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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성경 번역
최재석  |  jschoi@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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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년 12월 18일 (수) 02:22:04
최종편집 : 2016년 03월 06일 (일) 17:08:16 [조회수 : 6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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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성경’을 내세운 개혁자들은 성경번역에 힘썼다. 가톨릭교회에서는 라틴어가 세계의 언어 그리고 영원한 언어라고 믿고 라틴어 성경을 사용했고 미사도 라틴어로 드렸다. 그리고 각국 방언으로 성경을 번역하는 것은 엄격히 금했다. 라틴어를 모르는 일반 신도들은 성경을 읽지 못했고 성직자들과 라틴어를 공부한 유식한 사람들만 성경을 읽었다. 어려운 한자를 모르는 우매한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서 그들이 쉽게 쓰고 읽을 수 있는 글자를 만든다고 말한 세종대왕처럼, 개혁자들은 라틴 성경을 읽지 못하는 일반 신도들을 위해서 그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각국의 방언으로 성경을 번역했다. 15세기 말에 영국에서는 가톨릭교회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위클리프의 구약성경이 영어로 번역되어 나왔고, 네덜란드 출신의 에라스무스는 1516년에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펴냈다. 루터도 1522년에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이렇게 성경번역은 본격적인 종교개혁 이전부터 시작되었고 ‘오직 성경’을 주장한 종교개혁자들에 의해서 꽃을 피우게 되었다. 성경번역자들은 바로 개혁적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경전을 자기네 모국어로 읽는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성경을 읽지 않고 어떻게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세상에 있는 것은 무엇이나 그 존재 이유가 있다는 말처럼, 라틴어 성경을 고집한 사람들에게도 그들만의 이유가 있었다. 히브리어나 그리스어로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의 목적은 분명히 그 언어를 아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에 문맹 율이 높았기 때문에 교육받은 사람들만이 그 성경을 읽을 수 있었다. 그 후 기독교의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널리 전파되자 교회 지도자들은 히브리어나 그리스어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당시 만국 공용어로 간주되었던 라틴어로 복음을 널리 알리려고 라틴어로 성경을 번역했다. 중세까지만 해도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 사제들이나 교육받은 일부 계층에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라틴어 성경이면 충분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문예부흥기를 거치면서 모국어와 모국 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라틴어를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들의 모국어로 성경을 번역할 필요가 생겼다. 여기서 안타까운 것은 전통을 중시한 가톨릭교회에서 시대의 요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라틴어 성경에 오랫동안 매달렸다는 점이다. 이러한 성경번역에 관한 우매한 전통 중시는 지금 우리들에게서도 발견된다.

그런데 번역은 대상 언어를 좀 알면 아무나 할 수 있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한 언어에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독특한 언어습관이 나타나고 문화가 배어 있기 때문에 번역하려는 사람은 먼저 대상 언어와 역어의 어법과 그 두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문화를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글 쓰는 훈련을 받은 사람이어야 한다. 시를 번역할 때는 먼저 언어의 강세와 관련되는 운율이 문제가 된다. 불어는 마지막 음절에 강세가 오고, 영어는 강세의 위치가 각 단어마다 다르다. 그런데 우리나라 말은 단어의 맨 앞의 음절에 강세가 온다. 영시의 운율은 강세와 음절수가 주요 요인인데 반해서 우리시의 운율은 음절수를 중시한다. 이러한 차이로 인해서 영시를 우리말로 번역할 때 그 운율을 맞출 수가 없다. 유럽의 노래에 약박자로 시작하는 곡이 많은 것은 첫 음절에 강세가 오지 않는 단어가 유럽 언어에 많기 때문이다. 약박자로 시작하는 유럽 노래 말을 첫 음절에 강세가 오는 우리말로 그 곡의 박자에 맞추어 번역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산문에는 운율의 문제가 별로 없지만 문장 구조나 문화의 차이로 인해서 번역할 때 어려움이 많다. 영어에서는 주어 다음에 동사가 오고 보어나 목적어가 마지막에 온다. 그런데 우리말에서는 주어 다음에 보어나 목적어가 오고 마지막에 동사가 온다. 문장의 앞 단어보다 마지막 단어가 듣는 사람의 뇌리에 남는다고 하는데, 예를 들면, 유치원 아이들에게 ‘누가 더 좋아요, 엄마요 아빠요?’ 하고 물으면 아빠를 더 좋아한다는 아이가 많고, 엄마가 뒤에 오게 물으면 엄마를 더 좋아한다는 아이가 많다고 한다. 영어의 경우 ‘It is important to be a saint.’에서 중요한 내용을 지닌 단어 ‘saint’가 마지막에 와서 그 단어가 문장 강세를 받으면서 강조된다. 그러나 우리말로 바꾸면 ‘성인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가 된다. 이 문장을 ‘중요한 것은 성인이 되는 것이다.’라고 번역해도 성인은 중간에 오고 ‘중요하다’ 혹은 ‘것이다’가 마지막에 와서 영어에서처럼 ‘성인’이라는 단어가 강조되기 어렵다. 이렇게 산문에서도 문장구조로 인해서 각 언어마다 그 효과가 다르다.

