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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해석이 어려운 두 가지 이유유불리의 문제와 옳고 그름의 문제
김용호  |  yhchorakdo@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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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년 11월 09일 (토) 05:19:59
최종편집 : 2013년 11월 10일 (일) 15:26:57 [조회수 : 5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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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해석이 어려운 두 가지 이유

(요 8:42-47)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들어가며

신구약 성경은 많은 곳에서 인간을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소경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니 어떻게 해야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도 모르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위 본문에서 예수님은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시기를 인간들은 그 아비인 마귀에게 속하였기 때문에 진리를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자신은 지금 기독교인이니 예외라고 속단하는 우를 범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놀랍게도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이 소경인 것은, 그래서 진리를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아래의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1. 유불리의 문제 인간의 모든 관심은 자신(들)의 유불리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항상 생존과 번영을 갈구하면서 공포와 탐욕으로 허우적거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속 공동체의 생존과 번영을 목적으로 하는 윤리도덕은 물론이거니와 휴머니즘과 이타주의 또한 이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간혹 수도 정진과 깨달음에 의한 달관 또는 해탈을 주장하며 공포와 탐욕에서 벗어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그들의 무의식은 여전히 공포와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애초에 그들이 달관과 해탈을 목표로 수도 정진한 이유도 공포와 탐욕 때문이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인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성경 말씀을 자신의 생존과 번영을 보장하는 말씀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막무가내지요. "하늘의 신령한 복과 이 땅의 기름진 복"이라는 애처로운 구호가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십자가 위에서의 옛사람의 죽음과 새사람으로의 부활,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를 말씀하는데 기독교인들은 옛사람이 세속 공동체 속에서 살면서 누리고 싶어 하는 이 땅의 복과 내세의 복을 열심히 성경에서 찾습니다. 그 결과 성경에 계시된 새사람에 대한 약속을 옛사람인 자신들에 대한 약속으로 오해합니다. 그리고는 옛사람인 자신들과는 무관한 약속을 붙들고 눈물로 호소하다가 삶을 모두 허비해 버리게 됩니다. 무섭고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옳고 그름의 문제 에덴에서의 타락의 본질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다양한 해석들이 있고 그 중 대부분은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을 핵심으로 꼽지만 타락 사건의 본질은 주체적인 선악관의 획득입니다.

그 결과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피할 뿐만 아니라 자기들끼리도 자신의 부끄러운 부분을 가리게 됩니다. 서로를 남, 즉 타자로 인식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남남의 관계가 모든 인간의 삶을 수렁으로 몰아넣게 되었습니다. 각자 자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고 서로 충돌하면서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상 어느 관계도 하나가 된 관계가 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 부모 자식 간도 예외가 아니니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이처럼 주체적인 선악관을 가진 것은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여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정의와 공의가 자기가 생각하는 정의와 공의와 같은 것이라고 고집을 부립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른 것을 하나님이 옳다고 하실 리가 없다는 것이지요. 교만의 극치입니다. 이 어리석은 교만은 심지어 신학자들도 마찬가지여서 세상 사조에 따라 신학이 달라져 온 것이 그 증거입니다.

시청 앞에서 하루는 보수 기독교인들이 성조기를 흔들며 대한민국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소리 높여 기도하고 다음 날은 진보 기독교인들이 반미 구호를 외치며 가난한 자의 복지와 인류의 평화를 기원하는 집회를 합니다. 우리에게는 익숙한 풍경이지요. 욥기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며 그것을 인정해주지 않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욥에게 하나님께서 엘리후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욥의 의로움, 즉 그의 선악관의 오류를 지적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욥 35:1-8) 엘리후가 말을 이어 가로되 네가 이것을 합리하게 여기느냐 네 생각에 네가 하나님보다 의롭다 하여 이르기를 유익이 무엇인고 범죄한 것보다 내게 이익이 무엇인고 하는구나 내가 너와 및 너와 함께 있는 네 동무들에게 대답하리라 너는 하늘을 우러러 보라 네 위의 높은 궁창을 바라보라 네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

욥이 내세우는 선과 악, 의와 불의는 사람들끼리의 문제일 뿐 하나님의 공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선지자 또한 우리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구 기독교는 지난 2000년간 자신들의 선악관, 즉 자신들의 정의와 하나님의 정의는 같은 것이라고 고집을 부려왔습니다. 정작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 사이의 정의란 것도 각자 다르면서 말이지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삶을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정의로운 삶이라고 믿고 인생을 헛되이 보내고 맙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가며

