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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해석 방법론의문의 꼬리를 끝까지 따라가자
김용호  |  yhchorakd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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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년 11월 27일 (수) 06:30:13
최종편집 : 2013년 11월 28일 (목) 01:19:59 [조회수 : 6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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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해석 방법론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벧후 1:20-21)

베드로 사도는 위 본문에서 성경 해석에 있어 가장 주의할 점으로 사사로이 푸는 것을 꼽고 있습니다. 이 헬라어 원문을 직역하면 "성경의 모든 예언은 개인적인(헬, 이디오스) 해석을 하면 안 된다"입니다. 근래에 유행하는 소위 "말씀의 적용"에 대한 엄중한 경계로 우리가 받아 들여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성경 말씀을 시대에 적용한다든가 자기 자신의 상황에 적용하는 일을 말씀의 적용이라 부르고 심지어 그것이 성경 해석의 본질인 양 호도하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신정통주의자인 칼 바르트의 주장을 꼽을 수 있는데 그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개인적)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가 된다"고 했습니다. 참 그럴 듯해 보이는 말이지만 그 안에는 대단히 위험한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자신(들)의 생존과 번영을 갈구하는 공포와 탐욕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특히 탐욕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자기 의"는 "하나님의 의"를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 원흉이기도 하지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나님도 옳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만 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은 성령의 감동으로 말씀의 의미를 깨달았노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많이 있는데 그것이 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성령을 훼방하는 자기 자신의 죄성이 모두 제거되었느냐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성령의 감동조차도 왜곡시키는 것이 인간의 공포와 탐욕이 가진 거대한 힘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절대적 한계를 가진 인간이 성경 말씀을, 즉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어느 정도나마 이해하기 위한 두 가지 방법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수동적인 방법으로서 자신의 모든 선입관, 즉 가치관을 모조리 배제하고 신구약 성경을 계속 통독하면서 성경 전체를 기반으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방법입니다. 이 때 각 장절에 대한 다양한 주석들을 참고로 삼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주석가들 사이의 견해 차이를 비교해 보는 것도 때로는 큰 유익이 됩니다. 다만 그 주석가들의 가치관이 개입된 주장들에 대해서는 철저히 경계해야 합니다. 이 방법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므로 누구에게나 가능한 방법은 아니지만 설교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입니다.

둘째는 능동적인 방법으로서 특정한 주제를 설정하거나 또는 특정 성경 요절로부터 출발하여 그 의미를 성경에서 탐색해 가는 방법입니다. 이 때 여러 차례 성경을 통독한 사람이라면 스스로 관련 구절들을 성경 전체에서 뽑아내어 탐색해 갈 수 있겠지만 그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여러 관주들에서 제시하는 관련 구절들을 비교해 가면 됩니다. 그러나 관주들 또한 그 관주를 만든 사람의 개인적인 가치관에 따라 관련 구절들을 선택해서 제시하고 있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오랜 시간을 두고 자기 자신의 관주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지금부터 두 번째 방법, 즉 능동적인 방법으로 성경을 해석할 때 인간의 공포와 탐욕 그리고 그로 인해 형성된 개인의 가치관이 성경 해석에 있어서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그리고 그 위험을 어떻게 피해나가야 하는지를 사례를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느 날 자신의 곤고한 처지를 탄식하다가 아래의 성경 구절을 찾아내었다고 가정하겠습니다. 또는 설교를 듣다가 아래 구절이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고 해도 좋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연이라 생각해도 좋고 또는 하나님의 인도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시 18:1-2)

이 말씀을 대하는 순간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면서 자연스럽게 아래의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게 됩니다. 또는 관주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마 10:29-31)

공포와 탐욕에 휘둘리고 있는 옛사람들은 여기까지 이르면 마음에 평안과 확신이 밀려들면서 성경을 덮고 용기 백배해서 다시 삶의 현장으로 뛰어듭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내 머리털까지 세신 하나님께서 나의 반석이시고 요새시고 나의 방패시니 내가 무엇을 두려워 하랴!"

