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북의 지도자들이 입을 모아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의지를 피력했다기에 모처럼 한반도에 훈풍이 불어오나 내심 기대를 했다. 우리 민족의 의지와 관계없이 외세에 의해 해방 직후 남과 북으로 갈라져 50여년동안 대립과 반목을 계속했다. 전쟁과 테러로 얼룩진 50여년이었다. 그런데 2000년도에 획기적인 전환의 기회를 만났다. 해방 후 처음으로 남과 북의 지도자가 만나 머리를 맞대고 한반도와 한민족의 미래를 함께 논의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2007년에 만나 보다 구체적인 방안들을 논의했다. 퍼주기 논쟁이 격화되기는 하였지만 이 시기가 지난 70여년의 분단 역사 중 가장 평화로웠던 기간이 아닌가 한다.

2008년 이후 다시 한반도는 격량에 휩싸였다. 북핵 실험과 천안함 사태, 연평도 포격사태로 봄바람 불던 한반도는 다시 차가운 삭풍에 몸을 떨어야 했다. 물론 북쪽도 연일 계속되는 남쪽의 전쟁훈련에 신경이 곤두섰을 것이라는 사실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 삭풍이 10년이라는 시간의 훈풍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평화의 꽃을 피웠던 기억까지 얼려버리지는 못했다. 머리는 기억하지 못해도 몸은 기억하는 법, 평화는 이제 한반도 구성원 모두의 염원이다.

그렇다보니 2014년 벽두부터 언급된 두 지도자의 관계개선 의지는 마음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설레는 마음을 뒤로 하고 뭔가 찜찜한 것들이 또다시 시름에 빠져들게 하고 있다.사진은 미디어다음 연합뉴스 기사에서 퍼왔습니다. 클릭하시면 기사원문으로 이동합니다.
조선은 김정은 위원장이 신년사에 남북관계 개선을 언급한 이후 지속적인 제의를 해오고 있다. 뭔가 획기적인 조처를 먼저 하겠다는 말까지 했다. 한국의 관점으로 본다면 그저 ‘뻔한 속임수’라거나 ‘통일전선전술’이라고 치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사기 치지 말라고 그저 외면해 버려야 하는지, 아니면 그 진정성을 의심하면서도 그 진정성에 대한 시험을 해볼 것인지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고민이다. 뻔한 놀음에 끼어들어 판돈을 걸 것인지, 아니면 뻔한 놀음이기에 아예 욕이나 한 바가지 퍼부어주고 외면할지 말이다.

그러나 한반도의 문제가 단순하게 도박으로 치부되어서는 안 된다. 박근혜 대통령은 ‘통일은 대박’이라고 했는데 사실 대박이라는 것이 도박성 일확천금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도박은 도 아니면 모이다. 한반도와 한민족의 운명이 도박에 걸린 판돈 신세가 되어서는 안 된다. 국제관계에서는 상대방의 저의를 면밀히 검토하면서도 그런 제의를 무시할 것이 아니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인지에 대한 베팅을 해봐야 할 것이다. 특히 그것이 평화와 관련된 기회라면 말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신년기자회견에서 통일과 관계개선을 언급했지만 그 이후에 들리는 이야기들이 뭔가 심상치 않다. 통일은 통일이지만 쌍방이 화합해서 이뤄내는 통일이 아니라 한쪽이 다른 한쪽을 일방적으로 흡수하는 통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 없다. 우선 관계개선을 원한다면 쌍방이 어느 정도 양보를 전제하고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은 양보할 생각이 없는 듯하다. 여전히 북핵해결이 대화의 전제라고 못 박는다. 물론 북핵은 해결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 걸음만 물러서서 생각해보면 북핵이 ‘포기하라’는 몇 마디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저 형식일 뿐이지 진정한 의지를 담은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천안함 문제도 여전히 난망하다. 결국은 조선의 의지를 반영하지 않는 통일을 상정한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든다.

기자회견 전후로 새나오는 이야기들도 걱정이다. 남재준 국정원장은 송년회 자리에서 2015년 자유민주주의로의 통일 운운하였다. 새누리당의 당직자들이 대통령과 만나고 난 후 이인제 의원은 라디오 인터뷰에서 흡수통일 혹은 북한붕괴론을 연상하게 하는 발언을 했다. 들리는 소문에 해외에서는 곧 조선이 붕괴할 것이라는 예측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고 한다. 결국 박근혜 정부도 이명박 정권과 다름없이 북한 붕괴론을 정설로 믿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할 수밖에 없다.