간혹 자신은 성령의 깨닫게 하시는 은혜로 진리를 깨달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러한 주장을 하기에 앞서 자신이 유불리와 옳고 그름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을 먼저 입증해야 할 것입니다. 극히 논리적인 성경의 진리도 왜곡하는데 성령의 감화감동을 왜곡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유불리와 자신의 선악 기준에서 해방되는 일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신비의 영역입니다. 우리에게서 본능이 제거되는 차원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진리를 깨닫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를 본능에서 해방시켜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본능에서 해방되는 일은 지난한 일이므로 평생 준비만 하다가 성경을 읽어보지도 못하고 생을 마칠 수는 없는 일이지요.

그래서 여기에 두 가지의 차선책이 있습니다. 하나는 거의 무념무상의 상태로 계속하여 성경을 통독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무수한 성경 구절들을 짝을 지어놓고 고민하는 일입니다. 많은 성경 구절들이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이유는 우리가 여전히 자신의 유불리와 자신의 옳고 그름에 묶여 있기 때문이므로 이 고민은 우리의 눈을 밝혀 우리의 본능을 직시하게 하는 유익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지난한 고민의 과정도 없었는데 성경의 어느 구절도 모순되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면 대개의 경우 그것은 본능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더욱 심각한 소경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난독 현상입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이 자신의 유불리와 자신의 옳고 그름이라는 족쇄가 풀어지고 다른 교단 신학에 의해 부정되고 공격을 받는 자기 교단 신학이라는 상대적 교리의 굴레를 벗고 성경의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시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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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관점 (72.137.138.62)
2013-11-14 00:55:27
보는 시각에 따라서 다릅니다.
사람은 각자 자기가 가진 시각, 경력, 지위, 학력, 현재의 심리상태에 따라서 보기 때문에 다르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각 교단이 있고, 해석의 차이가 존재하고요. 마치 성격의 역본이 많이 존재하는 것처럼 신앙의 모습도 가지각색입니다. 보는 눈도 다르구요. 그래서 설교를 준비하면서 기준이 필요를 합니다. 어디에 맞추어야 하는지 말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이 기준점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감리교회인지, 장로교회인지, 성결교인지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다들 촛점은 교회부흥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문제가 많습니다. 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소속된 교단이 있으시면 그 교단에 맞추어서 설교하시고, 아니라고 하면, 소속되신 분들과 꼭 상의를 하셔서 기준을 잡으십시요. 그래야 공동체가 깨지지 않습니다. 설교 자체를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아니면 심리적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우려도 있지만, 오히려 많은 은혜를 줍니다. 저는 개인적으로는 감리교 목사님들의 설교를 좋아합니다. 삶속의 고뇌가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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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 (110.70.44.50)
2013-11-14 01:58:11
댓글 감사합니다.
보는 관점님께서는 보는 시각에 따라 성경 해석이 달라지는 것을 당연한 일, 또는 어쩔 수 없는 일로 인식하시는군요.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본 글에서 제가 "자신의 유불리와 자신의 옳고 그름이라는 족쇄"에서 해방되어야 함을 결론으로 언급한 것도 보는 시각에 따라 성경 해석이 달라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론으로써 제시한 것입니다.

우리는 크리스찬의 신앙생활을 종교생활이 아닌 "삶 전체"로 이해하기 때문에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습니다. 성경 해석이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것은 이렇게 살 수도 있고 저렇게 살 수도 있다는 것과 같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우리가 우리와 다른 성경 해석을 두고 잘못되었다고 주장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각자 열심히 최선을 다 하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글을 기고한 것은 우리와 같은 모습도 있다는 것을 소개하기 위해서입니다. 혹 한두 분이라도 진리를 찾아가는 고단한 여정 속에서 이 글로 인해 실마리를 찾으실 수 있다면 좋겠다는 소망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댓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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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 (110.70.44.50)
2013-11-14 02:51:00
보는 관점님의 댓글을 반복해 읽으며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보는 관점님의 댓글을 반복해 읽으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저의 본 글이 다른 이들의 성경 해석을 정죄하는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추호도 그런 의도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입장이 우리와 다른 성경 해석을 참고로는 삼되 받아들일 수는 없는 입장이다 보니 그렇게 글이 진행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혜량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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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관점 (24.36.118.176)
2013-11-16 00:36:08
성경의 매력은
다양한 저자들이 다양한 시각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따라가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이러한 시각을 놓치고 살아가는 것이 아쉽지요. 특히나 감리교는 이 매력이 넘쳤는데, 요즘은 많이 잊어버렸습니다. 아무쪼록 하시는 목회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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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 (219.255.32.65)
2013-11-17 08:11:56
감사합니다.
따뜻한 마음을 가지신 보는 관점님에게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항상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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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멘 (183.109.98.143)
2013-11-14 00:19:34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성도나 성도가 아닌 자나 모두에게...

