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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도 어쩔 수 없는 사람들진실을 왜곡하는 편견과 변화를 가로막는 선입견에 대한 고발
김명섭  |  kimsubw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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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년 05월 01일 (수) 22:30:28
최종편집 : 2013년 05월 02일 (목) 01:31:12 [조회수 : 1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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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이후 중단됐던 <뜻으로 읽는 누가복음, 루카스>의 연재를 다시 시작합니다.교회이전 등의 사유로 약속대로 연재하지 못했던 점에 대해서 부디 독자들의 양해를 구합니다. 강릉예향교회 김명섭목사 올림


23절~24절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누가복음 4장 24절~30절) 
 

   


Cimon & Pero (루벤스 1630, 암스테르담 미술관)

처음 이 그림을 접하는 사람들은 이상한 생각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젊은 여성이 가슴을 훤히 드러낸채 늙은 남성에게 젖을 물리는 장면은 이유를 불문하고 외설스럽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이 그림의 주제는 외설과는 거리가 멀다. 이 그림은 고대로마사학자 발레리우스 막시무스가 쓴 ‘로마식 자애(Romman Charity)’에 나오는 아버지와 딸의 사랑을 전하는 감동적인 스토리를 담고 있다. 그림에 등장하는 남성 시몬(Cimon)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여성은 페로(Pero)인데 시몬은 바로 그녀의 아버지다. 시몬은 ’죄인에게 밥을 주지 말라’는 판결을 받아 감옥에 갇혀 굶어 죽어가고 있었다.

 페로는 아이를 낳은지 얼마 안되 젖이 흐르던 상태에서 굶어 죽어가는 아버지에게 여성으로서의 수치와 굴욕을 무릎쓰고 자신의 젖을 물리고 있는 장면이다. 결국 이에 감복한 로마법정은 아버지 시몬을 석방하기에 이른다. 이 그림은 부모에 대한 자녀의 헌신과 사랑을 전하고 있다. 얼핏 보면 외설스럽기만 보이는 이 그림은 ‘교만과 아집 그리고 편견을 버릴 때 비로소 현상 너머에 진실이 보인다’는 평범한 진리를 전하는 좋은 실례다.


하나님의 능력조차 가로막을 수 있는 힘

예수께서는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의 시험을 마치셨다. 이제 예수께는 삶을 변화시키고 치유하는 하나님의 권능이 함께 하고 있었다. 누가복음이 증거하는 치유는 곧 삶의 변화를 일컫는다. 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그토록 놀라운 성령의 능력이 모든 사람을 변화시키진 못했다. 또한 모든 질병을 다 치유하진 못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전하는 핵심이다. 그 이유는 결코 예수와 함께 했던 성령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였다. 우리의 죄악이 불치의 병처럼 지독하고 심각한 까닭이다. 오늘 말씀은 예수께서도 어찌 할 수 없었던 ‘첫 번째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의 회당 안에 있던 유대인들이다.


예수께서는 눈먼 자를 보게 하셨고 귀신을 내어쫓고 문둥병자도 깨끗케 하셨다. 하지만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바리새인들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도 끝내 변화시키지 못하셨다. 그 이유는 결코 예수께서 무능하셨기 때문이 아니다. 독선과 선입견, 교만과 완고함에는 실로 백약이 무효했던 탓이다. 이미 가득 채워진 그릇을 더 이상 채울 도리가 없듯이 배우려고 하지 않는 사람을 가르칠 방법은 없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나사렛동네 사람들을 가리켜 예수께서 아무 기적도 행하시지 못하셨던 ‘첫 번째 사람들’이라고 굳이 말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앞으로 자주 등장하게 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제사장과 율법사들이야 말로 ‘예수께서도 어찌할 수 없었던’ 진짜 주인공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을 통해서 치유 받은 사람들 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그들의 주된 역할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가로막을 수 있는 힘이 우리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증거하는 사명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마12:32) 그들은 예수께서 ‘용서 받지 못하는 유일한 죄라고 지목하셨던 성령의 능력을 훼방했던 사람들’이요, 끝까지 회개치 않는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16절~22절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22절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예수께서는 광야의 시험을 통해 더 막강해진 권능으로 돌아오셨다. 그 권능으로 갈릴리 동네를 두루 다니시며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다. 그리고 마침내 고향인 나사렛에 이르렀다. 예수께서는 그곳 회당에서 이사야의 말씀이 오늘 너희 가운데 이루어졌음을 선포하셨다. 예수님의 설교에 대한 나사렛 동네 사람들의 반응이 오늘 말씀의 핵심이다. 22절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께서 다른 동네에서 행하신 사역에 대해서 이미 소문으로 잘 알고 있었다. 이제 자신들의 회당에서 직접 설교하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마침내 권능과 기적을 직접 체험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를 통해 놀라운 은혜를 받은게 아니라 오히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로운 말에 대해서 의구심을 품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저 예수란 친구는 우리가 잘 알고 지내던 바로 그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그들은 예수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예수의 가정형편과 성장과정, 어린 시절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은혜가 아니라 도리어 그의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겼다는 점이다.

