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권사님께서 시장엘 가시나 보다. 누가 저리도 멋진 자동차(?)를 만들었을까? 겨울을 이기려고 온몸을 꽁꽁 싸맨 채 네발전동기에 보무도 당당하게 올라 운전하는 품새는 여느 베스트드라이버 못지않다. 가끔 나 혼자 사고를 걱정하기도 한다. 윤 권사님은 이런 목사의 마음을 알기나 할까. 웬만하면 집에 계시지 않고.

설이나 한가위를 맞는 때면 한 번도 거르는 일이 없다. 네발전동기를 타고 교회에 들러 선물을 내려놓고 가는 일을. 윤 권사님은 그런 노인이시다. 두 아들을 목사로 키워낸 장한 어머니일 뿐 아니라 주의 종 접대에 소홀함이 없다.

그러나 몸은 굽을 대로 굽었다. 지팡이를 짚어야나 간신히 걸을 수 있는 몸이다. 그 오그라든 몸으로도 새벽기도에 빠지지 않는다. 몸 성한 다른 이들을 제치고 기도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몸이 건강해야 헌신한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돈이 많아야 헌금한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적어도 윤 권사님을 보면 그렇다.

깎고 또 깎아 이제는 다 닳아버린 몽당연필처럼, 남은 힘이 다 기진한 것 같은데도 윤 권사님은 오늘도 네발전동기에 올라 뭐 그리 바쁘게 가시는지? 아직도 그녀에겐 할일이 많다. 교회의 이층 식당으로 오르는 계단이 여간 힘에 부치지 않지만 여느 노인들처럼 예배만 드리고 가지 않는다. 힘들게 난간을 잡고 올라 성도들의 교재에 동참한다.

윤 권사님을 볼 때마다 몽당연필 추억이 떠오른다. 물자가 귀하던 시절, 볼펜은커녕 연필도 모자랐다. 면도칼로 깎은 연필로 몇 자 적어가다 보면 뭉그러져 침을 묻혀가며 글을 썼었다. 그럼 이번에는 종이가 뭉개지고 뚫어져 버린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옆집 살던 나보다 공부를 못하던 친구, 부잣집 아들이 가졌던 기다란 연필은 한 개도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머리에 지우개도 달리지 않고 페인트칠도 없는 그런 연필을 썼다. 누나는 그런 연필을 어디서 구했는지 꼭 그런 싼 연필만 사왔다. 그것도 다 쓰고 나면 손에도 안 잡히는 몽당연필이 되고, 그러면 다 쓴 볼펜 껍질을 끼워 썼었다. 몽당연필 같은 사랑이 그리운 시대다. 봉당연필 같은 헌신과 충성이 그리운 시대다.

“손에 쥘 수도 없는 연필 한 개가/ 누군가 쓰다 남은 이 초라한 토막이/ 왜 이리 정다울까.// 욕심 없으면/ 바보 되는 이 세상에/ 몽땅 주기만 하고 아프게/ 잘려 왔구나.// 대가를 바라지 않는/ 깨끗한 소멸을/ 그 소박한 순명을/ 본받고 싶다.// 헤픈 말을 버리고/ 진실만 표현하며/ 너처럼 묵묵히 살고 싶다/ 묵묵히 아프고 싶다.”

이해인의 <몽당연필>이란 시다. 물질문명이 가져다 준 이 삭막함 속에서 몽당연필에 젖은 사랑의 추억을 생각하는 것은 핑계 많은 성도들을 너무 많이 만나기 때문인 탓이다. 몽당연필에 쓰다 버린 볼펜 껍질 고깔 씌우고, 밤이 새도록 사랑의 편지를 쓰고 싶다. 이제 삭아버리려던 잃은 것들에 대한 추억을 보듬어 안고 사랑의 노래를 부르련다. 그럼, 우리 성도들도 건강 핑계, 물질 핑계, 바쁘다는 핑계 안 대고 주님을 향한 몽당연필의 사랑을 보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