자신은 이미 교회에서 세례를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이니 이 말씀들이 자신에게 적용될 것이 틀림없다는 것이지요. 사사로운, 즉 개인적인 성경 해석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전 들었던 다른 사람의 놀라운 간증도 떠올리면서 더욱 확신을 갖게 되기도 합니다. 이것이 소위 세상의 많은 교회들이 칭찬하는 굳센 믿음이지요. 드디어 긍정의 힘이 발휘될 순간이 왔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공포와 탐욕을 자제하고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기로 작정한 사람들은 다릅니다. 제멋대로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결론을 내지 않고 그 지점에서 자연스럽게 아래와 같은 의문들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완벽하게 보호를 받고 복을 받은 사람이 과연 내 주위에 한 사람이라도 있었던가? 딸이 시력을 회복하는 기적을 보고 이어령 박사가 기독교인이 되었다더니 얼마후 목사가 된 그 딸이 결국 암으로 죽지 않았는가?"

"예수님께서 눈먼 거지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해 주셨는데 그 바디매오는 눈뜬 거지가 된 것밖에 더 있는가?"

"오병이어 기적은 왜 한 번만 행하신 것일까? 매끼를 계속해서 해결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닌가? 다음 끼니를 주지 않으시자 대부분의 제자들이 떠나기까지 했으니 그렇다면 도대체 오병이어 기적의 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지만 그 나사로도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을 것이 아닌가?"

"소녀와 나인 성 과부 아들을 살리셨는데 그렇다면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에는 죽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어야 정상이 아닌가? 크리스찬이라고 영생불사하는 것도 아닌데 죽은 사람을 살리셨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일까?"

의문은 끝이 없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 끝없는 의문이 바로 성경 말씀의 뜻을 이해하게 되는데에 있어서 필수적인 조건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 의문들이 해결될 때까지 성경 말씀을 파고 들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이 사람은 다음의 성경 구절을 떠올리게 됩니다. 또는 좋은 관주를 곁에 둔 덕분에 이 구절을 접하게 됩니다.

"너희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사 40:1-9)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하는 아름다운 소식이라고 하기에는 그 내용이 너무도 얼토당토 않습니다. 풀과 같이 연약하고 들꽃과 같이 초라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해지는 아름다운 소식이란 것이 어처구니 없게도 여호와의 기운이 불어와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들풀과 같고 들꽃과 같던 여호와의 백성이 레바논의 백향목과 같이 거대한 아름드리 나무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었던가요? 심지어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1장 24절과 25절에서 이 이상한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이 말씀이 바로 자신이 전한 복음이라고 재확인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예수님의 참새 비유 말씀도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시면서 하신 말씀이었다는 것을 새삼 되돌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이 세상에 나가 받을 대접은 핍박이라고 하신 말씀도 떠올리게 됩니다. 당사자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물론이고 사도들까지 나중에 모두 순교를 당했다는 사실도 떠오릅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에게 무엇을 약속하신 것일까요? 다윗왕의 경우처럼 잘 보호하시고 인도하셔서 승승장구하게 하신 다음에 들풀과 들꽃처럼 말라 비틀어지게 하시고 이어서 세상에서 핍박 받고 순교하게 하신다고 약속하신 것일까요?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진정한 깨달음으로 가는 길은 중도에 멈추면 안 됩니다. 자기 마음에 드는 특정 구절 몇 개만 움켜쥐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다 보면 어처구니 없는 수렁에 빠지고 맙니다. 소위 긍정의 힘류나 은사주의자들이 빠져 있는 수렁이지요.

내용이 너무 길어지게 되므로 여기서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자신(들)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각자의 선악관과 가치관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우리 옛사람을 미워하십니다. 그가 크리스찬이라면 더욱 미워하십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이시게 되지요. 그리고는 새로운 피조물로 부활시키신 후 우리를 사랑하셔서 보호하고 인도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자원해서 죽기까지 충성하고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뻐하면서 죽을 새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다른 사람들도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자원해서 충성하게 된 자들을 하나님께서 일할 수 있는 환경으로 이끄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 환경은 죽도록 일을 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이지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좋은 환경이 아닙니다. 물론 새로운 피조물은 죽기까지 충성하는 고난의 길을 걷는 것 자체가 행복이지만 말입니다.

