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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의 성서 읽기, 이대로 좋은가?한국 교회 교우님들께 드리는 류상태의 주일편지 - 2013년 9월 15일
류상태  |  sham5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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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년 09월 14일 (토) 09:35:42
최종편집 : 2013년 09월 14일 (토) 10:54:03 [조회수 : 4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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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서는 사람의 책인가, 하나님의 말씀인가?

어렸을 때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는 질문을 한 번도 받아보지 않은 분은 거의 없으실 것 같습니다. 사실은 엄마 아빠가 다 좋은데, 둘 중 하나로 대답하기를 은근히 강요(?)하는 질문자의 의도에 말려들어 어쩔 수 없이 한 분을 선택했던 기억을 갖고 계시는 교우님도 많으실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아이들은 “둘 다 좋아!”라고 씩씩하게 대답하기 시작했습니다. 반드시 둘 중 하나만 선택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사람의 책인가, 하나님의 말씀인가?”라는 질문에도 어느 한 쪽만 선택할 필요는 없습니다. 둘 중 하나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흑백논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이삼천년 전 근동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이 당시 그 지역의 언어로 쓴 ‘사람의 책’입니다. 하지만 깨어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 각성된 체험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거룩한 경전’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성서를 읽는 사람은, 먼저 성서가 ‘사람의 책’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종이와 문자의 집합으로 구성된 물리적 성서를 기록한 것은 ‘일차적으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살았던 ‘그 시대와 사회’라는 시공의 울타리 안에 갇혀서 살아가기에, 역사적 사실이나 우주의 질서를 이해하는 데 한계 내지는 오류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실은 창세기 기자가 지구는 천체의 중심이고 움직이지 않으며, 그 주위를 태양을 비롯한 뭇별들이 떠다닌다고 “의심 없이” 믿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쉽게 동의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서가 ‘천동설’이라는 원시세계관 아래 기록되었다고 해서 성서의 가치가 무너지지는 않습니다. 성서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과학적 사실’이 아니라 ‘종교적 의미’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찬란한 태양이 짙은 안개를 뚫고 저 하늘 위로 솟아올랐습니다.”라는 말은 신년벽두가 될 때마다 매스컴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태양이 떠오른 것이 아니라 지구의 자전으로 생긴 현상이기에 ‘과학의 언어’로 그렇게 말했다면 틀린 표현이 되겠습니다. 하지만 ‘과학의 언어’가 아니라 ‘삶의 언어’로 하는 말이기에 그 말에 시비를 거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처럼 과학적으로는 맞지 않지만 우리들의 삶의 자리에서는 여전히 의미를 주는 표현들이 있습니다.

여기까지 동의하실 수 있다면, “성서의 내용이 과학적으로는 틀릴 수 있다.”는 데에도 기꺼이 동의하셔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성서에는 오류가 없다.”는 오래된 교리가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될 사실은, 성서 기자가 하나님께 영적으로 사로잡힌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하더라도, 인간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지식의 한계나 오류의 가능성을 완전히 넘어설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주요 교리를 만들어낸 사람들 역시 대부분 1500~2000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이기에 ‘그 시대의 세계관’ 안에서 생각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여 천체의 움직임이나 물리적 세계의 질서에 대한 이해는 오늘날 초등학생의 이해수준보다도 훨씬 원시적인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남긴 연구 결과와 기록이 아무리 신중하고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과학적 사실 뿐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한계와 오류도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처럼 성서가 ‘사람의 책’이기에 담겨있을 수밖에 없는 오류나 한계를 정직하게 인정할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그 한계와 오류를 돌파하여 정금과도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금광석을 용광로에 넣어 정련한 후에야 비로소 순금을 얻을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2. 성서는 시대의 산물이며, ‘고백의 언어’로 기록되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성서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기록 당시 사람들의 신앙고백으로 쓰여졌습니다. 그러므로 성서의 언어는 ‘과학과 논리의 언어’가 아니라 ‘고백의 언어’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고백에는 객관성이 결여된 이기적 고백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당시에는 그것이 옳다고 확신했고 시대적으로도 용인되었지만, 현대사회에서는 반드시 재해석되어야 할 ‘원시 공동체의 이기적인 고백’도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시 시대와 사회 상황에서는 그렇게 이해되고 기록되었지만, 그 때와는 시대와 삶의 정황이 달라진 ‘지금, 여기서’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성서의 진정한 메시지는 무엇인가?” 라는 물음을 현대의 예수사람들은 끊임없이 묻고 재해석해야 합니다. 그 물음과 연구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기록된 그대로’ 읽는 것은 성서의 진실에 다가가는 데 방해가 될 뿐 아니라 매우 위험할 수 있습니다. 아래 구절은 그 하나의 예입니다.