마치 ‘아는게 병이다’라는 격언처럼 교회에서 감동과 체험이 적은 사람들은 대부분 모태신앙이다. 어릴 적부터 예배와 기도, 찬양과 성경공부에 아주 익숙해진 까닭이다. 그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너무 익숙해서 역설적으로 좀처럼 은혜 받지 못한다. 또한 교회 일에 지나치게 관여해서 내막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소위 교회의 중진들은 은혜는 커녕 종종 시험에 빠지기도 한다. 그래서, 교회에서 은혜 받기 힘든 사람들은 오랜 신앙의 연조를 가지신 ‘장로님’, 그 위에 ‘신학교 교수님’, 그 위에 ‘목사님’ 순서라는 우스개소리가 있을 정도다. 그 중에 최고봉은 '신학을 전공하신 장로님'이라고 한다. 꼭 그렇지는 않겠지만 신앙의 연조와 이해가 깊을수록 많이 알면 알수록 이처럼 감동을 받기 힘든 이유는 도대체 뭘까?, 그 이유는 분명하다. 스스로 이미 다 알고 있는 뻔한 것이라고 여기는 익숙함에서 오는 ‘선입견’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개’라고 일컬어지는 ‘편견’탓이다. 진정한 ‘배움’은 온전한 ‘비움’에서 시작된다. 제 아무리 유능한 스승일찌라도 도저히 가르칠 수 없는 제자가 있다. 그는 이미 스스로 다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더 이상 배우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러한 태도를 가진 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방법은 해 아래 없다.

그렇다면,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에 대해서 진정 다 알고 있었던 것일까>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알고 있던 예수에 대한 정보와 지식은 예수에 대한 일부였을 뿐, 예수에 대한 전부는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알고 있던 요셉의 아들이었음에 틀림없지만, 동시에 예수께서는 광야의 시험과 성령세례를 받으신 온전한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한마디로 예전에 그들이 알고 있던 그 예수가 아니었다. 삶에서 감동과 은혜를 상실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부분을 전체로 함부로 판단하는 '편견'과 제한적인 지식으로 멋대로 제단하는 '선입견'이다. 이처럼 선입견에 사로잡히면 진실을 볼 수 없다. 사실을 왜곡한채 진실을 거부한다. 신앙생활의 가장 큰 위험요소는 바로 ‘선입견’이다. 선입견에 붙들린 이들은 타인에 대해 멋대로 '정죄'하고 함부로 '판단'하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한다. 선입견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는 안타깝게도 해결책이 없다. 실로 속수무책이다.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다. 지난 십년간의 담임목회를 통해서 가장 절실히 느끼는 대목이다. 편견과 선입견은 사실 남 얘기가 아니다. 나는 앞서 언급한 모태신앙이요, 오랜 시간 신학수업을 받은 목회자다. 그래서 나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누구보다 익숙함이 주는 선입견과 편견을 가장 경계한다. 그래야만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있고, 반복되는 일상이 주는 삶의 기쁨과 감격을 놓치지 않고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까닭

23절~24절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예수께서는 옆동네인 가버나움에서는 많은 기적을 행하셨다. 하지만 정작 고향인 나사렛에서는 결국 아무런 기적을 행하지 못하셨다. 그것은 예수님의 문제가 아니라 나사렛 사람들의 문제였다. 다시말해 씨앗의 문제가 아니라 씨가 뿌려진 밭의 문제였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창세기 12장에 나오는 유명한 말씀은 진정한 삶의 변화(치유)는 본토와 친척, 아비의 집 즉 고향을 떠나는 일’에서 시작됨을 가르쳐 주고 있다. 본토는 고향, 친척은 인간관계, 아비의 집은 일체의 안락함을 의미한다. 본토와 친척, 아비의 집은 지금까지 의지하며 믿고 살아왔던 익숙한 삶의 기반들을 말한다. 아브라함의 출향은 새로운 삶으로의 변화(치유)를 위해서는 반드시 익숙함과 안락함을 주던 일체의 것으로 부터 떠나는 일에서 비롯됨을 증거하고 있다.

