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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만병의 근원에서 만복의 근원으로의 전환공감과 소통으로 영적인 문둥병을 치유하라
김명섭  |  kimsubw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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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년 09월 03일 (화) 22:06:25
최종편집 : 2013년 09월 04일 (수) 04:37:21 [조회수 : 4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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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문둥병이 곧 떠나니라. 누가복음 5장12절~16절


힐링, 마음의 변화를 통한 삶의 변화

2013년 가장 주목받은 단어는 힐링(healing)이다. 사회전반에 걸쳐 힐링이 대세가 된 이유는 그만큼 많은 현대인들이 몸과 마음의 질병을 갖고 살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힐링’이란 단순한 치료가 아니라 몸과 마음의 전인적인 치유를 뜻한다. 그래서 힐링은 증상치료가 아니라 원인치료다. 마음의 병이 몸의 병을 만들고, 마음의 치유가 몸의 치유로 이어진다는건 이제 상식이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본디 영적이며 동시에 물질적인 존재인 까닭이다. 따라서 성경이 증거하는 치유는 육체적인 병고침 차원이 아니라 마음의 변화를 통한 전인적인 치유 곧 삶의 변화다.

12절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문둥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문둥병이란 어떤 병일까? 동양에서는 풍라 또는 나병이라고 하는데 현대의학에서 일컫는 정식명칭은 한센병이다. 문둥병은 나균에 의해서 감염되는데 말초신경과 뼈, 눈에서 시작해서 온 몸으로 퍼져 나간다. 문둥병의 증상은 감각신경의 파괴로 인해 피부로 느끼는 촉각, 냄새 맡는 후각을 상실하게 된다. 급기야 손가락과 발가락 등의 사지를 잃게 되고 운동신경과 근육까지 파괴된다. 결국 똑바로 걸을 수 없을 정도의 행동장애에 이르게 하는 무서운 질병이다. 무엇보다 문둥병의 가장 무서운 공포는 강력한 전염성과 더불어 흉측하 변한 외모로 인해 사회로 부터 철저하게 격리되는 추방이다. 그래서 문둥병이 발병하면 자신의 이름과 재산, 가문과 일터에서, 친구들과 사랑하는 가정으로 부터 사회적인 사망선고를 받게 된다. 뿐만 아니라 문둥병은 하늘이 내린 저주요, 천벌이라고 여겨지는 까닭에 종교적으로도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용서받지 못할 죄인으로 낙인 찍히는 신세로 전락시킨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문둥병자는 ‘온 몸에 문둥병이 들렸다’는 누가의 증언을 통해 이미 발병한지 오래되어서 더 이상 회복이 불가능한 아주 절망적인 상황임을 미루어 짐작하게 된다. 그는 더 이상 스치는 바람의 부드러움도 햇살의 따사로움을 느낄 수 없었다. 손가락과 팔다리는 원하는데로 움직이지 않았고 나무토막처럼 떨어져 나갔다. 사랑했던 가족들과 친구들로부터 버림을 받았고 모든 재산과 지위를 잃어 버렸다.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배척 받아서 더 이상 성전에 들어가 예배할 수도 없었다. 무감각, 무감동, 무기력...그의 삶은 살아있어도 죽은 것과 같은 마치 산송장과 같은 형편이었다. 무엇보다 다시 회복될 수 없다는 사실이 그를 가장 절망스럽게 했다.

   



영적인 문둥병

다행히 오늘날 문둥병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문둥병은 약물로 완치할 수 있는 소위 정복된 질환이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육체적인 문둥병에서는 해방되었지만 이보다 더 끔찍한 마음의 문둥병을 앓고 있다. 겉모습은 멀쩡하지만 내면은 문둥병에 걸린 것처럼 썩어 문드러져 가고 있다. 현대인들의 마음은 문둥병의 증상과 같이 무감각하고 무감동하고 무기력하다. 마땅히 감사할 일에 감사하지 못하고, 기뻐할 일에 기뻐하지 못하고, 통곡하며 슬퍼해야 할 일에 함께 아파하지 못할 만큼 무감각하고 무감동하다. 간절히 바라는 일 조차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삶을 살아간다.

현대인들은 인공위성과 인터넷, SNS와 무선이동통신과 같은 첨단기술을 통해서 지역과 공간의 한계를 넘어 세계인들과 수많은 정보를 주고 받으며 사회적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속내를 터놓고 얘기할 진정한 친구는 드물다. 문화와 지역, 시간과 공간의 장벽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세상 속에서 역설적으로 철저한 고독에 갇힌 외톨이로 살아간다.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는 불통하고 부부관계는 무미건조하다. 이와 같은 관계의 단절은 부인할 수 없는 현대인들의 슬픈 자화상이다.