“여자는 조용히 복종하는 가운데 배워야 합니다. 나는 여자가 남을 가르치거나 남자를 지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침묵을 지켜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2장:11~12, 공동번역).

성서가 일차적으로 ‘사람의 책’이라는 점을 받아들이지 않는 일부 신학자와 목회자들은 위의 성서 본문에 의해 21세기가 된 지금까지도 여성은 성직자가 될 수 없다는 남녀차별 논리를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본문은 당시 교회 현장에서 발생한 특수한 사정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존여비’라는 전 지구적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시대의 한계’를 성서 역시 그대로 안고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줍니다.

성서의 기록이 ‘시대의 한계’ 뿐 아니라 ‘원시공동체의 이기심’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성서 본문들도 많습니다. 아래 본문은 그 중 하나입니다.

“너희 가운데 패륜아들이 나타나 너희가 일찍이 알지 못했던 다른 신들을 섬기러 가자고 선동한다는 소문이 나돌 것이다. 그런 소문이 나돌거든 너희는 샅샅이 조사해 보고 잘 심문해 보아 그것이 사실임이 드러나면 그같이 역겨운 일을 너희 가운데서 뿌리뽑아야 한다. 그 성읍에 사는 주민을 칼로 쳐죽여야 한다. 그 성읍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말끔히 없애버려야 한다. 거기에 있는 가축도 칼로 쳐죽이고 모든 전리품을 장터에 모아놓고 그 전리품과 함께 온 성읍을 불살라 너희 하나님 야훼께 바쳐야 한다. 그리고 언제까지나 폐허로 남겨두고 다시 세우지 마라. 너는 이런 부정한 것들을 건사해 두지 않도록 하여라.”(신명기 13장 14~18, 공동번역)

이 본문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어떤 극단의 선택을 했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타민족을 말살하는 이런 일은 종족 간에 벌어진 전쟁에서 승리한 민족이 패배한 민족의 복수를 막기 위해 선택한 잔인한 방법이었습니다. 하여 공동체 존망의 위기에 쫓긴 이스라엘이 극단의 처방을 내릴 만큼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는 점에서 당시의 그들을 이해할 수는 있겠습니다.

그러나 21세기가 된 오늘날까지도 “성서에 기록되었으니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여 이웃종교의 성전에 불을 지르고 단군상을 파괴하는 등의 무모한 행위를 저지르는 극렬 신자들이 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가 깊은 책임의식을 갖고 반드시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될 슬픈 현실입니다. 하지만 성서가 ‘사람의 책’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여전히 ‘오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규정하는 오래된 교리를 재해석하고 교정하지 않는 한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치유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3. 성서의 권위를 존중하되 합리적 해석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성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또 하나의 문제점은, 같은 본문을 두고 다른 해석이 공존할 경우에 다수를 차지하는 ‘보수정통’ 교회에서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배척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다른 견해’는 일시적 혼란을 가져오기도 하지만 합리적인 대화를 통해 보다 성숙하고 열린 신앙으로 인도한다는 점에서 장려되어야 할 일이지 이단시하고 배척할 문제가 아닙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최후심판에 대한 비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비유에는, ‘사람의 아들’로 오신 우리 주님께서 마지막 날에 천사들을 거느리고 영광의 보좌에 앉아 모든 민족 모든 사람들을 오른편과 왼편, 둘로 나누고 상벌을 내리신다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주님은 오른편으로 분류된 사람들에게 “세상 창조 때부터 준비된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하라.”고 하시고, 왼편으로 분류된 사람들에게는 “악마를 가두기 위해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본문에서 심판을 통해 사람이 갈 수 있는 곳은 극과 극을 달리는 두 세계 뿐, 중간 지점에 대한 언급이나 암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심판의 기준도 매우 단순하고 명확합니다. ‘사람의 아들’이 헐벗고 굶주렸을 때 그를 도와준 사람들은 모두 준비된 나라를 상속받고, 그를 외면한 사람들은 모두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천국과 지옥’이 되겠습니다. 이에 대한 본문 구절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 때에 그 임금은 자기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희는 내 아버지의 복을 받은 사람들이니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주었다.’” (마태복음 25:34~36, 공동번역).

“그리고 왼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의 졸도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으며, 또 병들었을 때나 감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마태복음 25:41~43, 공동번역).