참된 삶은 참된 믿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참된 믿음이란 자신이 붙잡고 있는 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으로부터 자유하는 것이다. 참된 믿음은 자신을 노예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익숙한 삶의 패턴을 과감하게 잘라 버리는 일이다. 왜냐하면, 본토와 친척 아비집은 편안한 안식처가 되지만 동시에 새로운 삶을 향해 나가지 못하도록 붙잡는 우상이 되는 까닭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실제로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르실 때, 하나같이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쫓았다.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쫓은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이전에 삶에서 경험할 수 없는 아름다운 삶으로 변화시키셨다.

제자도는 이천년전의 제자들 뿐만 아니라 오늘 예수님을 쫓는 우리에게도 해당된다. ‘고향’ 곧 나에게 익숙한 것들은 편안함과 숙련됨을 뜻한다. 하지만 이것은 자칫하면 나를 습관적인 신앙과 형식적인 신앙에 머물게 만들어서 결국 진리와 진실을 외면하는 아집과 독선으로 전락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경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 우리도 나사렛의 그들처럼 예수님을 직접 목도할찌라도 그 눈이 가리워져서 진리를 경험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 밖에 없다. 오늘날 한국교회를 향한 개혁의 요청과 변화의 열망이 그 어느때 보다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치도 새롭게 변화되지 못하는 진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교회가 갱신하지 못하는 진짜 원인은 진단과 처방의 문제가 아니라 지독한 편견과 선입견에 붙들린 완고함과 완악함에 있다. 진정한 회개 없이 새로운 변화는 아예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은 개인에 삶에서도 동일하다.

   


사렙다 과부와 나아만

25절~27절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였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

예수께서는 구약의 사건을 통해서 나사렛 유대인들의 오만과 독선을 꾸짖으신다. 사렙다 과부는 마지막 양식을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에게 헌신했던 여인이다. 그녀는 마르지 않는 기름과 그치지 않는 양식을 선물로 받는 기적을 누렸다. 나아만 장군은 볼품없는 외모로 유명했던 엘리사의 말에 기꺼이 순종함으로 지독한 문둥병에서 해방되는 치유의 기적을 경험했다. 그들은 비록 이방인들이었지만 선지자의 말씀에 기꺼이 순종함으로 놀라운 삶의 기적을 체험했다. 기적은 특정한 신앙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인간의 응답으로 이루어진다는 메시지를 증거한다. ‘치유’ 곧 ‘삶의 변화’는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통행이란 말이다.

기적은 간절함에서 싹이 움터서 신실함으로 마침내 열매 맺는다. 간절함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은 평상시에 인식하지 못하던 공기와 물, 건강과 음식의 소중함을 결핍의 순간에서야 비로소 절박하게 그 가치를 깨닫게 된다. 마치 너무 크고 거창한 것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사람은 결코 일상의 작은 행복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날마다 반복하는 일, 평범하고 작은 일의 소중함을 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너무 당연한 먹고 마시고 숨쉬고 잠자고 똥누는 평범한 일상이 어떤 사람에겐 간절한 소망일 수 있다. 불만스런 나의 오늘은 누군가가 꿈꾸는 내일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그 무엇도 ‘당연한 것’이란 없다. 참된 행복은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자각하는 소박한 간절함에서 시작된다.

삶의 변화(치유)와 기적은 신앙의 연조나 직분이 아니라, ‘사모하는 심령’ 곧 간절함을 통해서 일어난다.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도 어떤 이들은 놀라운 은혜와 변화를 경험하는 반면, 어떤 이들은 아무런 감동과 변화를 체험하지 못한다. 그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 오늘 본문은 삶에 대한 간절함이 행복의 시작이요, 거기서 비롯되는 사모함과 신실함이 삶을 변화시키는 치유와 기적의 원동력임을 가르쳐 준다. 또한 이와 같은 기적의 원동력이 되는 간절함과 사모함, 진솔함과 신실함을 가로막는 우리 내면에 숨겨진 무서운 적(賊)인 편견과 선입견임을 고발하고 있다.  