고독과 소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자극적인 인터넷게임에 몰입한다. 청장년층은 낯선 만남이 주는 쾌락에 편승해서 거리낌 없이 불륜을 일삼는다. 하지만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일시적인 쾌락이 주는 만족이란 결국 영혼을 더 공허하게 만들 뿐이다. 일터에서도 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는 없고 오직 경쟁과 손익계산만 있다. 자신의 속내를 터놓고 자신의 아픔을 나눌 대상이 없기에 슬픔과 기쁨을 함께 나눌 이웃을 잃어버렸다. 타인과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교류하는 것을 인간관계의 지혜와 미덕으로 여길 정도로 상막하다.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 이와 같은 지독한 소외는 문둥병자의 그것과 매우 닮아 있다. 군중 속의 고독, 대화 속에 단절, 풍요로움 속에 빈곤, 화려함 속에 초라함은 문둥병처럼 사회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이와 같은 현대인들의 실상은 본문에 등장하는 절망적인 형편의 문둥병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 나의 영적인 상태

이쯤에서 우리 스스로 영적인 상태를 진단해 보자. 최근 가슴 벅찬 감격이나 감동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지금 내가 하고 일에 열정과 보람이 있는가? 혹시 문둥병의 증상처럼 무감각하고 무감동하고 무기력한 삶은 아닌가? 우리는 왠만한 사건과 충격에는 감동하지 않는 걸 미덕으로 여길 만큼 강팍하다. 왠만한 죄악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만큼 완악하다. 따뜻한 말 한마디 환한 미소를 지을 여유가 없어서 표정은 늘 돌덩이 처럼 굳어져 있다. 사소한 배려와 양보는 찾아 보기 힘들고 작은 일에도 활화산 처럼 분노하기 일쑤다. 얼굴은 차가운 얼음처럼 냉냉하고 심성은 사막처럼 건조하다. 이런 내적인 문둥병의 증세는 신앙생활도 예외는 아니다. 말씀을 듣고 가슴을 치던 은혜와 감사, 찬양과 기도 가운데 흘러 넘치던 눈물과 헌신은 이미 남의 얘기가 되버린지 오래되진 않았는가?

도대체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마치 산해진미에 길들여진 입맛이 평범한 식탁이 주는 참맛을 빼앗듯이 현대인들은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쾌락에 익숙해져서 더 이상 평범한 일상이 주는 잔잔한 행복감을 잃어버렸다. TV와 스마트폰의 길들여진 사람에게 독서의 즐거움을 찾긴 힘들다. 대박을 꿈꾸며 사는 사람에게 소박한 일상생활이 주는 감동은 없다. 낙엽이 굴러가는 것에도 웃음을 터뜨리던 소녀의 감수성은 쓰나미와 같은 엄청난 재난에도 무심하다. 감동적인 노래 한소절과 시 한구절에 잠을 못이루던 감수성은 사라지고 오직 손해와 이익에만예민하게 반응하는 경제동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영적인 문둥병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삶에서 경험하는 ‘무감각-무감동-무기력’이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로까지 이어진다는 것이다. 마치 문둥병자들이 더 이상 회당에서 예배할 수 없는 존재로 전락하는 것과 같다. 오늘날 수많은 신앙인들이 예전에 누리던 예배의 감격, 말씀의 감동, 기쁨의 찬양, 간절한 기도, 깊은 영혼의 참회, 솟아나는 기쁨과 감사를 잃어 버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편에서는 이런 영적인 갈급함을 만회해 보려고 아말감이 금이빨로 변하고, 금가루가 내리는 원초적인 신비현상에 집착하거나 특별한 영성프로그램에 심취해 보기도 하지만 그것 역시 순간적인 감흥일 뿐 내면의 지속적인 평강을 주지 못한다.

   



죽음의 세 가지 차원

성경이 증거하는 문둥병은 단순한 전염병이 아니다. 비록 숨쉬고 살아있지만 죽은 것과 같은 영적인 상태 곧 사회적인 죽음을 의미한다. 잘 알려진대로 미국과 우리나라는 죽음을 판단하는 기준이 다르다. 우리나라는 심장과 호흡이 멈추면 죽음을 선고하지만 미국에선 뇌사(brain death)를 최종적인 죽음으로 판단한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죽음이란 호흡이나 심장이 멈추거나 뇌사와 같은 생물학적인 죽음만을 뜻하지 않는다. 성경이 증거하는 죽음의 의미는 더 깊고 중층적이다.

