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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신앙은 받는 것이 아니라 누리는 것한국 교회 교우님들께 드리는 류상태의 주일편지 - 2013년 6월 16일
류상태  |  sham5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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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년 06월 15일 (토) 11:00:22
최종편집 : 2013년 06월 15일 (토) 19:03:25 [조회수 : 3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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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들려주신 천국의 비유 중 하나를 선택하여 우리 기독교 신앙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마태복음 20장 1~16절에 기록된 ‘포도원 일꾼과 품삯의 비유’인데, 그 내용을 간추려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이상한 주인의 이상한 셈법

하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얻으려고 이른 아침에 나갔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품삯을 돈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고 그들을 포도원으로 보냈다. 아홉 시쯤에 다시 나가서 장터에 할 일 없이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당신들도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시오. 그러면 일한 만큼 품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니 그들도 일하러 갔다. 주인은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오후 다섯 시쯤에 다시 나가보니 할 일 없이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어서 “왜 당신들은 하루 종일 이렇게 빈둥거리며 서 있기만 하오?” 하고 물었다. 그들은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키지 않아서 이러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주인은 “당신들도 내 포도원으로 가서 일하시오.” 하고 말하였다.

날이 저물자 포도원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사람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사람들에게까지 차례로 품삯을 치르시오.” 하고 일렀다.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일꾼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그런데 맨 처음부터 일한 사람들은 품삯을 더 많이 받으려니 했지만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밖에 받지 못하였다. 그들은 돈을 받아들고 주인에게 투덜거리며 “막판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들을 온종일 뙤약볕 밑에서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십니까?” 하고 따졌다. 그러자 주인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보고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오? 당신은 나와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지 않았소? 당신의 품삯이나 가지고 가시오. 나는 이 마지막 사람에게도 당신에게 준 만큼의 삯을 주기로 한 것이오.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하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 (마태복음 20장 1~16절, 공동번역)

본문은 예수께서 친히 하신 말씀으로 성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경제문제에 대해 이런 말씀을 하셨다면 아무리 예수님의 말씀이라 하더라도 당시는 물론이고 오늘날에도 공감을 얻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우리 사회의 경제질서는 엉망진창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인의 처신이 계약상으로는 하자가 없습니다. 하루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일꾼들과 합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불공정한 대우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나와서 일한 사람과 오후 늦게 합류하여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에게 같은 임금을 지불하는 고용주를 어느 누가 공평하다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러나 이 말씀은 본문 앞부분에서 밝힌 바와 같이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이기에, 예수께서 임금문제의 정당성 여부를 논하려고 도입한 이야기가 아니며, 매우 부조리해 보이는 보조관념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원관념, 즉 하늘나라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읽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비유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원관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늘문은 언제나 항상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언제,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오더라도 하나님은 똑같은 사랑, 충분한 사랑으로, 그 사람을 품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예수님 오시기 오래전부터 하나님을 믿어왔던 이스라엘 백성이건, 허랑방탕한 생활로 가산을 다 탕진하고 아버지께로 돌아온 탕자와 같이 하나님을 떠나 살다가 뒤늦게 합류한 이방인이건, 하나님은 당신께로 나아오는 사람들을 아무런 차별 없이 똑같은 사랑, 충분한 사랑으로 받아주신다는 것이 이 비유 말씀이 전하는 주요 메시지입니다.


2. 하늘 문은 누구에게나 항상 열려 있다

이 비유 말씀이 초창기 예수사람들에 의해 전승되고 마침내 복음서에 기록된 이유는 본문의 끝부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

아마도 초창기 교회 내부에서는, 일찍부터 공동체를 위해 헌신한 사람과 뒤늦게 교회공동체에 합류한 사람 사이에 어떻게 차등을 두고 예우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적지 않은 고민과 이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 공동체는 오랜 기도와 토론 끝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모든 차별을 넘어 의무와 권리를 똑같이 나누는 고귀한 자매형제”라는 믿음의 고백으로 이 갈등을 넘어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당시에 이런 공동체의 결정을 부당하다고 느낀 사람들도 없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일찍부터 공동체에 헌신해온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공동체를 위해 더 많이, 그리고 더 오랜 시간 동안 헌신해온 그들이 서운해 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당시의 교회공동체는 기존의 모든 차별과 신분을 넘어선 공평하고 정의로운 세상, 즉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새로운 공동체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세상 나라 백성들과 다른 점은, 앞선 사람이 더 많이 갖고 뒤처진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기득권을 다 내려놓고 뒤늦게 합류한 자매형제를 기꺼이 끌어안으며 똑같이 나누고 누림으로써 이루어지는 새로운 세상이라는 것이 당시 예수사람들의 믿음이고 고백이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새 하늘과 새 땅의 질서였습니다.