   


지나서 가시니라

28절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고자 하되 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나사렛 회당에 모였던 유대인들은 상대방을 함부로 판단하는 선입견 만큼이나 눈치도 빠른 사람들이었다. 이방인들의 치유를 빗대어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부하던 자신들의 오만불손을 질타하시는 예수님의 의도를 금새 알아차렸다. 종교적인 자부심에 상처를 입은 그들은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가슴을 치며 통회자복한게 아니라 도리어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예수를 낭떠러지에서 떨어뜨려 죽이려고 까지 했다. 자신의 편견과 선입견을 참회하고 돌이키기 보다 자신들의 허물을 고발하는 목격자를 제거하는 손쉬운 방식을 선택했다. 만일 나사렛 회당에 있던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이방인만도 못한 자신들의 모습에 대해서 옷을 찢으며 회개했더라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아마도 나사렛동네에서도 가버나움에서처럼 놀라운 기적과 치유가 나타났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곳에서 예수께서는 간신히 죽을 고비를 넘기신채 탈출하셔야만 했다.

고래도 춤을 추게 한다는 칭찬은 참으로 소중한 삶의 묘약이다. 하지만 삶에서는 따가운 질책에도 귀기울이는 지혜가 더 요구된다. 개그맨 보다 더 웃기는 입담으로 한때 연애인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리던 어떤 목사님은 자신의 설교에 세 가지 원칙을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첫째, 재미있게 해라. 둘째, 재미가 없으면 짧게라도 해라. 셋째, 그것도 아니면 써먹을 수 있게하라.’ 참으로 매력적인 설교법이다. 그분이 누리는 인기의 비결을 충분히 가늠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그분의 세 가지 설교원칙은 페스트푸드점의 구호인 ‘맛있게’, ‘빨리’, ‘배부르게’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햄버거와 피자 같은 인스턴트식품은 잘 알려진대로 입에는 즐겁지만 몸을 상하게 하는 일명 정크푸드(JunkFood:쓰레기음식)다. 급할 때 가끔 먹을 순 있지만, 이것을 주식으로 먹으면 고지방, 고칼로리로 인해 비만과 더불어 고혈압이나 당뇨 같은 각종 성인병의 원인이 된다.

오늘날 한국교회 강단의 위기는 '맛있게', '빨리', '배부르게'와 같은 천박한 패스트푸드의 원리가 판을 치는 것이 그 원인이다. 무분별한 교인들은 어렵고 걸림이 되는 말은 거부하고 현란한 말주변(Oral-Performance)에 환호한다. 하지만 가벼운 말은 귀에는 즐겁지만 삶에 울림이 없다. 거기엔 삶을 온전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나사렛회당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예수님을 직접 만났지만 불행하게도 그들의 삶에서 아무 사건과 변화 없이 지나쳐 버리고 말았다. 예수께서는 지금도 끊임없이 우리의 삶에 찾아 오셔서 말씀하신다. 삶을 변화시키는 예수님의 능력은 오늘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래서 삶을 변화시키는 치유와 기적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 매주일 드려지는 예배를 통해서, 익숙한 성경말씀을 통해서, 일상에서 경험하는 반복되는 사건들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신다. 하지만 칭찬과 위로에만 익숙해져서 편견과 선입견으로 가득한 청중들에게 삶의 변화시키는 예수님의 외침은 거부되기 일쑤다. 

 

   

 


음성을 듣고 마음의 문을 여는 자

31절 예수께서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저희가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세가 있음이러라.

예수께서는 광야의 시험을 이시고 성령의 충만한 능력을 받아 갈릴리 지방을 순회하시며 복음을 증거하셨다. 나사렛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아무런 기적을 체험하지 못했다. 예수께서 그냥 저희 가운데로 스쳐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무엇인가? 이사야 61장1절 이하의 말씀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신다’ 예수님을 우리의 삶 가운데서 만날 때 모든 질병으로부터, 인생의 문제로부터, 탐욕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이러한 변화와 능력이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엄청난 사실을 폭로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천년전 갈릴리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에도 찾아 오신다. 예수님을 만나는 자리가 ‘예배’요,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이 ‘설교’이며 그분과 나누는 대화가 ‘기도’다. 오늘도 예수님의 갈릴리 치유사역은 계속된다. 어떤 사람은 놀라운 기적을 놀라운 변화를 체험하지만 어떤 사람은 아무런 변화를 경험하지 못한다. 누가복음은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목마른 나귀를 샘물까지 끌고 갈 순 있지만 억지로 물을 먹게 할 순 없다. 물가로 끌고 가는 것은 주인의 몫이지만 물을 마시는 것은 나귀의 몫인 까닭이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수많은 교회에서 수많은 예배를 드리지만 아무런 감격도 변화도 능력도 체험하는 이유는 결코 복음의 무능함이 아니다. 알량한 자신의 편견과 선입견 탓이다.