성경이 증거하는 죽음의 첫 번째 의미는 ‘생물학적인 죽음’이다. 세상과 이별해서 다시 만나 볼 수 없는 사별(死別)을 가리킨다. 두 번째 죽음의 의미는 ‘사회적인 죽음’ 곧 소외(疏外 , alienation)다. 오늘 본문의 문둥병자가 바로 이와 같은 상태였다. 살아있으나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기에 죽은 것과 다름없는 ‘관계적 죽음’이다. 세 번째 죽음의 의미는 바로 ‘영적인 죽음’이다. 마치 문둥병자처럼 무감각하고 무감동하고 무기력해져서 삶의 기쁨과 감사, 행복과 만족을 누리지 못하는 상태가 성경이 증언하는 ‘영적인 죽음’이다. 이와 같은 세 가지 차원의 죽음에는 한가지 뚜렷한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관계의 단절’이란 점이다. 죽음이란 곧 ‘관계의 단절’이다. 다시말해 죽음이란 ‘세상과의 단절’, ‘이웃과의 단절’,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우리는 앞서 살펴 본 죽음에 관한 통찰을 통해서 역설적으로 진정한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그 이유는 만일 죽음이 ‘관계의 단절’이라면, 이와 정반대로 삶이란 ‘관계의 회복’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관계의 본질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사랑이다. 따라서 삶이란 곧 사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사랑의 관계를 잃어버린 삶은 살아 있어도 죽은 것과 같은 영적인 죽음인 것이다. 이와 반대로 죽음 같이 절망적인 삶도 참된 사랑으로 다시금 되살아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여기에 예수께서 문둥병자를 치유하신 놀라운 능력이 숨겨져 있다.

   



공감과 소통, 그 놀라운 능력

13절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문둥병이 곧 떠나니라.
영적인 문둥병은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삶에서 잃어버린 감흥과 감동을 다시금 회복할 수 있을까? 본문이 증거하는 문둥병의 치유과정은 매우 단순하고 명료하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의 몸에 대실 때 지독한 문둥병이 그에게서 떠나갔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셨다는 말씀은 얼핏보면 단순하고 평범해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엄청난 사건이다. 모세의 정결법에 의하면 문둥병자는 부정하기 때문에 결코 손을 대서는 안된다.(레위기13장40절~55절) 하지만 예수께서는 ‘언터처블’해야 마땅한 문둥병자에게 친히 손을 대셨다. 더러운 문둥병자에게 거룩한 주님의 손길이 닿을 때 문둥병의 치유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율법과 관습의 장벽을 뛰어넘는 파격의 손길이요, 그의 형편을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의 손길이었다.

우리를 덮고 있는 영적인 무감각, 무감동, 무기력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오늘 말씀은 예수님을 만날 때 무감각, 무감동, 무기력한 삶에서 벗어 날 수 있다고 증거한다. 더 정확히 말해서 예수님의 손길이 문둥병자의 몸에 닿을 때, 곧 예수님과의 접촉(Touch)에서 치유는 시작되었다. 예수께서 문둥병자에게 손을 댈 때 비로소 막혔던 관계가 열려지고 소통이 시작된 것이다. 사랑은 손을 맞잡고 상대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일이다. 모든 관계의 회복은 소통에서 시작되며 소통은 공감에서 비롯된다. 예수께서 손을 대실 때 그는 더 이상 문둥병자가 아니라 절망과 고통 가운데서 치유 받아야 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의 이름을 불러 줄 때, 그들의 아픔을 진정으로 공감할 때 비로소 그들은 사회적인 존재로 회복될 것이다.