하지만 심판의 내용이 발표되자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이나 왼편에 있는 사람들 모두 판결의 이유에 대해 납득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절대심판권을 쥐고 왕의 자리에 앉은 ‘사람의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을 도와드렸습니까?”,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을 모른 체하고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이에 대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웬만큼 신앙생활을 한 교우님들 중에 이 비유를 모르는 분은 거의 없으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비유는 해석자에 따라 매우 완고한 교리를 지지해주는 근거로 이해되기도 하고, 따뜻한 인류애를 가르쳐주는 말씀으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본문이 보수적인 설교자에 의해 선포될 경우, 사람이 죽은 후에 갈 곳은 천국 아니면 지옥이며 중간 단계는 없다는 전통 교리를 지지하는 결정적 근거로 해석됩니다. 하지만 이 본문이 진보적인 설교자에 의해 선포될 때는 전혀 다르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본문의 중심 의도는 교리적인 재료를 제공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 전 상영된 <울지마 톤즈>에서 이태석 신부님이 보여주셨듯이, ‘헐벗고 가난한 이웃을 주님 대하듯 섬기는 삶’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에 나타난 최후의 심판이나,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이 가게 된다는 영원한 나라, 왼편으로 분류된 사람들이 가게 된다는 영원한 불 등의 비유는 모두 지극한 이웃사랑을 가르치는 데 필요한 극적 배경을 이루는 것일 뿐, 그것들 하나하나를 미래에 실제 이루어질 사실로 보는 건 잘못된 해석이라는 것이 진보 신앙을 가진 분들의 대체적인 시각입니다.

이처럼 같은 성서 본문에 대해 매우 다르게 해석하기도 하지만, 보수건 진보건 본문을 대하는 해석자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철저하게 본문을 중심으로 논리를 전개하고, 본문의 권위에 의존한다는 점입니다. 보수적인 해석자는 물론 진보적인 해석자도 성서의 본문 자체의 권위에 의혹을 제기하거나 비판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심지어 성서비평학을 통해 본문을 파헤치는 학자들조차도 결국은 해체한 본문을 다시 조합하여 보다 합리적이고 현대인이 받아들일만한 근사한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성서 자체의 권위에 도전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성서의 권위에 대한 최종 승복, 이것이 보수건 진보건 우리 기독교 신앙인들의 공통분모이며 전통입니다.

그러나 성서가 현대인에게 여전히 의미를 가지려면, ‘성서의 권위’를 존중하되 해석자들이 그 권위에 구속되지는 말아야 합니다. 본문을 솔직하게 연구하고 이해하는데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냥 아무 전제 없이 고문서나 고대 기록을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처럼, ‘일차적으로’는 아무 전제 없이 객관적으로 본문을 연구한 후에야 비로소 그 다음 단계로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려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위의 본문에는 보수적인 해석자와 진보적인 해석자가 주목하는 두 가지 요소가 모두 들어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지상의 세계’와 함께 ‘천상의 세계’와 ‘지하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이천 년 전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을 고스란히 담아내면서, 그 기반 위에 ‘심오한 이웃 사랑의 정신’을 예수사람들에게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현대인인 우리는 과학의 발전에 의해 오류로 밝혀진 원시세계관을 넘어, 그 중심 내용인 ‘심오한 이웃 사랑의 정신’에 집중하면 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성서는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인류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살아날 수 있으며, 우리 기독교 또한 지구마을 모든 이웃들과 조화를 이루며 상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서에서 진정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원석을 용광로에 녹여 순금을 뽑아내듯이, TEXT(본문 자체)뿐 아니라 CONTEXT(그 본문이 기록되기까지의 역사적 정황과 저자의 의도 등 본문의 배경을 이루는 모든 것들)까지 충분히 연구한 후에야 비로소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다가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과거의 교리에 매이지 않은 열린 신학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입니다.



4. ‘성서무오설’이라는 오래된 교리는 반드시 재검토하여 교정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평범한 수학교사가 알고 있는 수학지식은 수학의 성인으로 추앙받는 피타고라스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피타고라스가 당대에는 최고의 석학이었지만, 지난 25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수많은 그의 후예들이 만들어낸 지식의 진화와 그것이 쌓여진 결과는 그 옛날 피타고라스가 발견하고 터득한 수학지식과는 비교할 수 없이 풍요로워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평범한 수학교사가 피타고라스의 위대함에 감히 범접할 수는 없다는 것을. 저 역시 저의 주님이신 예수께서 결코 아실 수 없었던 과학지식이나 역사지식을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평범한 소시민인 제가 예수님의 위대함에 감히 범접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지금도 여전히 주님만이 제 인생의 구세주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성서에 담긴 물리적 세계관, 즉 땅은 움직이지 않으며 세계는 ‘땅 위의 세계’와 ‘하늘 위의 세계’ 그리고 ‘땅 속의 세계’로 나뉘어져 있다는 ‘삼층 세계관’은 당시에 어느 민족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고는 결코 생각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이천 년 세월이 흐르며 진화된 인류의 과학과 지식체계에 의하면, 그 우주관은 틀린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동의할 수 있는 이런 관점이 신앙의 세계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성서’라도 그것은 이천년 전에 만들어진 경전입니다. 과학과 합리에 의해 걸러져야 하며,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가려내야 마땅합니다. 그것은 다른 종교의 경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서의 진실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이러한 사실을 교인들에게 자세히 가르쳐야 할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진실을 말하기를 주저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래도록 그리스도교의 중심교리로 인식되어온 ‘성서무오설’이 가로막고 있기에, 조직에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사실대로 말하기를 망설이거나 돌려서 말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사실을 아는 분들이 침묵하거나 정확히 말하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순박한 교우님들이 오랜 교리의 심연에 갇혀 헤어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의 장래를 위해 그분들이 용기를 내셔야 하며, 나아가 이 오래된 교리의 재검토와 교정도 반드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분들이 용기를 내어 바른 말을 할 수 있도록 교우님들께서 기도와 격려 등 하실 수 있는 모든 방법과 지혜로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우리 한국 교회에는 저와 다른 견해를 갖고 계신 신학자와 목회자들도 많이 계십니다. 제 견해를 존중받고 싶은 것처럼 저 역시 그분들의 견해를 존중하며, 열린 대화와 토론을 통해 한국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방향을 함께 찾아보고 싶습니다. 하여 오늘의 주일편지를 마치면서 한국 교회에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성서의 바른 이해, 교회개혁, 다원화된 세상에서 과거의 선교방식을 답습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현대사회에서 교회가 당면한 이런 문제들은 믿음과 기도로만 해결할 수는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대형교회들이 앞장서서 공개 세미나를 열어 이런 문제를 합리적으로 다루어주십시오.