또한 문화적 차이로 인해서 대상 언어가 담고 있는 의미나 느낌이 번역어에 전달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할 때 양을 잡아서 속죄제를 드리는 유대인들의 관습에서 나온 이 말의 느낌이 그런 관습이 없는 우리에게 선 듯 다가오지 않는다. 우리말에서도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을 50여 년 전에 등잔불을 사용하던 사람들은 그들의 경험을 통해서 실감 있게 받아들였지만, 등잔을 사용하지 않고 전등을 사용하는 젊은 세대는 이 말을 이해하기 어렵다. 하물며 여러 천 년 전에 기록된 유대인들의 글을 우리말로 바꾸어 놓았을 때는 문화의 차이로 인해서 그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많은 사람들이 번역에는 직역과 의역이 있다고 생각한다. 직역은 원문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고 의역은 원문을 벗어나서 뜻이 이해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직역이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의역이 더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 개역개정 성경을 번역한 사람들은 원어의 글을 그 자구나 어법에 따라 충실하게 번역하는 직역을 선호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우리가 원문의 자구나 어법에 충실하다 보면 어색한 표현이 나오기도 하고 문화의 차이로 인해서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이 나오기 쉽다. 1950년대에 등가중심 번역이론이 나오면서 의역이 더 좋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러나 실상 번역에는 의역도 없고 직역도 없다. 원본의 의미를 그것과 가장 가깝게 다른 언어로 옮기는 일이 있을 뿐이다. 번역은 원본의 글을 새로운 언어의 어법이나 문화에 맞게 바꾸어 놓는 일이다.

이제 번역의 예를 들어서 왜 번역자가 두 언어의 언어습관과 문화에 정통해야 하는지 알아보겠다. 영어에서 ‘Don’t you like it?’이라는 질문을 받으면, 그것을 좋아하지 않을 경우 ‘No, I don’t like it.’이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그것을 좋아하지 않아요?’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좋아하지 않으면, ‘예, 좋아하지 않아요.’라고 대답한다. 영어의 ‘No’가 우리말에서는 ‘예’로 바뀐다. 이것은 두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언어습관이 만들어 낸 차이다. 한국의 개신교에서 많이 사용하는 개역개정판에서 보면, 재산을 가지고 나가서 탕진한 아들이 집에 돌아오는 것을 보고 아버지가 ‘나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라고 번역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아버지와 아들이 입을 맞추는 일이 없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렇게 기쁘거나 감격하는 순간 보통 눈물을 흘린다. 그래서 우리 문화에 어울리게 번역하기 위해서는 ‘나가 목을 안고 우니’ 혹은 ‘나가 목을 안고 기뻐하니’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다.

우리의 어법이나 문화에 맞지 않는 표현은 우리 것에 맞도록 조정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원문의 뜻을 잘 전달할 수 있는 우리의 말을 찾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의 말이란 단순히 단어나 문장뿐이 아니고 우리의 문화, 즉 관습이나 경험에 맞는 말을 의미한다. 바로 이것이 번역할 때 두 언어에서 등가물을 찾아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가중심 번역이론가들이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말과 문화에 맞지 않는 것을 그대로 옮겨놓는 것은 좋은 번역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외국 글을 우리 글로 바꿀 때 우리말에 가장 가까운 것, 우리 문화에 맞는 것으로 바꾸는 것이 번역이다. 성경에서 그 예를 하나 든다면, 유대인들이 먹었던 빵을 우리말로 떡이라고 번역했다. 100여 년 전에는 우리가 빵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룩 없는 떡이라고 번역하면, 우리는 떡에 누룩을 넣는 일이 없기 때문에 납득하기 어려운 말이 된다. 그러나 지금은 빵이 일반화했기 때문에 빵이라고 하는 것이 좋다. 실제로 성찬식에서 카스텔라를 사용하고 있다.