교회에서 불려지는 유명한 찬양 가운데 ‘물의 바다덮음 같이’라는 곡이 있다. 가사 중에 ‘주의 손과 발되어 세상을 치유하며’라는 감동적인 대목이 등장한다. 그렇다. 주님의 몸된 교회는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세상을 치유’할 사명을 가지고 있다. 이천년전 주님의 손은 추하고 더러워서 아무도 손대지 않던 절망 가운데 있던 문둥병자를 향하셨다. 주님의 손은 오늘도 문둥병자와 같은 깊은 절망과 소외를 경험하는 이들을 향하고 계신다고 나는 확신한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들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 앞에서 소외 당하고 있는 이들과 함께 하며 그들의 눈물을 닦아 주는데 너무나 인색했다. 이제 한국교회는 마치 죽은 것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소통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살려내는 일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고통받는 이들이 많아도 너무 많다. 장애우, 환자, 도시빈민, 비정규직노동자, 자영업자...어떤 이들은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하지 못한다’는데 교회가 어찌 그런 일을 다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핑계할지도 모른다. 세상을 치유하는 일은 결코 ‘나랏님 따위’가 감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요, 예수께서 그토록 ‘원하시던 일’이다. 고통과 상황이 다양하고 그 수도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세상에는 그에 못지않게 다양한 교회들과 수많은 교회들이 존재한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이 아닐까. 한국교회가 저들의 이름을 불러주고 저들의 손을 잡아줄 때 그때 우리 사회에는 죽은 것과 같았던 자들이 살아나는 치유의 역사가 벌어질 것을 나는 믿는다.


예수님과의 소통, 무엇으로 가능한가?

12절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가로되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님과 접촉하고 소통할 수 있을까? 이천년전 예수님 당시에 수많은 문둥병자가 있었지만 그 모든 사람들이 치유의 기적을 경험하진 못했다. 갈릴리에 수많은 어부들이 있었지만 오직 베드로, 요한과 야고보만이 주님의 제자가 된 것처럼 그것은 단순한 만남이 아니라 아주 특별한 만남이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시간과 공간의 간극을 넘어 예수님과 특별한 만남으로 소통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 본문은 단순하고 분명하게 세 가지로 응답하고 있다.

문둥병자는 예수를 ‘보고’, ‘엎드려’, ‘간구했다’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것을 오늘날로 바꿔 말하면 '예배'다. 예배의 본질은 나의 관심과 시선을 삶의 주관자이신 주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그분의 뜻과 말씀에 집중하고 귀기울이는 것이다. '엎드렸다'(he fell on his face)는 것은 철저한 복종을 의미한다. 주님의 말씀 앞에 전적으로 순종한다는 의미다. 이것은 기독교의 본질인 ‘자기부인’을 뜻한다. 내뜻, 내판단, 내경험을 철저하게 내려놓은 일이다. 이러한 자기부인은 반드시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어진다. ‘간구했다’(besought-beseech의 과거형. 애원하다. 간청하다)는 것은 치유의 요청을 넘어 의뢰였다. 자신의 문제를 삶의 주관자이신 주님께 전적으로 맡기고 의뢰했던 것이다. 기도의 반대말은 기도하지 않음이 아니라 염려다.

예수님과의 만남, 즉 예수님과의 소통의 방법은 첫째 ‘예배’요, 둘째 말씀에 대한 ‘순종’이요, 세번째는 ‘기도’다. 메마른 현대인들에게 ‘예배’, ‘순종’, ‘기도’ 따위는 어쩌면 너무 진부하거나 평범하고 단순해서 싱겁다고 치부해 버릴찌도 모른다. 좀 특별한게 없냐고 따져 묻기도 한다. 스스로 믿음이 좋다고 자부하는 신앙인들조차도 정작 예배를 멀리하고 말씀 앞에 순종하지 않고 좀처럼 기도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영적인 문둥병에서 치유받지 못한 채 영적인 문둥병 속에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리되신 예수님과 소통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나 특별한 길은 없다. 오직 말씀과 기도로만 예수와 소통할 수 있으며 그 말씀에 순종해서 준행할 때, 비로소 마음과 삶이 온전히 변화되고 치유될 수 있다. 더러운 삶에서 거룩한 삶으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말씀과 기도 외에는 없다. 삶은 마음에서 흘러 나온다. 마음은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으로부터 형성된다. 말씀과 기도는 우리의 눈과 귀, 입술과 행동을 모두어 마음을 훈련시키는 가장 좋은 영성훈련이요, 지난 이천년 동안 이어져 내려 온 예수와 접촉하고 소통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삶의 주관자

문둥병자는 예수님을 향해 ‘주여’라고 불렀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했다. 성경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님(My Lord)이란 표현은 무엇을 의미할까? 주님이란, 고대 노예제도의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넘어 ‘삶의 주관자’라는 신앙고백이다. 생명의 주관자, 건강의 주관자, 물질의 주관자라는 뜻이다. ‘주님’이란 고백은 삶에 대한 최고의 경외심을 표하는 동시에 자기자신에 대한 한없는 겸손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가장 잘 드러내는 고백이다. 이전까지 내가 주인되었던 삶에서 이제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삶으로의 전환을 뜻한다.