북한 붕괴론은 두 가지 입장에서 볼 수 있겠다. 지난 70년을 건재했던 일가 지배체제가 이제와서 무너질 수 있을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동안 70년이나 지탱했으니 이제 무너질 때가 되었다는 생각도 가능하다. 양자 다 가능한 예측이기는 하고 70년이면 많이 해먹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장성택 처형과 관련되어 나온 예측이다. 과연 장성택이라는 사람이 조선 사회를 송두리째 뒤흔들만한 충격파를 가졌던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의 분석이 필요하다.
그러나 조선의 붕괴, 사실적으로 말한다면 김씨 일가의 몰락이 과연 한반도 통일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것인가 하는 문제는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다. 만약 어떤 국가가 경제적 기반과 통치체제의 몰락으로 망하게 되었을 때 인근의 적대국가가 그 나라를 접수할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될까? 한반도 역사에서 통일이란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무력으로 침범하여 통치세력을 제압하였을 때 가능했다. 그런데 과연 그런 전근대적이고 무력적인 방법이 현대에도 통할 것이라고 믿을 수 있을까?

한 국가 내부에서 통치자가 암살당하거나 몰락하면 다른 세력이 나타나 권력을 찬탈하고 집권한다. 조선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김씨가 아닌 다른 성씨를 가진 사람이 집권을 하든지 아니면 또 다른 종류의 김씨나 또 다른 세력이 집권을 하면 했지 한국에 백기투항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전쟁 아니면 백기투항 외에는 한국이 조선을 접수하고 흡수통일을 이룰 길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한 가지 더, 국제사회의 중재로 몰락한 조선과 한국을 통일할 수도 있다. 그러나 미국과 중국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한반도에서 과연 미중이 합의를 이끌어내서 어느 일방의 이익에 충실한 선택을 할 수 있을지 역시 의문이다.
독일의 예를 들 지도 모르겠다. 독일은 동독이 서독에 백기투항했기 때문에 통일이 가능했다. 그러나 독일의 예가 한반도에 적용될 수 있을까? 당시 동독과 서독은 긴밀하게 교류했고 서독의 전면적인 지원이 있었다. 한반도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게다가 흡수통일의 댓가가 얼마나 가혹했던가? 근면의 상징이었던 독일이었지만 통일비용을 감당하는데 혹독하게 고생했으며 아직도 흡수통일의 상처가 남아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조선이 혹은 김씨 정권이 붕괴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통일, 흡수통일로 이어질 것이라는 생각이야말로 순진한 생각이다. 결론적으로 흡수통일이라는 것은 선전선동, 프로파간다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한국에서 흡수통일은 진정 통일을 위한 전략이라기보다는 통일로 인해 이익을 보는 세력이 만들어낸 선동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이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많은 남북문제 전문가들은 지금의 대치국면이 최소한 6월에 있을 지방선거까지는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남북의 대결과 대립은 정치적인 고려 하에 조장되고 방조되고 또 장려되기까지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대통령이 흡수통일론을 신봉하고 언제가 될 지도 모르는 그 날을 기다리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직무유기이며 무책임이다. 그래서 이런 나의 예측들이 그저 나의 크나큰 착각이기만을 바란다. 제발...

북한 붕괴론을 신봉하고 있는 세력이 또 하나 있다. 바로 미국이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 역시 조선으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곧 무너질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부시 정권의 ‘전략적 인내’ 정책이다. 그러나 전략적 인내는 적극적인 문제해결이 아닌 북핵개발을 방조했다. 최근 전문 조선연구단체인 38노쓰(38 North)는 ‘현재 조선은 언제라도 핵실험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오바마의 대북정책은 실패하였다’고 비판했다고 한다. 차라리 진작 대화를 하였다면 어땠을까?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하지만...

90년대 중반 북핵사태 때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과 만났다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핵포기를 종용하면서 ‘자꾸 이러면 재미 없어. 제재할 거야’ 하는 식으로 김일성에게 말하자 김일성이 언성을 높이면서 ‘마음대로 해봐라. 너희가 언제는 제재 안 했냐’고 대꾸했다고 한다(민족21, 2013년 11월호 내용 중). 제재로 조선을 굴복시킨다는 것은 현재로서는 가능하지도 않고 유효하지도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저 쇳덩어리일 뿐인 것을 두드려 강철로 만드는 결과만 낳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더할 뿐이다. 그럼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은 그동안 해왔던 제재가 이제야 효과를 발휘한다고 믿고 싶어 한다.