성경 해석은 진정한 끝을 볼 때까지 계속해서 나아가야 하는 길입니다. 마음에 일어나는 의문을 엉뚱하게 불신앙으로 치부하고 옆으로 치워버리면 안 됩니다. 그 순간 우리의 공포와 탐욕이 성경 구절들을 교묘하게 이용하려고 득달같이 달려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끝없는 길을 걷게 하신 하나님께서 합당한 열매를 맺을 때까지 우리를 인도하실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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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범 (175.176.40.19)
2021-01-28 11:00:20
성경이 쓰여진 목적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성경 해석의 방향을 잡는다고 봅니다. 여러각도의 이해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왜 성경을 주셨는지 그것에 대한 목적을 분명히 하면 성경 해석도 방향을 가지게 되지요. 문제는 성경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철저하게 근본하여 성경의 쓰여진 목적을 결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혹시 님께서는 무엇이 성경의 목적이라 보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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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 Im (70.62.49.64)
2013-11-28 04:14:32
성경 해석 방법론
인간의 죄성을 그대로 지니고
마음의 탐욕을 따라 자의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대원칙에 공감합니다.
그러면서도 거듭난 새피조물이라 하여 죄성이 완전히 사라지는가를 생각하면 성경을 온전히 해석하는 것이란 참 어려운 일이라 느낍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한편 칼 바르트를 예로 드셨지만
성경 해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을 사람의 작품으로 보느냐 아니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터 위에 쌓아 올리지 않은 모든 말씀은 거짓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이 사건을 통해 개별적으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계시된 말씀입니다. 밭에 묻힌 보배와 같은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그리스도인들이 삶을 통하여 "전파"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 해석이 올바른지 그 시금석은 말씀 선포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가 아닌가라고 생각합니다.

오직 주께만 영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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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 (219.255.32.65)
2013-11-28 10:52:52
참으로 귀한 댓글 감사합니다.
공포와 탐욕에 휘둘리는 자의적인 해석이라는 문제점에 공감해 주시니 반갑습니다. 제 의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최근 일어난 진보기독교와 보수기독교의 정면충돌은 인간의 자의적 성경 해석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단 사이의, 신학자들 사이의 절제된 성경 해석의 충돌에 감추어져 있었던 이면이 드디어 수면 위에 떠오른 것이지요. 감사한 일입니다. 일부 사람들이라도 이 일로 인해 자의적 성경 해석의 오류의 실상을 보게 되면 참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보수기독교와 진보기독교의 충돌은 내면의 공포와 탐욕의 충돌입니다. 그것이 성경 해석상의 고매한 학문적 차이로 위장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보수기독교는 세속 윤리도덕을 기반으로 성경을 해석합니다. 윤리도덕은 국가와 민족, 가정 등의 세속 공동체의 이기적 운영원리로서 자신이 속한 세속 공동체에 위해를 가하는 타 공동체의 윤리도덕이 접근해오면 증오가 폭발하게 됩니다. 따라서 보수기독교는 끓어오르는 공포와 탐욕 때문에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의 계시를 왜곡해서 자신들을 정당화하려고 할 뿐입니다.

진보기독교는 이기적인 작은 공동체를 초월해 인류공동체를 자신이 속한 공동체로 인식하는 세속 휴머니즘을 자신들의 가치관으로 삼고 있습니다. 보수기독교에 비해 진일보한 듯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보내신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구분하시는 예수님의 시각과 충돌하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자신들이 채택한 세속 휴머니즘이 인간의 실존적 문제의 본질인 "존재의 불안정성" 문제를 외면한 어리석은 세속 사상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2. 새로운 피조물과 관련해서는 우리 공동체가 공동 집필을 추진 중인 책 제목을 먼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새로운 피조물과 하나님의 나라 - 가톨릭과 개신교가 잃어버린 현세 구원의 약속을 찾아서 - ]입니다. 책 제목에서 이미 느끼셨겠지만 우리는 개인적으로는 새로운 피조물, 집단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원의 약속의 핵심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글에서 차차 말씀드리게 되겠지만 필립님의 질문과 관련된 부분으로 새로운 피조물의 완전성 여부에 대해서만 우리의 견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항상 깨어 있을 것을 요구하셨고 사도 바울은 자신이 다 이루었다는 것이 아니고 다만 푯대를 향해 달려갈 뿐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성령의 역사로 깨어 있는 체험을 한 사람이나 여전히 육체를 가지고 있는 연약한 자이므로 다시 잠들 수밖에 없는 불완전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In Christ와 Out of Christ로 구분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두 상태를 오락가락하는 자들이지요. 다만 깨어 있는 상태를 조금이라도 늘리기 위해 평생 하나님께 간구하는 자들이며 사도 바울의 위의 고백이 그러한 모습에 대한 고백이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깨어 있는 상태, In Christ의 상태에 대한 성경적 규정은 다음 글로 미루겠습니다. 다만 이 상태는 객관적으로 그리고 삶으로 입증되어야 한다는 점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님의 “그 말씀을 그리스도인들이 삶을 통하여 “전파”하는 것입니다“라는 말씀에 우리는 온전히 동감합니다.)