교회지도자들 뿐 아니라 일반 교우님들도 적극 참여하여 스스로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대화와 토론의 장을 각 교회별로, 또는 지역 교회들이 연합하여, 최소한 일 년에 한 차례씩은 꼭 마련해 주십시오. 영락교회, 순복음교회, 소망교회, 금란교회, 명성교회 등 교인수 일만 명이 넘는 대형교회들이 이 일에 꼭 앞장서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내실이 따르지 않는 교회성장은 복이 아니라 화입니다. 교단과 교파를 초월하여 많은 교회들이 용기를 내서 ‘바른 신앙을 위한 세미나’를 열고 오늘날 우리 개신교회가 안고 있는 이런 문제들에 솔직하게 다가갈 수 있다면 한국 교회의 진정한 성장과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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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rlie (198.208.251.22)
2013-09-16 23:31:58
고맙습니다
말씀 잘 읽었습니다. 좋은 지적이시고, 저도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해 왔던 부분이었는데, 용기있게 말씀하셨네요. 저와 같은 평신도야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지만, 목회자의 입장에서는 쉽지 않은 부분이겠지요.
다만 댓글들 수준이 좀 그렇군요. 상대방이 무엇을 강조해서 얘기하는 것인지 알면서도 굳이 꼬리를 잡고 물어지는 모습이라니... 우리 모두 좀 더 마음을 열고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하는 마음을 갖기를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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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2
자유로운인간공동체 (121.66.247.66)
2013-09-22 20:30:56
끝까지 가면..?
성령 잉태설도 설화. 예수의 부화도 설화. 오병이어도 설화.일체의 물리학적 화학적 원리에 어긋나는 것들은 다 설화.. 남는 것은..? 정의롭게 착하게 살자. 더불어 살자..삼강오륜만 남는거 아닌가? 뭘 신앙하는 거지? 공자를 존경하지 신앙하나? 예수의 가르침을 믿나? 따르는거지? 좋다 더 가 보면? 천지창조는 과학적으로 말이 됨? 홍해가 갈라진 것은? ...... 신이 있기는 힌 건가? 홍익사상을 설파한 토종 신 단군은?가르침을 따르는 것을 신앙한다고 하나?믿어? 뭘 믿어? 천국은? 지옥은? 신은 없다? 도무지 너무 어렵다.......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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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청교육대 (210.96.84.241)
2013-09-16 10:04:34
상태형 질문해도 괜찮나요
상태형 제가

상태형과 질문할때 주먹으로 벽을 치면서
고함을 지르면서 아무리 상태형이 좋은 이야기를 해도
다 개소리라고 하면 그것이 옳은 행동인가요 나쁜 행동인가요

상태형이 사는데
가서 옷을 다 벗고 상태형은 위선자요 거짓말장이요
하는데 옳은 행동인가요 나쁜 행동인가요

상태형에게 상처주는 안좋은 이야기를 해놓고
솔직히 그냥 심심해서 아무 생각없이 했다고
낄낄거리면서 그냥 이야기하는게 옳은 행동인가요 나쁜 행동인가요

상태형이 사랑하는 여자가 있는데 내가 꼬셔놓고
자랑스럽게 인터넷에서 그 여자 꼬셨다고 하는데
옳은 행동인가요 나쁜 행동인가요

이글을 본다면
상태형이 무슨뜻인지 알수 있을거에요

나도 개신교의 배타적인 성서해석에 대해서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상태형의 글과 행동에서

역시 개신교의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구절만 강조해서 말하는

것도 동일한 향기가 나는게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리플달기
0 8
무릇돌 (218.38.160.207)
2013-09-15 21:41:18
서로 상충하는 바울의 말들 - 어느 것이 진정한 바울의 말인가?
“여자는 조용히 복종하는 가운데 배워야 합니다. 나는 여자가 남을 가르치거나 남자를 지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침묵을 지켜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2장:11~12, 공동번역).