어느 영문과 교수가 영문 서적을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pop-corn’을 ‘튀긴 옥수수’라고 번역한 일이 있다. 그런데 동료 교수들이 그 책을 읽고서 ‘pop-corn’은 ‘팝콘’이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말했다. 요즘 ‘pop-corn’을 먹는 젊은이들이 그것을 ‘튀긴 옥수수’라고 말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튀긴 옥수수’라고 번역했을 때 독자들이 생소하게 느끼게 되고 심지어 그 의미가 무엇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 번역자는 한국어에 너무도 많은 영어단어가 들어와 있기 때문에 한국어의 순화를 위해서 일부러 그렇게 번역했다고 말했다. 그의 의도는 높이 살 만하지만 일반인들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휘를 사용하는 것은 좋은 번역이라고 볼 수 없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성경번역은 종교개혁의 초석이었고 순교적인 개혁정신의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원문이 지닌 언어구조와 문화적 배경이 번역되어지는 언어의 것과 다를 경우 번역되어지는 언어의 어법이나 문화에 맞게 바꾸어야 한다. 그런데 많은 개신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개역개정판 성경은 한국어의 어법에 맞지 않는 문장으로, 우리의 문화와 맞지 않는 어투로 번역되었다. 개역판을 개정했다고 하는 개역개정판은 개역판과 별로 다르지 않다. 교인들은 많은 돈을 지불하고 새로운 성경을 구입했는데, 개역개정판 성경은 그들이 낸 돈만큼 가치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20세기 말에 나온 개역개정판에서 100여 년 전에 나온 초기 한글성경의 문장 구조나 어투를 무비판적으로 답습하고 있다. 개혁자들의 후예들이 펴낸 이 성경 번역판에서는 개혁자들의 사명감, 헌신, 시대를 앞서가는 진취적인 정신을 찾아볼 수 없다. 개역개정판 성경을 보면, 오늘날 한국의 개신교 지도자들은 멀찌감치 시대에 뒤처져서 어슬렁어슬렁 맥없이 터덜거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말 성경에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지 않거나 이해하기 힘든 말들이 많다고 지적해 왔다. 그래서 쉬운 성경, 현대인의 성경, 표준새번역 성경, 공동번역 성경 등이 나왔지만, 대부분의 개신교회에서는 현대의 어투로 번역된 성경을 외면하고 1998년에 나온 개역개정판을 사용하고 있다. 개역개정판에서는 개역판의 훈도, 의문, 공교 같은 어려운 단어들을 쉬운 말로 바꾸었고 ‘가라사대’를 ‘이르시되’로 바꾸었다. 이러한 시도는 아주 바람직하다. 그러나 아직도 한글세대가 이해하기 어려운 편만, 배약, 무교병 같은 어려운 단어들이 많이 남아 있고, 여전히 ‘하셨도다,’ ‘하나니,’ ‘있느니라’ 같은 현대인들이 사용하지 않는 말들이 많이 남아 있다. 이렇게 일부는 바꾸고 일부는 남겨 놓은 데서 개정에 참여한 분들의 불성실한 태도가 엿보인다. 이러한 표현을 성경 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이것은 100여 년 전에 성경을 번역한 사람들이 쓴 말을 답습한 것일 뿐, 결코 성경 체가 아니다. 20세기 말에 나온 성경개역개정판은 현대의 한국인들이 사용하는 말에 맞게 개정되었어야 한다.

