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편에 설 때만 가능한 것이다.

본회퍼는 끝내 믿음을 지키다가 베를린 함락 불과 며칠 전에 외롭지 않게 다른 동료들과 함께 교수형을 당했다. 본회퍼는 나에게 안전하게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안전하지 못하게 살아간 사람의 표본이었다. 그러나 그 보다 먼저 그렇게 살다가 갔던 이가 예수였다. 예수는 불안전하게 살다가 가셨다.

불안한 삶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나는 과거 한국에서 오랫동안 불안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불안의 맛을 조금은 안다고 할 수이다. 교단도 나를 껄끄럽게 대했고 심지어는 신학교 동기생들 중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과도 대화가 단절되었었다. 십여 년 동안 배고픔과 단절을 경험하면서 살았었다.


신앙을 가짐으로서 이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종교의 중요한 기능의 한 가지일 것이다. 교회가 단순하고 소박한 이들이 뭔가 믿고 빌 수 있는 곳이 되고 그래서 편안히 쉴 수 있는 그 무엇이 되는 것은 귀한 일이다.

나는 "어린 아이 같은 순수한" 믿음을 좋아하고 평생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들이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순수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야 말로 교회의 보배 같은 존재이며 많은 교인들에게 감화와 감동을 준다. 그들은 믿음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그냥 이유 없이 믿고 그렇게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믿음의 근본에 대하여 질문을 하거나 문제를 제기하는 것 자체를 거부해버린다. 믿음에 대하여 어떤 감성적 논리적 설명도 거부한다. 다른 종교에 대한 글을 읽거나 절에 가서 금으로 코팅한 아저씨를 보거나 조상의 이름을 적은 종이에 절하는 것이 그들의 믿음을 감염시킨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멸균된 환경에서 살고 있다고나 할까…….

문제는 그들의 믿음이 너무나도 순수하기 때문에 -하지만 그 믿음은 멸균 환경에서만 지킬 수 있기 때문에- 조금만 방향을 틀어주면 전혀 다른 것도 마찬가지로 순수하게 믿게 된다는 것이다. 2차 대전 전 독일의 최면술에 의해서 미쳐 돌아갔다.

이것은 순수한 사람들이 곧 가장 과격한 사이비교 광신도가 될 가능성을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었다.


어느 영화감독을 인터뷰한 기사에서 다음의 대목을 발견하고 무릎을 친 일이 있었다.

“스크린 속 허구의 세계를 구성해 내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모든 실재를 깊고 넓게 아는 것이다. “

이 말은 내가 평소에 영성에 관해서 생각하는 것을 정확하게 표현해 주고 있었다. 실재를 외면한 영성이라는 것은 말장난, 혹은 관념의 유회일 뿐이라는 것이다.

현실을 직시 하는 것에서 오는 불안, 그것이 정말 안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