   

 


“어떻게 듣고 있는지 스스로 삼가라.”

앞으로 살펴보게 될 누가복음 8장에는 일명 ‘씨뿌리는 자의 비유’가 등장한다. 잘 알려진 대로 예수께서는 농부들의 일상생활을 통해서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생활언어로 설교하셨다. 비유의 내용도 간단하고 평이해서 누구나 이해하기 쉽다. '농부가 밭에 씨를 뿌렸다'. 농부가 씨를 뿌린 목적은 두말 할 것 없이 열매를 거두기 위함이다. 씨가 뿌려진 첫 번째 장소는 '길 가'였다. 씨가 뿌려졌지만 사람들에게 밟히고 공중의 새가 먹어 버려서 결실하지 못했다. 두 번째로 씨가 뿌려 곳은 '바위'였다. 새싹이 났다가 습기가 없어서 그만 말라 버렸다. 세 번째로 씨가 뿌려진 곳은 '가시떨기'인데 새싹과 가시가 함께 자라서 그만 기운이 막혀 결국 열매를 맺지 못했다. 오직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은 백배의 결실을 했다.

이처럼 쉽고 명쾌한 해설까지 첨부된 비유의 핵심을 청중들은 알아듣지 못했다. 오죽하면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라고 말씀하셨으랴!. 아마도 예수께서는 군중들을 가르치시면서 많은 한계를 느끼셨던 것 같다. 아무리 열심히 복음을 전해도 변화되지 않고, 삶에서 열매 맺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속이 많이 상하셨던 것이 틀림없다. 설교자로써 참으로 깊이 공감하는 대목이다. 비유의 핵심은 씨도 중요하지만 밭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비유에 핵심은 이는 말씀을 들은 자니라는 문장 속에 담겨 있다.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었다. 비록 말씀을 들었어도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의해 삶의 변화가 결정된다는 사실이다. 가르치는 선생의 내용과 역량도 중요하지만 배우는 학생의 자세와 태도 역시 중요하다.

예수께서 증거하시는 비유의 결론은 이어지는 16절~18절에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어떻게 듣고 있는지 스스로 삼가라> 나는 과연 어떤 자세와 태도로 말씀을 듣고 있는지 스스로 점검해보라는 것이 다. 삶의 열매는 삶의 변화 곧 치유다. 분노에서 기쁨으로, 염려에서 기도로, 불평에서 감사로, 다툼에서 평화로, 절망에서 희망으로의 변화다. 신앙생활을 통해서 구체적인 삶의 변화가 없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숨겨진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그 원인은 뿌려진 씨 곧 말씀의 문제가 아니라 씨가 뿌려진 밭 곧 나 자신의 듣는 태도에 달려있다. <진정 삶의 변화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예수께서 친히 하신 이 말씀앞에 반드시 정직하게 응답해야 할 것이다. 아주 정직하게...“어떻게 듣고 있는지 스스로 삼가라.”

   

 

 

 

 

 

<뜻으로 읽는 누가복음, LUCAS> 중에서

‘Lucas’ is the Latin form of the Greek first name Loukas (Λουκᾶς) This name is given to honor Luke the Evange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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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독자 (120.136.115.186)
2013-05-07 17:27:21
반갑습니다.
목사님의 글 오랫동안 기다렸습니다. 루카스를 다시 연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리플달기
9 8
Philip Im (70.62.49.64)
2013-05-08 04:30:35
예수님의 부르심을 거부한 자
물위를 걸으신 예수님을 보고
나도 물위를 걷게해 달라고 간청한 베드로처럼
내 마음도 열리기를 원합니다.

오늘도 그 물위를 걸어오신 예수님을 이건 꾸민 것이라고 거부하고
내가 상식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엉뚱한 예수님을 따르지 않도록
참 믿음을 허락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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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218.39.77.67)
2013-05-02 07: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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