3. 로마 가톨릭이 회의를 거쳐 여러 사본들 중에서 “채택”한 성경이 사람의 작품이냐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냐를 객관적으로 검증할 방법은 없습니다. 또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무조건 받아들이자는 일부 주장에도 우리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 66권 전체의 치밀한 약속의 논리에 압도당한 사람들입니다. (내부적으로 조직신학의 수립이라는 장기 플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치밀한 약속의 논리를 우리는 정확한 하나님의 계시로 받아들였습니다.

4. 우리는 우리의 걷고 있는 길이 삶의 현장에서 객관적으로 검증되어야 한다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로 언젠가 우리가 더 성숙해지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때가 오면 우리의 모습을 책으로 그리고 여러 경로를 통해 세상에 증거로 제시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다음 세대가 될 지도 모르지요. 우리는 일정표를 가지기를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뜻대로 일이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무수히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필립 임님의 귀한 댓글에 감사드리며 답글을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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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 Im (70.62.49.64)
2013-11-30 00:41:11
궁금한 것이 많아 질문을 드리니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1.최근 일어난 진보기독교와 보수기독교의 정면충돌이란 무엇인지요? 한 가지 예를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용호 형제님의 관점에 의한다면 보수나 진보 모두 공포와 탐욕에 의하여 성경을 왜곡하고 있는데 나름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는 부류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2.용호 형제님은 구원을 현세와 하나님 나라 곧 미래의 구원으로 나누시는 것 같은데 두 구원은 어떤 관계입니까?
3.형제님은 성경에 대하여 "성경 66권 전체의 치밀한 약속의 논리에 압도당"하였다고 하셨는데 치밀한 약속의 논리란 어떻게 전개된 것을 말하며(사실 이것은 꽤 많은 지면을 할애해야 할 것이라 생각되므로 기억하셨다가 본문 글로 올려 주셔도 됩니다.)그 전개 자체가 사람의 능력에 따른 전개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감동에 따른 전개인지요?
4.지금 형제님이 걷고 있는 길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성경을 올바로 해석한 바탕 위에 순종하는 삶이라 할 때 누가 객관적으로 검증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누구든지 님이 해석한 것을 인정하여야 그 해석을 바탕으로 검증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혹 신광은 목사님을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분도 진보와 보수, 칼빈과 알미니안이 아닌 제3의 신학을 연구하시는 것으로 압니다. 형제님도 그렇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언뜻 듭니다.
좋은 결과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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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 (219.255.32.65)
2013-12-01 04:24:40
제 답변입니다.
먼저 필립 임님의 진지하고 정중한 질문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진리와 관련해 세상에는 세 그룹의 사람들이 있다고 봅니다. 진리에 관심이 없는 사람, 진리를 찾아내 자기를 위해 이용하고 싶어하는 사람, 진리를 발견하고 그에 소유 당하고 싶어하는 사람 등입니다. 진리를 이용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기독교인이 되면 기복신앙이나 요즘 유행하는 실용주의 기독교로 빠지게 되지만 진리에 소유 당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기독교인이 되면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하나님께 소유 당하고 싶어하게 되지요. 필립 임님의 여러 차례의 댓글을 대하면서 하나님을 알아 가고 하나님께 소유되고 싶어하시는 님의 마음을 느끼게 되어 반가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소유 당하고자 애쓰는 과정이야말로 크리스찬이 평생 걸어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답변 드리겠습니다.