하여 본문의 말씀은, 이런 새로운 질서를 이해하지 못하고 기득권을 주장하며 교회의 일치를 방해하는 사람들은 먼저 참여했다 하더라도 뒤쳐질 수밖에 없고, 비록 뒤늦게 공동체에 합류한 사람이라도 새 질서에 잘 적응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면 새로운 세계에서는 앞선 사람이 될 것이라는 예언과 경고, 또한 격려의 뜻이 담긴 말씀입니다.

이런 초창기 예수사람들의 신념은 우리가 잘 아는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재산의 절반을 모두 탕진해버린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그를 끌어안고 잔치를 베푸는 아버지를 보고 맏아들은 심사가 뒤틀려 ‘아버지의 부당한 처사’를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맏아들을 달래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모두 네 것이 아니냐? 그런데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으니 잃었던 사람을 되찾은 셈이다. 그러니 이 기쁜 날을 어떻게 즐기지 않겠느냐?” (누가복음 15장 30~31절, 공동번역)

맏아들이 아버지의 처신에 불만을 가진 이유는 신앙의 의미를 대가와 보상에서 찾으려했기 때문입니다. 맏아들이 집에서 아버지와 고생하며 일하는 동안 둘째는 실컷 놀고 재산을 탕진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아들을 차별 없이 똑같은 사랑으로 대하는 아버지의 처신은, ‘대가와 보상’이라는 시각으로 보면 불공평하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맏아들과는 전혀 다른 시각을 갖고 계셨습니다. 맏아들은 아버지와 늘 함께 있었기에 아버지의 모든 것을 함께 소유하며 자유롭게 누려온 반면에, 둘째는 아버지를 떠났기에 오히려 자유를 잃고 고통스런 삶을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하여 이제라도 둘째를 품어 안아 모두가 함께 자유와 풍요를 누려야 옳다는 것이 아버지의 생각입니다.


3. 받기를 바라는 신앙에서 누리는 신앙으로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우리 기독교신앙의 진정한 의미는 무언가를 얻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누리는 데에 있다는 것입니다. 포도원에서 아침 일찍부터 일한 사람이 주인의 처사를 이해할 수 없었던 이유는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만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1시간 밖에 일을 하지 않은 품군에게 아침 일찍부터 일한 자신과 동일한 보수를 준 주인에 대해 부당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을 ‘대가’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만 보지 말고 ‘누림’이라는 측면과 함께 생각해보면 어떻겠습니까? ‘누림’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먼저 일한 사람은 일한만큼 누렸습니다. 일 자체에서 오는 기쁨과 함께,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기에 안정된 삶과 보람을 아침 일찍부터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나중에 온 사람은 해야 할 일을 찾지 못한 채 마음을 졸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고통일 수 있습니다. 먼저 온 사람은 일을 해서 고통을 받고 나중에 온 사람은 놀아서 즐거웠던 것이 아니라, 일한 사람은 즐겁게 일했고 일하지 못한 사람은 해야 할 일을 찾지 못해 고통을 받았으니, 이제부터는 모두가 함께 일하고 함께 누리자는 것이 주인의 뜻입니다.