흡수통일론은 치명적인 도덕적 한계도 내포하고 있다. 흡수라는 것은 결국 어떤 한 쪽이 다른 한쪽을 일방적으로 압도하는 것을 말한다. 현대는 다원화된 사회이고 개성의 존중이야말로 현대 자유주의, 자본주의의 근간이기도 하다. 흡수는 일방의 압도와 일방의 전멸을 전제한다. 한쪽은 말 그대로 사라져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흡수한 한 쪽은 철저하게 흡수 당한 쪽을 착취한다. 상호작용을 일으켜 전혀 새로운 제3의 존재를 만드는 방식은 화학식에서는 존재할지 모르나 정치와 인간역사에서는 미미했다. 이것이 흡수의 본질이다. 흡수는 상생이 아니라 멸절이고 착취이다.

나라와 나라가 마주앉아 대화를 하지만 그 속내에 착취와 멸절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면 그 대화는 결코 결론에 도달할 수 없다. 그리고 악은 더 큰 악을 초래한다. 아무리 얼굴로는 미소를 지으며 관계개선을 하자고 교언영색하여도 본심이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고 곧 망하라고 기도를 하고 있다면 어찌 그 본심이 영원히 가려질 수 있을 것이며 또 어찌 원만하게 대화가 되겠는가? 진심이 없이 의도를 가지고 상대방을 대한다는 것은 결국 국가 간 관계를 권모와 술수의 관계로 만들어 버린다. 그런 세계가 과연 살만한 땅일까? 지금도 이미 천박한 자본주의에 길들여진 국가관을 가진 나라들이 그렇게 국제관계를 망가뜨리고 있지 않은가!

아무튼 지금 한국에서는 조선과의 평화로운 관계개선을 바라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정확한 의도야 알 수 없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지금 펼쳐지는 상황이 그런 의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류길재 통일부 장관은 한 강연회에서 ‘북한의 중대제안을 들여다 보면 한마디로 우리가 받을 수 없는 걸 제안했다... 자기(북한)는 관계개선을 바라는 주체고 한국 정부는 바라지 않는다고 깔아놓고 있다... 설령 북한이 제안한걸 호의인 것처럼 받아서 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남북관계가 얼마나 가겠느냐... 김대중, 노무현 정부 당시 남북관계가 좋았다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 시대의 남북관계가 적대적인 대결 관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남북이 서로 대화 몇 번 나눴다고, 사람이 오고 가고 물자가 오고 갔다고 구조적인 적대적 대결관계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한다. 읽는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고 논리전개도 빈약하다고 느낀다.

그럼에도 조선은 관계개선에 대한 의지를 강력하게 피력하면서 연일 공세를 늦추지 않고 있다. 통일부장관이 지적한대로 통일전선일 수도 있다. 그러나 류 장관의 발언에는 조선의 공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만한 자신이 없고 공포심마저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정말 자신이 있다면 ‘너희들의 뜻대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주도해주마!’하지 않을까?

흡수통일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고 감당할 수도 없다. 독일이라는 나라도 통일비용을 감당하느라고 아직도 동일 이전의 독일 상황으로 복구하지 못하고 허덕이고 있다. 내면적인 상처도 여전히 남아있다. 한 국가가 한 국가를 강압적으로 억압하면서 집어삼키는 것은 사실 제국주의적이고 식민주의적인 발상이다. 우리는 이미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식민시대를 처절하게 경험하였다. 그럼에도 또다시 같은 동포를 상대로 식민지적 발상을 관철시키려고 한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그런 가능하지도 않고 위험하기까지 한 발상을 한국 정부가 구상하고 있지 않기를 바란다.

민족적 상처가 정쟁의 도구로 이용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7천만 민족의 상처가 치유되고 평화적인 미래로 나아갈 준비를 해야 한다.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내일로 미룬다면 오늘이 마지막인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절망적일 것이다. 오랜만에 국면 전환의 기회가 왔다. 부디 이 기회를 또다시 놓쳐서 분단이 만드는 공포에 사로잡혀 몇 년을 허송하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