1-1 제가 언급했던 최근의 진보기독교와 보수기독교의 정면충돌은 지난 대선의 불법성 문제를 놓고 일어난 충돌에 대한 것입니다. 가톨릭 전주 교구의 정의구현 사제단이 대통령의 사퇴를 주장했고 이어서 진보 개신교 목사들의 모임인 목정평도 대통령의 사퇴를 요구했지요. 그러자 보수 개신교 단체인 한기총이 정의구현 사제단의 해체를 요구했고 가톨릭 내에서도 보수적인 사람들이 정의구현 사제단에 대한 불만을 공개적으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마치 진보 가톨릭과 진보 개신교가 이쪽에서 함께 움직이고 보수 가톨릭과 보수 개신교가 저쪽에서 함께 움직이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제부터는 불교까지 둘로 나뉘어 양측에 각각 가세한 모양새입니다. 이는 갑자기 일어난 사건은 아닙니다. 2차 대전 이후에 본회퍼 목사의 영향으로 진보기독교가 세워진 이후 사사건건 부딪히던 성경 해석과 현실에 대한 대처가 이번 대선 과정의 불법 문제가 국내에서 터지면서 극적인 충돌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뿐입니다. 이는 전 세계 기독교가 함께 앓고 있는 몸살입니다. 그리고 그 몸살의 모티브는 생존과 번영을 위한 공포와 탐욕이지요. 양측이 똑같은 모티브를 가지고 있으면서 진단과 처방만 다른 것입니다. 각자 성경 말씀까지 동원해 가면서 말입니다.

1-2 누구의 성경 해석이 바른가는 우리가 판단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와 가장 유사한 성경 해석으로 슈바이처의 “그리스도 신비주의, Christ Mysticism”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슈바이처는 그 후 왕성한 신학자로서의 활동을 갑자기 중단하고 기독교를 떠나 생명 존중 사상으로 옮겨갔지요. 자신이 성경에서 발견해낸 “그리스도 신비주의”는 실현 불가능한 것이라고 결론지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지점에서 방향을 달리 합니다. 실현 가능한 것임을 일부 체험했고 더 깊은 성취를 소망하면서 “새로운 피조물과 하나님의 나라”라는 푯대를 향해 걸어가고 있습니다.

2. 성경의 구원의 약속은 거의 대부분 현세 구원에 대한 약속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우리는 해석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새로운 피조물의 약속, 집단적으로는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약속입니다. (김세윤 박사가 “현재 천국”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우리와 콘텐츠까지 비슷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교회를 의인들의 공동체라고 주장했던 4세기 도나투스파와 유아 세례를 부정하고 국가 교회 체제를 반대하며 성인이 되어 직접 신앙고백을 한 자들의 공동체를 교회로 규정한 16세기 재세례파도 우리와 형식 논리는 비슷하나 그 내용인 새로운 피조물의 개념에 있어서는 다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현세 구원과 내세 구원은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들에게 내세 구원이 약속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말씀도 분명 있으나 새로운 피조물일지라도 여전히 육을 가진 불완전한 자들이고 더구나 성경에는 최후의 심판에서의 통과 기준이 명확히 계시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그 자리에서 깊은 회개가 요구되고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은혜를 베푸신다고 약속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믿음으로 내세 구원을 보장받는다고 보는 것은 성경의 구원 약속의 논리와 맞지 않습니다. 성경은 믿음 중에서 죽은 믿음을 날카롭게 구분하고 있으며 설혹 올바른 믿음이라 해도 완전한 믿음은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칼빈과 웨슬리조차 구원의 확보에 대한 교리를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이럴진대 만약 선행을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운다면 이는 진정 어리석은 일이 될 것입니다. 누가 자신의 선행을 감히 심판의 자리에서 당당히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3. 우리가 압도당한 성경 66권의 치밀한 약속의 논리는 말씀하신 대로 책 한두 권에 해당하는 내용이어서 여기서 상술할 수는 없지만 소주제만 열거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창조 당시 아담과 하와는 순종과 불순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만을 부여받음
(2) 불순종으로 인해 취득한 독자적인 선악 판단 능력이 모든 문제의 시작점이자 성경에서 지적하시는 인간의 죄의 본질임
(3) 추방되면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형벌인 결핍과 죽음이 이미 취득한 독자적인 선악 판단 능력과 결합하면서 서로 물고 먹으며 살다가 죽는 인간의 비극이 시작됨
(4) 느닷없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뜻은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신인류 집단을 만드는 것임 (창 18:19)
(5) 유대인들은 독자적인 선악 판단 능력과 생존과 번영의 추구로 인한 공포와 탐욕에 휩싸여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삶을 실현하는 일에 실패함 (이것이 사도 바울이 규정한 싸르크스에 속한 삶임 - 싸르크스는 육, 육체, flesh, sinful nature 등으로 번역되고 있으나 그 의미는 사전적 의미 그대로 human nature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봄)
(6) 이 human nature에 속한 삶을 영에 속한 삶으로 바꾸시겠다는 새 언약이 계시됨 (렘 31:31-34)
(7) 이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성령의 강림으로 성취되어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들이 출현하게 되고 사도 시대에 불완전하나마 작은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인 초대교회가 세워짐
(8) 불완전했던 초대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지 않고 오히려 말씀을 오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다가 결국 지쳐 콘스탄티누스와 야합함으로써 로마 국가 교회를 세우게 되었고 그 왜곡된 성경 해석과 교리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음