성서가 일차적으로 ‘사람의 책’이라는 점을 받아들이지 않는 일부 신학자와 목회자들은 위의 성서 본문에 의해 21세기가 된 지금까지도 여성은 성직자가 될 수 없다는 남녀차별 논리를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본문은 당시 교회 현장에서 발생한 특수한 사정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존여비’라는 전 지구적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시대의 한계’를 성서 역시 그대로 안고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줍니다.

‘당당뉴스’에 게재된 류상태 목사님의 ‘한국 교회의 성서 읽기, 이대로 좋은가?’에서

성서-성경의 이해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구절이다. 비판적 성서연구 이전의 전통적인 교회의 설명은 디모데전후서는 바울 사도의 친서(親書)로 이해하여 ‘교회 안에서의 여자의 침묵 강요’가 사도 바울의 진정한 의견이요 명령이라고 이해하여 왔다. 그러나 성서의 세밀한 연구는 디모데 서신들은 사도 바울의 친서가 아니요 바울의 사후(死後) 상당기간 후에 교회의 바울의 친서를 사칭(詐稱)하는 익명(匿名)의 저자에 의하여 기록된 문서들로 판명되었다. 오늘날 같으면 이런 일은 커다란 사회적, 법적 문제를 일으키는 사건이 되겠지만, 기원 1~2세기와 같은 고대의 시기에서는 이러한 일들이 보편적으로 유행하던 일이었으므로 이렇게 바울의 이름을 빌어 쓴 편지들이 작성되었고 또 교회에 의하여 경전(성경)으로 받아들여졌으니 참으로 대단한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이것이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는 것은 바울의 이름을 내세워 작성된 문서들(이른바 목회서신이라 불리는 것들)이 상당부분의 내용에 있어서는 거의 사도 바울과 정반대의 신학적 입장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보그와 크로산은 이 목회서신들을 아예 반(反)바울적인(Anti-Pauline) 서신들이라고 명명하기도 한다. 이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 그러나 여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은 채로 기도하거나 예언하면, 그는 자기 머리를 부끄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는, 남자 없이 여자가 없습니다. 여자 없이 남자가 있을 수 없습니다.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과 마찬가지로, 남자도 여자의 몸에서 났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다 하나님에게서 생겨났습니다.”(고린도전서 11장 5절; 11~12절,
표준새번역)

고린도전서의 11장에서 바울은 여자들이 교회 안에서 기도와 예언을 하는 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언급한다. 다만 여자가 머리를 자른 민머리로 기도나 예언을 하기가 민망하다면 긴 머리로 하든지 아니면 머리에 무엇인가를 쓰고 하라는 권고를 하고 있다. 바울의 일관된 신앙과 신학은 여자나 남자가 교회에서는 동등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같은 고린도전서 14장에 보면,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십시오. 여자에게는 말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지 않습니다. 율법에서도 말한 대로 여자들은 복종하십시오. 배우고 싶은 것이 있으면,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으십시오.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자기에게 부끄러운 일입니다.”(고린도전서 14장 34~35절, 표준새번역)

이전에 언급하였던 디모데전서의 내용과 거의 유사한 남존여비의 사상이 등장한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성서의 본문은 이처럼 바울이 자신의 말을 스스로 뒤집는 다중(多重) 인격자처럼 보이게 한다. 성서-성경의 이해가 결코 수월하지 않음이 이곳에서도 드러난다. 다행하게도 본문의 난외주에 14장 33절에서 36절까지는 몇몇 고대의 사본들에서 40절 이후에 나온다는 점에 착안하여 세밀한 본문비평을 한 결과 후대에 첨가한 내용들임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제 디모데서신과 고린도서신의 본문 비교를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본래 바울의 사상은 주 예수와 같은 남녀평등의 혁신적인 것이었는데 교회가 점점 제도화하면서 예수운동과 초기 기독교의 혁신적인 사상을 저버리고 서서히 고대세계의 일반적인 풍토와 같이 남존여비의 사상으로 물들어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사례를 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 상충(相衝)되는 성서본문들을 세밀한 비판적 고찰을 통하여 그 의미와 문제점을 제대로 추출해내지 못하고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좌충우돌, 혼비백산할 수밖에 없게 된다. 똑같은 본문들을 통해서도 그 해석과 이해의 차이가 극과 극인데 하물며 문자적으로는 서로 반대되는 본문의 내용들은 어떻게 지혜롭게 해결해 나가야 할지 난감할 뿐이다.