개역개정판에서 사용된 문장구조는 한국인의 말이나 글쓰기와 맞지 않는 것이 많다. 성서 번역자들은 주어 다음에 동사가 오는 헬라어나 히브리어를 동사가 문장의 맨 마지막에 오는 한국어로 번역할 때 생기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대답하시되’ 혹은 ‘이르시되’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가라사대’나 ‘이르시되’는 중국어 성경을 참고한 초기 번역자들의 영향인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서, 요한복음 11장 23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되어 있는데, 우리말에서는 동사가 마지막에 오기 때문에 우리말 어순에 따르면 “예수께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셨다.”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한글성경의 문장에 익숙해져 있어서 그 문장의 어순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지나가는데, 우리말 어순에 맞지 않는 문장은 실상 우리나라 말이 아니다. 그리고 지금 한국인이 글을 쓰면서 ‘이르시되’라는 말을 사용하는 사람은 없다. 참으로 아쉬운 것은 1998년에 나온 개역개정판에서 1887년에 나온 백홍준 장로와 르스 목사의 한국어 성경의 용어나 어투를 답습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100여 년 동안 우리말은 많이 달라졌다. 한자어 표현이 순수 우리말을 선호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는가 하면 민주주의 시대를 맞아서 권위적인 어투가 사라지고 대중이나 심지어 아랫사람들을 존대하는 어투로 바뀌었다.

그런데 개역개정판에서는 이러한 바뀐 어투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이사야서 56장 1절에서 2절까지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정의를 지키며 의를 행하라 이는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공의가 나타날 것임이라 하셨도다(1절)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의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하지 아니하여야 하나니 이와 같이 하는 사람, 이와 같이 굳게 잡는 사람은 복이 있느니라(2절)”라고 번역하였다. 1절에는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직접 인용되어 있는데,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직접화법으로 전할 때는 신이신 하나님의 권위를 위해서 낮춤말을 써야 하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사야의 말은 높임말이어야 한다. 그리고 “안식일”로 시작하는 2절 전체는 높임말이어야 한다. 이사야가 선지자이기 때문에 그의 말도 낮춤말이어야 한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지금 이사야가 한국의 대중에게 말한다면 낮춤말을 쓰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만약 개역개정판에서처럼 낮춤말을 쓴다면 쫓겨날 것이다.

이러한 낮춤말은 신약에서도 마찬가지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사람들을 모아놓고 복음을 선포하는 장면이 많다. 그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낮춤말로 되어 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의 모습으로 대중 앞에 서서 말하기 때문에 설교하거나 연설할 때 높임말을 쓰는 것이 자연스럽다. 바울이 여러 교회에 편지할 때 그는 믿음의 형제들을 가리켜 ‘너희’라고 부르고 반말을 한다.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고전 15:11). 지금 성인들에게 편지하면서 그들을 가리켜 “너희”라고 부르거나 반말을 하는 사람도, ‘전파하매’라고 말하는 사람도 없다. 이러한 어투는 성경 체가 아니다. 단지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맞지 않는 표현일 뿐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이러한 번역은 잘못된 것이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개역개정판에는 한 문장 안에 높임말과 낮춤말이 섞여 있다는 점이다. 사도행전 20장에서 바울이 장로들을 모아놓고 고별설교를 할 때, 그들을 ‘너희’라고 부르지 않고 “여러분”이라고 부르면서 “못하노라”(18-22)라고 낮춤말로 말을 맺는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것은 개역판의 ‘너희’를 개역개정판에서는 ‘여러분’이라고 고치면서 맺음말은 고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성경 전체의 맺음말을 고치지 않고 이 부분의 맺음말만을 고칠 수는 없었기 때문인가? 22장 1절에는 바울이 “부형들아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로 되어 있다. 여기서 “여러분”이라는 단어는 “부형들아”나 “들으라”는 말과 맞지 않다. 개역판에서는 “여러분” 대신 “너희”로 되어 있었다. 일관성이라는 면에서 보면 개역판이 맞다. 그러나 오늘날 누가 부형들 앞에서 “부형들아,” “너희,” “들으라”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그리고 개역개정판에 나오는 “여러분”은 개선이 아니고 개악인데, 이것은 단순한 실수인 것 같지 않다. 이 번역에 참여한 어느 위원의 의도적인 반발이 아닐까?