이상에서 보듯 구원의 약속과 실현의 전개과정은 오로지 하나님의 약속과 역사이며, 소수의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제외하고는 인간이 한 일이라고는 훼방 밖에는 없다 할 것입니다.

4. 우리는 세상의 빛, 증인이 되라는 말씀을 객관적인 검증(도키모스/ test, trial, prove, 시험 등으로 번역됨)을 전제로 한 말씀으로 해석합니다. 그 검증은 성경 해석에 대한 논리적인 검증과 새로운 피조물과 그들이 모인 공동체에 대한 현실적인 검증, 즉 인문과학적, 사회과학적, 자연과학적 검증 등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핵심적인 검증은 개인 차원에서는 새로운 피조물들에게서 나타나는 성령의 열매에 대한 검증, 집단적으로는 공동체의 현실적 삶의 모습에 대한 검증이 될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처럼 서로 사랑하고 있는가에 대한 검증이지요.

물론 새로운 피조물들의 공동체가 높은 수준의 객관적 검증을 통과한다 해도 실존적 차원에서 여전히 불완전한 것은 사실이고 또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은 오히려 사망에 이르는 냄새를 맡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단 몇 사람이라도 새로운 피조물들의 공동체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를 맡게 될 수만 있다면 자신들의 모든 것을 허비할 수 있는 것이 사도 바울과 같은 새로운 피조물들이라 하겠습니다. (여기서 제가 “우리”라고 표현하지 않은 이유를 잘 아실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과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인 현세 구원의 약속을 소망하며 이제 겨우 몇 발짝을 뗀 자들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언젠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욱 성숙시키셔서 세상에 증인 집단으로 드러내실 것을 믿고 오늘도 함께 회개하며 간구하고 있습니다. 물론 현실에서도 각자 열심히 일하며 살고 있습니다.)

신광은 목사님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그분의 책 “메가처치 논박”의 “감사의 글”에 언급된 김용호 전도사가 접니다. 뉴스앤조이에 연재되었던 메가처치 논박 글들에 달린 “해방” 필명의 댓글들이 제가 쓴 글이지요. 신광은 목사님의 성경 해석과 우리의 성경 해석이 여러 곳에서 일치하는 점도 있으나 푯대의 설정이 좀 다릅니다. 그에 대해 신목사님께 메일로 우리의 입장을 말씀드리기도 했습니다. 아직 직접 뵌 적은 없습니다.

답글이 많이 길어졌습니다. 필립 임님과 앞으로도 계속 하나님을 알아가는 끝없는 여정에서 귀한 동반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반갑고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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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 Im (70.62.49.64)
2013-12-01 09:32:25
성경의 치밀한 약속의 논리
저도 이점에 대하여 동의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실 때 "성경의 치밀한 약속의 논리"를 생각하면 느닷없이, 계획에 없었던 것을 추가하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창세 전에 계획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하나하나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하나님의 때를 따라...

이런 약속을 믿고 따르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의지하는 것이며
그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른 말씀과 해석과 삶에 적용하려 노력하는 용호 형제님께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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