맞다! 성서-성경은 사람이 기록한 책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내용들은 각양각색, 천차만별이다. 그러나 그 책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고 하니 해석자는 또한 하나님의 영감으로 해석하여야 할 것이다. 영감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중개로 해석되고 이해된 사람의 책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석의 작업은 지난(至難)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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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평일 (72.196.234.24)
2013-09-16 00:50:13
상식적으로 생각하고있었 던 것들을
성경구절로 예를 들어 설명해 주시군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구약시대는
유태인들 뿐 아니라 인류전체가 일부다처제가 정당화 된 걸로
알고있습니다. 모세율법에서 간음은 여자들에게만 적용되는
율법이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가끔 구약에 나오는 지도자들이 요즈음의 윤리인
일부일처제을 범해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다는
설교를 듣곤 합니다. 구약에 기반을 두고 있는
이슬람교 모하멧은 9명의 처가 있었고, 또 아직까지
율법적으로 일부다처제가 정당화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여자들이 얼굴을 가리고 다니고요.
신구약을 기반으로 한 미국의 몰몬교 의 경우도
일부다처제는 율법으로 허용하고 있습니다.
또, 근본주위 신앙에 바탕을 둔 미국에서
여자들에게 선거권이 부여된 시기가 50년 대로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이런 점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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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돌 (218.38.160.207)
2013-09-16 21:17:03
우매하여 질문의 요지를... 하여 동문서답을 하렵니다.
질문의 요지를...

박평일님의 질문의 요지가 예수와 바울이 남존여비의 풍조 속에서 변혁적인 남녀평등의 가르침을 강조하였는데 왜 그것이 기독교 역사 혹은 서구의 역사에서 20세기에 이르도록 제대로 실현되지 않았나 하는 것인가요? 그렇다면 저의 댓글에 대답의 실마리가 충분히 잠재되어 있다고 보입니다.

<덧댐으로>

일처다부제→일부다처제→일부일처제→다부다처제(?). 결혼관의 변천사라하기에는 좀 그렇습니다. 특히 다부다처제는. 그러나 아직도 지구세계의 오지에서는 일부일처제가 도저히 받아들여질 수 없는 제도라고 생각하며 사는 종족이 있다 합니다. 그냥 눈이 맞아 숲속에 며칠 여행 갔다 오면 새로운 커플로 인정한다고 합니다. 이전의 것은 완전 무효이고. 선교사가 그 종족에 선교하러 갔다가 무신론자로 전향(?)하였다 합니다. 도저히 기독교 교리(복음)가 먹혀들지 않았다 합니다. 다 아시는 이야기이겠지만요. 박선생님의 ‘인간 지팡이’라는 글을 징하게 읽었습니다. 어쨌든 현금의 문명세계(?)에 사는 저로서는 일부일처제로 족합니다.

기독교는 박해받는 종교에서 박해하는 종교로 ‘성공적’으로 변신(?)하면서, 신학을 만들고 경전을 제정하여 변혁적이고 대안문화적인 예수와 바울 등의 초기기독교운동의 교훈과 사상에 적절한 ‘물타기’를 하므로써 자신의 변신을 정당화해 왔다고 판단됩니다. 그러나 경전은 그러한 과정의 흔적을 여전히 드러내 보여주고 있기에 우리는 원류의 모습을 ‘흐릿하게나마’ 상상하고 추정할 수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좀 더 원형에 근접할 수만 있다면 가야 할 길이 더 분명해지지 않을까 기대하여 왔습니다만 최근에 목사에서 무신론자가 되신 어느 분을 웹상에서 만나고 원형에의 접근이 혹 금단의 열매가 되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합니다. 저는 그래서 성서-성경을 고전을 공부하듯이 접근하여야 하리라고 막연하게 울타리를 치기로 하였습니다.

동문서답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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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평일 (72.196.234.24)
2013-09-18 05:31:04
상세한 설명 고맙습니다.
우리 집 거실에 예수님 그림이 하나 걸려있습니다.
장발 머리에 굴렛수염이 덥수룩하게 나있는 히피같은
모습입니다. 7개 월 전에 눈때문에 며칠간 밖에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생각없이 수염을 깍지 않았습니다.
아들이나 대부분 지인들이 내 얼굴에 아주 어울린다고
좋아라던 군요. 그런데 근본주의 신앙관을 가지고 있는 처는
기독교인으로써 단정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반대했습니다.

농담삼아 예수님과 비슷한 모습인데 왜 싫어하느냐고
몇 개 월을 따지며 버티다가 결국 며칠 전에 내가
두 손을 들고 면도하고 말았습니다.