일의 의미와 기쁨을 찾지 못한 채 오로지 대가만 생각하고 일을 하는 것과, 일 자체에서 의미를 찾고 기쁨을 누리는 것과는 이렇게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 자체의 의미와 기쁨을 찾지 못한 채 오로지 대가만 생각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힘들고 피곤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천국가기 위해서, 남보다 더 축복받기 위해서, 또는 하늘나라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이 이 땅에서 큰 돈 벌고 출세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기에, 그래서 힘들고 피곤하지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교우님이 계신다면, 그것은 우리 기독교신앙의 의미와 가치를 한낮 이기적인 목적을 얻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순수한 믿음도 아니고 진정한 신앙도 아닙니다. 겉으로는 열심히 부모님을 모시지만, 그래야 부모님이 집도 물려주고 유산도 물려주실 것이기에 힘들고 피곤하지만 효도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진 자식을 진정한 효자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님보다 재산을 먼저 생각하는 자식은 불효자식일 수밖에 없으며,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한 가정의 행복을 진정으로 누리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자신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무엇에 더 관심이 많은 분은 신앙적으로 불효자식일 수밖에 없으며, 진리 안에서 진정으로 자유와 기쁨을 누리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교우님들께 부탁드립니다. 받으려는 생각을 넘어 누리는 신앙생활을 해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진정 기쁨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며, 죽은 다음에 가는 천국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천국을 누리고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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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평일 (72.196.234.24)
2013-06-16 21:35:30
진정한 신앙은 받는 것이 아니라 누리는 것

참신한 관점입이다.
그러나 받는 것과 누리는 것은
서로 상반된 개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이다.

동전의 양면이지요.

자신 안에 사랑이 없는 사람이 사랑을 나눌 수
없고, 빈털털이 거지가 경제적으로
남을 도울 수는 없지요.

나눔은 풍요 속에서 나오지요.

누리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감사하는 풍요로운 마음이 필요합니다.

진정한 신앙은 바라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것이다 하는 생각을 합니다.

감사가 없는 받음과 누림은 탐욕이지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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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
Philip Im (70.62.49.64)
2013-06-17 09:19:28
먼저된 자 나중되고 나중된 자 먼저된다.
는 이 말씀이 복음서에 여러 번 나옵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대하여
단순히 먼저 교회에 들어 온 자가 열심을 내지 않으면
나중에 들어온 자가 열심을 내어 앞서나간다고 이해를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앞뒤 문맥을 따라
단순히 순차적인 의미만 아니라 양적이고도 질적인 의미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포도원 주인의 이해할 수 없는 품삯 지급방식은 천국 비유를 나타냅니다.
아침 일찍 포도원에 간 자나 저녁 늦게 포도원에 간 자나 같은 품삯을 받은 것은 예수님을 일찍 영접한 자도 있고 늦게 영접한 자도 있으며 이들은 모두 같은 품삯 곧 같은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간혹 이를 잘못 이해하여 세상 쾌락 다 누리고, 혹은 일찍 예수 믿어 돈 바치고 몸 바쳐 고생할 것 없이 죽기 1분 전에 믿습니다 하면 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이 구원 받을 만한 때인 것도 아셔야 합니다.

그런데 같은 구원을 받으면서 먼저 된 자 나중되고 나중 된 자 먼저 된다고 주님이 말씀하신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인력시장에서 아침 일찍 불림을 받은 자들은 기쁜 마음으로 일했을 겁니다.
내일 일에 대한 걱정이 사라졌으니까요.
그런데 아직도 인력시장에서 기다리는 자들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오후 지나 5시 경이면 자포자기일 것이며 내일의 양식 걱정에 근심은 태산일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포도원주인이 자기를 선택했을 때 그 마음의 기쁨은 어떠했을까요?
거기다 일을 마치고 받은 품삯은 하루치!
먼저 온 자들이 받은 것과 똑같을 때 그 기쁨은 두 배 이상일 겁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는 것과 같이
늦게 왔지만 받은 품삯이 똑같을 때
그가 느끼는 은혜의 양은 먼저 온 자보다 넘쳤을 겁니다.

구원받은 자가 하나님 앞에서 먼저된다는 것은
이같이 구원에 대한, 그 은혜에 대한 기쁨의 양이 넘침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먼저 구원받은 자는
첫사랑을 잊지말고 구원의 은혜의 감격을 계속 누려야 합니다.
이는 아래 어떤 분의 댓글처럼 계속적인 감사의 생활을 뜻합니다.
그러지 못할 때 나중된 자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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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7

유상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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