주님이란 말은 세상의 물질과 번영, 세속적인 삶의 방식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하나님으로 경외하며 살아가겠다는 신앙고백이다. ‘경외’의 반댓말은 ‘무시’다. 오늘날 신앙인들은 입술로는 ‘주여 주여’ 말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무시한 채 살아간다. 세상에 믿을 건 돈밖에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오직 전지전능한 돈만을 경외한다. 오늘날 무엇을 경외하는가의 문제는 신앙생활과는 전혀 별개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신앙인들 조차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돈을 벌기위해 자신의 인생을 허비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신이 경외하는 것 곧 믿는 것에 자신의 인생을 걸고 자신의 삶을 의뢰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문둥병자는 자신의 삶을 온전히 주님께 맡겼다.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이어서 문둥병자는 ‘원하시면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주님이 원하시는 일은 문둥병으로 부터 자유케 되는 일이다. 예수께서 이땅에 오신 목적은 바로 이 일을 하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이다.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며’ 주님이 원하시는 일은 문둥병으로부터 자유케 하시는 것 뿐만 아니라 우리를 일체의 질병으로부터 자유케 하시길 원하신다. 따라서 주님의 몸된 교회는 오늘도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원하시는 ‘힐링’을 위해서 마땅히 주님의 손과 발이 되는 수고를 감당해야만 한다.

질병의 치료에는 ‘원인치료’와 ‘증상치료’가 있다. 예수께서는 증상치료가 아니라 원인치료를 원하셨다. 육체의 질병만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병의 뿌리가 되는 영혼까지 치유하셨다. 그래서 다시는 더러운 질병에 붙들리지 않을 수 있는 새로운 삶의 방식까지 인도하셨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이와 같은 주님의 뜻을 외면한 채 육신의 질병이 치료되는 일, 다시말해 건강해지는데만 관심을 두고 살아간다. 예수께는 외적인 문둥병 보다 더 심각한 영적인 무감각, 무감동, 무기력의 문둥병을 치료하기 원하신다. 왜냐하면, 우리가 감사하며 감동하며 기쁘게 살아가길 원하시기 때문이다. 삶에서 누리는 ‘기쁨’, 신앙생활의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다. 복음(GoodNews,기쁜소식), 기쁨이야말로 복음의 본질이다. 몸과 마음이 주님 안에서 강건하고 온전하고 깨끗하게 되는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이 건강한 삶 곧 치유와 변화의 시작이다.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14절~16절 예수께서 저를 경계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오되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예수께서 지독한 문둥병을 고쳐주셨다. 이런 감짝놀랄 기적을 동네방네에 소문을 내도 모자란터에 예수께서는 그져 율법대로 제사장에게 확인만 받고, 다른 사람에게는 알리지 말라고 입단속을 하신 이유는 대체 뭘까? 예수께서는 자기자신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하나님이 하시는 일)만을 뚜렷하게 드러내시길 원하셨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서 앉은뱅이를 기도로 일으켰다. 기적을 보고 놀라서 수많은 군중들이 순식간에 구름 때 처럼 솔로몬전각으로 몰려들었다. 베드로는 몰려든 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오늘날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과 특별히 능력있게 사역을 감당하는 이들이 잘 새겨 들어야 할 대목이다. 자칫하면 주님의 일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유혹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수많은 교역자들이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가로채서 나의 영광과 나의 자랑으로 삼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는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만일, 자신에게 놀라운 능력이 있다면 그 능력을 주신 주님을, 물질이 있다면 물질을 허락하신 주님을, 재능이 있다면 그 재능을 주신 주님을, 봉사를 했다면 봉사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신 주님만을 높여야 할 일이다. 나는 무익한 심부름꾼이며 오직 나를 통해서 주님만이 존귀케 되길 추구해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에 예수께서 치유 받은 문둥병자에게 경계하신 첫 번째 이유가 있다.

   



만병의 근원에서 만복의 근원으로의 전환

오늘날 수많은 이들이 질병의 고통 속에 살아가는 이유는 뭘까? 잘 알려진대로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다. 스스로 되려고 하는 인생은 몹시 피곤하다. 자기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는 인생은 늘 고단하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을 때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 때때로 자신을 더 알리기 위해서 자신의 능력 이상의 행동으로 오버하는 이들을 종종 본다. 화려한 스폿라이트를 받는 연예인들이 스트레스와 중압감 허탈감을 견디지 못해서 약물을 복용하거나 자살을 선택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스스로 되려고 하는 삶의 태도는 어떠한 자리에서 무엇을 하든지 필연적으로 스트레스와 과로를 낳는다. 불행하게도 ‘스스로 되려는 인생’은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택하는 삶의 방식이다. 그래서 초등학교 아이들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자기과시, 스펙쌓기’란 이름으로 하루하루 과도한 스트레스 속에서 피곤한 나날을 보내며 살아간다. 예수께서는 이와는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도리어 자신을 알리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시며 도리어 한적한 곳으로 몸을 숨기셨다.

