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람 후에 이 장면 저 장면을 떠올리고 되새기고 곱씹다가 붙잡은 주제는 ‘인간’이다. 주인공 안토니아를 비롯해 갖가지 특색을 지닌 인물들이 등장하는 까닭이다. 이런 식으로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의 저변에 깔려있는 ‘인간이해’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더불어서 ‘용서’라는 개념을 다소 딱딱하게 다뤄보고자 한다.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은 삶과 죽음, 그리고 순환의 이야기를 그리는데, 아마 영화 속 골방철학자 ‘크룩핑거’의 영향력은 안토니아 가족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는 염세주의 철학자다. 아마 실레노스의 명제를 인용하는 대목이 이를 잘 상정해줄 터다. “태어나지 않았어야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고, 그다음 좋은 것은 가능한 한 빨리 죽는 것.” 제2차 세계대전 직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영화이기에 그 비관과 회의감은 영화 근간에 스며들어 있다.

안토니아는 증손녀 사라에게 이렇게 말한다. “영원히 죽는 것은 없어. 언제나 무엇인가가 남는단다. 그리고 거기서 새로운 것이 탄생해. 인생은 그런 거야. 이유 없는 시작이지.”

연결이 조금 부자연스러울 수 있지만, 또한 논쟁의 여지가 있겠지만, ‘용서’라는 것은 삶의 덧없음, 허무함 덕분에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죽을 수밖에 없음, 인간의 유한성을 자각할 때에 비로소 너그러움, 넉넉함, 관용 같은 덕목을 기르고 닦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인지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 도처에는 사람들의 죽음이 보도될 뿐만 아니라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안토니아의 사망 장면으로 점철되어 있다.

영화 속 가장 극적인 장면은 손녀 테레사를 강간한 자에게 안토니아가 응수할 때일 것이다. 그는 총을 들고 강간범 피트를 찾아간다. 자칫 ‘폭력을 통한 구원’을 반복할까 염려스러웠지만, 다행히(?) 안토니아는 말로 저주를 퍼붓는 데에 그친다.

이 즈음에서 용서의 개념을 살펴볼까. 용서 이론가 엔라이트(Robert D. Enright)는 용서를 세 가지로 권리로 환언한다.
“첫째, 우리가 겪은 가해행위는 부당하고 항상 부당할 것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둘째, 우리는 분노감에 대한 도덕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상처를 줄 권리가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우리는 존경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 셋째로, 용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권리, 즉 우리의 분노감, 복수심을 포기해야 한다.”(『용서치유』[서울: 학지사, 2004], 38)
안토니아는 그렇게 피트를 용서한 것이다. 자신의 손녀가 겪은 사건의 부당함을 고발하며, 남에게 상처를 입힐 권리가 없음을 공언하되, 자신의 복수심을 포기한 것이다.

자살로 스스로의 생애를 마감한 크룩핑거, 뭔가에 억압된 감정을 보름마다 울부짖는 것으로 토해낸 미친 마돈나, 그 울부짖음이 그리워 자살한 신부, 욕망을 절제하지 못해 살해당한 피트, 평생 일만 하다 죽은 바보 루니립, 기타 등등.

 

“고통은 예외가 아니라 일상적인 것이란다. 나의 존재에 대해 누굴 탓하겠니? 우리에게 빛을 주는 태양을 탓할 수는 없지. 난 무신론자고 천당을 안 믿기 때문에 나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어. 만약 신을 믿었다면 결국 내 자신을 속이는 거야. 소화도 안 되는 밥을 먹고 디저트를 기다리는 격이지. 언젠가는 나아지리란 희망을 품는 오류를 받아들일 수 없어”

착하기만 한 사람도, 악하기만 한 사람도 없다. 참호 속에 무신론자가 없다고 했던가. 반대로 냉혹한 세상 속에 신을 믿을 여유가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는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을 통해 넉넉한 인간 이해를 도모하자는 메시지를 추출해내고 싶다. 생각하는 인간(Homo Sapiens), 노동하는 인간(Homo Faber), 놀이하는 인간(Homo Ludens), 공생하는 인간(Homo Symbious), 경탄하는 인간(Homo Ammirandus) 등등, 인간을 수식하는 표현들이 다양하지만, 영화 <안토니아스 라인>은 용서하는 인간(Homo Ignoscens)을 선호하고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남성보다는 덜 폭력적인 여성을 통해서 말이다. 비폭력과 소박함, 마을/공동체, 그리고 노동을 통해서 말이다.

극 중 사라의 ‘죽은 디디를 위한 시’를 인용하는 것으로 글을 매듭짓겠다.

디디는 사랑스러운 회색 비둘기 같다
다행히 아직 안 죽었지만
죽으면 무척 보고 싶을 것이다
왜냐면 증조할머니, 엄마, 라라
그리고 할머니 다음으로
좋은 여자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최고로 좋다
왜냐하면 디디는 아직 죽지 않았으므로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