하나님의 공의를 위한 예수님의 죽음은 세상 모든 사람에게 유효합니다.

다만 이것을 받아 들이느냐 받아들이지 못 하느냐 하는 문제만이 남았습니다.

즉,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자유의지의 활용 문제입니다.


성경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방해하는 영을 받은 자들은 어렵습니다.

윗글에 쓰인 요 8:42-47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 14:26을 보면 성령을 받은 자들은 성경을 잘 알 수 있음이 나와 있습니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성경을 넘어서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성령안에서

예수님을 닮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되는 사람들은

성경이 단순하고 명쾌한 말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많은 묵상을 하게 하는

김용호 형제님의 글에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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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 (110.70.44.50)
2013-11-14 02:06:29
따뜻한 댓글 감사합니다.
포이멘님처럼 우리도 크리스찬의 신앙생활을 종교생활이 아닌 "삶"으로 인식합니다. 성경 해석이 사변에 머무를 수 없는 이유지요.

우리의 삶이 어떠한 삶이어야 하는가, 우리의 순간 순간의 일거수 일투족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성경에서 찾고 삶에서 확증하는 지난한 길을 우리는 오늘도 꿋꿋한 열정을 가지고 걷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포이멘님의 따뜻한 댓글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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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가 (71.234.154.98)
2013-11-12 14:35:25
글쎄요.
가장 처음에 나오는 이야기만 가지고 제 의견을 말하죠. 김용호님께서는 "신구약 성경은 많은 곳에서 인간을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소경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신약만 보아도 이 말은 적절치 못하다고 봅니다. 예수의 제자들이야말로 예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죠. 처음부터 끝까지 동문서답을 하는 모습이 복음서 전체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소경이라고 말한 적이 있나요? 없습니다. 인간이 소경이라고 표현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서경이라고 했지요. 구약이나 신약이나 모두 성경의 가르침을 일부러 알아듣지 못하게 하려고 한다고 써있습니다. 신구약의 기자는 성경을 쓸 때에 알아듣기 쉽게 쓴 것이 아니라 그 반대입니다. 기독교가 시작되면서 이런 사실은 까맣게 잊고서 엉터리로 성경을 해석하기 시작한 것이 여기까지 온거죠.

결론적으로 성경이 어려운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기독교가 처음부터 엉뚱한 길로 갔고

두 번째는 그 길로 간 지 너무 오래되어서 원래의 길이 어떤 길인지 아예 모르는 것이죠.

지금 개신교에서 가르치는 성경은 루터와 칼빈이 완전히 바꿔버린 해석에 의한 것이라는 것은 아시죠? 그렇다면 그 이전의 사람들은 완전히 다른 성경으로 이해했을텐데요.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짐작하실 수 있나요?

이 문제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신학적으로도 말이죠.

성경이 어렵다고 느껴지는 자체가 뭔가가 잘못된 것이라고요.

성경은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인생을 관조할 수 있는 눈을 가져야 이해가 가능한 것입니다. 신학교에서 몇 년 공부했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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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김용호 (219.255.32.65)
2013-11-13 06:56:56
댓글 감사합니다만...
글을 안 읽으시고 댓글을 다신 듯하여 제가 뭐라고 답글을 달아야 할지 난감하네요^^

저는 18년째 작은 신앙공동체에서 설교하고 있는 "형제"입니다.
나이는 58세구요.
신대원 다니던 시절이 까마득하군요.
본 글을 읽으시고 댓글을 다시면 답글을 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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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0
무릇돌 (218.38.160.207)
2013-11-10 23:27:59
인간이 마귀의 자식?
"인간들은 그 아비인 마귀에게 속하였기 때문에"
라는 표현은 물론 예수님의 말씀도 아닐 뿐더러
옳은 표현도 아닙니다.
본문의 말씀이 진정한 예수의 말씀이 아닌 것은 당연하지만
유대인(유대교)과 대결상태인 요한의 공동체에서
요한은 예수의 입을 빌어 유대교(유대인)과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위와 같은 표현을 하였겠지만
인간들이 마귀에 속하였다 운운은
참으로 해괴난망한 표현이며...