놀라운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한적한 곳으로 찾아와 예수께로 몰려 들었다는 사실이다. 예수께서 사람들에게로 간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숨어있는 예수께로 몰려 왔다. 여기에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신 진짜 이유가 있다. 창세기의 마지막 주인공인 요셉은 우여곡절 끝에 애굽의 총리대신이 됐다. 요셉은 단 한번도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길 바라거나 노력한 적이 없다. 요셉이 한 일은 오직 하나였다. 하나님과 동행 했을 뿐이다. 언제나, 어디서나, 어떤 상황과 형편 속에서도, 심지어 감옥에 있을지라도 말이다. 요셉과 같은 삶의 자세를 가리키는 말이 히브리어로 ‘임마누엘(Immanuel)’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요셉은 이 믿음으로 언제나 ‘보고, 엎드리고, 간구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친히 애굽의 노예요, 죄수였던 절망적인 신세의 요셉을 들어올려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게 하셨다.

스스로 되려고 하는 인생은 피곤하다. 하지만 요셉처럼 하나님께서 되게 하시는 인생은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처럼 늘 활력이 넘친다. 부와 성공, 명예와 권세를 쟁취하려고 애쓰는 인생은 늘 피곤하다. 이것이 바로 만병의 근원이다. 성경은 ‘사랑하는 자여 내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하노라’고 말한다.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되고 건강은 저절로 뒤따라온다는 말이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앞뒤의 순서를 뒤바꿔 버렸다. 오직 범사와 건강만 잘되길 바랄 뿐 영혼에는 무관심하다. 무엇이 더 중요한지,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삶의 우선순위를 잃어 버렸다. 이런 이유로 결국 마음의 병인 ‘과로와 스트레스’를 한없이 받으며 살아간다. 이러한 삶의 태도에서 신앙인들 아니 주님의 일을 한다는 목회자들 조차도 예외가 아니다. 이것이 오늘날 이 시대의 영적인 문둥병과 같은 만병의 원인이다. 참된 신앙생활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만병의 근원을 되는 삶의 방식을 버리고, 만복의 근원 되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일이다.

나는 이것이야 말로 오늘날 현대인들이 그토록 소망하는 힐링’의 참된 본질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뜻으로 읽는 누가복음, LUCAS> 중에서

‘Lucas’ is the Latin form of the Greek first name Loukas (Λουκᾶς) This name is given to honor Luke the Evange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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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당당뉴스에 연재했던 루카스를 아쉽지만 누가복음 1장~5장까지에서 마치게 되었습니다. 나머지 6장~21장까지는 오는 11월 <도서출판 샘솟는 기쁨>에서 출간될 책을 통해서 만나뵙겠습니다. 루카스(가제)는 1장~9장, 10장~19장, 20장~24장까지 총3권으로 출간될 예정입니다. 그동안 성원해 주신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하면서 더 좋은 글로 찾아뵐 것을 약속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강릉에서 김명섭목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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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기 (112.186.25.106)
2013-09-08 01:02:12
김목사님, 깊은 울림이 있는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책으로 역어내시길 하는 바람이 있었는데 그리하신다니 참 기쁘네요.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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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섭 (182.209.241.203)
2013-09-09 14:00:17
목사님, 감사합니다.
존경하는 이수기목사님, 늘 부족한 후배를 위해 귀한 격려해 주심에 큰 힘이 됩니다. 늘 건승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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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기 (112.186.25.106)
2013-09-08 01:02:12
김목사님, 깊은 울림이 있는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책으로 역어내시길 하는 바람이 있었는데 그리하신다니 참 기쁘네요.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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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섭 (182.209.241.203)
2013-09-09 14:00:17
목사님, 감사합니다.
존경하는 이수기목사님, 늘 부족한 후배를 위해 귀한 격려해 주심에 큰 힘이 됩니다. 늘 건승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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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평일 (72.196.234.24)
2013-09-04 07:16:45
유익한 내용 잘 읽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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