율법이나 제도,풍습, 문화는 수염처럼
그 시대의 산물이지 그 자체에 옳고 그름은
없다고 봅니다.

시대적 기호나 유행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저는 가족제도도 예외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남녀간의 탄생비율은 남자가 여자보다
5-10% 정도 더 많이 태어납니다.
남자들의 사망률이 여자들 보다 그 만큼
높기 때문이지요. 잦은 전쟁으로 인해서
갑자기 남녀비율의 균형이 크게 파괴되면
가족제도나 성문화가 이에 맞추어 변화되어 왔습니다.
중동지역에서의 일부다처제도는
그런 역사적 배경에서 비롯되었다고 저는
믿고있습니다.

그러니 현대적 일부일처제도 기준에 따라서
그 당시 사람들을 정죄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아주 재미있는 현상은 이차대전 후에
남자신생아들이 여자들 보다 20% 더 많이
탄생했습니다.
장기적으로는 남녀비율을 조절해 나가시는
하나님의 섬세하신 섭리겠지요.

저도 일부일처제를 지지합니다.
그러나 가족제도도 그 시대의 역사적
산물이라는 이야기지요. 진리가 아니고.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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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돌 (218.38.160.207)
2013-09-14 20:49:05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만
한국의 기독교(개신교)가 그동안 성서를 이해하고 해석해 온 결과는
기독교를 '개독교'로 목사를 '먹사'로 변형시킨 것입니다.
이런 상황의 최일선에는 유상태님이 언급하신 대형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과연 이런 자기를 부수고 던지는 변혁을 할까요?
그래도 꿈은 꾸어야 되겠지요.
사실은 목사들이 성경에 너무 무지한 것이 문제의 근원이지만이지만요.

"다른 모든 민족은
각기 자기 신들을 섬기고 순종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까지나,
주 우리의 하나님만을 섬기고,
그분에게만 순종할 것이다."

<미가서 4장 5절, 표준새번역>

위와 같이 다원주의 혹은 다신론을 예언하는 예언자의 예언이
성서에 버젓이 있음을 누가 들추어 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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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angelist (68.92.238.219)
2013-09-15 10:35:28
성경에서 말하는 신들
성경에서 여호와 하나님 외에 언급하는 신들은 살아있는 신들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신을 일컫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 유일신 하나님을 참신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다른 신을 섬기라고 표현한다면
이는 만들어진 신을 섬기는 어리석은 자임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사실 참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도
그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에 대하여
인간의 체험적인 각성과 고백에 의한 것임을
그리하여 성경에 기록된 것은
전적 하나님의 역사나 말씀이 아닌 것처럼 여기는 것 또한
저들이 부르짖는 하나님은 만들어진 하나님일 수 밖에 없습니다.
성경 한 말씀 보시지요.
[그들의 신들을 불에 던졌사오나 이들은 참 신이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 뿐이요 나무와 돌이라 그러므로 멸망을 당하였나이다]
이사야서 37장 19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 앞 16절에 보시면 [천하만국의 유일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이 표현이 유대인들이 체험하여 각성한 하나님에 대한 표현일 뿐
유대인을 제외한 이민족이 경험한 신도 있다거나
유대인들이 체험한
그러나 실상은 저들의 머리에서 생각한 하나님이라고 주장한다면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결국 자기 믿음 문제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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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돌 (218.38.160.207)
2013-09-16 21:22:40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리려합니까?
아예 본문에서 문제의 그것을 제외시키는 편이 나을 듯.
성서-성경은 말 그대로 신묘막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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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angelist (68.92.238.219)
2013-09-16 23:05:51
그렇습니다.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릴 수 없습니다.
인간의 조그마한 지식으로
성경 말씀을 이리저리 재단하지만
그 말씀의 참된 빛을 가릴 수 없습니다.
손바닥으로 자신의 눈을 가리고는
참된 빛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재해석했다고 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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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약돌 (218.38.160.207)
2013-09-26 18:58:43
혹시 박창진,
아니면 그의 문하생
혹은 '근본주의' 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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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멘 (183.109.98.143)
2013-09-14 13:23:03
왜 성경을 이해시키려고 하십니까?

그것은 성령의 역할입니다.

목사나 신학자의 몫이 아닙니다.

선악과의 폐해가 무엇입니까?

바로 판단하려는 것입니다. 남에게 강요하려는 인위입니다.

엊그제 지성수 형제님의 '매사에 너무 심각해서 문제다'라는 글이 생각납니다.

'억지로 하려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하도록 한다.'라는 것이 무위이고
'그러면 예수는 어떠했던가?
복음서에 보면 예수는 유다가 자신을 배신할 것을 알면서도
최후의 만찬에서 떡을 떼어 주면서 "네 할 일을 하라."고 했다.
죽음조차도 때에 자기를 맡기는 모습에서
’무위‘의 완성의 모습을 발견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말씀이 떠오릅니다.