그리고 성경에는 현대인들이 글을 쓸 때 꼭 지키는 따옴표나 구두점이 없다. 우리가 구두점을 찍고 따옴표를 사용하는 것은 문장의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한 조치이며 한글을 쓰는 우리의 규약이다. 이러한 따옴표나 구두점은 단지 한글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 외국에서도 모두 택하고 있는 글쓰기의 규약이다. 이러한 규약을 지키지 않는 문장은 틀린 문장이다. 우리가 영어를 배울 때 문장의 첫 문자는 대문자로 써야 한다고, 소문자로 시작하면 틀린 것이라고 배웠다. 앞에서 예를 든 요한복음 11장 23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되어 있다. 이 문장은 직접화법이기 때문에 “네 오비가 다시 살아나리라”에 따옴표를 붙여야 하고 마지막에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그런데 개역개정판 성경에는 따옴표도 마침표도 없다. 영어로는 Jesus said, “Your brother will rise again.”이 된다. 개역개정판 번역자들이 구두점을 무시한 것은 히브리어나 그리스어 원문에 구두점이 없기 때문에 그 예를 따르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그 당시 사람들의 관행이었고, 실상 그러한 관행은 환영할 만한 것이 못된다. 원문의 관행을 따르려고 한 것이라면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번역할 때 원문을 그대로 옮길 수도 없는 일이고, 그대로 옮겨서도 안 된다. 다시 말하지만, 번역이란 원문의 의미를 번역된 글을 읽는 사람들의 어법과 문화에 맞도록 바꾸는 일이다.

위에서 어려운 한자 단어를 쉬운 말로 바꾸거나 “가라사대” 같은 말을 바꾸면서 많은 어려운 어휘나 지금 쓰지 않는 “있느니라” 같은 말을 그대로 남겨 두었다고 지적했는데, 구두점에서도 그런 것을 발견한다. 개역판에서 성경 전체에 쉼표, 물음표, 혹은 마침표가 없는데, 유독 몇 군데에만 쉼표가 나와 있다. 예를 들면, 이사야 43장 16절, 47장 12절 등 구약의 몇 군데와 고린도전서 12장 8-10절, 13장 13절 등 신약의 몇 군데에는 쉼표가 나와 있다. 이것은 일관성의 결여라는 면에서 교정되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개역개정판에서도 이러한 쉼표가 교정되지 않았다. 여기서 다시 개정에 참여한 사람들의 불성실한 자세가 드러난다.

지금까지 살펴본 성경의 개역개정판에서 우리는 한국 개신교의 극단적인 보수성을 발견한다. 그 어법과 어투나 문장 구조가 100여 년 전의 로스 목사가 펴낸 번역본의 것을 답습하고 있고 그 번역판에는 히브리어나 그리스어 원본처럼 구두점이 없다. 현대인의 언어습관이나 글쓰기 규약을 외면한 이 번역은 너무도 시대에 뒤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금할 수가 없다. 특별히 성경 문장의 어순이 우리말의 어순에 맞지 않는다는 것은 작은 문제가 아니다. 개혁자들은 시대의 변화를 읽고 그 시대의 요구에 응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라틴어 성경을 고수하는 보수적인 가톨릭교회에 맞서서 성경 번역에 헌신한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자세를 지닌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개역개정판을 고집하는 한국 개신교의 지도자들은 시대의 요구를 외면하면서 시대에 한참 뒤진 번역 성경을 사용하고 있다. 가톨릭교회에서 현대어로 번역된 성경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한국의 개신교는 가톨릭교회보다 보수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성경을 번역한 개혁자들은 진보적이었는데 지금 그들의 후예들은 가톨릭교회보다 보수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진보적 성향을 보이는 개신교 교단들에서도 개역개정판 성경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다. 그 지도자들이 진보를 표방한다 하더라도 그들이 사용하는 성경의 언어가 현대적이지 못하다는 것은 그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의 의식이 진보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함축한다고 말해서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개역개정판에서 우리는 한국 개신교의 극단적인 권위주의를 발견한다.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사용된 낮춤말은 그 말을 하거나 그 글을 쓴 사람의 권위를 높이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의 권위를 높이는 일은 신학적으로 그리고 신앙적으로 바람직한 일이지만, 모세 같은 지도자, 이사야 같은 선지자, 바울이나 베드로 같은 사도들의 권위를 높이려는 노력은 현대인의 의식에 맞지 않을 뿐더러 겸손을 강조하신 예수님의 정신을 훼손하는 일이다. 근묵자흑이라는 말이 있듯이, 성경에 나타난 권위적인 어투를 날마다 대하는 교회 지도자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 권위의식에 물들게 된다. 어느 보수 교단에서는 목사가 고린도후서 13장 마지막 절의 내용을 가지고 축도할 때 개역개정판의 어투를 따라서 ‘있을 지어다.’로 축도를 마감하고 있다. 그렇게 권위적으로 축도를 마치는 사람들은 세례를 공포할 때 ‘공포하노라.’고 말한다. 그것은 만인제사장주의를 내세운 개혁자들의 정신에 어긋난다. 그리고 그러한 권위적인 어투에 익수해진 교인들은 성직자의 권위의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중세에 사제들의 권위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갈 때 교회가 부패했던 것처럼 목회자들의 권위주의는 교회의 부패의 원인이 된다. 한국 교회의 부패에 개역개정판 성경의 권위적인 어투가 일조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개신교 교회들이 왜 이렇게 시대착오적인 성경 번역판을 사용하는지 모르겠다. 현대어 어투로 번역된 성경이 여러 가지 나와 있는 것을 보면 개역 성경이나 개역개정 성경의 어투와 직역식 번역에 대한 비판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개신교 교단들은 그 정당한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는가? 목회자들이 옛 번역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인가? 현대어 번역이 가볍게 느껴지기 때문인가? 어떠한 논리로도 우리의 어순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현대적인 어법과 문화에 맞지 않는 성경 번역을 고수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우리는 땅이나 집의 면적을 말할 때 사용하던 ‘평’을 ‘평방미터’로 바꾸었다. 아직 익숙해지지 않아서 어려움이 많지만, 지구촌 시대에 맞게 바꾸면서 그 어려움을 감수하고 있다. 그리고 집주소도 도로 명으로 바꾸었다. 여기에는 비용이 많이 들고 당분간 혼란스럽지만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 바꾸었다. 그런데 한국의 개신교 지도자들은 어려움을 감수하지 않으려고 익숙한 것을 계속 고집하면서 우리가 사용하는 한국어와는 다른 말로 번역된 성경을 고집하고 있다. 언제까지나 이러한 성경을 고집하려는가?