이 글을 내려놓으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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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호 (219.255.32.65)
2013-11-11 00:39:40
댓글 감사합니다만....
성경의 인간론과 마귀론에 대한 견해 차이입니다. 서로 "다른 견해"지요.
제가 보는 성경의 인간론은 "어둠에 속한 자"이고 마귀론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와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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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돌 (218.38.160.207)
2013-11-13 16:20:35
성경의 인간론과 마귀론...
그런 것이 정작 존재합니까?
성경 여기저기 인간에 대한 이야기, 마귀에 대한 구절들
끌어 모아 취향대로 연결한 것이 마귀론이요 인간론입니까?
이미 글쓴 분은 충분히 기존의 성서왜곡에 의하여 산출된
조직신학적 전제에 젖어있는 분 같은데요?
아, 영적으로(개인취향대로, 자의로) 성서-성경을 이해하자는 건가요?
무슨 독특한 성경의 진리를 깨달으셨는가요?
차라리 지나가다님의 언급이 더 적실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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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9
김용호 (110.70.44.50)
2013-11-14 02:59:36
무릇돌님. 서로 다른 견해와 주장은 모두에게 큰 유익을 줍니다.
저는 지난 20년간 교회사와 교리사 공부에 많은 시간을 쏟았습니다. 수많은 주장들과 논쟁들을 보면서 귀한 지혜들을 많이 얻게 되었지요. 수백 수천의 신학자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답니다. 당당뉴스도 그러한 공간이 되기에 참 좋은 장이라는 생각이 들어 앞으로도 글을 계속 올릴 예정입니다.

무릇돌님도 님의 생각과 다른 주장을 펴는 분들의 글을 비난하시기 보다는 참고로 삼으시고 또 긍정적인 방향에서 다른 의견을 제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서로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저보다 연배가 위이실 수도 있겠지만 58년 동안 살아온 사람으로서 이런 권면은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렇게 답글을 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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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돌 (218.38.160.207)
2013-11-14 23:54:16
다른 것과 이상한(?) 것
물론 틀린 것이라고는 표현하지 않습니다만
20년간 교회사와 교리사를 공부하셨다 하면서
뜬금없이 성경해석을 들고 나오셨네요?
성경해석사를 곁들여 공부하셨는가요?
일단 성경해석 운운 하시려면
말씀드린 바 있는 카렌 암스트롱의 성서 이펙트는
기본서라 할 것 같은데요.
올 5월말경에 번역된 책입니다(원서는 2007년 출간).
님의 이 다음 글을 읽어보니 성경해석에
방점을 두시는 것 같지 않습니다.
서구 기독교의 사변적 해석이랄까?
요점이 분명하지 않은 듯 합니다.
저의 난독이 심해서인지는 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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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5
무릇돌 (218.38.160.207)
2013-11-10 22:52:18
우선 전제가 심히 오류인 듯
본문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는 자들이 아닌듯 한데?
왜 글쓴이는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라는 표현을 하는지요?
그냥 본문을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한 도구로 삼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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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6
김용호 (219.255.32.65)
2013-11-11 00:01:26
댓글 감사합니다만...
이 장면은 요한복음 8장31절 "그러므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기를...."의 연속된 장면입니다. 주석가들 중에는 그 그룹을 둘로 나누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저는 둘로 굳이 나누어야 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그 후에 모든 유대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는 상황은 물론 성경의 전체 인간론을 볼 때 그것이 합당한 시각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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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3
무릇돌 (218.38.160.207)
2013-11-10 20:29:20
성경해석은 본래 어려운 것
입니다만,

성경해석을 하기 전에
최소한
카렌 암스트롱의 '성서 이펙트'는
읽어야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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