어거스틴이나 교황이나 사제나 목사나 신학자나 이만희나 류상태나

내 말이 옳다고 성경을 해석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성경에 오류가 있는 지 또는 성경에 오류가 없는 지를

사람들이 판단하여 말하는 것이 바로 인위입니다.


성령이 함께하는 성도들은 성령이 없는 자들과 다릅니다.

성경에 오류가 있던지 없던지

성도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기에

성령으로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깨닫습니다.

성령이 없는 자들은 매사가 심각해서 문제입니다.


이 글로 류상태 형제님이 많은 공격을 받을 듯 싶습니다.

이 글에 공격을 해대는 사람들도 인위가 아니겠습니까?


가난하게 사는 것이 무위입니다.

도교를 통해서는 도사로 오랜 수행을 하여야 선인이 되겠지만

기독교는 예수님의 보혈로 단번에 선인이 되며 무위에 이릅니다.

그리고 하나님나라의 백성이요 제사장이요 성도로 덕을 베풀며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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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평일 (72.196.234.24)
2013-09-14 22:43:38
선악과의 폐해가 무엇입니까?
"바로 판단하려는 것입니다. 남에게 강요하려는 인위입니다."

깊은 신앙적 깨달음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네가 비판하는 대로
네가 비판을 받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 천국에서의 크고 작음은 하나님만 아는 일이다" 라고
다투는 제자들에게 경고하셨을 것입니다.

옳고 그름, 크고 작음은 하나님 고유의 소관이라는
의미로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자유의지였습니다. 저는 성경 에덴동산 선악과
이야기를 그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결과가 빤히 내다 보이는
무서운 도박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 자유의지를 인간들로 부터
배신을 당하면서도 도로 걷어들이지 않았을까?
사람에 따라서 그 해석이 각기 다르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하나님이 인간들을 노예나 종이 아니라 자녀들로
창조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믿고있습니다.

저는 신학의 필요성을 전면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신념을 가정으로 한 신학을
과학적인 학문으로 간주하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신학이 바탕을 두고 있는 가정인 신념은
다른 학문과는 달리 객관적으로 검증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신학은 주관적인 해석상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성경해석이
각기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는 이런 다름을 땅에 뿌린 씨앗의 결과로 설명했습니다.
같은 씨앗이라도
옥토, 딱딱하게 굳은 땅, 바위 위, 가시떨기 사이에
따라서 결과가 달리 나타납니다. 또, 사도 바올은
유아 때는 우유을 먹다가 점점 딱딱한 음식을 먹게 되는
신앙적 수준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세상만사에 수준이 없는 것은 없습니다. 높고 낮음,
깊고 얕음, 크고 작음, 길고 짧음이 있습니다.
학문, 지식, 학력, 부, 명예, 지위, 기술... 그 모든 것들이
상대적인 피라밋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신앙적 깨달음의 세계도 그 예외가 될 수는 없다고 봅니다.

보수주의 신학이든 자유주의 신학이든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점은 선생님이 주장하고 계시는
것 처럼 자신의 주관적이 해석을 절대적이라고
남에게 강요하는 데 있다고 저는 믿고있습니다.

절대는 신에 속하는 단어입니다.
절대는 존재이지 해석이 아닙니다.

"내 해석이 절대적으로 옳다" " 내 말이 곧 하나님 말씀이다"
"나는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이해하고 있고
너희들은 인간의 부족한 두뇌로 오해하고 있다" 하는 주장들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으로 믿고 있는 정신병 내지는
신성 모독죄에 해당된다고 저는 믿고있습니다.

선생님 말씀처럼 신앙은 자신과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입니다. 그 사이에 어떠한 중계자나
거래상이 끼어들 수가 없다고 봅니다.

필요한 것이 하나 있다면
자신의 성찰을 통한 깨달음일 것입니다.
좋은 댓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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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9
좋은 댓글입니다. (174.114.60.109)
2013-09-18 23:28:52
그런데 이곳에 함정이 있습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권력에 의해서 이것이 바뀌는 것입니다. 역사의 산물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고 있을찌라도 사람은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언제든지 변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깊어질수록 변하지 말아야 하는데, 깊어질수록 변합니다. 똑똑해서요. 아무튼 이렇게 이야기하는 저도, 아침, 점심, 저녁의 믿음에 대한 수준이 달라집니다. 그래도 변함이 없는 것은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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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5
최Ray (220.118.20.85)
2013-09-14 11:53:30
정통이 정통이 아니고

이단이 이단이 아니다.

내가 글을 쓰고도 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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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5
최Ray (220.118.20.85)
2013-09-14 12:24:01
해명 :

난 아무 것도 안 믿고 '예수 그리스도만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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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상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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