사회를 선도해야 하는 교회가 현대인의 언어를 외면한다는 것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불성실과 무책임의 결과라고 말해서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반성해야 한다. 한국의 개신교회들이 이런 시대착오적인 성경을 사용하는 데서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맹목성, 안이함이 드러난다. 우리는 성경 번역을 시작한 개혁자들의 개혁적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100여 년 전의 문장구조와 권위적인 어투로 이루어진 시대착오적인 성경을 가지고 나날이 급속하게 변해 가는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이끌어 갈 수는 없다.


최재석
충남대 명예교수
대전 월평동산교회 장로
jschoi@cnu.ac.kr
018-711-7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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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를당하는자 (175.204.161.189)
2013-12-20 19:27:59
개역개정성서는 마귀의 작품
개역개정은 로마카톨릭에 뿌리를 두고 있고 성경이라라고 볼수 없는 한 마디로 쓰레기 입니다.설마 그럴리가 있겠는냐고 반문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그러나 실제로 원문비평학을 공부해 보시면 실체가 드러남니다.부디
개역개정성서에 속지 마시고 바른성경인 한글킹제임스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참고로 책한권 소개하지요 아무도시비를 걸수 없는 주석성경 럭크만 주석성경을 보신다면 금상첨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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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를 당하는 자 (175.204.161.189)
2013-12-19 21:54:54
종교개혁의 뿌리인 한글킹제임스 성경으로 돌아가라.
개역개정은 36000군데 삭제.첨가.변개된 성경이다.실로 성경이라고 볼수 없는 오점 투성이다.루터.웨슬리.무디.스펄젼등등 신실한 사람들이 복음을 전한 말씀으로 돌아가서 바른 말씀대로 실행할때 한국교회는 부흥할 수 있을 것이다.한국교회가 개혁외치지만 교회에 대한 괴리감은 더 커져가고 사회로 부터 지탄을 받고 있다.우리는 거짓을 버리고 참된 바른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가야 한다.이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다.주님이 재림 하신다는 라오디케아 마지막 교회 시대를 살고 있다.반드시 내가 속히 오리라 하시니 아멘 그러하옵나이다.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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